79화. < ep19. 변혁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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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시펠케의 목구멍에 쑤셔 박은 마구로의 머리를 한 번 더 차서 밀어 넣고 강서는 신선대를 잡았다. 신선대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한껏 휘어져 있었다.
강서가 리차드를 보며 말했다.
“여기, 이 녀석한테 손을 얹어 주세요.”
강서는 그리 말하며 어깨의 라오를 들이밀었다. 분명 다급한 상황이었다. 강서의 목소리는 전혀 다급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강서가 갑자기 나타났는지, 왜 손을 얹어야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리차드였지만 우선은 강서의 말대로 움직였다.
리차드가 라오에게 손을 얹자 라오가 리차드를 째려보며 한 번 울음소리를 내었다.
캬오-
[<고유능력: 공간밟기>가 발동됩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라오에게서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리차드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 시야가 일렁이며 리차드가 있던 공간이 바뀌었다.
시펠케의 입 안에서, 아드리아나가 있는 군단함 옆쪽, 바다 위 허공으로.
“아...?”
바닥이 허함을 느끼고 리차드가 짧은 탄성을 흘렸다.
풍덩-
두 사람과 한 마리의 짐승이 바닷물에 빠졌다.
수혁이 급히 ‘레비테이션’을 사용하여 바다에 빠진 셋을 떠올렸지만, 그때는 이미 모두가 흠뻑 젖은 상태였다.
선상으로 올라온 강서와 리차드.
작금의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펠케의 아가리 속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리차드가 어떻게 살아 돌아온 것인지, 강서가 데려온 푸른색 짐승은 무엇인지,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강서가 나타난 것인지 말이다.
수혁은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는 지 고민을 하며 강서에게 다가갔지만 상황이 그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크와악!
시펠케가 울음소리를 내며 강서와 리차드를 노려보았다.
시펠케의 입장에서는 짜증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다잡은 사냥감을 놓치고 뭔가 역한 것이 자신의 목구멍으로 굴러들어갔으니까.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흠뻑 젖은 것은 아는 지 모르는 지.
시펠케의 울음소리를 들은 라오가 그 울음 소리에지지 않겠다는 듯 울었다.
캬-오
그리고 그 울음소리와 함께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두근-
라오의 울음소리가 만들어 낸 일은 아니었다.
다만, 거대한 박동소리와 함께 시펠케의 몸이 요동쳤다.
실제 몸이 요동친 것은 아니었다. 시펠케의 표면을 감싸고 있는 마수의 기운이 요동친 것.
[<마수:시펠케>가 <징크스>의 영향을 일부 받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수사냥에 참여하고 있는 모두의 상태창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징크스?”
“기운이...갑자기 약해졌네요.”
시펠케의 존재감 자체가 감소하였다. 바로 앞에서 그 기세를 견디고 있었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의 <고유능력: 사냥개>의 영향을 받은 리차드가 자신을 억누르던 공포감이 줄어든 것을 자각 할 수 있었다.
약해진 기운에 샬롯이 혹시나 하고 시펠케를 향해 도약했다.
샬롯이 지근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시펠케는 미동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샬롯보다 빠른 속도로 돌진하던 리차드와 림샤드도 반응하며 이빨로 받아내었던 시펠케였다.
상대적으로 그보다 느리다고 할 수 있는 샬롯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샬롯은 시펠케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확신하며 오른손을 뻗었다.
퍼억!
다시 한 번 시펠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도저히 무너지지 않았던 시펠케의 몸도,
기울었다.
쿠웅!
시펠케의 몸이 쓰러지며 땅에 누웠다. 자욱하게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시펠케의 몸체를 덮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샬롯이 침묵했다. 직전에 가격했던 것보다 손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이 덜했다. 시펠케가 결국 샬롯의 주먹이 닿을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
두근-
[<마수:시펠케>가 <징크스>의 영향을 일부 받습니다.]
다시 한 번 박동소리가 울리고, 마수의 기운이 요동치며 시펠케의 존재감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자 그곳에는 원래 크기의 반 정도가 되어버린 시펠케가 누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렸는지 샬롯의 주먹에 맞기 이전처럼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시펠케는 확실한 공격성을 띠고 낮게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으르르..
하지만, 존재자체로 흉포하게 피부를 찌르던 마수의 기운이 더 이상 뻗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몸도 채 다 감싸지 못한 칠흑같은 마수의 기운은 듬성듬성 시펠케의 잿빛 털을 드러내었다.
전장의 결이 바뀌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분위기가 기울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긴장감이 분명히 줄어들었다.
자리에 존재하지 않은 시청자들도 화면을 통해 그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
강서가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말했다.
“저게 시펠케의 본 모습입니다. 아직 징크스가 완전 적용되지는 않았지만...본래 저 모습에서 마수의 기운을 얻어 마수가 된 것이죠."
시펠케가 가장 가까이 있던 샬롯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시펠케의 속도는 많이 느려져 있었다.
군데군데 벗겨진 마수의 기운. 피를 토하는 모습. 현저히 느려진 속도.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어 달려오는 시펠케를 보며 샬롯이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듯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샬롯은 시펠케가 지척에 다가오자 도약하여 몸을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 달려온 시펠케를 향해 주먹을 내리 찍었다.
콰앙-
샬롯의 주먹질에 시펠케가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내리 찍혔다.
얼마나 강하게 내리 찍혔는지 바닥에 움푹한 구덩이를 만들어 내고도 모자라서 시펠케의 몸이 바닥에서 튕겨 올라왔다.
동시에 샬롯의 팔에서 퍽-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리미트 해제 최대출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며 쌓인 데미지에, 온 힘을 실어서 주먹을 내리 찍기까지 하니 근육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간 것이다.
두근-
[<마수:시펠케>가 <징크스>의 영향을 완전히 받습니다.]
[마수의 기운이 사라집니다.]
시펠케의 몸이 다시 한 번 움츠러들며 마수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샬롯은 아랑곳 않고 공중으로 튀어 오른 시펠케의 몸을 다시 한 번 뒤꿈치로 내리찍으며 같이 낙하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샬롯의 다리가 바닥에 내리 찍혔다. 다시 한 번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공격에 실려 있는 감정을 읽은 강서는 샬롯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강서에게 수혁이 입을 열었다.
“샬롯은 부모 두 분을 다 마수에게 잃었습니다. 평소에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밝게 행동은 하지만...마수에 대한 복수심이 적지 않을 겁니다.”
"..."
수혁의 말대로 샬롯은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복수심’때문이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실제로 마수의 기운이 약해지기 전까지 샬롯의 주먹에는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으니까.
“이런 보잘 것 없는...”
퍼억-샬롯의 주먹질 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샬롯이 분노한 것은 마수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샬롯이 분노한 것은 마수가 너무 약했기 때문이었다.
퍼억-
“이런 보잘 것 없는 새끼 때문에...”
샬롯은 전투에 임하기전 스스로 수백 번을 되뇌었다. 자신의 복수심이 작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정에 휩싸이지 말자고 말이다.
그런 감정을 담아 싸워서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마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 했으니까.
전투에 감정이 담기면 냉철한 판단이 불가능했고, 마수는 되는대로 싸워서 이길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샬롯의 앞에 놓여있는 마수 시펠케는 그런 감정조절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나약했다.
근육이 다 터져나간 팔로, 뼈가 부러진 다리로 가하는 공격에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약했다.
왜 15년 전에는 막지 못했는지.
15년 전에 아버지가 죽을 때는.
15년 전에 어머니가 비명을 지를 때는.
그때는 왜 지키지 못했는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원망스러울 정도로 약했다.
시펠케는 이미 몸을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샬롯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퍼억- 퍼억-
샬롯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이미 축적된 데미지가 상당했다.
오른팔의 근육이 터져나가 팔 전체에 피멍이 들어있었고, 손가락뼈가 부러졌는지 주먹을 쥔 것도 안 쥔 것도 아닌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샬롯의 몸도 망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선뜻 샬롯을 말리기 위해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샬롯의 응어리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샬롯이 느끼는 감정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샬롯의 감정은 샬롯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이 장면을 보고있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행동이었다.
15년 전, 아득한 전력 차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그 무력감이, 마수에게서 느껴지자 알 수 없는 울컥함이 가슴속에 차오른 것.
그렇게 인류는-
[<마수:시펠케>를 처치하셨습니다.]
마수를 사냥했다.
***
마수를 사냥한 직후.
헌터협회는 모든 신전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맨 처음 하프라인이라는 장벽을 세울 때. 그리고 헌터 티어의 기준을 정하던 15년 전 이후로 신전은 한 번도 인세(人世)와 말을 섞은 적이 없었으니까.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리고 복잡했다.
‘하프라인 바깥세상을 수복하자.’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그것이 신전의 제안이었다.
헌터협회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애초에 마수사냥으로 기대하던 가장 큰 효과가 바로 하프라인 바깥을 노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던전개척이라는 목표를 잃어버린 헌터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내는 것은 필수불가결적인 일이었고, 하프라인 바깥보다 더 좋은 목표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사냥과정에서 한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최소의 인원으로 구성한 것이긴 했지만, 모든 방송분을 그대로 내보낼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 신전이 먼저 제안하지 않았더라도 헌터협회는 하프라인 진출을 준비 했으리라.
하지만 내용이 간단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에 뒤이은 내용은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단 번에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신전에서 보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현재 하프라인 바깥의 세상은 시공간이 뒤틀린 상태. 수십 수백 개의 공간과 시간이 연결되어있다. 지구의 과거도 있으며, 알지 못하는 이 세계에도 연결이 되어있다. 본래 하프라인 바깥에 존재하던 지구의 잔해와 마수들은 그 시공간 속으로 흩어져있다.’
헌터협회는 그 요약본만을 기사로 공개하고, <신전의 편지>에 대한 관심과 문의가 빗발쳐 전세계의 온도가 정점에 달했을 때, 신전의 편지에 대한 공식 기자회견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