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ep18. 마수사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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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떠다니는 헬기는 없었지만, 마수 ‘시펠케’의 사냥은 전 세계로 중계되고 있었다. 스마트 워치를 이용해서 장면을 찍고 있는 것.
물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실제 시간과 5분 정도 시간차를 두기는 했지만 생중계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하네요. 곧 온다고 합니다.”
수혁이 스마트 워치를 보며 강서의 말을 전했다.
리차드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시간은 맞춰 시작하는 게 좋겠지.”
투구가리개 틈새로 시펠케를 바라보며, 리차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이 정말 갈림길이 되겠군.’
천명의 결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아이슬란드의 동남쪽에서 마수 ‘시펠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아이슬란드와 시펠케는 더할나위 없이 어울렸다.
주둥이가 날카롭게 빠진 늑대의 형상. 10m 길이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몸체.
시펠케는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흉흉하게 뻗어 나오는 마수의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심장어림에 파고들었다.
거리가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등골이 오싹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시펠케에게 눈을 고정한 채 리차드가 성흔을 발동시켰다. 리차드가 계약한 신전은 <축생의 신전>.
[<성흔: 사역마>가 활성화 됩니다.]
[사역마: ‘축생의 신’의 힘을 빌려 ‘계약’을 맺은 대상에게 소환, 명령 권한을 갖습니다.]
[남은 횟수: 6]
리차드의 팔뚝이 푸른빛으로 감싸이며 바닥에 신전 특유의 문양이 생겨났다. 리차드의 앞에 생겨난 푸른빛 문양은 일순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발한 빛이 사라질 때쯤 마법진 위에는 하나의 몬스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림샤드.”
림샤드는 리차드가 축생의 신전과 성흔 계약을 맺자마자 선택한 사역마.
A급 던전 ‘아이바브의 골짜기’에 출몰하는 말의 외형을 가진 몬스터였다.
능숙하게 그 위에 올라탄 리차드는 갑옷에 새겨져 있는 아공간을 활성화 시켜 무기와 방패를 꺼내었다. 리차드가 꺼낸 무기는 기병창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원뿔형의 거대한 창.
오로지 꿰뚫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그 창은 림샤드와, 리차드의 풀 플레이트 아머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그야말로 기사라고 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
"..."
“기사의 소양 중 하나지.”
아드리아나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리차드의 입에서 ‘기사’라는 말이 나온 이상 말려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게다가 리차드가 언급한 그 말은, ‘라이언하트’에 입단하기 전에 리차드가 자신에게 했던 질문에 대한 답.
아드리아나 자신이 직접 대답한 기사도의 의미였다.
‘정한뜻을 굽히지 않는 것.’
[<버프: 방패병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 방패병의 가호: 받는 충격을 10% 감소시킵니다.]
[<버프: 인도자의 발걸음>이 적용됩니다.]
[인도자의 발걸음: 이동속도가 10% 상승됩니다.]
리차드를 더 말리는 대신, 아드리아나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드리아나가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된 것은 그녀가 몇 안 되는 전문 버퍼일 뿐 아니라 소수 스쿼드에 특화된 고유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아드리아나는 리차드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버프를 걸어주기 시작했다.
리차드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시펠케를 바라보았다.
크르르-
시펠케의 울음소리가 다시 한 번 공간에 울려 퍼졌다.
리차드는 손에 쥔 기병창, 헤비랜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무겁겠네요. 리차드씨.”
그런 리차드를 보며 샬롯이 툭 던지듯 내뱉었다.
리차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비랜스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지만, 그건 헤비랜스가 무겁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리차드는 헌터생활을 시작하고 10년이 넘게 같은 무기를 써오고 있었다.
휘두른 것만 수만 번이 넘는 그 무기가 이제 와서 무거울 리가 없었다.
다만 샬롯이 무게를 언급한 것은 창 끝에 서려있는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던전의 몬스터를 찌르는 것이 아니었다.
인류전체의 원수이자 재앙이었던 마수에게 가하는 복수의 서막이었고,
하프라인 밖의 포식자들을 사냥감으로 끌어내리겠다는 혁명의 선포였다.
인류의 염원이자 하프라인 밖으로 나가는 첫걸음.
그게, 이번사냥에서 리차드의 첫 공격이 가지는 의미였다.
“그러게 말일세. 이거 생각보다 훨씬 무겁군.”
“후후- 저 같으면 오늘 끝나고 무명검을 다시 뽑아볼 거에요.”
샬롯의 실없는 농담을 듣고 리차드가 수혁에게 물었다.
“기회를 주겠나?”
“글쎄요. 이미 제게 아니라. 판다님 오시면 직접 물어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고개를 다시 앞으로 향한 리차드는 시펠케가 자신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며-
리차드는 천천히 헤비랜스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들어 올리던 리차드의 창끝이 시펠케와 일치하는 순간.
리차드의 한 마디가 중후하게 울려 퍼졌다.
“먼저 가보겠네.”
그 말과 함께 리차드를 태운 림샤드가 시펠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리차드가 서있던 선상과 아이슬란드 사이에는 거대한 지중해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림샤드에게 그것은 방해가 되지 못했다.
선상에서 도약한 림샤드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물 위를 내달리며 가속도를 붙였다.
점점 더 빨리지는 림샤드의 속도는 아이슬란드의 지척에 도착했을 즈음에 리차드가 창을 꽉 틀어잡았다.
[<스킬: 차지>가 활성화됩니다.]
[차지: 거대한 마력을 한 번의 타격에 응축합니다.]
리차드의 몸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피어오른 푸른 기운은 리차드의 전신에 맴돌며 리차드의 존재감을 키우더니 이내 리차드의 오른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시펠케가 그 모습을 보며 한껏 몸을 움츠렸다. 리차드의 몸에 응축된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도약하려 피하려 한 것.
[<스킬: 무기 거대화>가 활성화 됩니다.]
[무기 거대화: 마력을 이용하여 사용하는 무기의 유효타격 범위를 두 배로 늘립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반 박자 빠르게 리차드의 창을 감싼 거대한 마력이 시펠케에게 파고들었다. 시펠케가 몸을 틀었지만 리차드의 창이 닿는 타격범위였다.
그대로라면 유효한 데미지를 먹일 수 있는 상태.
"...!"
하지만 마수(魔獸)라는 말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시펠케는 주둥이를 벌려 리차드의 창을 물었다.
가가가각!
리차드의 창이 시펠케의 이빨을 긁으며 찔러 들어갔지만 속도는 급격한 속도로 줄어들었다.
결국 찔러 들어가던 리차드의 창이 시펠케에 몸에 닿지 못하고 멈추었다. 음속의 물체를 멈추는 것이 시펠케로서도 부담이 있었는지 송곳니에서 피가 새어 나왔지만 그뿐.
유효한 타격은 없었다.
시펠케는 피를 흘리며 창을 문 채로 리차드와 림샤드를 들어 올렸다가, 땅에 내리꽂아버렸다.
쾅!
땅바닥에 내리꽂힌 리차드는 방패를 이용해 충격을 감소 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충격에 몸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쿨럭-"
결국 피를 토한 리차드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데, 리차드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펠케가 자신을 공격한 리차드를 마무리하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것.
아직 몸의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리차드가 창을 지지대 삼아 일어서려 했지만, 마수의 공격을 받은 직후에 움직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윽!”
리차드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워 중심을 잡았지만 시펠케의 아가리는 이미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때.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다가오던 시펠케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콰앙!
고유능력을 이용해 샬롯이 선상에서 단번에 날아와 시펠케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었다.
“...역시 쉽지 않네요.”
샬롯이 중얼거렸다.
리미트 해제를 최대출력으로 사용한 만큼 과부하가 상당했다. 온몸의 근육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런 공격에도 시펠케는 쓰러지지 않았다. 잠깐 기우뚱하던 시펠케의 몸이 바로잡혔다.
샬롯은 예상을 했다는 듯 잠시 거리를 벌렸다. 리차드도 샬롯이 시간을 벌어준 사이 몸을 일으켜 림샤드에 올라탔다.
창을 잡고 있어 직접적으로 충격을 받은 리차드에 비해, 림샤드는 바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멀쩡했다.
리차드는 림샤드를 이용해 거리를 벌리고 다시 한 번 처음과 같은 자세를 잡고 돌격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처음, 리차드가 아무의 도움도 버프도 받지 않고 돌격 했던 것은 마수의 힘을 가늠해보기 위함이었다.
15년 만에 첫 조우였으니까.
리차드는 아드리아나에게 눈짓을 했다.
[<버프: 방패병의 가호>가 적용됩니다.]
[ 방패병의 가호: 받는 충격을 10% 감소시킵니다.]
[<버프: 인도자의 발걸음>이 적용됩니다.]
[인도자의 발걸음: 이동속도가 10% 상승됩니다.]
[<버프: 전장의 지배자>이 적용됩니다.]
[전장의 지배자: 가하는 피해량이 10% 상승됩니다.]
아드리아나의 버프세례가 이어졌다. 그리고.
[<고유능력:버프 중첩>이 적용됩니다.]
[버프 중첩: 지정한 대상의 버프가 3중첩되어 적용됩니다.]
[<버프:방패병의 가호>, <버프: 인도자의 발걸음>, <버프: 전장의 지배자>가 3배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고유능력이 더해지며 리차드의 전력이 대폭으로 상승했다.
리차드가 엄청난 기세를 피어 올리며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 훨씬 거대한 기세로 달려들기 시작한 리차드의 창끝이 다시 한 번 시펠케를 향해 겨누어졌다.
시펠케가 피하거나 몸을 움직이는 일도 없었다. 수혁이 마법을 사용해 시펠케의 몸을 묶었기 때문.
[<마법:프로즌 패터>가 <마수:시펠케>에게 적중합니다.]
시펠케의 발밑에서 마력이 일렁이더니 얼음이 돋아나 시펠케의 발목을 묶었다. 오랫동안 묶고 있지는 못할 것이었지만, 리차드가 도착할 때 까지.
잠깐이면 충분했다.
꽝!
점점 가속도가 붙던 림샤드가 음속을 돌파하여 소닉붐을 내었다. 공기가 터져나가는 파공음과 함께 거대한 마력으로 감싸인 리차드의 창이 시펠케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창이 적중하기 직전, 리차드는 뭔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지고 마치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기분이 엄습했다.
[<고유능력: 사냥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냥개: 사냥감으로 정해진 대상에게 저항할 수 없는 공포를 선사합니다. (단, 시전자와 대상의 피가 맞닿은 적이 있는 대상에게만 효과가 적용됩니다.)]
“아…"
리차드가 힘 빠진 탄식을 흘렸다.
마수에게 고유능력이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시펠케에게 사냥개라는 고유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풀 플레이트 아머에 투구까지 쓰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샬롯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피를 토했을 때...’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리차드는 창을 쥐고 있는 팔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리차드씨!”
“정신 차려요!!”
리차드의 창에서 마력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모두가 경악했다.
수혁이 다급하게 마법을 펼치고 샬롯이 선상에서 도약하고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차드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미 시펠케의 아가리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림샤드도 더 이상 속력을 내지 못했다.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있었지만, 이미 시펠케의 범위 안이었다.
다물어지는 순간 풀 플레이트 아머가 짓이겨 지며 죽을 게 뻔한 상황.
<고유능력: 사냥개>의 조건을 충족시켰다는 것을 몰랐을 때부터. 이미 이 사냥은 실패한 것이었다.
그렇게 리차드가 닫혀오는 시펠케의 아가리를 보고나서 눈을 감으며 체념하는 순간-
턱-하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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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영물입니다. 영물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격에 도달하지 못하고 외도(外道)의 힘을 빌어 더 강력한 힘을 얻은 것이 바로 마수죠.”
익숙한 목소리였다.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하지만 이보다 더 반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외도의 힘을 빌어 강해진 존재들은 언제든지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기면 힘을 잃게 되는 조건들이 있죠."
"그걸 <징크스>라고 부르죠. 그 징크스가 시펠케의 경우에는 <육지에서 사는 물고기의 머리를 먹는 것>이고요.”
리차드는 눈을 떴다.
다물어지던 시펠케의 입이 푸른색 대나무 한 자루에 의해 멈춰져있었다.
그리고 그 대나무 옆에서-
“미안합니다. 이 녀석이 생각보다 훨씬 길을 못 찾아서.”
어깨 위에 요상한 생물을 얹어놓은 판다가 '마구로의 머리'를 시펠케의 목에 쑤셔 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