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ep18. 마수사냥 (2) >
=========================
"흠."
강서를 <고유결계:흑막>속으로 불러낸 목소리의 주인은 결국 강서를 흑막에서 내보내 버렸다. 홧김에 그런 것은 아니었고, 용건을 마쳐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흑장상주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었다.
<흑막>에서 나오기 직전. 세계가 잠시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강서는 목소리의 주인이 아직 <흑장상주(黑帳上珠)>를 다루는 데 미숙 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강서와 떨어진 곳에서 불러낸 만큼 공간왜곡을 유지하며 결계를 지속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리라.
기분좋은 나른함에 당장이라도 잠들 것 같았던 강서는 ‘딱 좋았는데-’하고 중얼거리며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잠을 청하는 강서에게 목소리의 주인은 비장하게 이야기했다. 물론 졸음이 몰려오는 강서 입장에서 그것이 그리 비장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정말 보통 놈이 아니군. 내가 경솔했다. 곧 직접 찾아가지. 어디 내 앞에서도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지 보겠다.]
강서가 느끼기에,
말투는 노장의 그것이었지만, 숨소리에서 느껴지는 호흡은 중년 사내의 것이었다. 무슨 이유로 강서 자신을 불러냈는지는 알지 못했다.
흑장상주를 한계적으로라도 다룰 수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딱히 고민해서 답이 나오는 일은 아니었다. 강서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생각을 털어버렸다.
결계에서 빠져나온 강서의 눈앞에는 무명검이 놓여있었다.
앞에 선 김에, 무명검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던 강서는 무명검을 처음 집으로 들였을 때를 떠올렸다.
혹시 몰라 하린에게 무명검을 잡아보라고 이야기했을 때.
하린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지만 강서는 무명검이 미세하게 기울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검을 뽑아내지 못하는 이상 큰 의미는 없을 터였지만... 고개를 갸웃하며, 강서는 쇼파로 돌아가 다시 앉으려 했다.
그렇게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졸고 있는 라오를 쓰다듬으려 할 때.
갑자기 집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끼이이-
하린의 집 대문이 스산한 소리를 내었다.
하린이 주기적으로 집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쇳소리가 나지 않는 하린의 집 대문이었다. 일부러 문을 천천히 열지 않는 이상 이런 소리가 날 리가 없었다.
‘곧 이라더니...’
갑작스러운 인기척과 수상한 소리에 강서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목소리의 주인밖에 없었다. 평소 하린의 집에 찾아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신승아와, 김수혁 정도.
하지만 그 둘이 찾아올 리는 없었다. 이미 본인들의 일에 강서가 부탁한 정보를 공유하는 일까지 더하여 벅찬 상태일 테니까.
심지어 수혁은 마수사냥에 대비하는 일까지 동시에 처리하고 있었다.
차라리 전화를 했으면 전화를 했지 직접 찾아올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상하기 그지없는 소리까지. 강서는 문밖의 인기척이 목소리의 주인공임을 확신했다.
대문이 열렸고, 인기척이 느껴짐에도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흠...”
하린의 방을 한 번 쳐다본 강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먼저 문을 열었다.
벌컥-
그리고 열린 문 앞에는-
“사부...”
웬 시체가 한 구 서 있었다.
***
델타가 페트병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스산한 소리를 내며 하린의 집을 찾아온 것은 강서가 수련을(?) 시킨 채 잊어버리고 있었던 델타였다.
강서가 문을 열고 델타를 확인했을 때 어째서인지 델타는 시체화에서 풀려나지 못한 상태였다.
본래 강서가 구상한 대로라면, 효과는 24시간에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24시간이 이미 지나버린 시점에서도 델타의 몸은 <디버프:시체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강서가 델타에게 준 ‘끝이끼 농축액과 재생의 비약을 적절히 배합시켜 만든 알약.’
일명 <끝이끼환>을 만들며 동시에 해독제도 만들어 둔 터라 바로 해독할 수는 있었지만, 만약 델타가 스스로 절벽을 올라오지 못하고, 강서가 델타를 기억해내지 못했다면 정말 시체가 돼서 만날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페트병 한 병에 담긴 물을 단번에 다 마셔 버린 델타를 보며 강서가 물었다.
“흐음...반복이 되었다고요?”
“응, 나도 처음에 고유능력도 안 쓰고 진짜 열심히 올랐는데 진짜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팔 한 번 부러지고 말자. 하는 심정으로 <리미트해제>를 사용했거든? 근데 사부 진짜 사악하더라.”
“이거 신체능력 자체를 저하시키는 거라 한계도 90%가 낮아지던데. 그래도 안 쓴 거 보다는 나아서 계속 사용했지만...”
“잘했네요.”
“아마 몸이 자동으로 회복되는 효과가 없었으면 난 진작에 뼈가 다 부러졌을 거야.”
강서는 델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생의 비약.
델타가 시체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원흉은 바로 재생의 비약이었다.
끝이끼 농축액의 지속시간을 24시간까지 늘린 것까지는 강서의 생각대로였지만, 그 효과가 너무 강력해서 24시간이라는 지속시간까지 재생시켜버린 것.
아마 강서의 해독제가 아니었으면 델타는 영원히 시체같은 몸으로 살았을 지도 몰랐으리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델타가 절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치료효과를 발휘한 것도 재생의 비약이었다.
회복마법과 메모라이즈 페이퍼가 발전하면서 헌터계에서 잡템 취급을 받게 된 물건이었지만, 그건 아직까지 사람들이 ‘연성술’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일.
연성술의 재료로서의 재생의 비약은 그렇게 가치없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물론 재생의 비약이 그 자체로 희소가치가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던전에서도 포션계열 중에선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강서가 경험했던 세계 중에서는 이 재생의 비약이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되는 세계도 있었다.
기본효과자체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연성술에 재료로 사용될 경우 어디에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잠재력이 높고 범용성이 뛰어나기 때문.
“근력과 체력은...좀 나아졌나요?”
강서가 델타에게 물었다.
“응! 역시 다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일부러 재생의 비약과 배합 시킨 거니까요.”
강서의 질문에 델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체화를 겪으며 엄청난 고생을 한 만큼 강서에 대한 원망이 쌓여있을 수도 있었지만, 델타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강서를 선망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올라갈 때 근력과 체력이 오르기 보다는...<리미트 해제>의 과부하로 부러진 팔다리를 회복시킬 때. 그때 엄청나게 오르더라고.”
그건 바로 강서의 훈련으로 델타가 얻은 것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강서가 재생의 비약을 사용한 이유 중 또 한 가지는 바로 델타의 성장이었다. 당연히 끝이끼 농축액에 회복마법효과를 걸 수도 있었다. 그편이 회복도 빠르고 말이다.
하지만 회복마법으로 신체손상을 해결할 경우, 빠르고 유연한 대처가 가능했지만 회복마법은 이름 자체가 가리키고 있듯 원래의 상태로 복구시키는 방식의 치료법이었다.
이렇게 할 경우, 신체복구로 인한 경험치는 얻을 수 없었다. 찢긴 근육이 다시 엉겨 붙으며 더 촘촘해지는 효과도, 부러진 뼈가 다시 붙으며 더 단단해지는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재생의 비약은 인간이 가진 자가회복력을 증강시키는 방식의 메커니즘을 가진 치료제였다.
실제로 샬롯도 그것을 노려 심각한 상처가 아닌 이상 회복마법을 사용하기 보다는 자가 회복을 하는 편이었다.
리미트 해제라는 고유능력을 가진 이상 근력과 체력의 한계증강은 곧 전투력 증강으로 이어졌으니까.
강서는 그 효과를 단기간에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델타에게 적용시킨 것이었다. 시체화와 리미트 해제, 그리고 재생의 비약의 조화로 근력과 체력의 한계를 증강시키는 것.
그렇게 강서가 나름 의미있는 실험결과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 갑자기 델타가 뜻밖의 질문을 해왔다.
“그래서...사부 혹시 더 남은 거 있어?”
"....? 남은 거요? 혹시 몰라 만들어 둔 게 하나 더 있긴 한데...같은 부작용을 가지고 있을 텐데요.”
바로 강서의 <끝이끼환>이 더 있는 지 물어본 것이었다.
“응! 그래서 누나를 말리기 위한 특훈에 들어가려고! 후후후. 마수를 잡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누나를 힘으로 제압해주겠어.”
"..."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더라고. 고마워 사부! 이 은혜는 꼭 갚을 게!”
"..."
강서는 말없이 델타에게 알약을 쥐어주었다.
***
"흠..."
“수혁, 뭐 들은 거 없어요?”
5월11일 11시55분.
마수사냥 개시 5분 전. 아이슬란드 앞바다에 영국군의 군단함이 하나 떠 있었다.
군단함 내부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도공학 기술을 이용해 적당한 거리까지 이동하고 되돌아오도록 설정만 되어있을 뿐.
배에 존재하는 인물은,
샬롯, 수혁, 그리고 리차드와 그의 비서관인 아드리아나 뿐이었다.
네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곳은 바로 마수가 존재하는 아이슬란드.
천명에서 아티팩트를 이용해 새하얀 반원모양 결계가 아이슬란드를 감싸고 있었다. 그 결계를 바라보며 그들은 <판다>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로 말은 없었습니다.”
“흐음..."
따로 전달받은 것이 없다는 수혁의 대답에 리차드가 침음성을 흘렸다.
5분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본래라면 강서가 와서 <마수를 사냥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마수 사냥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아드리아나.”
리차드가 자신의 비서관인 <아드리아나>를 부르며 눈짓을 했다.
마수사냥으로 선포한 시간까지 5분이 남은 시점. 그건 천명이 결계를 풀기로 되어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눈짓은 최종보고를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예 길드장님. 현재 상황보고 드리겠습니다. 우선 지중해지역 모든 상공에 비행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참사에 대비해서 노르웨이와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 해안가에 일반인들은 모두 내륙지방으로 대피령을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리차드가 가장 중요시한 부분이었다. 일전에 수혁이 말한 것처럼 첫 마수사냥이 가지는 의미는 굉장히 컸다.
이 마수 사냥을 기점으로 헌터들이 하프라인 수복을 꿈꿀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성공적으로 사냥을 한다면, 헌터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건이 될 터였지만, 만일 마수가 날 뛰다가 일반인들이 사는 유럽대륙 가까이로 이동을 하기라도 한다면, 15년 전의 끔찍한 사태가 되풀이 될지도 몰랐다.
“...알겠네.”
대피령이라는 말에 리차드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15년 전 균열당시의 끔찍한 사태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길잡이랑 천명 쪽에서는 아직 답이 없나?”
“천명에서는 동태를 보다가 <천명>이 떨어지게 되면 참전한다고 하고, 길잡이 측에서는...”
“또 답이 없겠지.”
아드리아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4대 길드라고 불렸지만, 길드간 사이가 좋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길드는 하쿠나마타타와 라이언하트 뿐이었다.
천명과 길잡이는 다른 길드와 일말의 대화도 없었다.
관계가 없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았다.
천명은 매번 출처모를 <천명>에 의해서만 움직였고, 길잡이는 양지에서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리차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지금 온다고 해서 같이 스쿼드를 이루기도 힘들겠네만...”
마수가 나타난 시국에서도 평소와 같은 두 길드에 리차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다 되었나 보네요.”
샬롯의 말과 함께 선상의 모든 사람이 손가락 말미부터 찌릿찌릿하게 타고 올라오는 섬뜩함을 느꼈다.
마수의 기운이었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그 기운에 수혁이 눈을 감으며 숨을 한번 내쉬었다.
천명이 설치한 반원형태의 새하얀 결계가 중앙에서부터 조금씩 스러지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된 것이었다.
결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며 아드리아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마수의 기운을 직접 느끼자 불길함이 솟구쳐 오른 것이다.
“길드장님 지금이라도 기사단을...”
아드리아나도 강서를 직접 본 경험이 있었다. 예사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밟아온 행보를 생각하면 이번에도 특별한 방법을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법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리에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법이었다.
그는 자리에 없었다. 연락도 없었고, 이 자리에 올지 안 올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다.
후퇴를 하거나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아드리아나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상식이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 그를 아직 모르는 군.”
그래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던 길드장 리차드가 자신의 만류를 무시하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이유를.
리차드는 허리춤에 끼고 있었던 투구를 머리 썼다. 완전히 무장한 리차드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사>의 모습이었다.
황금색과 흰색의 무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갑옷까지 장착하자 안 그래도 거대한 리차드의 몸이 더욱 거대해졌다.
크르르르!
때마침 멀리서 마수 ‘시펠케’의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 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 번 불안감이 차오른 아드리아나는 리차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그런 아드리아나를 바라보며 리차드가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렸다. 사람좋은 미소를 지은 그는 이어서 투구로 손을 올렸다.
“정 불안하면 한 번 따라해보게. 요즘 이게 유행이라더군.”
“....예?”
그리고 철컥-하고 투구가리개를 닫으며 나지막히 읊조렸다.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