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ep16. 징조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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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
놀랍게도 그 두 단어에 마수사냥은 보류되었다.
물론 그것이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태민양이 내뱉은 말에 정적이 한참을 이어졌으니까.
샬롯과 리차드는 미간을 한참 움찔거리면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한 수긍이었다.
“저 마수가 섬을 벗어나지 못할 것은 이 노인이 보증하지.”
“아이슬란드를 벗어나는 순간 바로 돌격할 겁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천명의 길드장이 무언가를 막아서는 일은.
사실 그렇기 샬롯과 리차드가 태민양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
“딱 삼일입니다.”
“삼일이면 자네들이 독촉하지 않아도 천명에 따라 시행될 것이네.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니...저 섬은 천명에서 봉인주로 수호하고 있겠네. 다시 말하네만 안에서 나오는 것도 불가하고 밖에서 들어오는 것도 불가하네.”
"..."
하늘이 내린 명령이다. 태민양의 그 말에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말은 말 그대로 천명 (天命)이 되었다.
태민양 자체로도 강력한 헌터였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민양이 천명이라는 말을 꺼내며 막아설 때, 그것을 거스르는 순간마다 항상 참사가 일어났기 때문.
“어쨌든, 그럼 그리 알고 이 노구(老軀)는 가보도록 하지. 괜히 감시한답시고 무고한 인물들 불구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섬뜩한 말을 내뱉고 태민양은 회의실을 나갔다.
적막한 기운이 회의실 내부를 맴돌았다.
분위기를 깨고 입을 연 것은 수혁이었다.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음.”
“나쁘지 않다고요?"
나쁘지 않다. 분명 그건 타이밍 상 태민양의 말이 나쁘지 않다는 의미였다. 쉽게 수긍할 수 없는 수혁의 말에 샬롯이 반문했다.
“헌터들의 수준이 정말 많이 올라갔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9티어, 7티어, 8티어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죠. 아예 헌터체계를 개편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이어지는 수혁의 말은 의외로 천명(天命)에 대한 생각도 아니었고, 노인장의 말에 대한 감정도 아니었다. 헌터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직 모두 정복하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A급 던전 두 개는 아직 공략되지 않았습니다. 노인장께서 말씀하신 것과 별개로 저도 미룰 수만 있다면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좀 더 말해보게나. 미루는 게 좋다는 이야기가 아직은 공감되지 않네만.”
리차드가 손끝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사실 두 분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던전을 모두 클리어한 뒤에 헌터들의 방향성을요. 지금은 헌터라는 무리의 방향성이 던전클리어로 향해있지만, 모두 클리어 된 뒤에는 그 방향성이 상실됩니다.”
“퀘스트형 던전이 남아있긴 하지만... 클리어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고요. 모든 던전이 클리어되면, 그 뒤에는 쌓이기 시작하죠. 공략법도, 아이템도, 모두 쌓이게 될 겁니다.”
“그렇겠죠. 정보가 흔해지고 아이템이 흔해지는 건 최근에도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고요.”
“맞습니다. 당연한 수순으로 시간이 흐르면 높은 티어로 향하는 장벽이 낮아지게 될 겁니다. 길드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는 겁니다.”
리차드가 고개를 끄덕여 수혁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뒤이은 말은 수혁에게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맞네. 그래서 더 이 마수 사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네만...미뤄지는 것은 오히려 나쁜 것이 아닌가? 자네가 왜 천명주(天命主)의 말이 ‘나쁘지 않다’라고 표현했는지는 아직 이해가 가지 않네.”
“혹시 마수사냥을 하게 된다면 얼마만큼의 피해를 생각하셨습니까?”
수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리차드에게 물어왔다.
하지만 리차드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에 담긴 무게 때문이었다.
얼마만큼의 피해를 생각했느냐.
얼마만큼의 목숨을 희생시키겠느냐.
가벼이 대답할만한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연히 아무도 안 죽이는 걸 목표로 해야지!’라고 대충 대답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고 말이다.
새로운 던전을 개척할 때에도 최대 사망자수를 정해놓고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던전공략을 중지 하도록 하는 <최대 사망자수>
던전을 공략할 때도 그러한대, 하물며 상대는 마수였다.
그런 방식의 접근은 클리어도 못하고, 희생자도 다수 발생시키는 최악의 참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
리차드의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침묵하던 샬롯이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면 너무 무책임 하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저희 하쿠나마타타의 간부진은 모두 동의 했습니다.”
“맞네. 자네 말대로 피해를 생각했지. 하지만 피해를 감수하지 않겠다는 건 너무 오만한 생각 아닌가?”
맞는 말이었다. 수준이 아무리 올라갔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처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변수로 점철된 것이었으니.
희생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 상식에 대하여, 수혁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제가 뭐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가정해보죠. 마수를 사냥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그 숫자. 딱 그만큼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
"성공적입니다. 마수사냥은요.”
수혁의 목소리는 덤덤하게 리차드와 샬롯의 귀에 꽂혔다. 헌터는 분명 이능을 얻은 존재였지만, 그래도 사람이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단어 앞에서 조용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성공적인 진출은 아닐 겁니다. 많은 헌터들이 뒷걸음질을 칠겁니다. 4대길드도 죽어가며 잡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 내가 어떻게 가냐며 말이죠.”
“성공적인 사냥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진출을 하려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수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종이 한 장을 펼쳤다. 그 종이는 서약서였다.
“그건...”
“서약서입니다. 저도 놀랐어요 마수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영감님이랑 똑같이 저도 딱 삼일을 생각했거든요. 여러분들에게 마수사냥을 삼일만 미뤄달라고 부탁하려했죠.”
“왜...?”
샬롯은 의문성을 내었다.
천명이라며 자신들을 막아서 태민양의 행보야 원래도 그래왔으니 이해가 가능했다. 하지만 본래라면 이 자리에 없었을 수혁이 삼일간 마수사냥을 미뤄달라고 부탁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
“태민양 어르신이 이미 일주일을 말해놓고 가셔서 이 서약서가 의미가 없어졌기는 하지만...더 준비를 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준비...? 아이템과 인원이라면 이미....아.”
이미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하려던 리차드가 탄성을 뱉었다. 그리고 샬롯이 입을 벌렸다.
“혹시 그분이 마수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게 있나요...?”
오래전부터 하프라인 바깥쪽을 생각해온 두 개의 길드이고, 4대 길드에 속한 길드이니만큼 인원과 아이템 자체는 부족함 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당장 마수사냥을 할 수 있을 정도. 실제로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고 말이다.
다만 준비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면, 그건 바로 정보였다.
마수를 사냥해본 사람이 없으니 사냥방법에 대한 정보를 모을 수 없는 건 상식적인 수준에서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정보에 대해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가 있었다.
항상 상식수준을 벗어나는 행보만을 걸어온 한 사람.
던전에 들어갈 때 마다 헌터세계에 반향을 몰고 오는 미지의 인물.
수혁은 샬롯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확신은 아니고, 여쭤봐야 하지만 아마...지금 까지를 되돌아보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과연...마수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사냥법 같은 게 있다면 확실히 사망자를 줄일 수도 있겠군. 내가 경솔했네. 마수라는 이름에 너무 서두르려 했군.”
리차드는 판다와 했던 팔씨름을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샬롯은 수혁을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리차드와 샬롯의 흐뭇한 시선에 수혁도 자그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수혁의 진정한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사실 판다가 방법을 알고 있다면 물어보고 지금 당장 시행하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판다의 <친구 플레이리스트> 개정판 스마트 워치가, 발매까지 남은 시간이 딱 삼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
수혁이 자신의 이름을 팔아먹는(?) 동안 강서는 델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요 델타라는 꼬마가 아저씨 제자라는 말이신 거죠?”
“그렇게 되는 것 같네요.”
하린이 팔짱을 끼고 자신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톡톡-두드리며 델타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뻔히 보이는 행동과 말투였다.
델타는 그런 하린을 비웃으며 말했다.
“흥, 꼬맹이는 누가 누구보고...”
"..."
델타의 말에 머리의 빠직하고 사거리 표시가 난 하린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강서를 보며 말했다.
“아저씨가 직접 가르치시는 거죠?”
“음...가르친다기보다는...실험이라는 말에 가깝긴 한데 일단은 계약을 조금 갱신한거라 일주일 정도에요.”
"....?"
강서의 입에서 나온 말에 델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부 실험이라니...?”
델타가 조심스럽게 물어왔지만 그 목소리는 강서에게 닿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하린은 고개를 가로졌고 강서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요. 애 인성이 별로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몇 번 구르다보면 고쳐지겠죠?”
“....구른다고?”
여전히 델타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캬오-
오직 강서의 어깨에 있던 라오만이 델타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델타는 강서를 향해 소리쳤다.
“사부! 가르쳐준다면서 실험이라니!”
“아. 그 단어가 조금 걸리시면 아까 사인한 계약서를 조금 볼까요? 여기 2조2항에 보면 ‘가르침’이란 ‘갑’이 ‘을’에게 제공하는 유무형적인 가치를 의미하며 정신적인 형태로 제공될 경우 ‘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상정한 명칭...”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는지, 강서의 설명을 열심히 듣던 델타는 외쳤다.
“그래!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걸로 하기로 계약서 작성 했잖아! 내가 분명 도장찍기 전에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
“그래서 제가 두 번 더 설명을 드렸는데 특약 11번에 보면 실험적인 행위로 갑이 생각하기에 도움이 될 거라 추정되는 경우에는 2조2항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의 유익성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공될 수 있다고...”
“아아악! 그놈의 특약이 도대체 뭐야 아까는 얘기 못 들었단 말이야!”
강서에게 속아 또 다시 자기도 모르게 사인을 해버린 델타는 머리를 헤집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면 아직 법정대리인분 동의를 못 받아서 계약서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물러도 무방 합니다만....”
삐빅!
고통스러워 하는 델타를 보며 계약을 물러도 괜찮다는 설명을 하던 와중 갑자기 강서의 메시지가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강서는 델타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이제야 답신을 보내네요. 이거 팩스로 보내주신 문서에 사인만 하면 되나요? 이렇게 사인을 하기는 했는데...]
“늦었네요.”
거기에는 델타의 법정 대리인이 남긴 메세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