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ep16. 징조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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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라인이 함락되었다.’
그건 반은 맞는 말이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물리적으로 하프라인이 함락된 것은 아니었다.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일부지역을 둘러 세워진 하프라인의 장벽은 여전히 건재 했으니까.
다만 ‘하프라인이 함락되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 말이 <마수가 하프라인 안에 출몰했다>는 맥락에서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 하프라인은 어디까지나 인류를 마수로부터 구하기 위해 설치된 방어벽이었으니까 말이다.
마수가 나타나며 기존 인간사회에서 힘을 숨기고 살아오던 마법사와 무인(武人)들이 힘을 보태었고,
균열과 동시에 생겨난 각성자들도 힘을 모았지만, 모든 마수들을 처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수(魔獸)들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는 사람은 매우 적었고, 마수를 죽일만한 힘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말 그대로 나라의 재앙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신전들이 나타났고, 신전으로부터 인류는 마수들을 막을 수 있는 하프라인의 건설을 제의 받았다.
그렇게 갖은 방법을 사용하고 많은 이들이 희생해 마수들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그리고 북아메리카 일부지역으로 몰아내고 하프라인을 건설했다.
그 뒤로 인류세계에는 한 번도 마수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충격적인 말이었다. 마수가 나타났다는 말은.
수혁은 팔뚝의 인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왔나. 자네도 아는 것처럼 <종탑주>가 오지 못하는 상황인 것 같네. 그래서 자네를 대신 부른 거고.”
“네."
“우선 앉지.”
리차드 4세가 화려하지만 무게감 있게 장식된 상아색 원탁 중앙의자에 앉아 수혁을 맞았다.
방 자체에 설치된 통역마법 덕분인지 따로 수혁이 따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대화에 어려움이 없었다.
라이언 하트의 중진회의실.
본래라면 라이언하트의 중진 간부들이 앉아 있어야 할 그곳에는 수혁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하쿠나마타타의 길드장 샬롯 피미아와, 리차드 4세가 앉아 있었다.
샬롯 피미아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수혁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아하하...오랜만이네요 수혁.”
“그러게요. 이틀도 다 안 지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음? 둘이 봤었나?”
“네, 저에게 용건이 있던 건 아니지만...”
수혁의 말에 리차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대충 알겠군. 뭐 어쨌든, 사사로운 이야기는 제쳐두고 용건부터 말하겠네. 나머지 둘은 아직 답신조차 보내지 않아서 올지 안 올지도 몰라서 말이지.”
“메세지에 써놓은 것처럼 <마수>가 나타났네.”
무미건조한 어투였지만,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마수가 나타났다. 메시지로 듣는 것과 직접듣는 이야기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고, 수혁은 생각했다.
수혁은 침묵에 잠겼다. 샬롯은 왜인지 조금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다행히 우리 알고 있는 마수지. 15년 전에도 나타났던 <시펠케>라는 마수네. 약하다...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비교적 약한 마수였던 건 사실이지.”
마수들에게는 고유의 이름이 있었다. 친절하게도 상태창이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 물론 왜 그런 이름이 지어졌는지, 이름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리차드는 눈을 감은 채 몸을 뒤로 기대고 물어왔다.
“어떡하면 좋겠나.”
리차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샬롯이 답해왔다.
“잡아야죠.”
샬롯의 말에는 여러 가지가 담겨있었다. 마수를 사냥하겠다는 의지와, 드디어 도전한다는 약간의 희열. 그리고 걱정과 기대같은 것이 적당히 버무려져 있었다.
“어차피 다들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남아있는 A급 던전 두 개. 그거만 클리어 되면 누가 먼저냐의 차이지 분명 누군가 시도 했을 거에요.”
"..."
오히려 이 타이밍에 나타난 것이 기회라고 생각해요. 헌터가 마수를 사냥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일이 될 거에요. 그것만으로 충분하잖아요?”
“흠...”
리차드가 눈을 감고 고민하는 듯 소리를 흘리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수혁과 샬롯은 그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의아해하다가 이내 리차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그곳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새하얀 한복두루마기와 같은 색의 모자를 걸친 채, 적갈색 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이 한 명 서있었다.
길드 천명(天命)의 길드장. 태민양이었다.
그를 보고 리차드가 자리를 권하려 했지만, 태민양은 리차드의 말허리를 잘랐다.
“앉으시죠. 이번...”
“천명을 거스르는 일이다. 마수사냥은 미루도록.”
태민양의 단호한 말과 함께 회의실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천명...’
그리고 수혁은 욱신거리는 팔뚝을 반대쪽 손으로 꽉 쥐며 속으로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
-와 쟤도 진짜 근성인이다. 저걸 또 올라오네.
-ㄹㅇ솔직히 근성만큼은 박수를 줘야함.
-판다아재의 인성에도 박수를...
강서와 델타의 판다가면 터치 내기는 너무도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시작과 동시에 절벽으로 나가떨어진 델타는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절벽을 기어 올라왔지만, 강서는 한 번 더 밀어 차는 것으로 그 근성에 보답했다.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떨어진 델타는 부들부들 거리며 한 번 더 절벽을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델타와 약속한 30분은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강서는 스마트 워치를 바라보았다.
시작과 동시에 맞추어 두었던 스탑워치가 내기의 종료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01:33]
“화이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강서는 절벽 아래로 델타를 바라보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 놀림에 가까운 응원에 시청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탐탐’님이 ‘10,000원’을 후원!
[와... ㄹㅇ악마...]
‘교훈’님이 ‘10,000원’을 후원!
[여러분 제가 드디어 사자가 절벽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그건 바로...]
-키우기 쉬우니까.
-ㅋㅋㅋㅋ사자 이 나쁜 새끼얔ㅋㅋㅋㅋㅋ
-우리 아빠 좌우명이었는데 시팤ㅋㅋㅋㅋㅋㅋㅋㅋ
-화이팅이 아니라 리얼로 fighting하고 싶어서 이를 악물 듯.
-zzzz
-판-다
강서의 응원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델타가 절벽 위를 향해 오른 손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오른손을 드는 것과 동시에 다리가 미끄러졌는지 몸이 늘어지며 왼손으로만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흔들리는 몸을 왼손으로 간신히 지탱하며, 델타가 절규에 가깝게 외쳤다.
“항-복!!!!”
***
강서에게 항복선언을 하고 절벽에서 끌어올려진 델타는 숨을 몰아쉬었다.
신체가 한계까지 몰아쳤던 것인지, 한번 달아오른 델타의 호흡은 그칠 줄 모르고 한참을 계속되었다.
그렇게 심호흡을 하던 델타의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대(大)자로 뻗어있던 델타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무슨 이유에선지 반짝이는 눈을 하고 강서를 바라보았다.
“사부!”
그리고 도저히 바라보는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탐탐’님이 ‘10,000원’을 후원!
[...?]
‘제정신?’님이 ‘10,000원’을 후원!
[뭐요…? 사부요?]
-혹시 고통을 좋아하는 건가.
-‘사자씨부랄’의 줄임말 아닐까...?
-띄어쓰기가 그게 아니잖아 ㅁㅊ놈앜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사자빌런ㅋㅋㅋㅋ
시청자들이 델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기 때문.
아무리 계약을 했다고 하더라도, 강서는 델타를 강제로 던전에 끌고 들어가고, 절벽에 매달아 놓은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본 상황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좋은 감정이 남을 리가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본래라면 악에 받쳐 강서에게 달려들었어야 할 델타가 강서를 사부라고 불러오며 눈을 반짝이는 것이 말이다.
그리고 그건 강서도 마찬가지였다. 강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델타를 쳐다보자 델타가 반짝이는 눈동자를 더더욱 빛내며 중얼거렸다.
“절벽을 오르면서 깨달았어. 생떼 부리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어. 결국 사람을 말릴 수 있는 건 압도적인 힘이야.”
"..."
“지금이라도 시작해야해 누나를 말릴 수 있는 힘이 필요해...나를 가르쳐줘 사부!!”
“가르쳐 달라고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은 델타를 만류했다.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벌어질 많은 잔혹한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
‘동물병원’님이 ‘10,000원’을 후원!
[그...취향은 존중하는데요...이 취향은 조금 위험한 것 같다만...]
‘아 알았다’님이 ‘10,000원’을 후원!
[이거 그거네 호랑이 가죽 수련법. 사자새끼식 절벽수련법 끝났으니까...]
-? 호랑이가죽 수련법이 뭐냐?
-뭐긴 뭐야, 이름 석자만 남기고 뒤지는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게 무슨 수련법이야
-zzzz갈수록 태산
-가죽이라도 남기면 다행이자너ㅋㅋㅋㅋㅋㅋ
델타가 강서를 사부라고 부르게된 경위는 이러했다.
델타는 처음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자신의 안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두 번째 떨어졌을 때는 <절망감>을 느꼈다. 고통을 감수하고 노력해서 절벽정상에 올랐지만 강서의 손짓에 자신의 노력이 너무도 쉽게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
그리고 나서 세 번 째 떨어졌을 때 델타의 안에는 억울함밖에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악에 받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절벽을 오르다 델타의 표현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
자신이 이 상황에 처해있는 것도, 누나를 말리지 못하는 것도 자신의 힘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아무것도 안하는 델타의 방식은 샬롯에게 불편함을 주기는 했지만 샬롯이 던전을 도는 행보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항상 <하지 않겠다.>는 다짐만을 해오던 델타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
델타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든지 시키는 건 다 할게!”
델타의 모습을 보며 강서는 침묵했다. 잠시 고민을 하고 있던 것.
어찌되었든 강서는 샬롯과 약속한 것을 모두 이행했다.
물론, 델타가 자신과의 약속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그때 가서 발생할 문제이고 우선은 하루에 한 시간씩 나오기로 약속한 내기에서 강서가 승리했다.
그리고 강서의 생각이 맞다면 지금 모습대로 델타를 돌려 보내더라도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서가 고민이 되었던 것은, 델타의 바뀐 태도를 보며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강서는 델타에게 되물었다.
“뭐든지 다 한다고 했죠?”
그리고 델타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