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ep15. 가르침을 주십시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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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강서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샬롯이 고개를 갸웃하며 수혁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수혁도 그 단어를 알고 있지는 않았다.
“엘프요...? 저는 샬롯인데...무슨 말씀이신지 아나요. 수혁?”
“엘프...는 저도 처음 듣는 단어 같습니다만.”
“아."
강서가 짤막한 탄성을 뱉으며 잠시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이 풍기는 분위기와 외모가 엘프의 그것과 놀랄 만큼 비슷했기 때문에, 강서는 샬롯에게서 잠시 엘프의 잔상을 보았다.
돌아온 지구에는 엘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멈칫한 것. 심지어 샬롯의 얼굴이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한 엘프와 굉장히 닮아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닮았군.'
하지만 샬롯은 엘프의 특징인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샬롯의 귀를 확인한 강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잠시 착각했네요.”
그러자 샬롯이 배시시 웃었다.
“후후, 그런가요?”
그리고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치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다소 늦었지만! 저는 샤를로트 피미아라고 합니다! <하쿠나마타타>라는 길드에서 대장노릇을 하고 있지요! 그리고 선생님과 같은 한국인의 핏줄이 흐르고 있어요.”
“혼혈...이란 말씀이시군요.”
샬롯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가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나온 혼혈아(混血兒) 였기 때문.
자랑스럽게 자신의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이야기하던 샬롯은, 갑자기 목소리를 줄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척을 하다가 강서에게 소곤거렸다.
“넵! 사실 비밀이지만...전 한국이 더 좋아요.”
장난기 넘치는 샬롯의 모습을 보며 수혁이 한숨을 한번 내뱉었다. 그리고 샬롯을 향해 물었다.
“샬롯.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저번 판다지아 판매목표 달성행사 때에도 꿈쩍 안 하고 앉아만 있다 가더니.”
수혁은 샬롯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었다. 같은 한국출신(?) 최상위랭킹 헌터이기도 하고 한창 A급 던전을 개척할 때 대규모 던전공략을 하며 몇 번 스쿼드를 이룬 적이 있었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는 장난기 많은 말괄량이로만 보일지 몰라도, 샬롯이 절대 시간을 낭비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한 틀이라도 더 모아서 하쿠나마타타가 설정한 <목표>에 사용하려고 혈안이 되는 쪽에 가까웠지.
“다름이 아니라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오게 되었어요.”
"...?"
샬롯이 조금은 톤이 다운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라는 말에 강서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샬롯이 몸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델타!”
“델타라면...”
수혁이 중얼거림과 동시에 문 밖에서 샬롯과 같이 이국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15살 남짓의 소년이 들어왔다.
“아, 싫다니까.”
소년은 밝은 분위기의 샬롯과는 정 반대로 얼굴 전체에 짜증을 드리우고 있었다. 보는 사람마저 짜증이 날 정도로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들어온 그 소년은 머리를 털며 샬롯 쪽으로 걸어왔다.
“델타 피미아...”
수혁이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델타 피미아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샬롯 피미아의 동생. 각성자 이지만 던전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특이성으로 유명했다.
샬롯은 자신의 옆에 선 델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제 동생이에요. 이름은 델타 피미아. 각성자죠.”
“흠...”
“하지만 딱히 던전활동을 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헌터 라이센스도 제가 9급만 간신히 발급받게 해놓았지 던전에 스스로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
샬롯의 말에 강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떤 부분을 부탁하고 싶으신 건가요?”
“...이 녀석을 좀 가르쳐 주셨으면 해요.”
"...?"
“흥, 소용없다니까.”
샬롯의 말에 델타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 아저씨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리고 그런 델타의 모습을 보며 샬롯이 한숨을 쉬었다.
"보시다시피, 판다님이 누군지 모를 정도로 집밖으로 안 나오는 아이에요.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종일 방 안에만 있고, 저 말고는 아무 랑도 대화를 하지 않죠.”
"..."
"사실 자질자체는 굉장히 충분해요. 남매라서 그런지 저랑 같은 고유능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
샬롯의 말에 수혁이 놀란 기색을 보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같은 고유능력이라면...’
고유능력이 같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수혁이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샬롯의 괴물같은 고유능력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것.
샬롯의 고유능력은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발전가능성이 높은 고유능력 중 하나였다. 아니, 수혁이 아는 고유능력 중에서 발전가능성만 따지면 단연 최고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닌 고유능력이었다.
샬롯이 지금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그것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아! 던전을 돌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은 아니었어요. 물론 델타와 같이 던전을 돌게 된다면 제가 너무 고맙겠지만, 우선 이 아이가 뭔가 목표라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뭘 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는 아이라.”
“흠...”
“만약 부탁을 들어주시면 정말 뭐든지 원하시는 걸 해드릴게요. <하쿠나마타타>의 길드장 자리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샬롯이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했지만, 강서는 잠시 침묵했다.
만약 할 일이 있었다면 정중하게 거절을 했겠지만, 갑자기 시간이 일주일 동안 붕 떠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던 것. 그렇게 몇 초를 고민하던 강서가 고저없는 탄성을 뱉었다.
"아."
"...?"
“뭐든지 라면....좋아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샬롯의 제안을 승낙했다. 고민하던 강서의 머릿속에 뭔가 하나가 떠오른 것이었다.
강서의 침묵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이던 샬롯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 자신의 누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델타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으려 했으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흥, 누나가 이번이 마지막이라서 승낙했지만, 나는 이 아저씨가 말하는 대로 따를 생각이 없...”
퍽-
강서가 어느새 꺼내든 <신선대>로 델타 피미아의 머리를 후려쳤기 때문.
“딱 기절할 정도로만 가격했으니 크게 아프진 않을 겁니다. 보통 당사자가 없는 게 나아서.”
"...?"
샬롯이 놀란 눈으로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델타가 뒤로 넘어가 기절한 상태였다.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안한 것처럼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서는 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탑주님, 제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 좀 종이에 적어주실래요? 그리고 샬롯님은...”
왜인지 굉장히 익숙하게 샬롯 피미아에게 말을 건넸다.
“법정대리인 맞으시죠?”
"...?"
***
강서는 샬롯 피미아에게 여러 가지 필수적인(?) 동의사항들을 종이로 받아내고 던전으로 향했다. 물론 델타 피미아를 대동하고 말이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강서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병사의 수 만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였다.
훈련을 기획해본 경험도 있었고, 직접 훈련을 시켜본 적도 있었으며 한 제국의 황제를 검술훈련으로 굴려본 적도 있었다. 물론 이번처럼 의뢰를 받은 적도 수없이 많았다.
강서는 잠시 눈을 감고 회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샬롯님에게 의뢰를 받았지만...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그만 둘 수 있습니다.”
“...상관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요.”
당연히 한 번 더 물어올 줄 알고 강서의 되물음을 예상했지만, 강서는 그러지 않았다.
델타는 민망함을 느끼고 묻지도 않은 것에 혼자 대답했다.
“이번에도 내가 이기면 누나가 소원 하나를 들어 준다고 했어. 어디 아저씨 마음대로 해보라고. 얼마든지 버텨줄 테니.”
사실 샬롯이 델타의 개과천선을 누구에게 맡긴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델타는 샬롯에 의해 내로라하는 많은 교육자들의 손을 거쳐 온 상태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델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두 손을 들며 포기를 외쳤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강제로 던전으로 데리고 온 사람만해도 다섯 명은 되었다. 하나같이 뭔가를 해보려다가, 움직이지 않는 자신에게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졌다.
이번이라고 다를 리가 없다고 델타는 생각했다.
자신은, 방안에서 나와서 생활할 생각도 없었고, 누나와 같이 던전사냥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아. 꼭 이겨야겠네요.”
하지만 델타는 알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는 <판다>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말이다.
강서는 꼭 이겨야겠다고 응원 아닌 응원을 하면서, 델타에게 스테이플러로 붙여져 있는 종이 한 뭉치를 내밀었다.
“여기 법정 대리인분이 동의하신 사항들이고요. 계약서 원본은 제가 한 장, 샬롯님에게 한 장 이렇게 있습니다. 이건 사본이시고 읽어 보시고 궁금하신 사항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이게...”
그리고 델타가 종이를 받아들자 강서가 품에서 채찍을 하나 꺼냈다.
델타는 그 모습을 보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회초리정도는 본적이 있었지만 채찍을 꺼내드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 계약서도 처음이었다.
"....!!"
꿀꺽-
델타는 침을 삼켰다.
“폭력은 안 될 텐데...아저씨 감당할 수 있겠어?”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자신에게 폭력을 행한 자는 없었다.
그 이유는 델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누나가 <하쿠나마타타>의 길드장이었기 때문. 아무리 본인이 의뢰했다고 하더라도 잘못될 경우에 그 여파를 감수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 관련사항은 계약서에 기재되어 있으니 확인해보시면 됩니다. 원하신다면 설명도 해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강서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전혀 동요없는 강서의 모습에 델타가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계약서라도 폭력은 안 될 텐데!!”
“계약서에 보시면 폭력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특약 2번에 보시면 신체손상을 동반하지 않고, 훈육을 위한 행위임이 명확할 경우에는 허용될 수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거 다 찍어!! 나가서 정식으로 항의 할거야. 사람들에게 다 공개해 버릴 거라고.”
겁에 질린 델타의 외침은, 강서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죠. 원하시는 게 공개면 지금부터 바로 촬영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샬롯님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방식으로...”
"....???"
“동의 하시는 거죠?”
스마트워치를 조작하는 강서를 보며 델타는 뭔가 계속해서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깨닫고 억지를 부렸다.
“이익! 무슨 계약이...!! 나는 이런 계약에 동의 한 적 없어. 당장 내보내줘.”
“그렇죠. 그런데-”
하지만 강서는 개의치 않고, 판다가면을 꺼내 쓰며 고저없이 말했다.
“미성년자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