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소소한 꿀팁방송-63화 (63/191)
  • 63화. < ep13. 뽑기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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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될지는 몰랐는데...’

    테이블이 부숴져 무승부 판정이 나게 되고, 수혁이 리차드 4세와 강서에게 제안한 것은 두 사람 다 무명검을 뽑아보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반발이 나타났다. 수혁의 대처가 모든 사람이 납득할 정도로 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법진은 새겨 넣으면 그만이었지만, 그만한 테이블을 어디서 갑자기 구해올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수혁은 그 점을 적극 이용했다.

    사실상 이후 경기 속행이 불가능한 상황인 점을 이용하여, 주최측의 권한을 사용한 것. 불만을 표하는 쪽은 거대길드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참가자들이었다.

    만약 수혁이 ‘테이블이 없으니 대회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항의할 방법이 없었다.

    수혁은 그들에게 ‘두 사람이 만약 못할 경우에는 모든 사람에게 도전할 기회를 주겠다.’고 공언했다. 그제야 불만을 표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세계 최고의 방송인(?) 강서는 무명검 앞에 섰다.

    처음에 강서는 자신은 뽑을 생각이 없다며 손을 내저어 거절했다.

    하지만-

    “꼭 최선을 다해 도전해 보게.”

    리차드 4세가 정중히 ‘자네가 도전하지 않으면 나도 하지 않겠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가 완고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명검 앞에 서게 된 것.

    애초에 강서가 계획한 것은 순전히 리차드 4세가 검을 뽑을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것뿐이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버렸다.

    “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드리면 리차드 4세님과 판다님의 경기는 무승부로 종료되었습니다. 본래 무승부 판정의 경우 재경기를 하게 되어있는데 그것이 현재 상황 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두 분 다 뽑을 권한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포커스가 강서에게 더 맞추어 진 것.

    -???" 쑤욱?!

    -???" 아. 뽑아버렸네요.

    -리차드 4세: ....?

    -ㅋㅋㅋㅋㅋㅋㅋ

    뽑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온 상황에서 검에 손조차 대어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리차드 헌터는 판다님에게 우선권을 양보했는데요. 그동안 항상 예외적인 결과를 가져왔던 판다님이 이번에도 과연 그럴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하린의 중계가 경기장 내에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이 강서에게 집중했다.

    모든 사람들이 강서에게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 같은 기대는 아니었다.

    시청자들은 판다가 검을 뽑는 장면을 기대했다. 언제나와 같이, 방금 전에도 리차드 4세에게 패하지 않는다는 쾌거를 이룬 것처럼 판다 특유의 <예외적임>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경기장에 자리한 헌터들은 하나같이 강서가 무명검을 뽑는 것에 실패하길 바랐다. 강서가 무명검을 뽑지 못하면,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모두가 집중하는 가운데 강서가 손을 조금 들어올렸다.

    그리고 들어 올린 손을 무명검 쪽으로 움직였다. 무명검에 손을 뻗으며 강서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돌을 들어 움직일 때는 느끼지 못했던 기묘한 기분.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강서의 손이 검 손잡이를 말아 쥐는 순간-

    [<유흔결계: ■■■>에 진입합니다.]

    익숙한 상태창이 나타나며 시야가 점멸했다.

    흩어졌던 초점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을 때, 강서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탑의 대회장이 아니었다.

    자신이 실패하기를 기대하던 수많은 거대길드의 헌터들도 없었고, 리차드 4세도, 수혁도, 하린도 없었다.

    칠흑같이 검은 돌산들이 사방 가득 펼쳐져 있었고, 돌산에는 드문드문 들끓는 핏빛용암이 울컥거리며 솟아올랐다.

    강서가 있는 곳은 그 중앙에 위치한 투박한 제단 위였다. 3m남짓한 직경의 상아색 원판 위에 흑색 관(棺)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무명검>은 그 관 정중앙에 박혀있었다.

    [뽑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강서의 귀에 하나의 소리가 들려왔다. 단호하지도, 그렇다고 무심하지도 않은 어조로 강서를 타이르는 목소리.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관의 한쪽이었다.

    상의는 없었다. 검은색 바지만 입고 있는 창백한 피부의 소년이, 관에 걸터앉아 허공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뽑는 게 좋다는 확신이 있다면 뽑아도 되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뽑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누구십니까?”

    17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외관은 분명 어려 보였지만, 하대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강서는 그 소년에게서 아득한 무언가를 느꼈다.

    금제를 걸고 있는 지금 상태에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격의 차이.’

    사이에 하나의 벽이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강서의 기억 속에 이런 아득한 느낌을 주는 존재들은 ‘신격’을 얻었거나 그에 준하는 수준에 이른 존재들이었다.

    [검귀(劍鬼)...■■■...두 번째, ■■■■■지.]

    강서는 소년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중간 중간 듣기는 들었으나 머릿속에 자리 잡지 못하고 흩어지는 단어들이 있었다.

    “검귀. 두 번째. 정도만 들리는 것 같습니다.”

    [들리지 않는 건가. 뭐 그 정도면 괜찮겠군.]

    소년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 했다. 그리고는 강서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나도 하나만 묻겠다.]

    [<아오하시아>는 어떻게 되었나.]

    아오하시아.

    소년의 말에 강서는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떠올렸다.

    분명 그건 제2망록시기에 지구에 존재했던 <국가>중 하나였다. 그리고 강서가 기억하기로 최종적으로는...

    "...멸망했습니다.”

    [아. 멸망했나.]

    자신을 검귀(劍鬼)라고 소개한 소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오른 손으로 자신의 심장부분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고 나지막히 읊조리길-

    툭툭-

    [아오하시아를 위하여.]

    소년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강서는 기억을 되짚었다.

    소년이 한 것은 아오하시아 전사들이 결투나 전투 전후에 하는 특유의 행동이었다.

    강서가 기억하는 아오하시아는 전사들의 도시. 오크보다 더 오크같을 정도로 결투와 무(武)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모인 도시였다.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검소리가 울려 퍼지던 도시였다. 소년은 그곳의 출신인 것 같았다.

    “여긴 어디입니까?”

    강서가 소년에게 물었다. 이전까지의 유흔결계와는 너무 달랐던 것. 들어오며 이름도 보이지 않았고, 강서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생(生)도 아니었다.

    알고 있는 공간도 아니었고, 알고 있는 검도 아니었다.

    소년은 강서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안 들릴 거다. 나도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다만...]

    [오늘은 시간이 없는 것 같고 다음에 한 번 더 대화를 하지.]

    소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서의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다음에 올 때는 그 요상한 가면 좀 벗고 오거라. 얼굴 좀 보고 얘기하지.]

    흐려지던 시야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간에 점멸했다.

    [<유흔결계:■■■>에서 귀환합니다]

    [다음 진입 시까지 167:59:59]

    ***

    강서의 초점이 다시 돌아왔을 때. 강서는 다시 마탑의 대회장에 있었다. 검을 쥐고 있는 그 자세 그대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결국<판다>선수도 불가능했던 건가요?”

    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에서 주먹에 힘을 주며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거대길드의 사람들이 보였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강서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강서는 유흔결계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것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유흔결계로 말이다.

    그 이전까지 강서가 들어갔던 곳들은 모두 강서의 과거였으나 이번에는 알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심지어 강서 자신의 본신을 가지고 들어갔다.

    강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수 없는 것뿐이었다. 더 고민을 해봤자 알 수 없는 것은 똑같을 것.

    상태창에 나타난 것처럼 일주일은 지난 뒤에 그곳에 다시 들어가야 뭔가를 알 수 있으리라.

    강서는 상념을 털며 무명검(無名劍)에서 손을 놓았다.

    “안 뽑히네요.”

    자신을 검귀라고 소개한 유흔 결계 속 소년이 말한 대로 검을 뽑지 않은 것. 본래부터 뽑을 생각이 없기도 했고, 소년이 한 말이 그냥 한 말인 것 같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그 모습이 영 어색하지는 않았는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늘은 팔씨름으로 1판다 했으니 쉬고 내일 2판다 하셈.

    -리차드 4세 : (방긋)

    -거대길드 : (기쁨에 떨리는 입꼬리를 주체 못하며) 아..아쉽네요.

    -ㅋㅋㅋㅋㅋㅋ현실반영 무엇;;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된 거네.”

    강서의 속사정(?)을 모르는 리차드는 당연히 그가 아쉬워 한다고 생각하며 강서의 어깨에 손을 올려 위로했다.

    다음은 리차드였다.

    리차드가 검 앞에 서자 좌중이 침묵했다. 판다가 예외성으로 주목을 받았다면 리차드는 그 반대였다.

    적통성.

    일부 사람들은 그야말로 검을 뽑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리차드는 명실상부하게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검사였으니까.

    모두의 기대 가운데 리차드 4세는 조용히 검을 말아 쥐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아무도 무명검을 뽑지 못했다. 리차드도, 그리고 그 이후로 검에 도전하겠다고 차례로 줄을 선 거대길드의 사람들도 무명검을 뽑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김이 빠지는 결과였지만, 수혁의 입장에서는 그리 나쁠 것도 없었다.

    지금 당장이야 무명검을 뽑았다는 기사가 난다면 그만큼 더 거대한 이슈를 몰고 오겠지만, 그렇게 되면 상품으로 무명검이 사라지게 되니 다시 이 대회를 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도 뽑지 못하고 마무리 되었으니 차후에 다시 대회를 열 기회가 마련된 것. 우선 다음 대회는 확실히 열 수 있으리라.

    게다가 총무를 통해 보고받은 대로라면 대회의 여파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방송이 나가는 어느 곳이든 한 쪽에 판다지아라는 광고를 대문짝만하게 붙여놓고, 참가한 모든 길드들은 판다지아의 고객이라고 적어 놓은 만큼, 새로운 판매처에서 오는 연락이 실제로 대회진행 중에 늘어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리던 수혁은 멈칫했다.

    ‘아니야, 만족하지 마라 김수혁. 아직 <큰-돈>은 오지 않았다.’

    멈칫한 수혁은 자만하던(?) 자신을 다잡고 대회가 종료된 후 하기로한 미팅의 내용을 다시한 번 곱씹었다.

    “네, 아쉽게도 이번 대회에 승자가 정해지지는 않았는데요. 모든 분들이 검에 도전하셨지만, 그 누구도 ‘무명검’을 뽑는 것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쉽게도 시간상...”

    하린의 마무리 멘트와 함께 대회가 정리되었다.

    방송이 꺼지고 대회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악수를 하고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강서도 하린에게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고 곧바로 어딘가로 향했는데, 그가 향한 곳은 수혁이 있는 곳이었다.

    “탑주님. 혹시 저 검 제가 보관하고 있어도 될까요?”

    수혁에게 다가간 강서는 가운데에 있는 무명검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수혁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대답했다.

    “음...상관은 없는데...그럼 제가 아공간 페이퍼에 넣어서 드릴게요. 잃어버리지만 않을 수 있도록...”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따로 보관을 하면 되니까...그럼 허락해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강서의 말에 수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전에 분명 자신의 아공간 페이퍼가 아니면 반응하지 않는다고 설명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서는 자신에게 따로 방법이 있다고 한 것. 수혁으로서는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 말을 이해하고 경악하기 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읏-차”

    "...?"

    "..."

    “뭐야 저게...”

    수혁에게 허락을 받은 강서가 무명검이 꽂혀있는 돌을 통째로 들어 올려 어깨에 지었던 것.

    “하린님 어서 가죠. 이거 역시 꽤 무겁네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여놓고 태연하게 하린을 부르는 모습을 보며 악수를 하며 서로 인사하던 사람들은 모두 벙찐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다른 표정을 짓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리차드 4세와

    줄곧 대회장 한 구석에 앉아 있다가 눈동자의 이채를 띠고 강서를 바라보는 4대길드 <하쿠나마타타>의 길드장 샤를로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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