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소소한 꿀팁방송-62화 (62/191)

62화. < ep13. 뽑기 (5) >

======================

“3라운드에 참여하지.”

묵직한 목소리가 대회장의 공기를 가라앉혔다.

리차드 4세의 목소리에는 아무 의도도 담겨있지 않았다.

순수한 의사표현.

리차드 4세는 말 그대로 3라운드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을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감정도 없었다.

다만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사람들이 묵직함을 느낀 것은 그가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무거웠기 때문.

사위가 적막했다. 손을 들어 올리던 사람들이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손을 털어 내렸다.

3라운드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리차드 4세가 참여한 이상 3라운드에서 우승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수혁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데.’

손을 내린 자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리차드 4세가 손을 들었다면 그럴 수 있었다. 아니 그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최강이라는 이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리차드 4세는 균열시절 각성하여 활동하는 1세대 헌터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가 가진 특유의 전투스타일과 패도적인 검은 전사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것.

게다가 헌터 체계가 정립되고 나서 리차드 4세는 한 번도 공식헌터랭킹 3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헌터랭킹이 던전레이드 등급과 숫자에 따라 결정되는 것과, 그가 4대 길드에 속하는 라이언하트를 이끄는 수장인 것을 생각하면 그것도 정말 엄청난 업적이었다.

그 둘을 동시에 사수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이고는 <라이언하트>가 지향하는 방향 자체가 <기사의 길드>였다. 길드원의 80%이상이 리차드 4세의 뛰어난 무위를 동경하여 모인 전사클래스 헌터들이었다.

최강의 전사들을 이끄는 전사.

그것이 리차드 4세였다.

붉은 빛이 도는 갈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리차드 4세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리차드 4세는 천천히 가운데에 놓여있는 무명검을 향해 다가가며 읊조렸다.

“마탑주의 의도는 알겠으나, 뽑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10회나 기다리는 것이 여기있는 사람들의 명예를 지키는 일인 것 같지는 않네."

“게다가 저 검은 본래 영국의 것이니, 회수하도록 하....”

“제가 할게요.”

강서가 손을 들었다.

***

강서는 리차드 4세를 보며 오크들의 결투문화 ‘뭉투스’를 떠올렸다.

뭉투스라는 결투문화는 상대가 없으면 성립하지 않았다. 뭉투스의 특성상 중요한 의사결정이 거기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뭉투스가 제대로 성사되지 않는 경우 대립기간만 길어졌었다.

물론 이번 팔씨름 대회 규정의 경우, 수혁은 상대가 없으면 그 라운드에 손을 든 사람이 검을 뽑을 권한을 얻는 것으로 정해두었다.

그래서 리차드 4세가 나왔을 때 경기가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강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수혁이 미쳐 설명에서 빠뜨린 것.

결국 자연스레 뭉투스를 떠올린 강서는 그가 상대가 없어서 무명검에 도전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서는 리차드 4세를 배려(?)하여 그가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이 참여를 자처한 것이었다.

강서는 하린에게 중계를 맡기고 팔씨름테이블로 향했다.

“하린님, 중계 좀 부탁해요.”

“아, 아 네."

리차드 4세와 강서는 테이블에 마주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리차드 4세는 강서를 바라보았다.

‘판다.’

리차드 4세도 판다라는 이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거대길드 길드장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인물이라고 그의 비서관 인 ‘아드리아나’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헌터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지만, 4대 길드는 거대길드와 길드원 영입 구조가 조금 달랐다.

4대 길드라는 명칭이 형성되고 부터는 직접 길드원을 영입하러 다니지 않았다. 이미 길드에 속한 강력한 헌터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했지만, 굳이 영입하러 다니지 않아도 뛰어난 헌터들이 길드의 명성을 보고 찾아왔기 때문.

그래서 정말 뛰어난 몇몇을 제외하고는 리차드 4세는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며 그의 비서관이 리차드에게 강조했다. <이례적>이라고 직접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말이다.

그의 비서관 아드리아나는 확실하지 않은 것에 쓸데없이 힘주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확실히.’

다르기는 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손을 내려놓을 때 그는 손을 들었다. 이 팔씨름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단순히 손익만 생각하는 거대길드 간부들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사렸지만, 판다는 손을 들어 자신에게 도전했다. 리차드 4세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용맹함. 리차드 4세가 보기에 강서는 기사가 갖추어야할 필수적인 덕목 중 하나인 그것을 갖추고 있었다.

리차드 4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기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렸다.

"야 설마... 벌써?"

"나도 끝나고 말 걸어 보려고 했는데 이미 물 건너갔네."

"에잉..."

그건 리차드 4세가 강서에게 건넨 말이 가진 의미 때문이었다.

길드원을 모집할 때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티어도, 실력도 아닌 ‘기사도 정신’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아직 제안을 하지는 않았지만, 기사의 자질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 리차드 4세가 ‘판다’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의미.

만약 라이언 하트 길드가 길드 가입 제안을 한다면 다른 거대길드들은 명함을 내밀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들은 더 높은 조건도, 더 높은 명성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강서에게 중계를 넘겨받은 하린이 경기를 진행했다.

“준비가 다 되셨으면 조정하실 룰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시면 됩니다!”

“오른 손을 제외한 다른 신체의 개입을 금지 하고, 무기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지. 원래의 팔씨름대로.”

“알겠습니다. 그럼 원래의 팔씨름 룰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양측 모두 준비해주세요!”

리차드 4세가 팔씨름의 틀을 원래의 규칙대로 설정했다. 그쪽이 더 정정당당한 대결이 될거라 생각한 것.

“아-"

하린이 그것을 승낙하고 경기를 준비시키려 할 때, 갑자기 리차드 4세가 무언가 떠오른 듯 소리를 뱉었다. 그리고 뒤이어 하나의 조항을 추가했다.

“기사도 정신에 위배되지 않도록 충실하게 경기에 임할 것. 이것도 추가하지.”

그 말을 들은 강서는 고민에 빠졌다.

기사도 정신.

그건 강서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기사라면 누구나 숭상하는 그 것은 명예와, 무(武), 그리고 예절을 중시하는 기사들의 도덕, 윤리적 덕목.

그 중에는 리차드 4세가 말한 것처럼 ‘결투에 임할 때에 상대방을 모욕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강서는 이 자리에 리차드 4세를 이기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에게 무명검을 뽑을 정당한 기회를 주기위해 나온 것. 그에게 이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흠...'

하지만 그가 정한 룰대로 기사도 정신을 지킨다면 최선을 다해야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말하자면 딜레마에 빠진 상태.

하지만 강서의 고민과 관계없이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경기를 시작하기 직전.

대회장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강서는 딜레마에 고민을 했고, 리차드 4세는 판다에 대한 기대감을 곱씹고 있었다.

앉아있는 길드들도 경기에 대한 기대감에 빠져있었다. 베일에 쌓인 초신성 ‘판다’가 헌터계 최강자 중 하나인 ‘리차드 4세’에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가 궁금했던 것.

“그럼 준비하시고-”

그 대회장이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한 침묵 속에서, 하린의 목소리가 경기시작을 고했다.

“시-작!"

쾅!

굉음과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오며 두 사람을 덮었다.

***

하린이 탄성을 흘렸다.

"...맙소사.”

자욱한 먼지가 바람에 날아가자, 그곳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펼쳐져 있었다.

리차드 4세의 승리가 아니었다.

강서가 승리한 것도 아니었다.

무승부.

그 누구도 경기의 승자가 아니었다.

“설마 테이블이 깨져나갈 줄이야...”

경기가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테이블이 깨져나갔다. 그것이 시작과 동시에 울린 굉음의 정체였다.

경기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이 허탈해 했다. 판다가 얼마나 리차드에게 버티느냐가 경기의 주 관심사였는데, 가늠을 해볼 새도 없이 경기가 끝난 것.

심지어 먼지바람이 덮이면서 시작장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탑주야 일 안하냐;;

-이 명 경기를 이렇게 망쳐버리네 이건 석고대죄 감이지;;

-첫 경기랑 두 번째 경기하면서 데미지 쌓였나보네.

-ㅇㅇㅇ그래도 꽤 단단해 보이기는 했음. 어쩔 수 없지 뭐 1티어들이 치고박는데

‘아니.‘

수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혁은 장담할 수 있었다. 1경기와 2경기에서 테이블에 준 데미지는 없었다고.

다른 능력없이 단순히 경도만으로 B급인 아이템이었다. 따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국내 최고수준 대장장이에 의뢰해서 제작한 것.

지금 부숴진 것은 순전히 판다와 리차드의 힘이었다.

그래서 수혁도 놀라고 있었다. 스킬이나 무기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테이블이 부수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수혁보다도 훨씬 더 놀란 사람이 있었다.

'...'

바로 경기에 당사자인 리차드 본인이었다. 리차드의 눈앞에는 자신의 상태창이 떠올라 있었다.

[<고유능력: 불패(不敗)>가 발동 됩니다.]

[불패: 1대1 전투상황에서 1회 패배에 저항합니다.]

[48시간동안 <고유능력: 불패(不敗)>가 비 활성화됩니다. 남은시간 47:59]

바로 자신의 고유능력이 활성화됨을 알리는 상태창이었다.

1대1 전투상황에서 1회 뿐이지만 패배에 저항한다는 그 사기적인 능력은 리차드가 지금의 자리에 이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이 고유능력 덕분에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차드는 이 고유능력을 좋아하지 않았다.

패배에 저항한다는 문구를 볼 때마다 정정당당한 능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는 치욕스러움이 들었기 때문.

하지만 이번엔 치욕스러움 보다는 당혹감이 먼저 들었다.

이전까지 <고유능력: 불패(不敗)>가 활성화되는 상황은 어디까지나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A급 던전의 보스몬스터와 1대1로 싸워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던가, 이길 수 없도록 설정된 퀘스트형 던전의 보스 몬스터와 싸우며 혼자 버텨야하는 상황이라던가.

하지만 이번에는 불패가 활성화 될 거라고 상상도 못한 상황이었다.

<고유능력: 불패(不敗)>는 리차드 자신이 <원래라면 패배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발동되었으니까.

‘판다라...’

전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던전 밖에서는 일부러 제약을 두는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제약을 둔 것들을 제외하면 기사도 정신에 맞게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패>가 활성화되었다.

‘이걸로 세 명인가...’

리차드 4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념을 털어버렸다. 자신답지 않은 사족이었다.

당연히 이길 것이라는 생각이 깨졌으니, 자신이 오만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뿐. 그 이상은 치졸한 변명이고 도움도 되지 않았다.

리차드는 강서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혹시 검도 다룰 줄 아나?”

“조금 쓸 줄 압니다.”

“다음에 우리 <사자성>에 오게. 자네와 검으로 겨루어보고 싶군.”

강서는 리차드의 손을 마주잡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훈-훈

-킹차드과 갓판-다

-그래서 무명검은 어떻게 되는 거냐 그럼

“어...그럼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게 되었으니....”

두 사람이 경기를 끝내는 분위기를 내자 하린이 마무리멘트를 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수혁에게 미리 브리핑을 들은 대로라면 무승부의 경우 <재경기>를 해야 했는데, 테이블이 깨져버려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수혁이 천천히 다가가 중계석의 마이크를 들었다.

“원래라면 재경기를 해야 하지만 테이블이 부숴졌으니...”

.

.

.

.

“두 분 다 뽑아보시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