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ep12. 훈수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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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하지말라.”
강서가 마수 한 마리의 목뼈를 비틀어 부숴 트리며 중얼거렸다. 장갑을 낀 강서의 오른 손에서는 신성마법의 상징 중 하나인 성화(聖火)가 하얀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똑똑히 기억났다. 나단 가이스트의 생(生) 중에서 수많은 마수들을 죽이지 않고 막아내다가
결국 중급마수 발에 짓눌려 죽었던 회차를.
‘그 말장난 때문에 몇 번을 반복했었더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은 정확히 인간에게만 적용되었다.
지옥에서 마수를 살리며 막아내다 여러 번 고꾸라졌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마수는 그 계율에 적용되지 않았다.
죽이지 않고 버티는 것이 죽이는 것 보다 배는 더 힘들었다. 게다가 지옥문을 통과하지 않도록 막아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으니. 나중에는 죽여도 된다는 사실도, 지옥 4층에서 마수들이 기어 올라오는 시간을 늦추는 편법도 알아내어 쉽게 상대할 수 있었지만.
그 전까지 나단 가이스트는 정말 수십 번을 지옥에서 죽어야 했다.
“문... 막는... 인간”
"..."
유흔결계가 이야기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에는 살아있는 하급마수가 없었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보이는 족족 강서가 머리를 부숴버렸으니까.
강서를 보며 중얼거린 것은 3층에서 올라온 중급 마수였다. 확실히 하급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듯, 중급마수 주변은 색 자체가 달랐다. 짙은 검은색의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주변을 짓눌렀다.
강서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굵게 만 두꺼운 마리주아나를 꺼내들었다. 마지막 남은 마리주아나를 모두 털어 넣어 만 것이었다.
따악-
강서의 손가락이 튕겨지며 희미한 불꽃이 마리주아나 끝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것도 마지막.
마지막 마력이었다. 하급마수들을 잡아 나가면서 마력을 모두 사용한 것.
후우-
강서는 마리주아나 연기를 뱉으며 마수의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르망.’
중급마수 부터는 이동의 제약을 줄이기 위해 큰 몸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인간과 비슷하거나 조금 큰 정도의 효율적인 크기.
가르망도 그랬다. 늑대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빼면 인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문...나간다..내가 먼저”
"...."
강서는 가르망의 중얼거림에 딱히 반응해주지 않았다. 확실할 때 까지는 쓸 데 없는 호흡은 삼가야했기 때문.
마지막 <마리주아나>였다. 이것을 다 피운다면 그 때부터는 강서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나단 가이스트의 몸에 가장 큰 위협을 줬던 것은 물리적 타격도 마법도 아니었다.
바로 이 대기중에 흐르는 마기(魔氣).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마기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천천히 내성을 키우며 적응한 것이면 몰랐을 테지만, 나단 가이스트가 지옥문을 넘어 온 건 해봐야 이틀이 안 되었을 것이다.
뚝-
강서는 옆에 있던 하급 마수의 갈비뼈 하나를 부러트리며 손에 들었다. 무기라기에는 많이 부실했지만, 가르망과 싸워본 적 있는 강서가 판단하기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핵심은 이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는 바로 가르망에게 달려들었다.
강서가 달려드는 것을 본 가르망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끝에 마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마기가 꼬여 날카로운 손톱을 형성했다.
하급 마수들은 나단 가이스트의 공격에 반응조차 못하고 터져 나갔으나
중급마수, 그러니까. 지옥 3층인 아귀옥(載鬼獄)에서 올라온 가르망은 여유롭게 나단 가이스트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었던 것.
달려든 강서에게 가르망은 손톱을 횡으로 휘둘렀다. 강서는 오른 손을 바닥에 짚어 그 공격을 피하며 한바퀴를 굴러 가르망의 지척으로 파고들었다.
서걱-
재빨리 피하긴 했으나 휘날리던 강서의 옷깃이 가르망에 손톱에 조금 잘려나갔다.
그 섬뜩한 소리에도 강서는 아랑곳 않고 들고 있던 마수의 갈비뼈를 가르망에게 꽂아 넣었다.
유연하게 몸을 기울여 뼈를 피한 가르망은 강서가 파고든 거리가 자신의 손톱이 닿지 않는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그래서 뒤로 뛰며 손톱을 한번 크게 저어 거리를 벌렸다.
그런 가르망에게 강서는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같은 공격이 아니었다.
팟!
직선으로 달려오던 강서가 땅을 박차고 가볍게 뛰어 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가르망의 위로 향한 강서는, 가르망과 몸이 같은 수직선상에 놓이자 들고 있던 갈비뼈를 그대로 꽂아 넣듯 던졌다.
팍!
그건 가르망의 손톱이 하급 마수의 갈비뼈에 박혀 들어가는 소리였다. 가르망이 손을 들어 강서가 던진 갈비뼈에 손을 꽂아 넣으며 막아낸 것.
가르망의 얼굴에는 미소가 서려있었다. 강서의 무기가 사라졌다. 전투에서 무기를 잃었다는 것은 졌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그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의 손톱이 꿰뚫은 갈비뼈에서 느껴져서는 안 되는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
‘마력은 더 이상 없지만-’
가르망의 손톱이 꿰뚫은 갈비뼈에는 마수의 피로 적셔진 강서의 장갑이 붙어있었다.
갈비뼈와 함께 꿰뚫리며 손상된 신성마법진이 새하얀 빛을 내기 시작했다.
화악!
마기와 상극이라 본래라면 마수의 피와 닿는 순간 폭사(爆違)했어야 했으나. 강서가 억제하고 있던 것이 가르망의 손톱에 서린 마기와 반응하여 다시 한 번 증폭한 것.
가르망이 그 신성마법진을 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궁여지책으로 재빨리 손을 휘둘러 갈비뼈를 던져내려 했지만, 채 손톱에서 갈비뼈가 빠져나가기도 전에 새하얀 빛이 세상 가득 차오르며 굉음이 울렸다.
콰광-!
“끄흐어...”
[03:10:22]
강서는 시간을 확인하고 가르망을 한 번 보았다.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날아가고 나머지 신체부위도 빛에 녹았는지 뼈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겉 피부는 모두 날아가 흉부에 숭숭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사이로 녹아내리는 내장기관이 보였다.
"...."
장갑은 본래 이 유흔 결계에서 가져가려던 물건이라 조금 아깝긴 했지만...
마지막 회차가 아닌 다른 회차라는 것으로 변수는 충분했다.
또 다른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사용하는 것이 나았다.
[동화율 2.1%]
강서는 쓰러져 누워 있는 가르망 앞에서 털썩- 하고 앉았다. 가르망은 손끝을 조금 까딱일 뿐,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짙게 느껴지던 마기도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옅어졌다.
완벽한 그로기상태.
강서는 그 앞에 앉아 남은 마리주아나를 피우며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사족을 붙였다.
“언제 갈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 죽여...”
그저 자동으로 떠오르는 생각인 것을 보면, 그건 분명 나단 가이스트 시절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리라. 강서는 생각했다.
스읍-
“어디 있는 지도 잘 모르겠고요.”
“....크럭...”
가르망의 입에서 검은 피들이 뿜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내장기관이 거의 다 녹아내린 모양. 그럼에도 강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제가 알 수 있는 건 그렇게 살면 못 간다는 겁니다."
후우-
“회개하세요.”
강서는 거의 다 피운 마리주아나를 가르망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치이익!
그 신성이 서린 담뱃불에 가르망의 심장이 타는 소리를 내었다.
천국은 생각보다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강서의 중얼거림과 함께 알림음이 울렸다.
* * *
“아저씨 진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몸은 괜찮아요?”
하린이 강서를 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서가 끄덕였다. 아마 자신이라도 걱정을 했으리라.
강서의 끄덕임을 본 하린이 잠깐 째려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강서에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어느 쪽이라고 대충 방향이라도 말은 해줘요.”
“소소하게 산다는 사람이 이렇게 신문에 대서특필이나 되고 말이에요.”
분위기를 풀기위해 가볍게 말한 것이었지만.
하린이 말한 것처럼. 신문의 첫 장에는 떡하니 가면을 쓴 강서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폭풍의 중심 판다. 실종.]
[판다. 던전사고?]
[소재지 불명의 던전. 현재 조사조차 착수하지 못해.]
[균열 이후 첫 마수사고]
하린이 나름대로 수습한다고 수습을 했지만, 마수와 마주치는 순간 사라지는 그 장면은 솔직히 수습이 불가능한 성질의 것이었다.
재빠르게 방송을 마무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서가 마수와 마주치며 실종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물론 방송을 통한 간접경험이긴 했지만, 하프라인을 건설한 후에 처음 사람들이 마주한 마수였다. 그 장면 자체가 충격적일뿐더러 공격당함과 동시에 방송이 꺼졌다.
그 이전까지 판다는 한 번도 방송이 꺼진 적이 없었고 말이다.
강서가 생각해도 논란이 될 거리밖에 없었다.
게다가 하루 동안 소식이 불명이었고, 마탑에서 공식 입장도 밝히지 않은 상태.
그 상황에서 던전관리국의 관계자는 소재지불명의 던전이라며 조사 착수에 난항을 겪는다는 말까지 했다.
그 발언과 동시에 엄청난 반발이 일며 전국적으로 던전관리국을 비난하기는 했지만.,,어찌되었든 그게 사실이었으니.
물론 사람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강서는 마수들을 때려잡고 있었지만.
강서가 돌아온 순간. 수혁은 마탑의 공식 입장으로, 판다는 현재 복귀 했으며 문제는 없다라고 기사를 내보냈고, 신체에 이상은 없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강서에게 조금 잠잠해질 때 까지는 방송을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을 남겼다.
지금 방송을 시작하면 강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과열될 대로 과열된 상태에서 사람들이 정리되지 않은 질문세례를 쏟아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강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조금 달랐지만 강서도 텀을 두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
이번 유흔 결계를 겪으며 유흔결계가 항상 마지막 회차로 데려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실패한 회차로 데려갈 수도 있다는 것. 그건 생각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졌다.
나단 가이스트 같은 경우에는 수습 가능한 범위였지만, 그렇지 않은 회차로 데려갈 수도 있었다.
강서는 이제는 유흔결계를 들어갈 때에도 조금은 생각을 하며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강서는 생각했다.
“오늘은 좀 집에서 쉬세요.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수를 만났는데 아저씨가 제일 충격이 크겠죠.”
“저는 라오가 일어났다고 연락이 와서 라오 데리러 좀 다녀올게요.”
라오는 하린의 집이 아니라 승아에게 맡겨져 있는 상태였다. 렙틸리스의 바다를 클리어하고 얻은 보상 <해룡옥>.
강서가 라오의 간식이라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서는 보상으로 얻은 해룡옥을 라오에게 먹였고, 라오는 처음으로 음식을 먹듯 맛있게(?) 그것을 먹어치우더니 수면상태에 들어갔다.
강대한 에너지를 흡수하고 소화하느라 다른 신진대사기능이 모두 멈추고 그쪽으로 집중이 된 것이었다.
강서는 수면상태에 들어간 라오를 승아에게 맡겼고, 그 라오가 일어났으니 데려가라는 승아의 말에 하린이 승아의 연구실을 방문하기로 한 것이었다.
“혹시 심심하면 제 꺼 부 계정으로 로그인 해 놨으니까 다른 방송이나, 트프리치tv 게시판같은 거 보고 계셔도 되고요.”
“그래요. 잘 다녀와요.”
강서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턱-
하린이 나가고 나서 강서는 하린이 말한 대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딱히 특별한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게시판에 들어가기 전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강서는 방송 하나를 눌렀다,
[던선생의 던전공략방송: 아벨타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