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ep10. 소소한 간식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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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이라 부르기도, 숲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그사이 어딘가의 분위기를 풍기는 길.
“진전은 좀 있나요?”
강서와 수혁은 마탑의 뒤쪽에 위치한 사유지를 거닐고 있었다. 계약당시 이야기 한 한 달에 한번 대화를 나누는 시간. 오늘이 바로 그 두 번째 날이었다.
“네. 정말....엄청난 문자더군요. 도대체 누가 만든 건지.....”
수혁은 룬문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자신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강서가 알려준 룬문자. 그 문자는 오랜 기간동안 정체되어있던 수혁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었다.
수혁은 룬문자를 공부하며 거짓말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느꼈다. 수혁의 상식안에서, 한 문자 안에 담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룬문자는 달랐다.
룬문자는 정말 에너지볼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으니까. 1차원적으로 생각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깨달음을 얻어 한 단계 위에서 보면 같은 문자에서 10개 이상의 다른 정보가 보였다.
“공부하는 것만으로 완벽한 더블캐스팅이 가능해졌습니다.”
에너지 볼트의 룬문자를 공부하며 이미 더블캐스팅의 완성도는 더 높아질 수 없을 정도로 공고화되었다. 이제 그의 에너지 볼트는 4서클 마법인 더블 익스플로전을 뛰어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완전한 소화는 아니었지만, 강서가 준 룬문자가 담고 있는 정보들 중 적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은 없었다. 그렇기에 수혁은 내심 강서로부터 다른 문자를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빠르네요.”
나지막히 울리는 그 한 마디에는 강서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강서 자신은 그 룬 문자를 만들어 내기에 훨씬 더 많은 노력을 쏟아 내야 했으니까.
파이베브스는 천재가 아니었다. 대마법사가 되고, 룬문자 하나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수십 년>을 <수십 번>반복하며 한줌씩 쌓아나갔을 뿐.
...그걸 모르는 수혁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
분명 에너지볼트의 링크방법을 알려주고, 그 룬 문자를 알려준 게 강서였다. 진짜 빠르다는 건지, 아니면 강서 스스로를 띄우는 말인 건지. 수혁은 정확히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 상황에 수혁은 아직 강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아니, 하나도 알지 못한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정확하리라.
룬문자에 대해서도, 그가 보여준 그 경이로운 가로베기의 정체도, 어떻게 판다지아 같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도, 율죽을 만들어 낸 것도, 그 방대한 지식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에스티아 마리아.’
그녀와 같은 냄새를 풍겼다. 몸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그 압도적인 지식량이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수혁은 그 둘을 한 번 가늠을 해보려다가 포기했다.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들을 가늠한다는 것이 얼마나 쓸 데 없는 일인지는 자신이 마탑의 간부들 앞에서 자주 설파하곤 했던 내용이었으니까.
“한 5년이면 충분하겠어요.”
강서의 입에서 나온 한 문장에.
수혁은 가슴이 쿵쾅 쿵쾅 뛰어댔다.
오년.
그 말은 아직 수혁이 공부할 ‘하프 룬’이라는 문자가 무려 60개는 더 있단 소리로 들렸으니까. 수혁의 탐구심이 요동쳤다.
“혹시 더 궁금한 건 없나요?”
“네 뭐 따로 궁금한 건 없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면 되겠네요.”
“....?"
이해할 수 없는 강서의 마지막 말에 수혁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다음 문자를 줬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강서는 대화를 마무리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조금 걸어가다 멈칫한 강서는-
“아, 오늘도 카드 좀 써야할 것 같아요. 후원해주시는 덕에 이런저런 데 소소하게 잘 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큰 돈 쓰기 전에는 꼭 말씀 드릴게요.”
뒤를 돌아 그렇게 소소한(?) 후원에 대한 감사인사를 남기고 이동했다.
수혁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니 상황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더 이상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기요! 판다님!”
정신을 차린 수혁은 강서를 애타게 부르며 그가 간 길을 따라갔다.
수혁이 생각하기에 분명 그건 룬문자를 받아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룬문자 대신에 뭔가 이상한 엄청난 말을 받아버렸다.
소소하게 잘 쓰다니.
큰돈 쓸 일이 생기면 말한다니.
그건 틀려먹은 금전감각이었다. 마탑의 재고가 살아남기 틀려먹은 금전감각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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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혁이 룬문자를 받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강서가 말한 5년이 수혁이 생각한 5년과 달랐기 때문.
수혁이 생각한 5년은 다른 문자를 다 배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지만.
강서가 말한 5년은 수혁이 <에너지 볼트의 ‘하프 룬’>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던 것.
물론 그것도 수혁의 천재성을 반영한 기간이었다. 일반사람이라면 50년이 되어도 가능할지 알 수 없었으리라.
수혁은 자신이 에너지볼트의 하프룬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수혁은 룬문자의 진가를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파이베브스가 살았던 아단대륙의 역사가<룬문자 창제>를 기점으로 나뉠 정도였다. 그 마법대륙에서도 그러했으니, 아무리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 달 찔끔거린 것으로 룬문자를 이해할 리가 없었다.
...백문이 불어일견이라고, 하프룬의 온전한 사용을 직접 본다면 또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
-판-하
-?? 나만 화면에 아무것도 안보임?
-뭐야 잘못 켜진 거야?
하린이 미리 공지해 놓은 방송시간이 되고, 예약된 대로 방송이 켜지자 시청자들이 채팅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송화면에는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고 검은 색만 자리하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하린의 톤 높은 오프닝도 없었고, 강서도 없는 완전한 검은 상태.
‘참솔구이’님이 ‘10,000원’을 후원![똑똑- 거기 누구 없나요?]
-설마...드디어 저세상 방송인가
-ㅋㅋㅋㅋㅋㅋㅋ킹-갓판다라면
-???:이곳이 저-승인가...
-(이것은 척척석사의 시야입니다.)
-ㅋㅋㅋㅋㅋㅋ척척석샄ㅋㅋㅋㅋㅋㅋ
-처맞사(死) 해버렸자너;;
-안 다쳤다고 인증도 했는데 왜 죽임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의 이런저런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울리며 화면이 바로잡혔다.
“안녕하세요. 판다입니다.”
강서의 뒤쪽으로는 엄청나게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고 지평선 끝까지 섬하나 보이지 않는 푸른 배경이었다.
-판-하
-여기 거기네. 수행포기
-ㅇㅇㅇㅇ딱 보니까 낚시터네
강서가 나와 있는 던전은 ‘랩틸리스의 바다’라는 퀘스트형 던전이었다. 랩틸리스의 바다는 그 본래이름보다 <낚시터>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던전이었다.
본래 이 던전은 강서가 들어올 수 있는 던전이 아니었다. 그건 이 ‘렘틸리스의 바다’가 다른 길드 소유의 던전이었기 때문.
“아, 이 던전은 어제 ‘오성길드’에서 선물로 소유권을 양도해주신 겁니다. 감사드립니다.”
강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꾸벅였다.
강서는 선물이라 표현했지만,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그건 선물일 리가 없었다. 이번 율죽 사태에서 언론플레이에 가담한 길드 중 최상위권 길드 ‘오성’도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ㅋㅋㅋㅋㅋㅋ예? 선물이요?
-???:네. 수금이요.
-???:다음에는 이 정도 선물론 어림도 없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요즘 선물은 강제로 받는 거구나
강서에게는 선물이라 이야기 했지만 당연히 그건 수혁이 ‘오성’으로부터 뜯어낸 배상이었다.
당장 물질적인 사과(?)를 하지 않으면 판다는 물론 마탑도 공식적으로 ‘오성’으로부터 돌아서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말이다.
명분도 확실했고, 이미 ‘율죽‘으로 몬스터병을 치료하면서 판다는 일종의 건드려서는 안되는 성역(聖域)이 되었다.
당연히도, 선물을 보내온 건 오성뿐만이 아니었고 말이다.
‘왕소금구이’님이 ‘10,000원’을 후원!
[판다아재, 우리 박병풍씨 어디갔나요?]
한 시청자가 하린을 찾는 도네이션을 보내왔다. 검은 화면을 벗어나며 판다의 모습은 보였지만 하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
“아 잠시만요. 좀 멀리 간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이 아재 너무 자연스럽게 알아 듣자넠ㅋㅋㅋ.
-판다공인 병풍린ㅋㅋㅋㅋㅋㅋㅋ
강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서가 움직이는 방향은 바다가 펼쳐져있는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 끝없는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두 개의 점이 움직이고 있었다.
모래사장의 한가운데에서, 하린과 라오. 둘이 일명 ‘나잡아 봐라’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 물론 한쪽은 애절하고, 한쪽은 귀찮아 보이는 누구도 즐기지 않는 놀이였지만.
“라오 너 거기 안서!"
***
“...그래서 함께 하게 된 친구입니다.”
강서가 어깨에 앉아있는 라오의 갈기를 쓰다듬으면서 설명을 마무리했다.
당연히, 승아의 입장을 생각해서 균열 사후 분석기지에 대한 이야기와 ‘블랙 독’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고,
지나가다가 다친 채 끙끙대는 것을 발견해서 치료를 해주고, 같이 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각색해서 설명했다. 크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고럼고럼’님이 ‘10,000원’을 후원!
[근데 진짜 영민하기는 한 것 같다. 하린보다 똑똑한 것 같은데.]
“아니거든요!”
하린이 자신을 무시하는 시청자의 도네이션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리액션을 하자. 라오가 살짝 하린 쪽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ㅋㅋㅋㅋㅋㅋ응 맞앜ㅋㅋㅋ
-???:어휴...(고개를 가로저으며)
"...어쨌든 그래서 오늘은 라오 먹이를 좀 찾으러 이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친구가 생각보다 미식가라서, 아무거나 주는 대로 먹진 않거든요.”
강서일행이 ‘랩틸리스의 바다’로 온 이유는 그거 하나였다. 수혁이 보여준 던전 목록을 보던 강서가 마침 ‘라오’의 먹이를 떠올리며 이 던전을 고른 것.
정확히 말하자면 먹이가 아니라, 간식이었지만 말이다.
강서가 소개하는 동안 한쪽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던 하린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라오를 돌아보았다.
“흐흐흐, 반드시 오늘은 안아버리고 말겠어.”
그렇게 중얼거린 하린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어형계열 몬스터 전용 마도공학 도구를 꺼내들었다.
하린이 생각하기에, 강서가 라오의 먹이를 찾으러 이 던전에 왔다고 했으니 라오는 어형계열 몬스터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라오를 안아보지 못한 하린은 라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승아를 통해 마도공학 도구를 빌려온 것.
사실 승아 입장에서는 한동안 괴수생물학 연구에 집중하며, 창고 한구석에 쟁여두었던 것이라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을 빌려준 것이었지만.
승아의 이름을 생각하면 충분히 기대할 만 했다.
‘있으려나...’
하지만 하린은 알지 못했다. 강서가 라오에게 주려는 간식은 단순한 어형계열 몬스터가 아니었음을.
오히려 강서도 이 던전에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물건이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