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ep5. 누군가를 위한 비석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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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밖에 좀 다녀올게요.”
하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서가 어디를 먼저 나간다고 이야기한 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종종 하린이 보여주는 트프리치tv 게시판의 반응을 보거나 하린이 구해다 준 차를 좀 마시는 정도가 강서의 유일한 취미였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준비를 하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처음이네요. 어디나간다고 하신 거.”
“꼭 가보고 싶은 데가 있었는데 갑자기 기억났거든요.”
강서는 조금 덜 신어진 쪽의 신발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리며 하린에게 말했다.
하린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입을 떼려다가 시선을 내리며 망설이더니 조금은 깔아진 목소리로 강서를 배웅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강서는 멈춰서서 잠시 하린을 바라보다 고개를 꾸벅이고 집을 나섰다.
* * *
제목: 야 요즘 하린 발임이지 않냐;
글쓴이:판상만
나 원래 하린방송 보던 사람인데 킹갓 판다랑 같이 있을 때 판다 활약이 좀 묶이는 것 같음. 원래가 100이면 한 60정도 보는 느낌? 점점 발암캐 되어 가는 듯;
-니가 그러고도 팬이냐;;
-근데 킹직히 좀 킹구마지.
-이 새끼 킹린 시절 잊었네. 나는 아직 존버다. 언젠간 분명...
ㄴ존버는 무슨 겜방 이제 죽어가는 시장인데 잘 나온 거지.
-근데 솔직히 좀 발암이긴 함. 하린이 잘못한 건 아니라서 약간 펫같은 느낌으로 보면 괜찮은 듯.
ㄴ그 말이 그 말이짘ㅋㅋㅋㅋ
ㄴ니가 더 나빠 이 새끼얔ㅋㅋㅋㅋ
“후우...”
하린은 한숨을 한 번 깊게 내쉬었다.
자신과 강서를 비교하는 글들로 가득한 트프리치tv의 게시판을 본 것이었다.
“...나도 안 다구요오.”
방송의 반응에 매달리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계속 보이면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린은 아직 20살에 불과했으니까.
사실 첫 방송부터 하린을 발암이라 칭하는 글들은 올라왔었다. 그런데 그 수가 점점 증가했고 이제 적지 않은 수가 게시판을 채우고 있었다.
만약 게시판에서 실시간 검색어를 표기했더라면 ‘하린 발암’이 그 중에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하린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 신승아로부터 받은 퀘스트 형 던전이 끝나면 더 이상 사람들이 말하는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
지금으로서는 확실히 하린이 강서에게 짐이 되는 건 맞았으니까.
“결국 오늘 아침에도 말 못했네...”
하린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통장을 열어보았다. 첫 번째 방송과 두 번째 방송에서 받은 후원금을 따로 모은 통장이었다.
자신의 방송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강서 때문에 번 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강서에게는 아직 이야기 하지 못했지만, 강서의 집 경매날짜가 이틀 전에 잡혔다.
액수 부분에서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두 번 뿐인 방송이었지만 전에 없던 반응이었던 것만큼 후원금의 규모도 적은 액수가 아니었으니, 조금만 더 보태면 여유있게 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은 분명했다.
경매날짜가 잡혔지만 하린은 아직까지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그냥 툭 던지듯 말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었지만-
아쉬웠다. 강서가 집에서 나간다는 것이.
경매에서 낙찰을 받고 이번 퀘스트형 던전도 마무리되면 더 이상 민폐끼치지 말아야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으나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헌터인 줄 알고 방송을 같이하자 했으나 강서는 상상 그 이상의 이상을 보여주었다. 도저히 그가 가진 9티어 헌터 자격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묘한 느낌. 마치 모든 것에 해탈한 듯 무미건조한 표정과 어떤 상황에서도 긴장감 없는 여유로움. 뭔가 다른 범주의 사람이었다.
오키아의 굴에서 나오자마자 하린이 강서에게 물어본 것이 있었다. 가지고 싶은 것 없냐고.
여러 가지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하려 했던 것이다. 그때 강서는 조금 뜬금없는 대답을 했다.
‘소소한 삶.’
‘...네?’
‘그냥 소소하게...오늘처럼요.’
하린은 그 말을 듣고, 강서에게 뭔가 과거사가 있음을 직감했다. 경매로 넘어가게 된 집도 혼자 산다고 했었고 말이다.
그 대화 뒤로 하린은 자기도 모르게 강서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강서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만약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도 집과 돈만 남겨놓고 사라져 덩그러니 혼자 남은 그때.
자신에게 집도 사라져버렸다면?
그런 생각에 막무가내로 집으로 들어와 같이 지내자고 우기기도 했다.
그렇게 강서가 들어온 뒤, 처음으로 집안에서 온기를 느꼈던 하린이었지만 이 정도 수준차이로 계속 방송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강서에게도 별로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슬슬,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을 도전해볼 때가 된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오늘은 꼭 말해야지...”
하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거실 한쪽 벽면의 구석에 걸려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 * *
강서가 도착한 곳은 한 비석 앞이었다.
서울 중심부에서 조금 벗어난 공원에 세워져 있는 이 비석 앞에는 몇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묵념하고 있었다.
그 비석 앞에는 ‘Tombstone for Somebody’라는 비석의 이름이 안내문과 함께 붙어있었다.
영어 아래에 조금 더 큰 글씨로 ‘누군가를 위한 비석’이라는 한글 이름도 적혀있었다.
강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비석 자체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본생으로 돌아오기 전 1년간의 튜토리얼 동안, 세상에 대해 대략적으로 둘러볼 수 있었지만 이<누군가를 위한 비석>에 대한 정보만큼은 전혀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에 수백 개가 분포되어 있는 이 비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튜토리얼에서는 무엇인지 누가 만든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강서는 천천히 비석으로 다가섰다. 높이 2m, 폭 1m, 가량의 비석에는 빼곡하게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다가가서 하나씩 이름을 읽어본 강서의 표정은 처음으로 조금씩 찌푸려졌다.
그 이름들이 모두 강서에게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강서는 몸을 돌려 조금은 급하게, 안내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 비석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 온 몇 번의 <망록시기>동안 한 나라, 혹은 세계를 구한 영웅들의 이름입니다. 기록이 모두 소거되어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이름만큼은 누구도 잊지 말길 바랍니다.]
그 아래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마탑>이라고 적혀있었다. <누군가를 위한 비석>은 마탑에서 세웠다는 의미.
강서는 다시 한 번 비석을 읽어 내려갔다.
‘아망찬’, ‘단테’, ‘발라딘’, ‘적추경’...그리고 수많은 이름들.
그 이름들은 분명-
강서가 지구에서 221번을 환생하며 겪은,
강서의 또 다른 이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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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누구인지 모르시나요?”
강서는 옆에서 방금 묵념을 끝낸 여성에게 물었다.
“단테요? 여기 쓰여 있는 221웅의 이름 중에 하나 아닌가요?”
“그 사람이 뭘 했는지는...”
“....? 무슨 소리에요?”
여성은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강서를 쳐다보았다. 그런 질문을 왜 하냐는 듯한 반응.
아무래도 여성은 안내문에 있는 쓰여있는 것처럼 단테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강서는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 천천히 비석에 적힌 이름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때, 강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강서 내면 깊은 곳에 감정의 응어리하나가 꿈틀 거렸다.
그건 상실감이었다. 지독하리만치 깊은 상실감.
수많은 생 가운데서 강서가 클리어한 지구에서의 삶은 총 221번.
그 221번의 생이 방금 너무도 간단하게 부정당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영겁의 시간동안 굳어있던 마음은 스스로 알아차릴 만큼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 지독한 상실감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상실감과 함께 억울함, 분노, 허탈함, 공허함 그런 것들이 단단히 굳어버린 강서의 마음을 조금씩 흔들었다.
강서는 그 자리에 무의식적으로 비석을 몇 번이나 되읽었다.
그건 지구로 귀환하여 처음 겪는 <동요>였다.
강서는 천천히 그 이름들을 되뇌기 시작했다.
“아망찬...발라딘...적추경...”
강서는 아망찬의 머리로 생각했고, 발라딘의 몸에서 살았었다. 단테의 목소리로 말했으며 적추경의 귀로 소리를 들었다.
그들, 한명 한명이 모두 다른 인물이었으나 동시에 강서였다. 강서는 누구보다 그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강서는 자각하지 못한 채, 마음 깊은 곳에서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꼈으며 동시에 안타까웠다.
문뜩, 강서의 무의식 속에서 하나의 생각이 튀어 올라왔다.
‘이 이름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이유는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강서도 몰랐다.
다만 무의식의 수준에서, 본생으로 회귀한 후 처음 경험한 욕망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욕망이라고도 못할만한 것이었지만.
그 작은 욕망은 강서의 유일한 욕망이었다.
하지 않을 이유도, 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다른 할 일도 없었다.
강서는 다시 한 번 그 이름들을 눈에 새기고 하린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221개의 인생을 다 이야기하려면-
할 말이 꽤 많았다.
* * *
제목: 뽕린ㅋㅋㅋㅋㅋㅋㅋ
글쓴이: 선풍기
아 개 빵터졌음. 그냥 킹갓 판다가 솔로 방송하고 가끔 컨텐츠 없을 때 하린 불러다가 뽀옹-시키면 될 듯.
-ㅋㅋㅋㅋㅋㅋ악마;;
-좀 너무하지 않냨ㅋㅋ그래도 하린이 호스트인데.
-호스트면 뭐함;; 개 발암인데.
-ㅋㅋㅋ입지가 좀 애매하긴 함. 들러리라기엔 좀 그렇고, 그렇다고 판다아재랑 같이보기는 답답하고
-고구마지.
ㄴ22222 딱 고구마란 표현이 맞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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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내 신경쓰이던 하린은 하루 종일 게시판에 있는 자신에 대한 글만 찾아다니고 말았다.
뻔하고 비슷한 글들이었지만, 혹시나 하면서 읽게 되는 게 사람의 심리였다.
결국 얻은 것이라고는 강서와의 방송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의 강화뿐이었지만.
-덜컥
해가 어둑해질 때 즈음에 강서가 돌아왔다.
“잘 다녀오셨어요?”
“아, 네 의미 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간단한 인사치례를 나눈 후에, 하린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쉬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게시판의 글들을 보며 생각을 확고히 했다. 강서가 집에서 나가게 되면 방송을 같이하는 것은 그만 해야겠다고.
“아저씨 저번에 넘어간 집이 경매에 나왔더라구요!”
하린은 일부러 밝게 이야기 했지만, 뭔가 가슴이 먹먹해오는 것을 느꼈다.
울음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좋아하는 밥도, 지금 먹으면 목이 메일 것만 같았다.
“아. 그런가요.”
“네 그래서 이게 아저씨가 저와 동업한 대가에요! 집값으로는 충분할거에요.”
강서는 하린이 내민 통장을 잠시 살펴보았다.
“부족하면 제가 조금 보태서 구매할게요. 근데 막 경매가가 치솟고 그럴만한 집은 아니....”
그런데, 하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통장을 다시 하린에게 내밀었다.
“그 집 안사도 돼요. 이건 제 집세로 써주세요.”
“...네?”
“이 집에 더 머물고 싶습니다. 얼마나 될까요? 이 정도면.”
강서는 진지하게 하린에게 물어왔다. 하린은 당황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기 때문.
울어야 될지 웃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집세요...? 아뇨 이건...아저씨 돈이에요. 그리고 남아도는 방 하나 빌려주는 건데 집세는...”
“그럼 그 돈을 사례금으로 드릴게요.”
“네?”
“이번 던전만 마치고 방송으로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하린님이 필요합니다.”
“방송이요?”
하린의 되물음에 강서는 잠깐 <누군가를 위한 비석>을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아는 사람 얘기 좀. 해보려고요.”
조금은 달라진 강서의 분위기와 왜인지 드는 안도감에-
하린은, 울어야 될지 웃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