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소소한 꿀팁방송-1화 (1/191)
  • 회귀자의 소소한 꿀팁방송

    1화. < ep1. 소소한 삶 (1) >

    ====================

    붉은 빛 하늘. 피비린내.

    척박한 땅. 텁텁한 모래바람.

    조금의 썩은 내.

    말할 것 도 없이 낭자한 시체와 까마귀.

    216번째. 굳이 센 이유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바뀌는 것이 ‘회차’뿐이었기에.

    딱 그 정도의 붉은 빛 하늘과. 딱 그 만큼의 피비린내.

    모래알 하나라도 바뀌지 않은 땅과 흐트러짐 하나 없이 곧게 부는 바람

    215번. 이 세계에서 내가 죽은 횟수.

    216번째. 내가 이 세계를 경험한 수.

    3720개의 세계에서 804,022번을 죽었다.

    틀려도 상관없다. 그렇다고 믿을 뿐. 이만큼이라도 세는 녀석이 있을까.

    짐작하기로는 아마 기억하지 못하는 수가 더 많겠지.

    나는 평소와 같이 스마트워치의 녹화버튼을 눌렀다. 유일한 취미였다. 아니 이제 취미보다는 의무였다.

    내가 잊어버린 순간들을 이 녀석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첫번째 에버돔 대륙, 역할 용사, 216번째. 트라이.”

    트라이 라는 말을 내뱉자 지긋지긋한 청동빛 상태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에버돔 대륙: 1번째]

    [롤플레잉: 용사]

    [수행: 악의 축‘???’를 제거하고 에버돔 대륙을 구원하세요.]

    [회차:216번째]

    .

    .

    .

    [트라이.]

    그 말과 함께 정적이 깨어졌다.

    “용사님!!”

    에버돔 대륙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왕족, 아르마네 공주가 나에게 다가왔다. 상체만을 일으켜 그녀의 걱정어린 얼굴을 보았지만 크게 감흥은 없었다. 216번째니까.

    “괜찮으신 건가요?”

    “...”

    괜찮지 않은 것은 한참 되었다. 이 <끝나지 않는 반복의 끝>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뒤. 이제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 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회귀하는 게 아닐까. 너무나 아득한 반복의 숫자에 질려 망각하기로 했을 뿐이지 않을까.

    “그래도 다행이에요. 용사님이 살아남아서 아직 희망이....”

    아르마네공주를 처다 본다. 공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아이러니 하게도 아르마네공주는 웃고 있었다. 눈물이 맺힌 채였지만, 다행이라는 감정히 충분히 느껴지는 아련한 얼굴.

    서걱-

    목을 베었다. 그녀의 아련한 얼굴은 공중에서도 그대로였다. 216번의 트라이동안 죽여보지 않은 인물은 아르마네 뿐이었다. 그녀가 악의 축이라고는 지금도 생각하기 힘들었으니까.

    “미안합니다. 아르마네. 그쪽뿐입니다. 아직 죽여보지 않은 것이.”

    공주의 머리가 허공에 떠올라서 바닥에 닿기 전, 모래바람처럼 흩어졌다.

    [‘용사’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용사의 활약으로 악의 축 ‘아르마네’가 제거되고 에버돔 대륙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역시, 감흥은 없었다.

    [4000개의 세계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저주: 윤회의 사슬’이 깨어집니다.]

    [윤회의 사슬 : 영겁(永劫)의 생애동안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삶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튜토리얼 후에 본생(本生)으로 회귀합니다.]

    [지구-한국: 222번째]

    [롤플레잉: 이강서.]

    [수행: 삶]

    [회차: 1번째]

    역시, 감흥은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