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화 암시장의 상인(1)
하급 게이트 공략을 마지막으로 국제 영웅 아카데미 첫 실기 주간이 끝났다.
C급 마수 3마리를 한 번에 상대하는 거에 비하면 쉬운 훈련이었기에, 1학년 A반 생도 전원이 통과했다.
하급 게이트의 보스는 D급 마수.
그 아래로는 E급도 간당간당했던 잡몸들이라 별 어려움은 없었다.
우리 조는 묵묵하게 걷기만 해도 미츠키의 그림자가 알아서 적을 처리해 주었다.
"모두들 첫 실기 주간동안 수고 많았다. 당분간 큰 일정은 없으니 컨디션 관리에 유념하도록."
"태산호 교관님, 컨디션 관리라니요?"
"얼마 후 있을 중간고사를 말하는 거다."
중간고사.
학년 당 두 번 존재하는 아카데미의 큰 시험 중 하나였다.
각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차지하는 성적 비중은 컸다.
그 때문에 생도들은 평소에 까먹은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 두 시험에 전력을 다해 임했다.
좋은 기회라 하지만 결국 시험은 시험.
태산호 교관이 중간고사를 언급하자 곳곳에서 새어 나온 한숨소리가 땅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와··· 벌써 중간고사야? 실기 주간도 이제 막 끝났는데."
"실기 주간은 무슨, 그거랑은 비할 바가 못 되지."
"인정. 그때는 필기 시험까지 치잖아."
중간고사에는 실기 시험뿐만 아니라 필기 시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국제 영웅 아카데미는 학기 중 필기 시험이 드물기 때문에 중간고사 필기를 망치면 출혈이 컸다.
필기 성적이 약 30%를 차지하는 만큼, 아무리 실기 성적이 높다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에 가장 큰 피해자는 클라디스였다.
중등부에서의 필기 비중은 상당히 낮았고, 게다가 국제 영웅 아카데미 입학 시험 또한 필기 지분이 5%가 채 되지 않았다.
그녀는 각종 임기응변과 위기대처 등 영리한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공부 머리가 크게 좋지는 않았다.
"하아···."
클라디스가 심란한 기색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녀 답지 않은 모습으로 책상에 늘어져 있자 올리비아가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갔다.
"무슨 일 있나 봐요?"
"응, 있지···."
"황금의 천재 클라디스한테 고민이라니. 궁금해지는데요?"
"···그 오글거리는 별명은 또 뭐야."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
게임에서 그대로 보았던 모습이 현실로 재현되니 보는 맛이 있었다.
설정상 클라디스는 본인에게 붙는 각종 별명들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않나?'
실기 시험이야 하루 핵 3번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도, 필기는 달랐다.
핵 개발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재화나 지능에 관련된 기술은 일절 만들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인게임에서는 필기 성적 따위 간단한 퀴즈나 퍼즐로 대체했으니, 뭐···.'
"그레이. 혹시 고민이라도 있어?"
"아, 미츠키."
오늘도 여전히 내 옆자리를 꿰차고 앉은 미츠키였다.
며칠 전에 보였던 돌발 행동 이후 이유 모를 여유와 차분함을 보이고 있었지만, 교실 옆자리와 식자 자리에서만큼은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주말까지.
"아··· 필기 시험때문에. 나는 중등부 졸업자가 아니라서."
"흠, 공부를 못할 이미지는 아닌데?"
그런가?
원래 세계에서 학교 다닐때도 상위권이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공부보다는 음악에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펜을 잡는 일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힘들면 내가 도와줄까?"
"어? 도와준다고?"
"당연하지~"
'미츠키랑 시험 공부를 한다라.'
확실히 좋은 방법이었다.
그녀의 필기 성적은 올리비아와 호각을 다툴 정도였으니.
그러나 문제는 나였다.
미래에 있을 전개나 각종 설정들은 알고 있을지 몰라도 아카데미 생도들이 치르는 시험 문제를 하나하나 풀 수 있을리 없다.
이론 수업 시간에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꾸벅꾸벅 졸았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과는 수많은 부분이 달랐다.
이런 나를 가르치려면 미츠키 역시 본인의 시간을 많이 포기해야 했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제안은 고마운데."
"고마운데라니?"
"내가 생각보다 더 이론에 약하거든. 기초부터 차근히 쌓아야 할 것 같아서, 이번 시험은 포기하려고."
필기 성적을 포기하는 대신, 실기 성적에 올인한다.
그게 내 전략이었다.
다행히도 실기라면 시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허공에 날리는 30%는 뼈아프겠지만, 별 수 있나.
나는 씁쓸히 웃으며 미츠키를 바라보았다.
걱정은 됐으니 스스로의 공부에 집중하라는 의미였다.
반면,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나 공부 잘하는데?"
"아니, 네 생각보다 더 이론에 약해서 그래. 이것저것 가르치려면 너도 시간 없을걸. 둘 다 망칠 순 없잖아."
"내 걱정할 필요 없어. 내 건 알아서 다 할 거야."
"정말 괜찮다니까."
완곡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손사래를 치며 거절을 표했다.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그녀의 성적을 희생시킬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극성맞은 히메노 가문에서 시험을 망치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하아··· 그레이.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네가 생각보다 이론에 약하다고 해도, 내가 그만큼 공부를 잘하거든."
"대단한 자신감인데?"
"5살 때부터 계속해서 공부해왔으니까."
"······"
그녀가 조기교육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역시 지옥 난이도 세계관답게 어린 아이조차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니.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이다. 전원 일어나도록."
""감사합니다!""
금요일 오후라 그런지 생도들 전원이 벌떡 일어섰다.
즐거운 얼굴로 떠들어대며 불금을 어떻게 보낼 지 각자 떠드는 모습에 부러움이 차올랐다.
나는 이번 주말에 암시장으로 숨어들어가야 팔자인데.
'참자. 안전한 미래를 위한 투자니까.'
희망적인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각종 위험이 득실거리는 장소에 제발로 걸어들어가자니 급격히 침울해지는 듯했다.
그걸 눈치챘는지 미츠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 소매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시험이 걱정돼? 부담가지지 마, 내가 전부 도와줄게."
"그거 때문만은 아닌데···."
이번 주말에 암시장에 숨어들어가는 거랑, 그게 미츠키에게 주기 위한 무기라는 사실을 알면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좋은 소리는 못 듣겠지.'
잡생각으로 뇌리를 채우며 둘이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기숙사로 걸어갔다.
항상 이 순간을 아쉬워하던 그녀였지만, 얼마 전부터 아쉬운 기색이 많이 줄어들었다.
심리적으로 내게 의존하는 건 좋지 않으니 긍정적인 변화였다.
치리릭.
기숙사 도어락이 정밀한 기계장치에서나 날 법한 소음을 내며 열렸다.
펜트하우스답게 2중 보안 시스템을 자랑하는 방문이었다.
나는 교복을 벗자마자 침대로 몸을 털썩 내던졌다.
최대한 편안함을 자랑하는 상태에서 앞으로의 대략적인 계획을 짤 생각이었다.
'제일 먼저 고려해야할 점은 약속받은 아티팩트들이다.'
요정의 팔찌와 본드래곤의 심장.
케르베로스 척살대 합류건으로 보내준다 했으니, 오늘 쯤이면 도착하겠지.
둘 다 엄청나게 귀한 등급이라 본래 예상했던 일주일보디 한달이 넘게 걸리고 말았다.
본드래곤의 심장은 전설 등급 아티팩트 중에서도 그 가치가 높았다.
아티팩트의 등급은 일반, 희귀, 특수, 전설, 신화 이렇게 5가지로 분류된다.
전설 중에서도 높은 가치를 지녔다는 뜻은 신화 등급과도 맞먹는 갓템이란 의미였다.
하기사 그 정도는 되야지 그 괴짜로부터 물건을 받아낼 수 있겠지만.
- 삐리릭.
전화가 오며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는 이미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시아 길드장님."
"그러게요. 아카데미 생활은 할만한가요?"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푸하하!"
갑작스레 터져나오는 웃음.
상정 외의 반응이었기에 순간 당혹스러웠다.
스스로가 유머 코드가 좋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레이 군은 가끔가다 큰 웃음을 준다니까요. 그게 제법 마음에 들어요."
"학창 시절에 그리 인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어서요."
"응? 지금이 학창 시절 아닌가?"
아 참.
쓸데없는 말실수에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것보다, 물건은 잘 포장되었나요?"
"요정의 팔찌와 본드래곤의 심장이라면 오늘 저녁 중으로 그레이 군 방문 앞에 배송될 거에요."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케르베로스를 상대해주시는데 이 정도 성의는 당연한 거죠."
좋아, 대화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나는 줄곧 기다리던 답변을 이시아에게 질문했다.
"케르베로스로 되겠습니까?"
"그 말은?"
"저번에 서로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시아 길드장님은 사뭇 다른 생각이셨나 보군요."
이시아는 대답 대신 침묵을 고수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있어선 극도로 민감한 질문이었으니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후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확신을 지닌, 흔들림 없는 말투였다.
"그렇지 않아도 다음 주 중에 초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레이 군 말대로 유익한 대화였으니까."
"···생각은 바뀌신 겁니까?"
이시아의 원수가 '기사왕'이 아닌, 그의 파문제자이자 S급 빌런 '환상검'이라는 진실.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받아들였냐고 묻고 있었다.
"그때 주신 증거물들, 100% 검증이 완료되었어요. 저로서는 그쪽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해야 될 셈인거죠."
"따로 신경써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드린 제안만 신경써주세요."
"···나이에 안 맞게 능구렁이라니까."
답지 않은 그녀의 투정에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시아는 몇 번 안부를 주고받고 난 뒤 전화를 끊었다.
'흐름은 대충 바로잡았어.'
저녁에 도착할 요정의 팔찌로 클라디스의 성장력을 높이고, 이시아의 도움과 미츠키의 도움으로 에피소드 클리어에 도움을 받는다.
나를 제외하면 사실상 현 학년 최강자는 미츠키였다.
다만, 그림자 능력이 주축이 된 만큼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다.
백귀의 유령검.
그 검은 오직 암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는 숨겨진 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