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화 돌발 행동
첫 번째 실전 훈련 이후, 평온하던 아카데미 생활에 큰 변화가 생겼다.
물론 유유자적이란 표현이 어울릴 만큼 여유 있는 일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하교 이후엔 대부분 내 개인 시간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제 어디 가는 거야 그레이?"
"어디 가긴···. 기숙사에 돌아가서 좀 쉬어야지."
"아직 4시밖에 안 됐는데?"
내가 어딜가나 귀신같이 따라붙는 누구 때문에 두통이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훈련 시간만 다가오면 언제 오냐고 독촉 문자를 보내기 일쑤였고, 때때로는 전화까지 걸기도 했다.
'누가 그림자 마스터리 각성자 아니랄까 봐···.'
미츠키가 첫 실전 훈련에서 나름 심경의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변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
함께 특별 훈련을 해오면서 유대감을 쌓아왔긴 했다.
그녀의 성장이 내 목숨과 직결되어 있었으니, 사활을 다해 도왔다.
그래서인지 지난 한 달간 미츠키는 고집해오던 까칠한 태도를 유순하게 바꿨다.
틱틱대거나 욕설을 내뱉는 대신 담담한 어조로 조곤조곤 말하는 정도랄까.
그러나 한차례 각성하고 난 뒤, 미츠키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마냥 달라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느껴지는 격렬한 시선.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시야 안에 나를 넣어두고 싶어 했다.
평소대로 혼자 떨어져 앉기는커녕 내 옆자리만을 고르질 않나,
어떻게 알았는지 내 등하교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선 기숙사 입구에서 미리 기다리기도 했다.
미츠키는 내게 있어 중요한 인재였으니 그러한 상냥함이 싫지는 않았다. 세계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인이니만큼 설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금 와서는 부담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하나씩 늘어나는 미츠키의 요구는 끝이 없었다.
수업도, 과제도, 점심도, 훈련도, 그리고 심지어 저녁 식사 마저 같이 보내고 싶어 안달 냈다.
어쩌다가 다른 여자 생도랑 대화라도 나누면 흉흉한 살기까지 일절 숨기지 않은 채 뿜어댔다.
특히 그 대화 상대가 클라디스나 올리비아라면 붉은 이채가 빛나는 눈동자를 내게 향했다.
당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심히 공포스러웠다.
마치 호랑이 앞에 선 초식 동물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뭔가 잘못됐어. 이런 건 내 계획이 아니었다고!'
성장에 관한 문제는 비단 미츠키만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황이 비교적 낙관적일 뿐, 클라디스나 올리비아 또한 기준치에 한참이나 모자랐다.
특히나 클라디스는 나라는 변수의 개입으로 인해 주인공이 걸어야 할 루트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마력증폭기 사용이나 가혹한 자학 훈련, 그리고 케르베로스 척살대 합류 등등.
그녀의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있으니 복수의 칼날을 갈 이유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훈련이나 각종 이벤트와도 멀어졌다.
일전에 이시아 길드장에게 약속받은 요정의 팔찌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아도 문제야.'
대련에서는 김호락을 손쉽게 이겼다지만, 현재 둘의 실력은 그 정도로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분명 올리비아는 4대 원소를 다루는 천재 중의 천재다.
초능력으로는 미츠키 정도는 돼야 비교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다만 모든 고위 각성 능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올리비아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한다.
바로 숙련도.
올리비아의 진정한 강함은 4원소의 조화에 의해 발휘된다.
그에 반해 지금은 각 원소를 분리해서 다루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의 능력만을 개발한 각성자들과 비교한다면 턱없이 모자랐다.
물, 불, 흙, 그리고 공기.
'능력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었다면 결코 국제 영웅 아카데미에 3위로 입학하지 못했겠지.'
어려운 각성 능력을 다루지 못한다는 부분에서 미츠키와 유사성이 짙어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다.
미츠키의 그림자 능력은 그 하나만으로 숙련도를 높이기 어렵다. 작중 순수 수련 난이도로만 따지면 전 세계에서도 최상급.
그녀가 몇 년 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한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각종 서포트를 받아도 난해한 능력을 가문 측에서 외면했으니 점점 약해지는 결과는 당연했다.
괜히 내가 제일 첫 타겟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충분히 정상 궤도에 올랐다. 아니, 오히려 게임에서보다 훨씬 빠른 성장 속도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실전 훈련에서 미츠키는 B급 영웅에 필적하는 실력이었다.
'아마 클라디스와 올리비아도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이제는 나머지 둘을 키워야 하는데···
도저히 틈이 없다.
클라디스야 요정의 팔찌를 주면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올리비아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마도왕의 죽음으로 인한 여파가 만만찮게 몰려올 테니까.
특히나 어중간한 상태에서 빌런들과 맞붙는다면 살아남기 힘들 터였다.
올리비아는 미츠키나 클라디스와 달리 신체 능력이 저조했으니까.
4원소를 완벽히 다룬다면 그마저도 해결되겠지만, 아직은 먼 이야기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어느샌가 옆에서 걷고 있는 미츠키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는 입가에서 잔잔한 미성이 들려왔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말해야 한다.
이제 둘이서 하는 특별 훈련 시간은 조금 줄여야 할 것 같다고.
더이상 올리비아의 성장을 미룰 수는 없었다.
떼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움직여 말을 꺼냈다.
"우리 둘이서 하는 훈련 말인데. 아무래도 일주일에 한 번이면 충분할 것 같아."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네 성장 속도는 충분히 빨라졌으니까. 굳이 감각 동기화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흐음. 뭐 바쁜 일이라도 있나 보네?"
예상 외로 잔잔한 반응에 긴장을 한시름 덜어놓았다.
한순간 살기가 느껴지는 듯했지만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다.
굳이 거짓말로 미츠키를 속이고 싶진 않아,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클라디스에게 전해줘야 할 물건도 있고. 올리비아도 저대로 두긴 아깝더라고. 걔도 잠재력이 대단하니까. 그래서너랑 한 것처럼―"
오소소.
갑작스레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림자 영역을 연달아 전개한 후 지친 기색으로 땀을 닦던 미츠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힘들어했던 건 연기였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림자의 영역을 재시전한 그녀는 내 주변 공간을 모조리 장악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이질감.
나는 마저 말을 끝내기는 커녕 호흡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내가 지나치게 민감해하는 반응을 보이자 미츠키는 가하는 압박을 살짝 줄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몸은 돌처럼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미친···.'
오전 아카데미 훈련에서 '고속 이동'을, 방금 있었던 특별 훈련에서 항상 하던대로 '투시안'과 '감각 동기화'를 미츠키에게 사용했다.
하루치 핵 3번을 전부 써버린 지금, 내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미츠키 손짓 한 번이면 수십 조각으로 토막날 수도 있는 무력한 상태.
왜 하필이면 이 늦은 시간에 그 민감한 주제를 꺼냈을까.
"자, 잠깐만. 미츠키, 이것 좀 풀어봐."
"풀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장난이 심하잖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표시했다.
하지만 미츠키는 옅은 헛웃음만 내뱉은 뿐, 그림자의 영역을 해제하지 않았다.
"왜 화를 내는 거야? 이것도 수련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천하의 아카데미 전체 수석을 상대로 그림자의 영역 유지하기, 어때?"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순간 말문을 잃었다.
초능력 훈련을 도와주겠다고 먼저 선뜻 나선 것은 나였으니 비논리적인 억지는 아니었다.
강자를 상대로 그림자의 영역을 유지하는 것은 확실히 효율적인 훈련법이기도 했으니.
문제는 지금 내가 핵을 쓸 수 없다는 거지만.
"아니···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하니까 그러지. 시간도 늦었고 피곤하다고."
"알았어, 그럼."
의외로 쉽게 수긍하는 미츠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5분이 경과했다.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뭐해, 미츠키? 이거 좀 풀고 기숙사로 돌아가자니까?"
"응? 그걸 왜 나한테 말해?"
···?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다시 한번 귀를 의심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지금 뭐라고 했―"
"S급 영웅, 태산호 교관이랑도 접전을 펼치는 네가 '고작' 이거 하나 못 풀리가 없잖아?"
외통수였다.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발끝에서부터 번져나가 머리끝까지 고스란히 도달했다.
내 표정은 중요한 비밀이라도 들킨 첩자마냥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자 미츠키의 날카롭던 눈꼬리가 비틀어지듯 휘어졌다.
나른하던 입매 또한 짙은 호선을 그렸다.
"혹시 어디 문제라도 있어?"
걱정 가득한 말투였지만, 표정은 정반대였다.
꽁꽁 감춰진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마냥 미츠키의 눈동자에서 이채가 서렸다.
그와 동시에 약해졌던 그림자의 압박이 다시금 강해졌다.
참기 힘든 고통이 전신을 휘감자,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으으윽···!"
'뭐, 뭐하는 거야 갑자기!'
나는 부들거리는 눈매를 간신히 치켜올려 미츠키를 노려봤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어떤 미동도 없었다.
단지 이유 모를 분노라도 느끼는 듯 험악해진 눈초리와 먹잇감을 노리는 난폭한 기세를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