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화 히메노 가의 어린 후계자
일본 최고의 검술 명가이자 막강한 자본력을 자랑하는 히메노 그룹의 주인, 히메노 가문.
그 위세가 워낙 막강하기에 우리 가문은 패자를 가리키는 의미에서 대 히메노 가(家)라고 불리었다.
힘이나 역사, 금력 등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고루 갖춘 가문.
그런 만큼 수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물밑 암투는 상당히 치열했다.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들이라 한들 뒤에서는 언제나 칼을 품고 있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방계들이 눈을 부릅뜨는 게 일상이었다.
특히 이전 세대, 즉 현 히메노 가의 당주이자 내 아버지 되시는 류노스케 히메노의 세대에서는 암투의 열기가 극에 달했다.
각종 분파가 이리저리 갈라지고 그룹의 계열사가 개인의 자금을 위해 분리되었다.
당주 자리 하나를 두고 히메노 가를 분열시키며 갉아먹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한 아버지는 결국 대대적인 개혁을 시전하셨다.
그는 곧바로 형제자매들을 앞지르는 자신의 압도적인 무력을 증명하고, 장로들의 인정을 받아 내었다. 또한, 뒤에서 가문의 소유를 빼돌리는 일족들은 속속들이 목숨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갈라진 분파와 그룹의 계열사들이 쇠사들에 묶인 것마냥 단단한 인력으로 가문의 당주에게 종속되기까지.
당시 숨죽이고 있던 인원들은 사무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말 땅바닥에 몸을 붙이고 다닐 정도였다.
감정과 자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철혈의 칼날.
지금까지도 그 존재감을 자랑하는 아버지의 이명이었다.
단지 무력 면에서만 뛰어났기에 그 이명이 붙여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보다는 기계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아버지는 온갖 일처리에서 다재다능함을 선보였다.
당주 자리의 가장 중요한 자격인 본신의 강함에는 처음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에서 몇 안 되는 S급 영웅을 상대로 그런 무의미한 논쟁을 벌이는 둔재는 없을 테니.
그러나 아버지는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의 총괄 운영과 각 계파의 운용 등, 핵심 업무를 이상적으로 해내었다.
지나친 분열로 인해 암흑기라 칭해졌던 시기마저 제 손으로 끝내버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절대 군주의 출현.
아버지가 히메노 가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당주로 군림했으니, 후계자인 내게 부담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여러 명의 자식으로 기껏 일군 히메노 가의 또 다른 황금기가 순식간에 빛을 잃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단 한 명의 자식.
그게 나였고, 그 사실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기 당주 자리는 독이 되어 다가왔다.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뛰어넘은 완벽을 추구하며 무력에서도 최강이 되어야 했다.
경제, 경영, 역사 등 갖가지 학문을 기본이고 사람을 다스리기 위한 제왕학에 히메노의 주인으로서 익히는 비전 검술까지.
가문의 이름을 등에 진 사람이니만큼 더더욱 패배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 무거움을.
어린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 못지않은 천재라며 치켜세워지는 일은 예사였고, 각성 능력인 그림자를 또래보다 일찍 각성했을 때는 경사라도 인 듯한 분위기였다.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웃음 한 번 지어 준 적 없는 아버지조차 만족스러움이 담긴 고갯짓을 선보였다.
그리고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림자 능력은 한낱 어린아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종류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극도로 희귀한 능력이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도 드물었지만, 기껏 배움을 청하려 해도 가문 내에서 반대가 일었다.
- '무조건적으로 검술이 우선이다. 알겠느냐? 각성 능력은 검술의 대성 후 갈고닦는 것이다.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하거라.'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결국 차기 당주라는 존재 의의 하나로 살아가야 한다고.
마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의 감정은 지운 채 그 길에만 매진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나 자신을 히메노를 위한 검술이라는 틀에 가둔 채 살아갔다.
검을 위해 살고, 오직 검을 통해서만 싸웠다.
각성 능력은 예비 영웅에게 요구되는 평균치에 맞출 뿐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였을까.
수련의 시간을 늘렸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퇴화를 거듭했다.
우러러 보던 가문 내에서의 시선은 먹잇감을 노리는 간악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자질 논란이라는 주장이 질리지도 않고 계속되었고, 급기야 혼란을 원치 않던 아버지까지 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매 순간 눈물이 났지만, 아침마다 마시는 냉수와 함께 속으로 깊게 삼켰다.
뇌리에서 스멀스멀 자라는 초조함과 두려움이 일 때면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둘렀다.
예리한 일격으로 그것들을 일격에 베어낼 수 있겠끔.
허나, 검을 내지르면 내지를수록 부정적인 감정들은 더욱 끈적이는 기세로 내게 달라붙었다.
게다가 클라디스라는 천재를 만나고는 증상이 심해졌다.
나와는 달리, 진정한 검의 재능을 소유한 행운아.
검기라는 각성 능력은 검에게 축복 받은 가호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한국에서 나와 같이 중등부 시절을 보냈으니, 그녀의 재능을 모를 리 없었다.
황금 세대의 주역이라며 클라디스의 이름이 본가에까지 알려지자 나는 버러지 취급을 받았다.
동급생에게 검 하나 이기지 못하는 년이 히메노 가의 차기 당주라면서.
그 소리를 듣자, 여지껏 잘 참아오던 평정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부들대며 떨리는 손으로 역겨운 소리를 지껄이는 장로들을 향한 검을 뽑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 했다.
태생부터 다른 년인데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지? 검기의 능력을 각성하지 못한 걸 왜 내 탓으로 몰아가는 거지?
물론, 차기 당주를 견제하는 의도가 담긴 비방 또한 난무했다. 방계 중에서 월등한 재능을 보이는 아이가 있으니 미츠키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보고가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올라갔다.
그의 선택은 침묵.
마치 덜떨허진 자식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초조함이 극대화되었다.
수면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얼마 남지 않은 인간관계는 일제히 쳐냈다.
어느새부터 내 삶은 부정으로 가득 채워졌고 햇볕 한 줄기 들지 않았다.
외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마찬가지로, 힘들지 않다는 말도 거짓이었다.
어린 나이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결국 상한선에 도달했다.
몸은 고장이라도 난 듯 삐그덕거렸고, 매끄러운 검 초식은 딱딱해져갔다.
육체적 문제인지 감정적 문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언제나 차오르던 눈물은 이미 메마른지 오래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의 해저로 천천히 가라앉은 뿐.
그러나 그렇게 끝을 맺고 싶지 않았다.
어린 후계자라는 도구가 아닌 미츠키 히메노라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보여지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게 마지막 구원줄이라는 생각으로 찾아간 이들은··· 내 부모님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를 이 세상에 낳아주신 분들이었으니까.
외쳤다.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다고, 도와달라고.
발버둥쳤다.
숨이 막힌다고, 몸이 더는 제 기능을 보이지 않는다고.
울부짖었다.
나는 당신들의 필요해 의해 낳아진 도구 따위가 아니라고.
···돌아온 답은 단 하나.
무차별적인 폭력이었다.
- '한심하구나. 미츠키 히메노. 무능을 넘어서 벌레 같은 나약함을 부르짖다니! 너에게 미츠키란 이름을 지어준 내 자신이 원망스럽구나. 이번 일로 차기 당주 자리를 몰수하지는 않겠다.
단! 이제부터 네년을 나 아키오 히메노의 딸이라 생각하지 않겠다. 썩 꺼져라!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가혹할 정도의 매타작을 당했다. 아버지는 말리기는커녕 경멸이 가득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날, 내 세상이 무너졌다.
갈 곳 잃은 고아마냥 이를 악물며 홀로 버텨야 했다.
부모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부모를 버렸다.
그네들이 그토록 바라는 당주 자리에 올라 이 모든 고통을 보상받고자 할 뿐.
하루 수면 단 4시간. 그 외에는 전부 수련으로 채웠다.
검기 따위 순수한 검술로 박살 내 주겠다는 각오로 무장했다.
고통과 망가짐을 체감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냈다.
매일 밤마다 찾아오는 경련과, 수시로 흘러대는 코피.
엄격한 훈련 교관들조차 걱정어린 조언을 건넬 정도였다.
그런데도 주변에서 건네오는, 스스로를 돌보라는 말은 더이상 위로가 아닌 토악질 나오는 위선으로 보였다.
내가 서 있는 곳은 한 발 자국이라도 물러서면 추락하는 벼랑 끝 낭떠러지였으니.
하지만 세상은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국제 영웅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난 낭떠러지가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차기 당주 지위의 박탈.
부모도, 친구도, 그리고 자신마저.
전부 버렸다.
···내게 단 하나 남아 있는 삶의 의미가 빼앗겼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더욱 바닥이라니. 난 뭐지?'
정말 그들의 말대로, 거저 얻은 당주 자리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는 병신인가?
더이상 부모도 없는 내게 남은 것이 뭐지?
그걸 깨닫자, 댐처럼 막혀 있는 눈물이 폭포 같이 터져 나왔다.
절망과 오열이 전신을 감싸 오르며 자살을 종용했다.
행복과 기쁨 한 번 느껴지지 못한 채 이대로 끝내자니···.
그 생각이 내 뇌에서 도출한 결과라니.
서글펐다.
어디로 걷고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않은 채, 내게 있어 유일하게 '진짜' 도움의 손길을 내민 녀석에게.
전체 수석, 그레이.
그가 내밀었던 것은 구취 가득한 어설픈 따스함이 아니었다.
이미 무감각으로 물든 내 심장을 다시 한번 자극할 정도로 매섭고 차가운 칼날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 남자에게 내 인생의 갈림길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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