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25화 (26/36)

제 25화 성장의 발판

커다란 덩치에 날카로운 가시가 촘촘히 박혀있는 기다란 꼬리.

그리고 뜨거운 열기가 새어나오는 아가리 속 뭉특한 이빨까지.

가상 마수가 잔뜩 도사린 실습장 내부는 인게임에서 그래픽으로 구현되었던 모습과는 현저히 달랐다.

어지간한 동물원보다도 좋은 관리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지만, 그 안의 생물체들은 바라만 보아도 생도들의 공포를 유발시켰다.

- 크륵! 크르르륵!

처음에 비해 더욱 사나워진 울음소리에 자그마한 딸꾹질 소리가 들려온다.

아예 눈을 감은 채 비강으로 스며드는 마수들의 구취에 헛구역질까지 하는 이들도 몇몇 있었다.

'A반이라 해도 메인 캐릭터들을 제외하고는 1학년 레벨을 못 벗어나나 보네.'

뭐, 그게 도리어 정상이지만.

비록 가상 괴수라 하나 C급 마수는 절대 얕볼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현역 영웅들도 까딱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다.

최하 등급인 D급 영웅들은 아예 교전 자체가 금기시 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D급이라 해도 현역 영웅.

현재 아카데미 1학년 생도들은 그마저도 미치지 못한다.

"···입학 시험 때 D급 마수는 상대해봤지만, C급이라니!"

"넌 몇 마리까지 잡았었냐?"

"5마리도 겨우였지. 그 후부터는 숨 넘어가는 줄 알았다고."

국제 영웅 아카데미의 전통적인 입학 시험 방법은 D급 마수를 한계치까지 상대하는 것이다.

단신으로 C급 마수를 상대했던 클라디스와 올리비아는 예외였지만, 나머지는 최소 5마리만 잡아도 충분히 상위권의 성적을 받는다.

황금 세대라 불리는 미츠키와 김호락, 그리고 채선아 또한 각자 10마리 이상씩 잡음으로서 우수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수들은 빌런이나 영웅들에 비해 등급에 따라 그 강함의 차이가 크다.

오로지 순수한 위험도로만 등급이 책정되니까.

D급 마수 수십이 덤벼들어도 C급 마수에게는 소용없다.

때문에 우리 안에서 적의를 드러내는 C급 마수들을 상대로 자신감을 드러내는 인원들은 극소수였다.

"저번에 싸웠던 개체랑은 또 다른 종류네요. 게다가 이번에는 세 마리나 되니, 나름대로 재미는 있겠는걸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올리비아, 너와는 달리 한 마리 밖에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는 마수를 상대로 똑같이 이빨을 내보이며 호승심을 돋우는 김호락.

순수한 호기심을 담은 눈빛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올리비아.

슬쩍 눈을 돌려 클라디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여러 마리라 해도 할 만하다 생각하는 듯했다.

그저 별다른 긴장감 없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려두고 있을 뿐이었다.

'올리비아와 클라디스는 그렇다 쳐도··· 김호락, 저놈은 아직 힘들텐데.'

1학년 시점의 김호락은 별다른 전략 없이 단순 육탄전만 고수하는 격투가였다. 슬럼프를 겪고 있는 미츠키보다도 떨어지는 실력.

뭐, 나름대로 쳐맞으면서 성장하는 녀석이니만큼 더 이상의 관심은 끄기로 했다.

나는 팀원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 그레이. 혹시 포지션은 어떻게 하면 좋겠어?"

밤색 머리에 수수한 이목구비를 지닌 프랑스인.

프레드릭이 조심스럽게 질문해왔다.

"흠···."

솔직히 말해서 포지션은 큰 의미없었다.

프레드릭은 방어계 각성자였지만 C급 마수 3마리가 상대라면 전방에 세우나 마나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수인 최준혁 또한 포지션이 마땅치 않아진다.

후방에 자리를 잡아도 엄호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결국 내가 혼자서 다해먹지 않는다면 굴러가지 않는 팀이었다.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실기주간은 미츠키의 실력을 빠르게 끌어올릴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검을 손질하고 있는 미츠키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용건이라도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는 네가 집중적으로 움직여줬으면 해서."

"···내가?"

얼떨결한 기색으로 돌아오는 반문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 반응이 불만이었는지, 미츠키의 미간에 가느다란 실금이 새겨졌다.

"D급 마수 열 마리면 모를까, C급은 아직 버거워. 너라면 혼자서도 처치할 수 있잖아?"

그 말에 프레드릭과 최준혁이 소심한 동조를 표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적절한 아부와 칭찬을 조합하여, 은근히 나를 치켜세움과 동시에 팀을 이끌어 줄 것을 종용한다.

그 행동들을 보자 확신이 들었다.

얘네들이 결정적인 요소 하나를 깜박하고 있다는 걸.

"나야 혼자 다 죽여도 상관없는데, 너희는 괜찮겠어? 팀이라 해도 개인별 점수는 따로 채점되잖아?"

생각지도 못하고 잊고 있던 정곡을 찔리자 둘의 낯빛이 흑색으로 물들었다.

조용히 입을 다문 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다시금 미츠키를 설득했다.

"정 위험하면 내가 본격적으로 나설게. 이번 실습은 너에게 있어선 중요한 기회야."

"그러면 나보고 전방에서 3마리를 혼자 상대하라고?"

"아니. 프레드릭과 최준혁이 하나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네가 혼자서 두 마리를 상대해."

짐짓 턱을 수그리고 고민하던 미츠키는 검집에서 세차게 검을 뽑아들며 기합을 다졌다.

"알았어. 해 볼게."

"좋아. 아! 참고로 검은 쓰지 말고."

"···뭐?!"

미츠키의 음성이 대번에 높아졌다. 그러나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지난 한 달간 미츠키의 성장 속도는 예상보다 느렸고, 그 이유는 명백했으니까.

"이때까지 수련하면서 너도 느꼈잖아, 미츠키. 네 성향은 검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어. 그 중심을 맞출 방법은 오직 그림자에 몰두하는 방법 외엔 없어."

단호한 어조로 일갈하자 댓 발 튀어나왔던 입술이 슬그머니 제자리를 찾아갔다.

미츠키의 현재 상태를 비유하자면 왼손잡이와 비슷했다.

오른손 사용도 감각에 익히고자 하지만, 왼손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제대로 된 연습이 막힌 상태.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해결법은 왼손을 등 뒤로 묶고 생활하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효율적이기도 하다.

'미츠키의 경우엔 왼손을 묶는 대신 손에서 검을 놓은 채 싸워야 하고.'

손톱자국이 깊게 눌릴 정도로 주먹을 강하게 말아쥐던 미츠키는, 결국 승낙하고서 땅바닥에 생도용 카타나를 내려놓았다.

한차례 깊게 심호흡 한 뒤, 그녀는 내게 시작하자는 눈빛을 보냈다.

얼핏 보면 당당한 눈동자였지만 그 뒤로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숨겨져 있었다.

"시작하자. 프레드릭과 최준혁, 너희가 한 놈을 맡아. 내가 미츠키랑 나머지 둘을 상대할테니."

둘은 굳은 안색으로 각자 무기를 고쳐잡았다.

프레드릭은 손에 박힌 굳은살 주름에 맞춰서 방패 손잡이를 쥐었고, 최준혁은 손톱 끝으로 화살촉을 날카롭게 세웠다.

"준비 끝났으면 필드 안으로 진입하도록!"

가상 마수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공간, 필드.

실제 마수들의 출신지인 게이트 내부를 본떠 만든 공간이었다.

[그레이 생도님, 미츠키 생도님, 프레드릭 생도님, 최준혁 생도님의 신원 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진입하시겠습니까?]

"바로 진입한다."

딱딱한 기계음성이 사그라들자 얇게 빙사된 푸른 막이 주위를 감쌌다. 앞을 비추던 시야에 푸른 빛이 점멸했다.

천천히 눈을 뜨니 코앞에서 꾸물거리는 혀로 입맛을 다시는 마수가 보였다.

"바로 시작해!"

내 외침을 기점으로 다들 기존에 계획했던 움직임을 구사했다.

최준혁이 먼저 구석으로 달려가 사수의 약점인 사각(死角)을 배제한다. 프레드릭은 최준혁이 선 위치의 다섯 발자국 정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 위에 방패를 짓쳐대었다.

- 피융!

최준혁의 손끝에서 떠난 화살이 푸른 마력을 내뿜으며 허공을 비행했다.

정확히 마수의 눈에 직격하자, 내 앞을 가로막던 한 마리가 프레드릭의 방패를 향해 육중한 몸체를 던졌다.

"크윽-!"

단번에 튕겨나가 바닥을 구르는 프레드릭. 그러나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하고 마수를 유인했다.

'저 정도면 나쁘진 않아.'

짐덩이 듀오가 제 몫을 하기 시작하자 두 마리를 상대로 버티고 있는 미츠키를 바라보았다.

지난 한 달간의 수련이 그 효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손에 검을 들고 있지 않아 결정적인 일격은 날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미츠키는 그림자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차분하게 대응했다.

- 크르르륵!

기어코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마수 하나가 그녀를 향해 덮치듯이 앞발을 휘둘렀다.

부드러운 살덩이를 산산조각 낼 기세로 날아드는 발톱.

미츠키는 급히 바닥의 그림자를 조작해 스스로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마수가 날린 회심의 일격이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겨우 드러난 빈틈을 놓치지 않고 미츠키는 '그림자의 영역'을 전개했다.

지난 수련을 통해 새로이 터득한 기술로, 영역으로 선포한 주변을 완전한 암흑으로 만들어 그녀의 지배하에 둘 수 있었다.

미츠키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한 줄기의 검은빛 마력 구체가 발산됐다. 이내 허공을 먹어치우듯 그 크기를 늘린 구체는 마수들이 손 쓸 틈도 없이 필드의 일부를 장악했다.

당황하는 마수들의 후방을 향해 바닥에서 수십 개의 그림자 암기가 솟아올랐다.

육중한 고깃덩어리를 향해 빠르게 쇄도하는 비수들의 표면이 옅은 광택을 뽐내며 반짝였다.

- 크라라라락!

예상치 못한 위력에 마수 한 마리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도사린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