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23화 (24/36)

제 23화 실기주간(1)

눈 앞의 소년에게서 들려온 말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기에 충분했다.

···10년.

자그마치 10년이었다.

오직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살아왔다.

인내와 사투만을 반복하는 기계적인 인생.

불리한 상황일수록 더욱 반갑게 받아들이며 죽을 각오로 싸워왔다.

그 대가로, 언제나 우상으로 우러러보았던 부모님을 뛰어넘어 S급 영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청천 길드 또한 고작해야 중견 수준에 그쳤던 시절 따위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워버렸다.

최고만을 바라보며 내부의 썩은 물을 모조리 갈아치웠다.

하지만 길드의 부흥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대규모 개편과 동시에 시작한 대규모 프로젝트, '기사 사냥'.

기사왕과 휘하의 제자들을 전부 죽이기 위한 포석.

그것이 수면 아래에 숨겨진 진짜 목표였다.

'만약··· 내가 이때까지 믿어왔던 사실들이 전부 틀렸다면?'

연신 떠오르는 악몽을 무시하며 떨리는 손가락을 꽈악 붙잡았다.

아직까지는 별 반응이 없는 반대편 손으로 제니퍼에게 손짓을 보내며 추출 입자 샘플을 가리켰다.

"일단···, 빨리 확인해봐."

조금이라도 빨리 이 불안감을 떨쳐내고 싶다. 차라리 진실이 어느 쪽이든 후련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다만, 다만···

여태껏 준비한 프로젝트가 의미없는 짓거리였다면?

두 분을 죽인 원수가 정말로 그 괴물이라면?

꿈속에서나 그리던 복수는 그저 한여름밤의 꿈으로 전락하겠지.

'절대 포기 못해. 설령 길드 전체를 갈아넣는 한이 있더라도.'

위이잉, 열이 차는 소리를 내며 컴퓨터가 돌아간다.

소형 슈퍼컴퓨터에 맞먹는 성능임에도 작업이 작업인 만큼 쉴 새 없이 전기를 잡아먹는다.

"······"

그 누구도 일말의 소리도 내지 않은 채, 1시간이 지났다.

정작 정보 제공자는 작은 화면 안에 담긴 뉴스 기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윽고, 제니퍼가 기다리지 마지않던 결과를 내왔다.

서로 맞잡은 두 손에서 물줄기 하나가 주르륵 떨어졌다.

그녀의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전, 슬쩍 강화한 동체시력으로 입모양을 살폈다.

결국 부질없는 마력 낭비에 불과했지만.

"그레이 생도의 말이··· 사실입니다. 재배치 결과 기사왕의 검흔은 눈속임이고, 은밀하게 감춰진 검흔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격이··· 결정적 요인이었던 듯 합니다."

결과지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반달베기의 흔적.

닮아있긴 하나, 기사왕의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머릿속이 멍해지며 맑았던 시야가 암흑으로 물드는 듯했다. 범인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복수를 꿈꿨던 내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이쳤다.

그때, 침묵을 유지하던 소년이 말을 꺼냈다.

"이시아 길드장님, 당신의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위로는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단지···"

"범인은 S급 영웅과 각종 최신 장비마저 속였습니다. 이시아 길드장님. 좌절할 때가 아니라, 주어진 힌트를 다시 한번 파고들어 보세요."

주어진 힌트라니.

멍청한 간악질에 속아넘어간 스스로를 욕할 시간도 모자란데, 그 무슨―

'잠깐.'

입자 추출로 가동시킨 시뮬레이터로도 밝혀지지 않던 사실이 재배치로 드러났다.

겨우 드러난 진짜 검흔은 육안으로만 파악하기엔 극도로 어려우며, 시뮬레이터를 동원해야 간신히 파악되는 수준이다.

게다가 인체의 치명적인 급소만을 노려, 종이 한 장 만큼의 두께로 예리하게 베어냈다.

"설마··· 환영검?"

S급 빌런이자 기사왕의 파문제자, 환영검 이스트라.

그 사람이라면 가능한 묘기였다.

확언을 바라는 눈빛으로 그레이를 바라보자, 그가 서서히 고개를 움직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제가 아는 바로는, 맞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강철왕이 있겠지요."

'기사 사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걸렸던 의문점들은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기에 애써 무시했을 뿐.

그러나 강철왕의 사주를 받은 환영검 이스트라가 범인이라면··· 그 모든 괴리감들이 해소된다.

- 드르륵.

그레이는 바쁘게 눈알을 굴리는 내 모습을 뒤로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표정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부 전했다는 듯, 후련한 기색이 맴돌고 있었다.

"생각하실 시간이 필요할 테니 그만 비켜드리죠. 그리고 제 제안에 대해선 부디 잘 고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느릿한 걸음거리로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

별 면식도 없는 정체 모를 남자였지만 지금은 왠지 그 수상함이 다르게 느껴졌다.

무슨 이유로 그런 무리한 계획을 실행하고자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째서 협회장과 결탁하여 나를 그의 계획에 끌어들였는지 조차 아직까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그에게 보여야 할 행동은 하나였다.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냄과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감사를 표할 대상을 향해, 난 옅은 웃음을 지었다.

* * *

어느새 밝아온 월요일 아침.

박물관 테러 저지와 이시아 길드장과의 면담, 협회장에게 주의사항을 빙자한 잔소리 듣기 등.

한참 쉬며 체력을 보충해야 했을 주말에 변변찮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피곤에 쩔어 금빙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꺼풀로 기숙사를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여! 오늘은 일찍 일어났나 보네, 그레이!"

상쾌한 아침 분위기를 조성하는 우렁찬 외침.

내게는 짜증이나 유발하는 배아픈 기세였지만, 정작 당사자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견디지 못해 괴로워하는 교복핏을 자랑하는 아카데미의 마초 담당.

김호락이 뛰어와 어깨동무를 걸었다.

"대체 주말동안 어디 갔었어? 어째 같은 건물에 사는데도 얼굴 보기가 힘드냐."

"아, 주말에는 기숙사에 없었어. 외박했거든."

"···음?"

외박이라는 말에 김호락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왜 그러는가 싶었는데, 이후 이어진 그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혹시, 밖에 숨겨둔 애인이라던가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차마 입으로는 표현 못할 천박한 손모양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미친 놈이, 누구 이미지를 조질려고.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있겠냐."

"네 외모에 외박이라면 다들 비슷한 생각일 거다. 벌써부터 눈독 들이는 여자애들도 많던데 말야."

'예전엔 피팅 모델까지 했었으니 딱히 외모가 못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봤자 이곳은 선남선녀가 넘쳐나는 판타지 세계니, 어줍잖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머리색도 핵 때문에 칙칙한 회색으로 변해버렸고.

"인기는 너처럼 몸이 받쳐줘야지 따라오는 거다. 그리고 내 외모가 무슨."

"글쎄, 난 부담스러워하는 애들이 많던데. 그나저나 너 거울을 보고 살긴 하는 거냐?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는데."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거울은 무슨.

옆에서 주구창창 떠드는 김호락과 같이 교실로 들어가자, 태산호 교관이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그레이 생도, 네가 왠일로 누군가와 함께 등교를 하는군? 과할 정도로 혼자를 고집하더니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딱히 그런 반사회적인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만."

다른 세상으로 떨어지자마자 초능력을 가지고 노는 생도들이 가득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적어도 나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웃으면서 적응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김호락, 이 놈의 친화력이 심상치 않기는 하지.'

김호락은 저번에 있었던 저녁 모임 후 단련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내 운동을 도와주며 말꼬리를 붙였다.

시종일관 옆에서 꿈틀대던 근육들은 무서웠지만, 의외로 꽤나 도움은 되었다.

원래 세상에서는 헬스 한 번 해본 적 없었으니까.

주말이 지나자 교실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금요일에는 생도들의 얼굴에 흥분으로 고조된 웃음꽃이 만개했었지만 오늘은 그 반대였다.

월요병은 만인공통이란 말을 증명하듯 대다수가 축 가라앉아 있었다.

'특히나 이론 수업으로 가득 찬 날이라 더욱 그렇겠지.'

혈기왕성한 10대들이니 만큼, 다들 필드 위를 선호하고 책상 앞을 싫어했다. 심지어 초능력까지 쓸 수 있는 놈들이니 그 성향은 더했다.

···기본적인 훈련 하나 따라가기 벅찬 나는 제외하고.

태산호 교관은 그런 반응들을 눈치챘는지 목소리를 높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렇게 힘 빠져있을 필요 없다. 마침 오늘부터 실기주간이 시작되는 만큼, 열심히 임하도록."

"실기주간? 벌써 그렇게 됐나?"

"원래 이맘때쯤이면 다 실기주간 시작하잖아."

"어쨌든 이론 수업은 당분간 좀 줄겠네. 와, 이제 좀 살 것 같다."

쏟아져 나오는 긍정이 담긴 환호들.

아직까지도 국제 영웅 아카데미에 대해 채 파악하지 못한 불쌍한 중생들이다.

주조연 캐릭터들에게 눈을 돌리자, 그들은 역시나 긴장을 키우며 스스로의 기세를 날카롭게 다듬고 있었다.

교실을 쭈욱 둘러본 태산호 교관이 입가에 비릿한 곡선을 그렸다.

"너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추천하고 싶군. 너희 선배들은 실기주간만 되면 골골 앓아댔으니 말이지."

교관의 불길한 반응을 목도한 생도들의 눈가에 얕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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