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화 빌런 학살극
유물 관리실은 건물 안쪽 중앙 관리실의 지하에 위치해 있다.
박물관에 전시할 수 없는 고위 등급 장비 혹은 아티팩트만 보관하는 곳.
보안이 삼엄한 곳이니만큼 아무리 퍼시발 렌토라도 혼자서 잠입할 수는 없었다.
A급 영웅 2명이 각 팀의 경비대장으로 근무하는 곳이었으니까.
나는 주위에 잠복했을 퍼시발의 부하들을 경계하며 발걸음 소리를 줄였다.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니, 난장판이 된 전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칼과 갑옷들.
쓸만한 장비들은 모조리 털어간 듯 했다.
그 도둑놈을 잡으면 어떻게 죽여버릴지 고민하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윽··· 독기 색이 녹색이 아니라 암녹색으로 변했다고?"
통제실이 시야에 들어오자 허공에 떠다니는 독기의 색이 급격하게 짙어졌다.
만독불침을 발동한 나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지만, 시야가 흐릿해져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독기의 색깔이 진해도 너무 진했다.
시전자가 근처에 있다는 증거였다.
"아무래도 퍼시발 렌토는 통제실 안에 있나본데··· 그러면 역시 유물 괸리실 금고를 뚫는 중이겠네."
관리실은 언제나 3중으로 잠겨있는 철문으로 봉해진다.
봉인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매일 밤 보안을 확인하니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철문을 열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놈이 금고를 여는 동안, 나는 놈의 부하들을 정리한다.'
"빨라져라."
【'고속 이동'을 발동합니다.】
S급 스피드스터의 속도보다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핵.
하지만 신체 능력에 관한 핵의 문제점은··· 제어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
단순한 일직선이 아닌 자유자재로 뛰어다니고자 한다면 S급 영웅의 수준보다 훨씬 낮추어 사용해야 했다.
'그 정도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겠지만.'
난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움과 동시에 발끝에 치이는 파편을 걷어찼다.
캉, 하고 울려퍼지는 마찰음.
그 소리에 숨어있던 부하들이 몰려들었다.
"침입자라도 발생한 건가?"
"그럴리가, 퍼시발 님의 독을 견딜 수 있는 건 그분의 혈청을 주사한 우리들 뿐이다."
"그렇다면 방금 그 소리는 무슨··· 컥!"
복면을 뒤집어쓴 남자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목에서는 새빨간 선혈이 흥건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젠장! 습격이다!"
"쥐새끼 한 마리에 흔들리지 마라! 통제실을 둘러싸고 급습에 대비―"
리더격으로 보이는 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귀찮게 부하들 전원을 불러모으려 하자 목 뒤로 달려가 직접 칼침을 선물해주었으니까.
"커, 허헉···."
그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즉사했다.
2인자의 죽음에 당황했는지, 조직적으로 뭉치던 부하들이 개인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데, 데이르 님께서 순식간에 당했어! 다들 어디있는 거야?"
"젠장할, 공기 색깔이 너무 진해서 시야가 흐릿하잖아! 일단 클로자 님부터 찾아!"
"클로자 님! 클로자 님! 어디 계십니까!"
'아직 2인자가 하나 더 남아있는 건가.'
데이르와 클로자라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게임에서도 그 2명은 퍼시발 렌토와 붙어다니던 수하격 인물들이었다.
그래봤자 B급 빌런 중 상위 레벨.
A급을 아득히 능가하는 내 속도에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난 천천히 스탭을 밟으며 적들의 경동맥을 향해 칼을 찔러넣었다.
초고속 오토바이를 타듯 지면에서 발이 떼질 때마다 주변 시야가 물감처럼 흐려졌다.
다시금 발이 지면에 닿자마자, 손에서 가시를 피어내던 놈의 목 뒷편이 눈에 들어왔다.
칼을 휘두른다, 그 의지만으로 몸이 반응하며 팔이 정면으로 쏘아진다.
- 푸확!
허공에 그려지는 핏빛 무지개.
잔뜩 뿜어져나오는 핏줄기 소리만이 또다른 사망자가 나왔다는 걸 적들에게 상기시켰다.
"이게 대체 뭐야! 상대가 눈에 보이지가···."
안타깝게도 그 역시 마저 입을 떼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동료들이 그를 돌아봤을 땐 이미 피로 이루어진 웅덩이만이 그들을 반길 뿐이었다.
경직된 시체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당혹감만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대항할 수 없는, 자신이 언제 죽는지도 자각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가 그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나, 난 안 되겠어! 아무리 그래도 고작 이런 곳에서 죽기는 싫다고!"
"마찬가지야! 애초에 우린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어디가는 거야 이 새끼들아!"
몇몇은 마력을 거두고 등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대낮의 학살극은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어느덧 남은 인원은 단 4명.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 동료들의 시체를 확인한 그들은 전신에 올라오는 소름에 손을 떨었다.
"···고작 4명 밖에 안 남았다고?"
"A급 영웅 중에서도 유명한 놈인가 본데! 빨리 퍼시발 님께―"
"그건 곤란한데."
남자의 목에 가느다란 금속의 실선이 그어졌다.
쿵, 하며 또다시 추가되는 시체 한 구.
그의 목에 그려진 실선은 이미 새빨간 핏빛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자, 잠깐! 누군지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거래를 하지.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주겠다!"
나는 모습을 드러내 그들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국제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복이 눈에 들어오자 그들의 얼굴에 당황감이 어른거렸다.
"생도? 고작해야 아카데미 생도가 이 정도 강함이라고?"
"생도복에 속지마! B급 빌런 12명이 손 한 번 못쓰고 즉사했다!"
오, 가운데 놈은 머리가 좀 돌아가는 놈인 건가.
'이 3명 중 한 명이 전시관을 털었겠지.'
"원하는 걸 말하라고?"
"그래!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이 급격히 환해졌다.
그 순간, 내 신형이 빛살을 그리며 직진으로 쇄도했다.
"크, 크아악!"
"아아아아악!!"
벌벌 떨고 있던 2명의 경동맥에 은빛 실선들이 수놓아지며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무, 무슨···!"
"게임에서 하나라도 남겨놓으면 꼭 뒤통수를 치더라고."
"게, 게임이라니?"
"걱정 마. 넌 살려줄 테니까. 훔쳐간 전시관 유물들이나 어디있는지 말해."
그가 연신 머리를 위아래로 회전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겉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물건들을 꺼냈다.
마치 전시관의 유물들을 압축시켜 만든 모양이었다.
"···미니어쳐?"
"아, 아까 그 유물들이다! 내 각성 능력인 축소로 크기를 줄인 거다."
'별의별 능력이 다있네.'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이런 잡몸들은 대사 없이 죽어나갔으니, 신박한 정보였다.
- 츠즈즈···
남자의 손에서 자그마한 빛이 발하더니 유물들로 스며들어갔다.
몇 초가 지나자 작아졌던 장비와 아티팩트들이 전부 제 크기를 되찾았다.
나는 걸음을 옮기는 대신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내가 가주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그의 기대를 무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말이야."
"뭐, 뭐지? 또 원하는 게 있나?"
"아까부터 왜 그쪽 손은 등 뒤로 숨기고 있냐?"
그 말에 남자의 눈끝이 날카롭게 치솟았다.
등 뒤의 왼손에 쥐어진 단검을 내게 휘두르며 덤벼들었지만, 너무 느렸다.
"젠장!"
칼날이 나를 긋지 못하고 빗나가자 그가 분노를 내비쳤다. 다시 한번 내게 덤벼들 자세를 취하자 나는 가볍게 직선으로 칼을 휘둘렀다.
"커헉!"
육안에는 비춰지지 않는 고속의 일격에 그의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어김없이 주변을 적시는 피웅덩이를 확인하고는 그제서야 등을 돌렸다.
"말했잖아. 꼭 뒤통수를 쳤다고."
게임에서도 귀찮아서 건너뛰었다가 몇 번 칼질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이 루트에서 생존자를 남겨둔 적 없었다.
굳게 잠겨있는 관리실의 문.
칼날을 가져다 대어 문고리를 흔들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가속도를 이용해 몸통을 날려 문에 부딪혔다.
끼익, 하며 철푸덕 넘어지는 문짝을 뒤로하고 관리실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클로자라는 여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설마 도망이라도 쳤나?"
아까 몇몇 부하들이 도망치려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먼저 몸을 내뺀 듯 했다.
엑스트라 빌런 치고는 기가 막힌 상황 판단력이었다.
"어이, 퍼시발 렌토! 문은 다 열었냐?"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리자 두피에 괴상한 문신이 새겨진 대머리 한 명이 걸어나왔다.
눈동자에 새파란 맹독이 어려 있는 것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퍼시발 렌토였다.
"네놈은 누구냐? 내 부하들은 어떻게 하고 들어온 거지?"
"따까리는 빠져있으라고 해도 덤벼들길레. 슥삭했지."
슬쩍 피로 잔뜩 얼룩진 단검을 들어올려 보여주자 퍼시발 렌토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났다.
"따까리는 빠져있으라고··· 그래, 나 퍼시발 렌토가 직접 왔다. 이제 어쩔 셈이지?"
그가 머리 위로 독기가 휘몰아치더니 거대한 도끼의 형상을 갖추었다.
언듯 보기만 해도 맹독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파괴력마저 위력적일 듯했다.
나는 단검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A급 빌런의 육체에 미각성자의 칼날이 통할 리도 없겠지만, 나 또한 상관 않고 핵을 쓸 수 있었으니까.
"무슨 소리야. 따까리는 빠져있으라니까?"
"···뭐라고?"
"너도 마도왕 따까리잖아. 내 손에 뒤졌던."
한심하다는 어조로 입가에 곡선을 띄우자, 피사발 렌토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의 머리 위에서 떠다니는 도끼 또한 그 크기가 배로 커졌다.
"애송이가 어디서 감히 뚫린 입이라고···. 되도 않는 헛소리로 그분의 죽음을 모욕하다니. 독에 버무러져 시체 한 줌 남지 않게 해주마!"
맹독을 내뿜는 거대한 도끼가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직격한다면 A급 영웅의 육체라도 무사하지 못할 일격이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린 뒤, 하늘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