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18화 (19/36)

제 18화 뜻밖의 제안

상쾌한 풀내음이 감도는 토요일 아침.

싸늘한 날씨에 몸은 추위를 느끼고 움츠러들어 있었지만, 반대로 머릿속은 바쁘게 회전하고 있었다.

'오늘 이시아를 만나는 사람이 클라디스가 아니라 내가 될 줄이야···.'

생각을 거듭할수록 내 활약으로 인한 나비효과의 영향력이 체감됐다.

많은 요소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겠지만, 가장 큰 변수는 마도왕과 주인공인 클라디스였다.

중반부에서 막강한 네임드 보스로 등장하는 마도왕은 스토리 시작도 전에 죽어버렸다.

마도왕은 원래대로라면 일전의 서울 습격 사건에서 협회장과 함께 클라디스의 아버지, S급 영웅 권성을 살해했어야 했다.

그는 이후에도 부하들로 하여금 실습 훈련 기간을 타 주조연들의 목숨을 노리도록 명령하며 크고 작은 이벤트에 개입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협회장과 권성은 멀쩡히 살아있고, 클라디스는 복수심에 피눈물을 흘리며 칼을 갈기는 커녕 정의롭고 친절한 성격을 지키고 있다.

인격적인 면에서 본다면 아버지의 죽음에 흑화하는 전개에 비할 수 없겠지만···.

'성장 속도가 원작에 비해 너무 느려졌어.'

인게임에서 독기를 품은 클라디스의 성장력은 무시무시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원통함.

마도왕이라는 불구대천지 원수가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이 두 가지 감정이 뒤섞여 유발된 자기 혐오로 인해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였으니까.

'괜히 매일 7시 마다 미츠키를 훈련시키는 게 아니지···.'

게임의 핵심인 주인공의 성장 속도가 대폭 느려졌으니, 그 빈틈을 내가 직접 메꿔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깊은 한숨이 우러져 나왔다.

"복잡하네, 정말."

아침부터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니 급격하게 당이 땡겨왔다.

편의점에 잠시 들러 콜라 한 캔을 산 뒤, 입에 물고 기숙사 정문을 나섰다.

그러자 보도 좌측에 주차되어 있는 검정 세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그레이 생도님 맞으십니까?"

"···일단 제가 그레이가 맞긴 한데, 누구시죠?"

"아, 그렇군요! 저는 청천 길드 비서실 소속, 주영흔 과장이라고 합니다."

그쪽에서 사람을 보낸 건가.

지리도 익힐 겸 대중 교통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

흔쾌히 주영흔 과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뒷자석에 올라탔다.

'외제 고급 세단이라 그런가, 승차감이 어우···.'

유독 게임 속 세계 들어오고 일상생활에 각종 호화로움이 깃든 느낌이었다.

나는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며 고심에 빠졌다.

이시아와의 만남은 첫 에피소드의 시작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벤트였기에 사소한 것 하나라도 실수할 순 없었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기존의 스토리 전개를 최대한 유지함과 동시에 클라디스의 성장을 가속하기 위한 아티팩트의 확보.

'원작에서 클라디스가 이시아에게 요구한 것은 마력증폭기의 사용이었지.'

마력증폭기.

영웅이 지닌 마력을 강화시켜주는 초고가 장비로, 어지간한 대형 길드라도 겨우 1대를 마련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금액에 비해 그 활용성은 그야말로 바닥.

개개인에 따라 실패 확률도 만만찮고,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석이 소모되는 녀석이라 길드장들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황금 세대의 선두 주자인 클라디스라고 해도 일개 신입생에게 사용 허가를 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시아는 클라디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길드 내부에서 반발이 심했지만 이시아는 길드장의 권한까지 사용해가며 마력증폭기 사용 허가를 내주었다.

대신, 그 대가로 이시아가 내건 것은 S급 마수 케르베로스 척살대 합류.

극한의 수련으로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이룬 클라디스의 모습에서 그녀가 가진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대타로 케르베로스 척살대에 합류하는 수밖에.'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른 척살대 인원들이 전방에서 주목을 끌때, 핵으로 마무리하면 간단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테니.

정작 중요한 부분은 '요정의 팔찌'와 '백귀의 유령검'이었다.

두 아티팩트는 클라디스와 미츠키에게 있어 최고의 궁합을 자랑했으니까.

착용자의 마나 감응력을 대폭 높여 주는 요정의 팔찌의 경우.

클라디스가 추후 검기를 넘어선 '검강'을 각성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백귀의 유령검은 후반부까지도 애용하는 미츠키의 전용 무기였다.

최대한 빨리 얻을수록 그녀의 성장이 빨라질테니, 이 기회에 챙겨야 했다.

유령검은 암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니 고생 좀 해야하겠지만.

"도착했습니다."

검은 세단이 청천 길드 사옥의 지하주차장에서 멈췄다.

차문을 열고 나서자 지하라고는 보이지 않는 고급진 인테리어가 나를 반겼다.

곳곳에 깔린 대리석 바닥은 주차장이 아니라 자동차 전시회에 온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화려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놀라움을 표하자, 주차를 마치고 다가온 주영흔 과장이 미소를 지었디.

"청천 길드의 사옥들은 전국 곳곳에 위치해 있지만, 이곳은 특히나 길드장님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습니다."

"그렇군요, 들어오면서 봤던 층수마저 예사롭지 않던데요."

국제 영웅 아카데미와 제일 가까이 위치한 사옥이라 그런지 확실히 기합이 들어간 디자인이었다.

물론 청천 길드 뿐만 아니라 인공섬에 지어진 길드 사옥들은 전부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 생도들이 제일 처음, 그리고 가장 많이 방문할 곳이니만큼 각 길드에서 사옥 설계로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쪽입니다."

주영흔 과장의 안내에 따라 최상층의 길드장 집무실로 올라가자, 짙은 흑장발과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의 미인이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수고했어요. 이만 나가도 좋아요."

"네, 길드장님."

그가 자리를 뜨자, 이시아가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키며 차 한잔을 권했다.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건 두 번째네요. 그레이 군 입장에서는 처음이겠지만요."

"맞습니다. 그래서 더욱 의외였지만요."

"흐음. 의외라니요?"

"한국을 대표하시는 이시아 영웅님께서 1학년 생도와 직접 면담을 나눌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 말에 이시아가 살포시 눈웃음을 지으며 입가에 호선을 머금었다.

"그저 그런 1학년 생도라면 틀린 말이 아니겠죠. 하지만 그레이 군은 평범함과는 궤를 달리하잖아요?"

마치 먹잇감을 탐내는 듯한 날카로운 눈초리.

동시에 S급 영웅의 기세가 뿜어져 나와서일까, 등 뒤에서 말아쥔 주먹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누군가 훔쳐보는 감각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부드러운 인상을 되찾은 이시아가 두 손을 벌리는 시늉을 했다.

"저도, 그리고 그레이 군도 잡담을 즐길 여유는 없을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할게요."

"제안이라 하시면···?"

"부길드장 자리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지금 내 귀가 똑바로 들은 것이 맞나?

"진심이십니까···?"

"네. 한 치의 과장이나 거짓도 없답니다. 저는 그때 그레이 군의 손끝에서 내려친 거대한 벼락을 목격했으니까요."

뇌리에서 격렬하게 울리는 경종에 표정 관리에까지 에러 사항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길드장이라니.

그녀가 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파격적인 대우를 제시할 줄이야.

"죄송합니다만··· 전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청천 길드의 부길드장 자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설정상 미국 다음가는 강대국인 한국을 대표하는 길드의 2인자이자, 영웅들의 별이라 불리는 이시아의 후계자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거절하자 그녀의 표정에 실금이 갔다.

"제 선에서 가능한 최고의 대우였는데··· 부족하셨나요?"

"아닙니다. 되려 과분한 자리이기에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평범한 1학년 생도 입장에서 본다면 이시아와 단독으로 약속 자리를 가지는 것 역시 로또나 다름없다.

이렇게 그녀와 안면을 트기만 해도 내게는 상당한 이익이었다.

하물며 부길드장 자리는 차후 스토리 전개를 대차게 꼬아버릴 테니 받아들이기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청천 길드로 데려오고 싶은데 말이죠. 따로 원하는 것이라도 있나요?"

"원하는 것은 있지요."

난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며 되려 제안을 건넸다.

"이시아 길드장님. S급 마수, 케르베로스 척살대를 구성하고 계시죠?"

"···그레이 군이 그 사실을 어떻게?"

"제가 그 척살대에 합류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역제안에 이시아가 크게 놀란 듯 눈동자를 치켜떴다.

"놀랍네요. 입단속은 나름 신경썼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죠."

"S급 마수는 녹록치 않은 상대 아닌가요? 제가 있다면 훨씬 수월할 겁니다."

아무리 S급 영웅이라고 해도 S급 마수와 싸운다면 목숨이 위험했다.

특히나 케르베로스는 S급 마수 중에서도 위험 등급으로 분류된 놈이었다. 이시아 입장에서는 꽤나 부담스러운 상황이이었다.

"원하는 게 있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그게 뭔가요?"

사뭇 긴장한 듯한 그녀의 말투에, 나는 한차례 숨을 고르고서 대답했다.

"요정의 팔찌와 본드래곤의 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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