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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15화 (16/36)

제 15화 황금의 레스토랑

어느덧 오후를 훌쩍 넘긴 바깥은 깜깜하니 어스름이 지고 있었다.

검푸른 이채가 은은하게 서린 달빛은 가로수의 잎새에 튕겨져 나와 거리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기숙사에 입주한 이후 하교 후에는 체력 고갈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드느라 야경을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이 정도 경치일 줄 알았으면 진작 나와서 볼 걸. 낭비한 시간이 아깝네···."

미각성자의 육체로 국제 영웅 아카데미의 일정을 따라가는 것은 하루하루가 고행이었다.

실기라도 있는 날에는 넘어갈 듯한 숨을 간신히 잡은 채 비오듯 땀을 흘리는 게 일상이었다.

정말 죽을 것 같다 싶으면 핵을 사용해 일시적으로 신체 강화를 하긴 했다만, 하루 3번이 한계였기에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주먹으로 결린 어깨를 두드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헤인즈 레스토랑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이곳이 인공섬이라 해도 서울 시내 못지않은 인프라를 구축한 턱에 야간의 번화가는 늘 사람이 넘쳤다.

특히나 헤인즈 레스토랑은 인공섬 최고의 명물이라 소문이 자자해 언제나 시끄럽고 북적였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 한 번 올 때마다 돈 수백은 깨질텐데. 다들 돈이 많나 보네."

하긴 국제 영웅 아카데미 학비 또한 억 소리나게 비쌌다.

재능과 자격은 충분하나 금전적으로 쪼들리는 이들을 위한 장학 제도는 활발히 운영되고 있었으나, 그 정도 실력자들은 전학년을 통틀어서도 드물었다.

그만큼 장학금을 타낼려면 무수한 경쟁률을 뚫어내야 했다.

부유층이 아닌 생도들 입장에서는 생활비 또한 만만찮을 것이기에 더욱 장학금에 목숨을 걸고 임했다.

'다행히 나는 전액장학금을 받았지만.'

덕분에 돈 당분간 돈 걱정할 일은 없겠지만 스토리 후반부로 갈수록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했다.

물론 내 손으로 직접 벌 수도 있다.

각종 미래 지식을 이용한 주식이나 장비 개발 등으로 크게 한 탕 해먹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뒤에 자금줄을 둔 채로 돈을 뽑아먹는 것과는 효율성에서 비할 수가 없었다.

"채선아가 나한테 얼마나 호의적일지가 관건이네."

영웅으로서의 기량도 훌륭했지만, 채선아의 진가는 기업 경영에서 빛을 발했다.

오늘 있을 그녀와의 만남에서 좋게 첫 단추를 꿰야 했다.

손에 번호표를 진 채로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카운터에 다가가자,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머금으며 팬과 종이를 건넸다.

"예약명과 연락처를 적어 건네주시면 번호표를 발급해드리겠습니다."

"아뇨, 이미 일행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어서요."

"그러시다면 예약하신 분의 성함을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채선아요."

그러자 직원이 흠칫, 몸을 떨며 귓가의 마이크에 대고 빠르게 뭐라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지 싶어 따지려 했지만 좌측해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말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VIP의 일행분이시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VIP라는 단어에 주변 행인들이 술렁거렸다.

"헤인즈 레스토랑의 VIP이면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야? 여기 생도들 다 금수저잖아."

"어디 재벌 그룹 자제라도 되겠지. 안그래도 이번 신입생 중에 대한 그룹 후계자도 있다던데."

"대한 그룹? 대박이네, 진짜."

다들 집안에 돈 깨나 있다는 사람들도 대한 그룹이라는 이름에 혀를 내둘렀다.

다시 한번 국내 최고 그룹의 재력을 실감하며 직원의 안내에 따라 걸어들어갔다.

입구 근처 일반석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테라스에 위치한 화려한 원형 테이블.

연붉은빛 조명이 우아하게 비치는 자리에는 이미 A동 멤버들이 도착해 모여있었다.

"늦었다고, 그레이! 이쪽으로 와서 앉아."

"초행길이라 그런지 조금 해맸네, 미안."

클라디스와 올리비아 사이에 위치한 빈자리에 가서 앉자, 김호락이 눈을 빛내며 입가를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렇게 보네! 여러모로 사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 넌 하루 일정만 마치면 귀신같이 어딘가로 사라지니까 말이야."

"맞는 말이에요. 혹시 비밀 장소에서 수련이라도 하시는 건 아니죠?"

입가를 가리며 눈웃음을 짓는 올리비아.

얼핏 보면 이성을 유혹하는 몸짓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상대의 마력을 가늠하고 중임을 알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나를 노려보던 그녀는 결국 여유를 잃은 채 눈동자까지 부릅떠가며 내 마력을 살폈지만, 곧 포기했는지 헛웃음을 내뱉었다.

"쳇, 정말 철두철미 하시네요. 설마 저녁 자리에서까지 힘을 숨기고 계실 줄이야."

올리비아가 툴툴거리며 물잔을 들어올리자 채선아는 혀를 찼다.

"하여튼 올리비아 너. 이때다 싶어 수석을 음흉하게 훔쳐보려고 한 거야?"

"클라디스만 해도 버거운데 그레이 씨는 심지어 태산호 교관마저 맞상대하는 괴물이라고요? 언제나 방심하면 안되는 법이죠."

그토록 기다리던 주제가 나오자 답지 않게 차분함을 유지하던 김호락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그 대련이 얼마나 궁금했던지! 이봐, 그레이. 대체 어떻게 그 악마 교관을 상대한 건지 말해줄 수 없겠어?"

흐음.

나는 눈을 돌려 자리에 앉은 4명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곳에 자리한 클라디스, 올리비아, 김호락 그리고 채선아는 모두가 엘 시드의 핵심을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이다.

'조금이라면 내 능력을 밝혀도 상관없겠지.'

"우선 그날 대련을 봤다면 알겠지만, 내 각성 능력은 하나가 아니야."

"뭐라고? 그럼 설마···."

"2차 각성이라도 하신 건가요?"

"역시 대단하다니까! 나 또한 2차 각성을 한 몸이라고."

당연히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고 핵을 가지고 빙의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과 스토리를 진행한다면 자연스럽게 내 능력을 보여야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조금 지어내서 말하는 것이 현명했다.

"···2차 각성도 아니야."

""으응···?""

2차 각성이란 추측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을 표하자 흥미가 깃들었던 4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각성 능력에는 갯수의 제한이 없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높낮이의 말투였지만 그 여파는 달랐다.

조용히 경청하던 4명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무언으로 서로를 지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총대를 맨 김호락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갯수의 제한이 없다니?"

"말 그대로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여러 개라고."

말을 마치고 태연하게 물로 목을 축이자 채선아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자 절로 속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먹혔네.'

채선아는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하고 있다.

사람이나 물건에 관계없이, 대상이 지닌 잠재력과 가치를 알아보고 활용하는 능력에 특화되어 있다는 뜻.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난데없이 비상벨이 울리는 상황일 것이었다.

'각성 능력에 있어 갯수 제한이 없다는 건 곧 무한한 잠재력과 가치를 지녔다는 의미지. 채선아 입장에서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 거다.'

"실례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주문하신 저희 헤인즈 레스토랑의 시그니쳐 코스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한차례 테이블을 강타한 충격 발언에 말소리가 끊긴 시점에서 타이밍 좋게 서빙이 시작되었다.

에피타이저로 나온 것은 모니터로만 보던 황금 스튜.

주방장의 특급 레시피로 조리된 소고기 스튜 위의 겉표면에 황금을 녹여 골고루 뿌린 자태였다.

식욕을 절로 유발하는 감칠맛에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시는 황금빛 색채는 일개 스프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훌륭했다.

어색하던 분위기도 잠시, 천천히 스튜를 떠올려 입에 집어넣은 클라디스가 감탄을 자아냈다.

"···생각보다 훨씬 맛있어. 넘기는 순간이 아쉬울 정도라니."

"나쁘지 않네요. 아카데미 지부 내에 위치한 레스토랑 치고는 정말 훌륭해요."

그 까다로운 올리비아마저 호평을 하다니, 미슐랭이라는 이름값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다들 만족한다니 다행이네."

태연하게 웃으며 화답하는 채선아.

그러나 그녀는 식사 도중 연신 내 쪽을 훔쳐보며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메인 디쉬로 겉표면에 황금을 감싸 익힌 미디움 스테이크까지 해치우자, 기어이 고민만을 거듭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 그레이, 혹시-"

채선아의 말을 끊고서는 울려대는 휴대폰.

잠시 실례를 구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자 다들 의외라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

"휴대폰이 특이하네? 저런 모델을 요즘에도 구할 수 있는 건가?"

"제가 알기론 옛날에 단종된 구형일 거에요. 꽤 올드한 스타일을 좋아하나 보네요."

김호락과 올리비아는 신기해하며 내 휴대폰을 바라보았지만, 채선아는 오직 화면에 적힌 번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알고있는 연락처인듯,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한층 더 커졌다.

"그 번호··· 이시아 길드장님?!"

"뭐??"

이시아 길드장이라니.

단연 한국 최고의 길드라는 청천의 수장이 어째서 나에게···

'그래, 그러고보니 일전에 협회장이 직접 나에게 연락을 했었지. 이시아 측에서 직접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고.'

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구석으로 향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국제 영웅 아카데미 1학년 생도, 그레이입니다."

"어머, 반가워요."

고요하지만 힘이 실린 음조가 휴대폰 너머로 울려퍼졌다.

"저는 청천 길드의 길드장, 이시아라고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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