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14화 (15/36)

제 14화 본격적인 연결고리(2)

간신히 몸을 가누며 대련장을 내려온 미츠키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격렬한 대련으로 머리는 산발처럼 흐트러지고 팔뚝과 어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런 육체적인 고통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했다.

저런 폭발할 것만 같은 분노를 애써 눌러참으며 부들거리는 미츠키의 모습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안쓰럽네···.'

미츠키는 명실상부 내 최애캐였다.

주인공보다 더욱 애정하며, 주조연을 통틀어 가장 공들여 키웠던 캐릭터.

내게 있어선 제 2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현실과 그리 다름없는 게임이었던 엘 시드에서 구현된 그녀는 나 자신과 너무나도 닯아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녀를 성장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했던 거였지.'

어릴 적부터 가져오던 꿈과 목표를 동경해오던 우상에게 가로막혀 포기했던 내 과거는, 그저 숨기고 싶은 오점에 불과했다.

그녀의 열등감이 검술이라면, 내 경우에는 피아노로부터 비롯되었다.

8살도 채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처음 본 또래 여자 아이의 아름다운 연주에 감명받아 그만 그 길을 택해 버렸으니까.

피아니스트라는 선택을 처음부터 후회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 재능이 있었고, 한창 실력이 늘고 상을 연달아 휩쓸며 자만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국내를 넘어 국제 대회에서까지 내 실력은 통하지 않았고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내리막을 달렸다.

점점 슬럼프의 주기가 잦아졌고 스스로를 낮추며 자기혐오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감을 얻기 위해 참석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어린 시절 보았던 그 여자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녀는 나 따위와는 태생부터가 틀린 듯, 세계 최고의 대회 가운데에서도 가장 밝게 빛나고 있었다.

'후, 어울리지 않게 과거 회상은 무슨···.'

고개를 돌려 상처투성이인 채로 홀로 서 있는 미츠키를 쳐다보았다.

클라디스만이 주변의 환호를 받고 있었지만 익숙하다는 듯, 그녀는 제 갈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는 미츠키를 보고 추하다면서 손가락질을, 또 다른 이들은 그릇도 안되는 년이 주제 넘는 자리를 넘본다면서 비웃었다.

그럼에도 미츠키는 무너지지 않았다.

자기 혐오에 빠지더라도 지독한 독기와 집요함으로 무장한 채 한 발자국씩 걸어 올라갔다.

아무리 게임 내 스토리라고는 해도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도망을 택한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런 그녀를, 난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존경하고 있었다.

"아무리 미츠키라도 클라디스한테는 역부족이네···. 이번에는 다를 줄 알았는데."

"황금 세대 중에서도 정점이라잖냐. 검성도 미친 재능이라면서 놀랐는데 말해 뭐하겠냐?"

- 까드득.

어금니를 통째로 갈아먹을 듯한 흉악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이미 무대 뒷편으로 퇴장한 패배자의 소리는 관중들에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검선이네요, 클라디스. 이렇게 되면 제가 1등을 하기가 힘들어진다고요?"

"저는 1등은 바라지도 않아요. 나중에 조별 수행 능력 평가 때 같은 팀이 되기만을 기도할 뿐이죠."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어차피 지금 1등은 넘사벽이잖아."

클라디스 주변에 몰려있던 생도들이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올리비아는 남들 모르게 싱긋 웃음을 지었고, 클라디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 손을 흔들었다.

얼떨결에 주목받게되어 뻘쭘했지만 대충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역시 주인공이구나. 어디서든지 인기가 많네.'

빛을 받아 고급지게 반짝이는 금발에 마치 사파이어를 연상케하는 아름다운 눈동자.

내가 등장하기 전까지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던 클라디스의 인기는 단 한순간도 식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사이, 미츠키는 어느새 뒷문을 통과해 비틀거리는 다리로 회복실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걸어갔다.

"···뭐야?"

미츠키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눈앞의 사냥감을 잡아 죽아죽일 듯한, 짐승을 연상케하는 살벌한 눈초리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실제로 핵을 쓰지 않는 이상, 난 그녀에게 있어 연악한 먹잇감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직 1번은 더 쓸 수 있었기에 과감하게 말을 꺼냈다.

"방금 대련 잘 봤어. 아쉽더라."

"아쉽다고···?"

- 스르릉.

반응할 새도 없이 뽑아져 나온 칼날이 목 옆에서 번쩍였다.

"어줍잖은 위선 떨면서 함부로 지껄이지마. 짜증나니까."

타인을 자신의 선 안에 두지 않으려는 배타적인 행동.

허나 그런 모습을 보일수록 그녀에게서 과거의 내 자신이 투영되었기에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열등감이란 감정은, 언제가 되었던 결국은 버려야 하는 법이야."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했어?"

"몰라서 되묻는 건 아닐텐데."

미츠키가 칼날을 비틀어올려 목 부근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주르륵, 하며 미량의 붉은 선혈이 그녀의 검을 타고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난 비릿하게 흘러나오는 피 냄새를 무시하고 맨손으로 일본도를 잡고 옆으로 비켜냈다.

"검으로 그림자를 휘두르려 하지마."

"···?"

순간, 미츠키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예상치 못한 영문 모를 한마디에 의문이 가득 피어오른 듯했다.

"네 진정한 힘은 검이 아닌, 그림자로부터 비롯될 테니까."

수백 시간을 플레이하면서 미츠키를 성장시켜왔다.

당연히 그림자 능력의 장단점과 육성 방법, 그리고 성장 한계치까지 모조리 꿰고 있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가성비가 좋지 않다며 미츠키의 빌런화 루트를 대거 이용하며 그녀를 버렸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림자의 사신'이라 불리게 될 그녀의 잠재력을.

"너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스스로를 가로막은 벽을 깨부수고 싶다면 나를 찾아와."

적어도 이 정신 나간 세계를 클리어하려면, 미츠키의 성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내 손으로 그녀의 성장을 가속시켜야만 한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 * *

팬트하우스가 위치한 기숙사 A동.

전학년을 통틀어 최상위 생도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1학년의 올리비아, 김호락, 클라디스 그리고 미츠키도 전부 이곳에 배정되어 있었다.

"다시봐도 진짜 호화롭네···."

아무리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라지만 일개 생도의 방에 샹들리에까지 달려있다니, 서민 생활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띠링!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알림음.

화면을 켜 확인하자, 올리비아가 나를 단체 톡방에 초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 올리비아: 안녕하세요, 그레이 씨. 1학년 A동 모임이라 초대해봤는데, 괜찮죠?

- 김호락: 오, 그레이? 반가워, 난 김호락이다!

- 클라디스: 안녕.

- 채선아: 그레이라면 아까 그 사람?

'그 와중에 미츠키는 답장도 안 남겼네.'

- 올리비아: 입학 기념으로 A동 멤버 전원 헤인즈 레스토랑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수석께서는 당연히 오실거죠?

- 김호락: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그레이! 너랑 한 번쯤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음, 곤란한데.'

헤인즈 레스토라이면 아카데미 내부에 위치한 레스토랑 중 가장 고급지고 비싼 곳이었다.

시각적으로나 미각적으로나 흠잡을 데 없어 미슐랭으로 선정된 맛집이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셰프가 즐비했다.

물론, 그에 따른 가격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협회에서 금전적인 지원을 받았긴 했지만 애초에 돈이 많은 집단은 아니었기에 한 끼에 수백만 원이 넘는 곳을 갈만한 여유는 없었다.

- 나: 미안, 그곳은 너무 비싸서. 그런 곳을 갈 돈은 없거든.

- 올리비아: 돈 걱정이라면 안하셔도 되요. 우리 모두 선아한테 얻어먹는 거니까요.

- 채선아: ······.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재벌 3세, 채선아.

국내 최대 그룹이자 세계 부호 순위 20위 안에 들어가는 대한 그룹의 외동딸이자 후계자였다.

그녀는 대한 길드와 연관될 수 있는 최고의 연줄이기도 했다.

- 김호락: 먹어본다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다! 와서 남자들의 단련에 관해 심도 깊은 토론도 해 보자고.

호쾌하고 마초적인 성격을 지닌 김호락은 내가 모임에 참석하길 열렬히 바라는 눈치였다.

강함을 인생 최고의 기준이라 생각하는 근육뇌답게 전체 수석인 나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듯했다.

- 김호락: 난 심지어 아까 회복실에 누워있느라 태산호 교관과의 대련도 못 봤다. 와서 직접 이야기 해주면 안 되겠나?

- 클라디스: 음, 그건 나도 듣고 싶어.

금전적으로 무리할 필요도 없고, 주조연들과 친해질 기회니만큼 잠시 망설인 뒤 곧바로 가겠다고 답했다.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수백만 원 어치의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 나: 알았어, 갈게. 그런데 혹시 미츠키는 안 와?

- 올리비아: 그 사람은 과묵하고 혼자 있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 김호락: 어이, 미츠키! 오랜만에 뉴페이스인데 안 올 거냐?

- 미츠키: 꺼져.

아까 조금 과하게 몰아붙였기 때문일까, 미츠키는 오지 않을 생각으로 보였다.

"최대한 빨리 설득시켜야 나도 편해질텐데."

나 역시 절대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트레스의 저주와 반사경의 저주에 의해 핵에 너무 많은 제한이 걸려있는 상태라 목숨줄을 연장하기 위한 히든피스들을 찾으러 나서야 했다.

마력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종류만을 엄선해서.

나는 다가오는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재빨리 세수를 마친 후 교복 재킷을 걸쳐입었다.

게임에서만 보던 헤인즈 레스토랑의 황금 스튜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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