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8화 (9/36)

제 8화 새로운 수석 입학생(2)

입학 시험 역대 1위.

그 말은 강당 내부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트렸다.

"지금 뭐라고···?"

"세상에! 그냥 1위도 아니고, 역대 1위?!"

예상치도 못한 소식에 다들 멍하니 입만 벌리고 수군거렸다.

각각 4위와 5위를 차지한 김호락과 미츠키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부릅떴다.

특히나 미츠키의 반응은 꽤나 격양적이었다.

'클라디스 가츠필드를 넘어섰다고?'

미츠키, 그녀가 평생동안 넘고자 했던 상대이자 극도의 열등감을 가진 원인.

자국인 일본 내에서는 수도 없이 천재라 불리었던 그녀가 좌절했던 이유는 클라디스의 압도적인 재능 때문이었다.

같은 나이, 같은 검술계 각성자.

언론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춰지면서부터 둘은 간간히 비교대상으로서 화자되었다.

1등은 언제나 클라디스, 그녀를 따라갈 수 없는 만년 2등 열등생은 바로 자신.

이미 신입생치고는 충분히 뛰어난 실력이었지만, 타고난 자존감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라이벌이라 생각했지만 한 번도 이겨 본 적 없었기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레이라는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평생을 염원하던 것을 이루어냈다.

"···씨발."

미츠키의 뇌리에 짜증과 동시에 비참함이 들이찼다.

그녀는 독기를 머금고 단상으로 올라올 그레이라는 놈을 기다렸다.

반면, 클라디스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미츠키와 달리 언제나 1등이었던 그녀에게 있어 이번의 패배는 꽤나 씁쓸했을 뿐이었다.

질투보다는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승부감이 불타오르기도 했다.

"입학 시험 역대 1위라··· 대단하네."

순수한 인정을 머금은 감탄사.

그러자 올리비아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 클라디스 양. 분명 1등을 뺏긴 걸로 분해할 줄 알았는데요?"

"분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냥 1위도 아니고 역대 1위라는 기록은 대단하잖아."

그냥 1위도 아닌 역대 1위.

강당 안의 내로라하는 실력자들과 유명 인사들이 괜히 소란을 피우는 게 아니었다.

국제 영웅 아카데미는 모든 영웅들이 거쳐야하는 관문인 만큼, 대다수의 영웅들을 배출한 기관이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다른 아카데미와는 다른, 세계 영웅 연합에서 직접 설립한 명문 중의 명문.

과거에 이름을 날렸던 S급 영웅들을 비롯해 현역으로 뛰고 있는 S급 영웅들부터,

5명의 왕들 중 한명이자 전세계 영웅들의 정점이라 불리는 '수호왕'역시 국제 영웅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역대 1위를 달성했다는 뜻은 수호왕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인재라는 뜻이었다.

"역대 1위라니···! 왜 그만한 인재가 이제서야 알려진 거야?"

"인사팀장! 일 이따위로 할거야? 입학 시험 역대 1위야, 역대 1위! 그 정도의 천재를 내가 입학식에서 알게 되는 게 말이 돼?!"

"부길드장! 당장 정보팀 연락 돌려서 확인해봐!"

단 한마디가 몰고온 어마어마한 폭풍.

언제나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웃음을 짓던 대형 길드의 수장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고, 기자들은 연신 카메라 각도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 드디어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화제의 생도가 몸을 일으켰다.

그레이라는 이름이 걸맞는 짙은 회색빛의 머리칼과 눈동자.

남녀노소 구분없이 감탄을 자아낼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남이었다.

그는 현재 상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과 태평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사실은 그가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얼어붙은 상태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일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날아와 박히는 수백, 수천 개의 눈짓을 외면한 채 단상에 올라가자, 엘게나 학장의 맑은 목소리가 기분좋게 울려퍼졌다.

"그레이 생도가 이룬 놀라운 성취에 정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뛰어난 인재가 본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을 기림과 동시에 전체 수석 자리를 거며쥔 것에 축하를 드립니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게 극찬을 남발하자, 스카우터들은 더욱 애긴장이 탔다.

그들이 채 손을 내밀어보기도 전에 영입 제안 0순위 대상은 너무나도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자, 그러면 수석 입학생의 선서문 낭독을 마지막으로 입학식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정숙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관심 속에서, 그레이는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애써 움직이며 겨우 입학식을 마쳤다.

* * *

"와··· 진짜 두 번은 못 하겠다."

진이 빠져 푹신한 침대로 몸을 던지자 긴장에 굳어있던 몸이 아우성쳤다.

욕조에 물 받아서 목욕이라도 해야 하나 싶은 찰나, 휴대폰에서 끊이지 않고 알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성 길드 부길드장, 태양 길드 부길드장, 세계 영웅 연합 이사에··· 이건 또 뭐야? 파이리 길드의 세레스틴 길드장까지?"

파이리 길드.

도성 길드나 태양 길드도 국내에서 꽤나 힘쓰는 대형 길드였지만, 파이리 길드는 그들과는 급이 달랐다.

자국인 프랑스 내에서는 독보적인 위치였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길드였다.

길드장 세레스틴의 경우 게임에서도 여러 번 등장할 만큼 비중 있는 조연이었다.

"유명해지니까 이런 점이 좋긴 하네."

지금은 현실이 되어버린 이 게임을 최종적으로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결국 주조연들과 엮여야하는 운명이었다.

대부분이 아카데미 내에 있다지만, 바깥에서 활동중인 이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이래저래 안팎으로 굴러야 하는 신세였다.

'······일단 지금은 조금 쉬자.'

아카데미 기숙사 동에서도 가장 좋은 펜트하우스.

럭셔리 아파트는 씹어먹을 정도로 호화로운 내부에 한눈에 도시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최고급 전망에 절로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 호사라면 조금은 즐겨도 되지 않을까?

무거운 고민들을 한껏 털어내려면 술만한 게 없었지만, 지금 신분으로는 구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 띠링.

무수히 울려대던 소셜 미디어 알람음이 아닌, 메세지가 도착했다는 소리.

누군가 싶어 화면을 확인하니 협회장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입학식은 어땠는지, 기숙사는 어떤지 등 안부가 궁금하다는 내용이었다.

누가 봐도 통화를 원한다는 말투에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레이 생도님이십니까?"

"네, 문자 보고 감사 인사차 전화드렸습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주신 덕분에 잘 입학했네요."

"도움이 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전화 너머 방긋 웃고 있느 박태호 협회장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나한테 하고 싶은 부탁 비스무리한게 있다는 걸 텐데.

"혹시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

잠시 말문을 잃은 그가 한껏 진지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레이 생도님을 사적으로 만나고자 하는 분이 계셔서 연락드렸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한국 영웅 협회장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

흥미가 돋았다.

국내를 넘어 세계 영웅 연합에서도 그의 입김은 결코 약하지 않았으니까.

한국 대통령이라도 되는 건가?

"그게 누구죠?"

"청천 길드의 이시아 길드장님입니다."

···뭐? 잘못 들은 건가?

생각치도 못한 이름에 놀란 난 벌컥거리며 물을 들이켰다.

이시아.

단연 국내 최고의 길드라고 불리는 '청천'의 길드장.

한국 최강의 영웅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그녀는 게임 '엘 시드'에서도 비중 높은 주연 중 한명이었다.

주인공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 중 한명이자 히로인 후보였으니까.

'클라디스가 주인공인 이상 히로인은 아니겠지만.'

놀란 마음을 가다듬기도 잠시, 재빨리 협회장에게 동의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이시아 길드장님의 부탁이라면 거절하기 어렵겠죠."

아무리 협회장이라 해도 이시아는 한국을 책임지는 핵심 영웅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이시아가 먼저 부탁을 해온다면 협회장으로서도 마냥 무시하기는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나한테도 크게 이득이기도 했고.

"곤란한 부탁일 수도 있으실 터인데··· 감사합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십시오."

그가 감사를 전하며 전화를 끊자, 다시금 넓은 방 안에는 고요함이 가라앉았다.

"이제는 진짜 좀 쉴 수 있겠네. 내 팔자에 언제 이런데서 살아보냐."

난 냉장고에서 캔음료 하나를 꺼내 멍하니 침대에 기대었다.

넋 놓고 호화로운 내부를 감상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가면 게임의 정사대로 진행이 될려냐?'

현재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두 가지였다.

바로 핵과 게임의 잡다한 설정들을 비롯한 미래의 지식들.

허나, 내가 가진 그 지식들은 '주인공'으로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 적용되는 것들이었다.

나라는 존재의 등장으로 혹시 꼬여버린 것이 아닐까 걱정이 들었지만, 클리어의 핵심을 떠올리자 다시금 안심이 되었다.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에피소드'를 넘기는 것이니까.

실제로 '엘 시드' 게임 역시 높은 자유도와 공략에 얽매이지 않은 다양한 플레이 방식으로 유명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네."

내일이면 시작될 아카데미 첫 날을 생각하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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