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역사적인 입학시험
일주일 뒤.
한국 영웅 협회장의 도움을 받아 국제 영웅 아카데미의 특별 입학 시험을 치룰 수 있었다.
본래 그 어떤 고위층의 자식이라 한들 범세계적으로 드높은 아카데미의 위상을 고려해 특례 입학은 절대 받아주지 않지만, 협회장이 직접 나서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그가 차후 내게 한 말을 들어보면 진짜 사정은 또 다른 듯했다.
"허허, 제가 뭘 그리 수고를 했다고 그러십니까. 이미 아카데미 측에서 그레이님과 관련한 대다수의 정보를 입수했더군요. 학장의 얼굴에서는 웃음꽃이 피어나더군요."
최강자 중 하나로 군림하던 왕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마도왕을 죽이고 사흘 뒤, 내가 그의 시체를 밟고 서 있는 사진과 함께 어마어마한 수의 기사가 인터넷을 휩쓸었다.
'뭐, 대부분이 합성 혹은 단순 오보라고 취급했지만.'
현재 여론은 마도왕의 죽음 뒤에는 다른 왕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기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꽤 있었다.
"저···· 그레이 님. 헌데···"
"말씀하세요, 협회장님."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아카데미 인사위원회에서 문의가 들어왔습니다. 과거 행적이 이상할 정도로 없으시다고··· 그쪽에선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같다 말하더군요."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원래 대한민국에서의 내 신원은 이 세계에 오면서 완전히 삭제되었고, 그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대학교 1학년생 이유준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협회장에게 부탁해 새 신원을 만들었다.
그레이.
내가 지금부터 쓸 이름이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지만, 뉴클리어 런쳐의 힘을 쓰고 난 뒤 내 머리색과 눈동자가 회색으로 물들어버려 그렇게 지었다.
추측이지만 핵 사용에 대한 단순한 부작용일 것이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어서요. 그냥 새로 만든 신원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까?"
"아뇨, 전혀 아닙니다. 인사위원회에서도 단순히 문의를 했을 뿐,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어지간히 간이 부은 이상 요구할 리가 없을 테지만···
뒤에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협회장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알던 한국의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여전히 입이 벌어질 정도로 커다란 빌딩과 도로들, 그리고 길거리를 가득 매운 인구수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현재 하는 생활에는 전혀 위화감이 없다.
협회에서 거처로 마련해준 초호화 호텔과 통장에 보이는 수많은 돈. 그리고 옆에서 언제나 충실하게 보좌하는 요원들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일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화롭게 느껴졌다.
어제 있었던 입학시험에서는 짜증이 나서 시험장 전체를 날려버릴 뻔했으니까.
* * *
강백호는 은퇴한 전 A급 영웅으로, 여전히 뛰어난 실력을 유지하고 있는 아카데미의 교관이었다.
다만, 입학시험을 담당하는 일은 은퇴하기 전부터 숱하게 해왔기 때문인지 지금에 와서는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매년 치루는 시험과, 고만고만한 신입생들.
조금 뛰어나다고 해봐야 딱 눈에 조금 더 띄는 정도.
전 A급 영웅의 입장에서는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그러나 더욱 실망스러웠던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이였다.
국제 영웅 아카데미의 생도라는 영광만을 쫓으며 스스로의 발전은 뒷전으로 두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화려함과 한 방의 강력함만을 어필하는 수준 낮은 각성자들은 강백호의 눈쌀을 절로 찌푸리게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입학 시험이 더이상 기다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척 보기에도 묵직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진짜'들의 등장.
추후 언론에서 황금세대라고 불리게 된 그들은 박한 평가로 유명한 그에게서도 감탄을 자아냈다.
한명 한명이 정숙하게 숙련된 강함을 선보여주었고, 그중에서도 전체 수석은 정말 급이 달랐다.
여전히 뇌리에 남는 그 이름.
클라디스 에버란트.
권성 선배의 딸답게 압도적으로 발달된 각 능력치가 훌륭한 군형을 자랑하며, 화려하나 동시에 절제된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광경은 현역 영웅을 보는 것만 같았다.
최소 상위 c급 영웅 이상.
당장 현장에 나가도 꽤나 대우를 받는 위치였다.
이제 막 입학하는 신입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강백호는 클라디스, 그녀야말로 차세대 인류를 이끌어나갈 최고의 영웅이 될 재목이라 생각했다.
···한 괴물이 특별 입학 시험을 치르러 오기 전까지는.
* *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학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특별 입학 시험이라니요! 그런 것은 아카데미 설립 이래 단 한번도 시행된 적이 없습니다."
"강백호 교관님."
"네, 학장님."
"그냥 하라면 좀 하세요."
대체 학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클라디스 에버란트를 비롯한 훌륭한 새싹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떴던 기분이 단번에 곤두박칠쳤다.
"학장님··· 하지만 결국 이건 특례 입학이나 다를 바 없잖습니까."
"특례 입학은 무슨. 입학 시험 치룬다니까?"
"하지만··· 특별 입학 시험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생도들이랑 다 똑같이 치를 겁니다. 단지 시기를 놓쳐서 그럴 뿐이지."
"제 말은···! 그러한 기회 자체가 특례가 맞잖습니까!"
국제 영웅 아카데미의 학장, 엘게나 아담스는 짜증나다는 듯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녀는 직후 날선 목소리로 내게 쏘아붙였다.
"나 두 번 말하게 하지마, 강백호 교관."
톱클래스 S급 영웅에게서 받는 위압감.
그것은 게이트에서 출몰하는 위험 등급 마수하고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온몸을 옥죄어오는 거대한 힘에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 예비 생도 시험장에 와있다니까 빨리 가봐요. 괜히 기다리게 하지말고."
기다리게 하지말라고? 게다가 시험도 치르지 않고서는 예비 생도라니?
평생을 강직함과 정직함에 맡기고 살아온 나로서는 너무나도 치욕스러운 처사였다. 얼마나 높은 분의 자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검증하고 또 검증할 것이다.
절대로 특례 의혹 같은 쓰레기같은 뉴스가 나오지 않도록!
화를 식히며 시험장으로 걸어내려가자 한 소년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의외로 기자들과 길드 관계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 옆에는··· 놀랍게도 한국 영웅 협회장이 함께였다.
'저분의 조카라도 되는 건가?'
어쩐지 학장님께서 편애하시더라니.
그렇다고 해서 절대 봐주는 일은 없을 테지만.
"그레이 시험자. 맞나?"
짙은 회색빛이 감도는 머리칼과 눈동자.
그리고 특유의 나른한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단순한 기우라 치부했다.
만약 이곳에서 생도로서의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저 뒤에 서 있는 기자들과 길드들 앞에서 망신을 당할 것이다.
"좋아, 이제부터 시험을 시작하겠다. 내용은 간단하다. 가상 괴수와 지쳐서 떨어져 나갈때까지 싸우면 되는 거다. 쓰러뜨릴 때마다 등급이 올라가니, 체력 분배에 신경쓰도록."
국제 영웅 아카데미는 그 드높은 위상만큼 입학이 어렵다.
가상 괴수의 등급은 쓰러뜨리는 한 끝없이 올라가며, 퇴치 불가 판정을 제외하고 S급 까지 올라간다.
그 수준이라면 A급 영웅이었던 나에게조차 불가능하다.
"시작!"
그레이가 시험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상 괴수가 소환되었다.
처음 나온 것은 F급.
단순 신체 강화자들도 죽일 수 있는 등급이다.
그는 단순히 주먹을 휘두룸으로써 괴수의 머리를 터트렸다.
그다음은 E급.
군대가 직접 나서서 퇴치해야 하는 등급이다. F급 마수와는 꽤나 차이가 난다.
이번에도 그는 펀치 한 번으로 머리를 터트렸다.
'힘은 좋은가보군.'
등급이 낮다 한들 E급을 한 번에 죽이는 것은 까다로우니까.
'하지만 D급 부터는 다르다.'
D급은 일반 각성자나 군대로는 상대가 되지 못하는, 영웅들이 직접 나서야 하는 마수들이다. 그래서 영웅들의 최하 등급도 D급부터 시작한다.
이번에도 그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머리를 터트렸다.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했다.
'저게··· 주먹 한 번으로 죽는다고?'
근력 계통 각성자인가. 그렇다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만.
하지만 이변은 계속되었다.
A급까지 올라갈 때까지, 그는 오직 일격으로 단번에 머리를 터트렸다.
"마, 말도 안돼!"
"저게 뭐야! B급 마수가 신입생 시험자한테 한 번에 터져죽었어!"
"저 소년 대체 누구야?!"
믿을 수 없었다.
B급 마수를 일격에 죽이는 것은 나조차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레이라는 저 소년이··· A급 영웅을 능가한다는 것인가?
'차, 착오가 있는 건가?'
드디어 등장한 A급 마수.
가상이라 하더라도 뛰어난 구현력 덕분에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도 긴장이 될 정도였다.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 아무런 기술도, 요령도 없는 단순한 지르기.
하지만 그 여파는 상식을 초월했다.
- 콰아아아앙!
이전과는 달리 굉음이 울리며 A급 괴수의 몸통 한가운데에 구멍이 났다.
커다란 구멍이.
""······""
떠들석하던 시험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방금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엔 여기 있는 모두가 너무나도 놀란 듯했다. 나를 포함해서.
고요함이 맴돌던 시험장을 일깨운 것은 기계음의 목소리였다.
<마지막 시험. S급 마수가 소환됩니다.>
"자, 잠깐! S급 마수는 아무리 가상으로 구현되었다 해도 위험하다! 이쯤에서 마무리-"
'어?'
급히 시험을 중지하려 달려나간 그때, 소년이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마치 하늘과 교감이라도 하려는 듯한 기묘한 자세.
그리고 그의 한마디가.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다.
"내리쳐라."
그 순간, 하늘에서 황금빛 번개가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