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200)

혁무성은 보주의 명을 완수해야 한다며 용혈궁까지 따라가기로 했기에, 그들만 발길을 돌린 것이다. 어차피 낙양으로 가야 할 휘 일행과 어거지를 쓰며 따라붙은 우진자까지.  

우진자는 자기 인생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을 되 뇌이며, 누군가가 말한 공짜표사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유현명을 따라왔다. 물론 그게 이유의 다가 아니란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유현명이 침음성을 흘리며 생각에 잠기자 가운데 있던 우진자가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기다리지 뭐. 한시진이야 밥 한끼 먹을 시간 밖에 더 되겠나?" 

"그럼 그렇게 하지요. 조소..." 

할 수 없다는 듯 유현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향해 누군가를 부르려 할 때였다. 그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걸 보고 우진자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놔두게. 이틀째 저러고 있으니... 그래도 이제는 많이 나아진 것 같긴 한데... 제법 말과 소통도 하는 것 같고..." 

그들의 눈이 향한 곳, 그 곳에선 휘가 말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워, 워...." 

"아, 형님. 너무 당기지 마시고 살살..." 

초평우가 생긴 모습과 다르게 간지럽게(?) 말을 하자 그 옆에서 풍인강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한기를 풀풀 날리며. 

"초형님, 형님 얼굴 때문에 큰형님 말이 더 날뛰는 것이오." 

순간, 초평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홱 고개를 돌린 그가 말머리 앞에 얼굴을 내밀고 말의 눈을 바라본다. 순간 말이 깜짝 놀라 머리를 틀었다.  

마치... 늑대다!! 하는 표정으로. 

'조...또... 진짜네...' 

초평우가 힐끔 휘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휘의 얼굴엔 즐거워하는 표정만이 가득하다.  

"하하하! 초형, 말을 탄 채 배를 타면 안됩니까? 재미있는데..." 

초평우는 생각했다. 

'아마 말이 저러는 것은 형님이 말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하니 힘들어서 일거야. 틀림없어.'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배에선 안 됩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자칫 사람이 다칠 수 있습니다." 

휘가 아쉬운 듯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그러자 말이 울음을 토해냈다. 이제 살았다는 듯...  

히히히힝!!! -당연하지요!- 

선상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안 쪽의 선실에는 십여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휘를 비롯한 여섯 명과 유현명과 우진자조차 정체를 모르는 무인 세 사람, 그리고 네 명의 상인이 전부였다. 

단순히 황하를 건너는데 한시진이 걸렸다. 우르르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 말을 끌어 내리던 휘의 눈에 몇 걸음 먼저 내리는 세 명의 무인들이 보였다.  

'같은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군.' 

사십대 나이에 하나같이 날카롭게 날이 선 기운을 지닌 자들이었다. 능히 일류고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사람들. 

헌데 전신을 간지르는 묘한 느낌이 자꾸 휘의 신경을 건들고 있다. 살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기나 그런 것도 아니다. 

배에서 내려 흘낏 세 명의 무인을 찾아 보았다. 저 만치 포구에 인접한 건물의 벽을 따라 걷는 그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먼저 내렸던 네 명의 상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휘의 눈이 반짝였다. 

'보표들인가?' 

세 사람은 네 명의 상인을 중심으로 삼각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알 수 없지만 멀리서 자세히 보니 확연히 느껴졌다.  

네 명의 상인과 보표로 보이는 세 명의 무사, 그 역시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호에는 별의 별 일이 다 있으니... 

'공연한 일에 신경을 썼군...' 

금양단

정주에서 낙양까지 삼백 오십 리.  

휘의 일행은 유현명과 정주에서 헤어진 후 낙양으로 향했다. 며칠 쉬었다 가라는 유현명의 간절한 부탁조차 거절한 채.  

말을 타고 갈까 했지만 휘는 왠지 걸어가고 싶었다. 아직 세상은 구경할 것이 많고, 걸어가야 많은 것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상의 인연이란 사소한 이유로 인해 만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는 법이었다. 

화창한 유월의 어느 날 오후, 탁 트인 관도를 지나는 초평우와 인강의 걸음에는 활기가 넘쳐 보였다. 단 며칠간이었지만, 표행 중의 실전으로 자신들의 무공이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시간만 나면 도검을 맞대고 무공연마에 여념이 없었다. 남들이 본다면 진짜 싸우는 것으로 착각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살벌한 광경이었다.  

오죽하며 휘조차도 낙양에 두 사람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길을 가다 보니, 어느덧 해가 서산머리에 걸려 있는 유시 초가 되었다. 두 사람이야 싸우던, 비무를 하던, 묵묵히 걸음만 옮기던 휘의 눈에 곤혹스런 빛이 떠오른 것도 그 때였다. 

옹현이라는 마을을 그냥 지나친 후, 다음 마을이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마을은 커녕 점점 더 산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휘가 초평우에게 물었다. 

"초형. 마을이 보이지 않는데, 이러다 노숙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원 형님두, 설마 마을이 없겠습니까? 그래도 낙양으로 가는 대로인데... 이봐! 풍가야! 한판 더 할까?” 

초평우의 별 걱정 다한다는 듯한 자신있는 말에, 세 사람은 계속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강호의 경험은 초평우가 가장 많았으니 그의 말을 믿는 수 밖에. 그러나 그 설마가 끝내...  

일각이 지나고, 이각이 흘러갔다. 헌데 나오라는 마을은 안 나오고 어둠이 깊어질 수록 산도 깊어진다. 참다 못한 풍인강이 못 미더운 음성으로 물었다. 

“초형님,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처음 와 보는... 곳인데...” 

“그럼 그렇지...” 

잉? 풍가, 저놈. 설마 날 놀리는 건...? 

초평우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눈에서 늑대의 눈빛을 토해낼 때였다. 

“후... 좌우간 어디 쉴 만한 데가 없나 찾아 봅시다.” 

휘의 나직한 한마디에 초평우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리고 풍인강의 눈에선 뿌연 한기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어둠이 완전히 세상을 집어 삼킨 해시 초, 어둠을 즐기며 걸어가던 휘의 눈에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상당히 먼 거리였다.  

초평우도 봤는지 소리를 질렀다. 절실한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로. 

“형님! 불빛입니다!” 

어둠 속의 불빛을 응시하던 휘가 나직이 말했다. 

“횃불이나 모닥불 같은 것이 아닌 걸로 봐서는 사찰이나 자그마한 장원 같습니다. 일단 저 곳까지 가 봅시다.”    

불빛을 향해 일각 여를 더 가자, 관도의 우측으로 난 소롯길을 따라 산 중턱에 한 채의 허름한 사찰이 보였다. 

영등사(影燈寺).  

칠이 다 벗겨져 나간 현판을 올려다 보던 초평우가 사찰의 문을 두드렸다. 

탕! 탕! 탕! 

"계시오!? 문 좀 열어 주시오!"   

부서져라 문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한 산사를 뒤흔들었다. 헌데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다시 문을 두드리려고 초평우가 손을 들었을 때였다. 

저벅 저벅, 자그마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이 야밤에 뉘신지...?” 

어려 보이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열 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사미승이 눈을 비비며 고개를 내밀었다. 

“하룻밤만 쉬어 갔으면 하네만.” 

초평우가 쓱 고개를 들이대며 하는 말에 사미승은 졸음조차 떨쳐 버리고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휘가 나서서 손을 내밀었다. 

“아침이면 떠날 것이오.”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은 한 조각이 들려 있었다. 족히 한 냥은 됨직한, 휘의 손가락 자국이 꽃처럼 새겨진 은 조각이. 그러자 언제 떨었냐는 듯 사미승의 눈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어찌 부처를 모시는 불자가 어려움에 처한 중생을 모른 체 할 수 있겠습니까? 들어오시지요.” 

샥! 휘의 손에 있던 은조각이 사라졌다. 극한의 빠름. 많이 해 본 솜씨였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초평우가 눈을 부라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이슬을 맞지 않고 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고맙기만 할 뿐이었다.  

사미승이 세 사람을 객사로 안내했다. 마지 못해-솔직히 은 때문에- 세 사람의 손님을 받았지만, 그들을 객사로 안내하는 사미승의 눈빛은 불안에 잠겨 있었다. 뒤에 따라오는 늑대가 금방이라도 덮칠 것만 같이 느껴지는지...    

안내 된 객사에 들어가자 다섯 개의 나무침상이 있었다. 휘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침 일찍 출발 할 테니 쉬십시오.” 

두 사람이 말없이 침상으로 올라가자 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 할만도 할 거야. 오는 동안 내내 투닥거렸으니 사람이라면...’  

그러나 웬 걸, 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풍인강은 자신의 검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심상비무로 무아의 상태에 빠져 버리고, 초평우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에 몰두한다.  

비록 정상적인 방법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독맥에 기를 가두는 천양의 법은 초평우에게 모든 것이었다. 결코 게을리 할 수 없는 마지막 밧줄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휘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하긴 두 사람이 택한 방법도 무인이 쉬는 방법 중 하나라 할 수 있었으니.  

한시도 쉬지 않는 두 사람을 보자 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초평우의 운기를 지켜 보던 휘의 손이 품속으로 들어갔다. 

‘지금 복용시킬까?’ 

손에 금양단이 만져진다. 어차피 복용시키려 했던 것이다. 다만 걸리는 점은 풍인강이 옆에 있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것.  

‘그렇다고 없는 데서 준다는 것도 그렇고... 이해 해 주길 바랄 수 밖에.’ 

마음을 다 잡은 휘가 나직이 전음을 보냈다. 운기에 방해가 안될 틈을 노려. 

<초형, 조금 운기를 늦추고 내 말을 들으세요.>  

휘의 전음에 초평우의 감긴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제가 단약 하나를 드릴 겁니다. 복용하고 나서 혹 약기운이 일거든 천양의 법문에 따라 기운을 돌리십시오. 어느 정도는 천양의 기운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휘는 금양단이 들어 있는 작은 목함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기이한 냄새가 코로 스며든다. 얼핏 느끼기에는 비린내 같기도 하고, 싸한 유황냄새 같기도 하다.  

금양단을 내려다 보던 휘가 단약을 집어 들었다. 순간, 기이한 향이 더욱 짙어져 간다. 

<준비 됐으면 입을 벌리세요!> 

작지만 단호한 전음에 초평우의 입이 반쯤 벌어지자 휘의 손가락이 튕겨졌다. 

쏙! 

칠푼 직경의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금양단이 순식간에 초평우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숨을 두어 번 내쉴 시간이 흐르고, 비릿한 향이 더욱 강하게 퍼지는 듯 하더니 초평우가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휘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모용서하가 매우 귀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예사 단약이 아니란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초평우가 복용한다 해도 결코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운기에 들어간 초평우를 보며 휘는 침상에 몸을 뉘였다. 그는 누워서도 얼마든지 운기를 할 수 있으니 굳이 자세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편한 자세만 되면 그 뿐. 

조용한 산사의 밤은 무심히 흘러간다.  

휘는 눈을 감고 고요함을 즐기며 천양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독맥을 타고 흐르는 천양의 불길이 점점 거세어지자, 지음의 기운이 슬슬 반응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각이나 지났을까, 임맥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지음의 기운이 천양의 기운과 가벼운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자 내부에서 바람이 일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그러다 점점 커지더니 소용돌이 같은 거센 바람이 만들어졌다.  

무저동에서 보다 훨씬 강력해진 소용돌이였다. 소용돌이를 따라 천양도 지음도 파묻혀 같이 돌아간다. 그러다 한 순간, 따로 따로 휘돌던 두 기운이 가볍게 부딪쳤다.   

쿠궁! 화악!! 

찰나, 두 줄기 환한 빛이 가슴에서 피어나 한줄기는 독맥을 타고 척추를 따라 위로, 한줄기는 임맥을 타고 단전 쪽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반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세 번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 때마다 휘의 입가에 미약한 아쉬움이 깃든 듯 보인다. 무엇이 그리 아쉬운 건지... 

‘후우... 역시 삼신주를 찾기 전에는 세 가지 기운을 합친다는 것은 무리인 것 같구나. 낙양에서의 일이 끝나고 나면 삼신주에 대한 것을 연구해 봐야겠다.' 

도사할배의 말대로 삼신주가 없이는 삼령의 법을 완성할 수 없는 것인지... 휘는 답답하기만 했다.  

물론 지금의 힘도 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해야 할 적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과연 그들을 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철혈성의 힘은 결코 예전의 철혈성이 아니다. 비록 이십수 년 전, 팔패 때의 철혈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신비세력이 그들의 뒤에 있다는 것이다. 삼악의 하나인 마백으로 추정되는 그들이...     

한참 동안을 삼신주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우측에서 강렬한 열기가 느껴진다. 우측이면 초평우가 있는 쪽,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맙소사!" 

대경한 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초평우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핏물이 흘러 무릎을 적시고 있다. 휘는 그 이유를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금양단의 약효가 생각보다 훨씬 강해서 천양의 기운이 폭주한 것이었다.  

이미 무저동에서 천양의 폭주를 경험한 적이 있는 휘로선 그 고통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전신이 타오르며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 지금 초평우는 그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휘에게 폐를 끼칠까 봐 처절한 고통을 참고 있었던 것 같다. 미련한 늑대...  

천화사의 후예

"이런! 바보같이!!" 

휘의 입에서 안타까움에 젖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옆에서는 풍인강이 어쩔줄 모르고 안절부절 하고 있다.   

다급히 몸을 날린 휘가 초평우의 명문혈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고는 전음으로 귀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정신 차리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초평우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진다. 다행히 말은 들리는 듯했다.  

<지금부터는 내가 기를 움직일 겁니다!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고 조금만 참으세요!>    

오른손을 통해서 초평우의 몸 속을 휘돌고 있는 뜨거운 기운이 타오르는 유황불처럼 느껴졌다.  

가공할 기세로 독맥을 오르내리는 열기가 빠져 나갈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있었다. 계속 놔두었다간 육신이 터져버릴 터, 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것 저것 생각할 시간조차 없는 것이다.  

다급한 김에 일단은 흡자결을 펼쳐 초평우의 몸 속을 휘젓고 있는 기운을 오른 손을 통해 빨아 들였다. 탈출구가 생기자 광란하던 열기가 물밀듯이 빨려 들어 온다.  

그것은 황하의 거대한 물결이 밀려오는 것과도 같았다. 단단한 바닥을 뚫고 치 솟는 용암과도 같았다.  

휘의 입이 악 다물어졌다. 오른손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 오르더니, 숨 한 번 쉴 시간도 되지 않아 얼굴마저 벌겋게 달아 올랐다. 이제는 오히려 자신의 몸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휘는 미친 듯이 몰려 들어오는 열기를 독맥 속으로 집어 넣고는 천양의 기운을 전신으로 휘돌렸다. 그 때였다. 지음의 기운이 단전에서 꿈틀대며 대응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체 금양단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이리도 양기가 강하단 말인가?'   

시간이 지나자 천양의 기운이 거세지는 만큼 지음의 기운도 점점 커져 간다. 그러던 어느 순간,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기운이 단전에서 용틀임 치며 솟구쳤다.  

'아!!'  

단전에서 솟구친 기운은 바다와도 같았다.   

펄펄 끓던 용암이 차가운 바다 속으로 빠져 들자 부글거리며 서서히 식어 간다. 식어 버린 용암사이로 새로운 용암들이 밀려든다.  

뜨겁기만 하던 열기가 지음의 바다를 지나는 사이, 탁한 기운은 소멸 되어 버리고 맑은 기운만이 남아 피어 올랐다.  

그러다 결국 척추를 중심으로 수많은 가지들이 형성되더니, 미처 생각도 못했던 세맥 깊은 곳까지 퍼져 나갔다. 그러자 전신의 곳곳이 더 할 수 없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마치 온 몸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휘는 그러한 기분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초평우의 몸을 지금 다스리지 않으면, 초평우의 내부에서 휘돌던 기운들이 다 소멸되어 버릴 테니까. 

휘는 자신의 몸에서 맑게 정제된 기운를 오른 손에 집중 시키고, 그 기운을 이용해 초평우의 열기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일각이 지나자 완연히 수그러진 양기가 초평우의 독맥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일각, 초평우가 스스로 천양의 기운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휘는 실눈을 뜨고 초평우를 살펴 보았다.  

벌겋던 얼굴이 제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반 이상의 열기를 휘가 흡수해 버렸다. 하지만, 나머지만으로도 초평우로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기연을 얻은 셈이었다. 

휘는 초평우의 기운이 가라앉자 손을 떼고 자신의 내부를 관조해 보았다.  

‘이거 참...’ 

참으로 어이없는 결과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으로 천양의 기운이 배는 강해졌다. 족히 승화(昇和)의 단계에 접어든 것 같다. 게다가 단전에 웅크리고 있어 운용이 힘들었던 지음의 기운조차, 어느 정도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있게 되었다. 초평우를 도우려다 오히려 자신이 기연을 얻은 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초평우로선 금양단의 열기를 감당치 못하고 전신이 타 버렸을 것이다.  

모용서하는 휘의 능력을 보고 금양단을 준 것이지, 결코 초평우의 능력을 보고 준 것이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휘가 금양단을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초평우를 바라보는 휘의 입가에 고소가 떠 올랐다. 

‘후후... 하마터면 초형을 죽일 뻔 했군.’ 

자신의 침상 위로 고개를 돌리자 금양단이 들어 있었던 목갑이 보였다. 문득 모용서하가 금양단을 주며 한 말이 생각이 났다. 

-하늘의 불을 키울 수 있을 거예요.- 

그냥 하는 말이라 생각 했었다. 모용서하가 자신의 무공내력을 모르는 이상은.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무공에 대해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자세히는 아닐지 몰라도. 하기야 그녀의 이상한 능력이 몇 번이나 휘를 놀라게 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휘는 한가지 의문에 사로 잡혔다.  

‘그녀를 만났을 때 지음의 기운이 자연스레 움직인 이유가 뭘까? 결코 여자라 해서 움직인 것은 아닌데, 대체 무슨 이유로 움직였을까? 음... 아무래도 빠른 시일 안에 그녀를 다시 만나 봐야겠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되돌아가서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휘는 손을 뻗어 목갑을 집어 들었다. 금양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얻은 걸 생각하면 가히 기연이라 해야 할 정도였다. 어쨌든 금양단은 면구값으로 받은 것, 문제는 금양단이 생각보다 훨씬 귀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면구 하나로는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없을 듯했다.  

'뭘 주지? 좋아하는 게 뭘까?' 

우습지도 않은 고민이 하나 늘었다. 

초평우가 깨어난 것은 새벽이 밝아 오는 묘시 초였다. 눈을 뜬 초평우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풍인강의 얼빠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초평우가 한마디 쏘아 주려 할 때였다. 

“초형님! 괜찮소?” 

풍인강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묻는다. 전혀 그답지 않게. 순간. 

“어...” 

초평우는 느닷없이 목이 꽉 막혔다.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괜히... 괜히... 그런다.   

“후... 나는 초형님이 죽는 줄 알았소. 온몸이 시뻘겋게 타 오르길래 진짜 죽는가 보다 했는데, 다행히 대형이 달려들어 초형님을 살렸소.”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다. 초평우는 그제야 왜 자신의 눈에 눈물이 맺혔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자슥이... 눈물나게.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야....크윽!’ 

초평우는 눈물을 표시 나지 않게 슬쩍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 단약의 약효가 너무 강했나 보군.” 

“단약요?” 

초평우의 말에 풍인강이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음, 대형이 줘서 먹었는데 그 다음부턴 기억이 안나.” 

순간, 풍인강의 눈이 서서히 본래의 빛을 찾아간다. 목소리까지 싸늘하게. 

“그러니까, 대형이 준 단약을 먹고 그랬다? 나 몰래?!!” 

“그.그게.... 나도 운기하던 중이라....” 

초평우가 미안한 듯 말을 더듬자 풍인강이 툭 쏘아 부쳤다. 

“쳇!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걱정 되서 잠도 못자고...”    

풍인강의 볼멘 소리에 침상에 누워 있던 휘가 눈을 뜨고는 힐끔 풍인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풍인강의 표정에 별다른 불만은 보이지 않았다.  

휘는 다행이라는 듯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 때였다. 풍인강의 무심한 목소리가 휘의 귀를 파고 들었다. 

“다음에는 내 차례유. 명심하슈!” 

아침은 불당에서 울리는 독경소리와 함께 밝아 왔다.  

휘의 표정도 아침 햇살만큼이나 밝아져 있었다. 어찌 되었든 뜻밖의 인연으로 막혔던 벽이 한 겹 무너졌다. 거기다 초평우 역시 어제의 초평우가 아니었다. 이제는 풍인강이라 해도 초평우를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풍인강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휘는 기분 좋은 아침을 맞으며 방문을 열었다. 시원한 산바람이 독경소리를 싣고 귓가를 스치며 불어온다. 가히 우진자의 멱따는 소리와 절로 비교가 될 정도의 청아한 목소리다. 

그 때, 문득 들려 오는 발자국 소리. 휘는 독경소리가 들려 오는 불전 쪽을 바라보았다. 저 만치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미승이 보였다. 헌데 조금 이상하다. 아! 사미승의 머리에 혹이 하나 솟아 있다. 뾰루퉁하게 내민 입술까지. 

다가 온 사미승이 휘를 보더니 허리를 숙였다. 

“큰스님께서 모셔 오라 하십니다.” 

휘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를?” 

“예.” 

휘는 의아했지만 어차피 신세진 인사는 해야 할 터.  

“갔다 오면 바로 출발할 테니 떠날 준비들 하세요.”  

초평우와 풍인강에게 말하고는 사미승의 뒤를 따랐다. 

대웅전을 돌아 연화당의 뜰을 가로질렀다. 사찰에 있는 건물은 모두 세 채, 객당까지 합해서. 헌데도 사미승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모른다. 

“큰 스님은 어디 계시지?” 

휘가 묻자 사미승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시주.” 

사미승이 가리키는 곳, 그 곳에는 자그마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휘가 동굴을 바라보자 사미승이 빠른 걸음으로 동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큰 스님, 큰스님이 말씀하신 시주를 모시고 왔습니다.” 

큰 소리로 외친 사미승이 휘에게 안으로 들어가란 손짓을 했다. 그러고는 부리나케 뒤 돌아서 뛰어갔다.  

피식, 웃음을 흘린 휘는 동굴의 내부를 쳐다 보았다.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아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모를지 몰라도 휘는 알 수가 있다. 사미승이 외친 소리가 동굴의 내부를 울리며 그 깊이를 알려 준 것이다. 

안으로 오장을 들어가자 옆 모습을 보이고 앉아 있는 스님이 보였다.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추측하기도 힘들 정도로 늙은 노스님이었다. 휘는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저를 보자 하셨는지요?” 

노승은 굽은 허리를 펴고 고개를 돌리더니 진물이 흐를 것만 같은 눈을 들어 휘를 바라보았다. 

“흘흘.... 그랬지, 그랬어. 왔군, 왔어.” 

빠진 이 사이로 흘러 나오는 목소리는 가는 떨림이 느껴질 정도로 기쁨에 젖어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곳에는 한냥짜리 은자가 놓여 있었다. 사미승에게 준 은자가. 그러고 보니 사미승의 머리에 난 혹이 이해가 갔다. 아마 돈을 받은 걸 들킨 듯했다. 

휘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걸렸다. 그 때였다. 

“어디서 얻었는가?” 

노승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어 왔다.  

시주를 하는 돈에도 어디서 번 돈인가가 문제가 되는 건가?  

“표행을 하고 받은...” 

“흘, 아니, 그거 말고...” 

“예? 그럼?” 

“손가락 자국... 천화단심기(天花丹心氣).” 

손가락 자국? 천화단심기? 설마...? 휘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혹시... 은자를 자른... 그 수법을 말하는 겁니까?”  

노승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노승의 눈에선 차가우면서도 은은한 열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혈련삼화를 이용해... 아! 혈련삼화라는 이름은 제가 붙인 겁니다.” 

노승의 눈빛이 곤혹스럽게 변해가자 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동굴에서 얻은 수법인데 정확한 이름은 모릅니다.” 

그 때였다.  

"그래? 그럼 일단 받아 보게!" 

일갈과 함께 노승의 몸이 떠오른다 느껴졌다. 순간. 

화악! 

노승의 손이 앞으로 쫙 펼쳐지더니, 한 송이 꽃이 피어난다. 

"헛!" 

휘의 입에서 놀람의 탄성이 터졌다.  

혈련화? 아니다! 뭔가가 다르다! 빠르긴 하지만 정교함이 없다!   

그러나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다. 노승의 손에서 피어난 꽃이 눈깜짝일 시간도 없이 코앞에 들이닥친 것이다.  

찰나 휘의 신형이 흔들, 순간적으로 신형이 갈라지며 다섯의 환영이 만들어 졌다.  

파파팍! 

환영을 뚫고 지나가는 꽃 그림자가 벽을 때리자 돌가루가 허공에 먼지처럼 피어 오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공격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노승은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으로 휘를 바라만 보고 있다. 

휘는 표정을 굳히고 그런 노승을 바라보았다. 느닷없는 공격에 화가 나기보다는 궁금함이 앞서는 휘였다. 휘가 노승을 향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노승이 주름진 눈에서 은은한 광채를 내 뿜으며 물었다. 

“광량과는 무슨 관계인가?” 

광량, 아후달 그리고 포여랍.

맙소사! 광량이라는 이름까지 알다니!  

아무래도 대충 넘어가기에는 노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상치가 않다.  

휘는 하는 수없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무저동에서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동굴 속에 죽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시신 옆에 그려진 그림을 얻었을 뿐이지요.” 

말없이 휘를 바라보는 노승의 눈빛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그러다 휘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는지, 눈빛을 누그러뜨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회한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그렇게 죽었나? 허허허... 그럴 것을 어찌..."  

대체 이 노승은 누굴까? 누구이기에 광량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백 수십 년 전의 사람이거늘. 

휘가 깊은 의문에 잠겨 있을 때였다. 노승이 물끄러미 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보여 줄 수있겠나?” 

노승의 요구에 휘는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노승을 바라보았다. 자신 역시 비슷하게 펼쳤으면서도 보여 달라 한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어차피 기의 흐름을 모르는 이상 보여 주는 거야 문제될 것도 없었다. 다만 그 이유가 알고 싶을 뿐. 

“보여 드리지요. 대신 스님께서도 보고자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노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휘는 오른손의 검지를 치켜 세웠다. 순간, 검지에서 붉은 꽃망울이 맺혔다. 전보다 훨씬 맑은 선홍빛 꽃망울이. 

“아! 천홍(天紅)!” 

노승의 입에서 나지막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역시나 알 수 없는 이름을 담고서.  

휘는 진기를 조금 더 끌어 올렸다.  

후욱! 꽃망울이 손가락 끝에서 솟아 오른다. 그제야 휘의 검지가 허공에 혈련화를 그려 갔다.  

선이 이어지며 허공에 둥실, 한 송이 혈련화가 화려하게 피어난다.  

아무런 향기도 없는 한 송이 꽃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너울거린다. 

그러다 한순간, 휘의 손짓에 따라 흘러가는 듯 하더니, 찰나지간 동굴의 벽을 파고 들었다.  

손바닥 만한 크기에 세치 깊이, 도장으로 꾹 눌러 놓은 듯 한점 부스러기조차 떨어지지 않은 채 피어 난 혈련화.  

혈련화가 피어난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노승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물었다.   

“몇 개의 꽃까지 그릴 수 있나?” 

휘의 눈이 번쩍였다. 꽃의 숫자까지 알고 있다.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걸까? 휘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본 혈련화는 세 송이였습니다. 모두 그려 봤습니다만...” 

“셋이라... 그렇겠지. 어쨌든 놀랍군, 놀라워. 그 나이에. 흘흘흘...” 

휘가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노승을 바라보았다. 분명 뭔가가 더 있는 듯했다. 일단 의문 중 한 가지를 물어 봤다. 

“이제는 제가 묻겠습니다. 천화단심기가 뭡니까?” 

노승이 주름 가득한 눈으로 휘를 올려다 보았다. 

“자네가 펼치고도 모르나?” 

휘가 굳어진 표정으로 노승을 직시하다가 다시 물었다. 두 번째 의문. 

“헌데 노스님께서는 어찌 아십니까?“ 

“클! 내 사문의 무공을 내가 모른다면 누가 알겠나?” 

휘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노스님의 사문이라구요?” 

“지금은 잊혀진 사문이지... 아니 멸문했다고 봐야겠지.” 

“무슨...?” 

“앉아, 늙은 땡중 고개 아프니까.” 

휘는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 앉았다. 마침내 혈련삼화와 광량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면 앉는 정도가 아니라, 누우라 하면 누울 수도 있었다. 

휘가 앉자 노승이 입을 열었다. 

“노납의 법명은 아후달(阿逅達), 서장에서 태어나고 자랐지. 시주는 알고 있나? 그 무공이 서장의 무공이라는 걸?” 

“어느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철혈성의 기록에 의하면 광량이 서장 사람인 듯하다 했었으니... 

“천화단심기는 서장의 전설이었지. 지금은 아는 이가 몇 없을 테지만.” 

아후달은 말을 하면서 구석에 놓인 석판을 들어내고는 안에서 다섯 치 넓이에 한 자 길기의 철함을 꺼내 들었다. 그러면서 동굴을 울리는 음성, 마치 주문처럼 울려 퍼지는 노승의 목소리에는 아련함, 처절함, 희열이 범벅되어 묻어 있었다. 

“노납은 사문의 마지막 제자이자 인연의 연결자, 흘흘... 천화단심기의 잃어버린 세 송이 꽃도 찾을 겸, 인연을 찾아 떠 돌았지. 그리고 삼십 년. 마지막 희망을 이 곳 영등사에 걸었지. 등불을 밝히고, 찾아 올 인연자를 기다리며 말일세.” 

휘는 아후달의 말에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오늘 제가 여기 올 줄을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흘흘... 노납이 어찌 그것까지 알았겠는가? 다만 이 곳에 있으면 인연자가 지나갈 테니 기다리라 하더군. 쓸데없이 광량의 흔적을 찾지 말고. 인연자가 그냥 지나치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요행으로 이 곳을 찾는다면 인연이 이어지는 것이니..." 

아후달이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인연자가 지나갈 이 곳을 알려 준 것. 그것이 바로 서장의 대 달라이라마 포여랍이 사령수라교로부터 서장을 구한 서장의 은인이자 포달랍궁의 은인인 천화사의 후계자에게 베푼 마지막 보답이었다네. 그는 천기를 누설한 죄를 청하여 포달랍궁의 십팔층 지하뇌옥에 스스로 육신을 가두어 버렸지.” 

“그러니까 포여랍이라는 분의 말을 듣고 이 곳에서 삼십 년을 기다렸단 말입니까? 그러다 만나지 못하면? 그의 말을 어떻게 믿고?” 

휘는 어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말만 믿고 삼십 년을 기다리다니, 그것도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로. 헌데 사령수라교라... 그 이름에 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혹시 삼악의 하나인 사령(邪靈)과 관계가 있는 곳이 아닐까?' 

그러나 짐작은 짐작일 뿐. 

“흘흘흘... 포여랍은 서장 제일의 예언자 누라(屢羅)의 환생자일세. 어쨌든 그의 말대로 만나지 않았는가?” 

아후달은 당연한 일이거늘 별 걱정을 다 한다는 투다. 그러면서 철함을 열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 만나 다행이구먼.” 

철함에서 나온 것은 두 장의 양피지였다. 양피지에는 두 송이의 꽃이 그려져 있었다. 단 두 송이의 꽃만이.  

그러나 그걸 보는 휘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진 채 격렬하게 흔들렸다. 혈련화는 세 송이가 다가 아니었다. 다섯 송이의 혈련화. 오! 맙소사! 

“다섯 송이의 꽃에 본문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네. 그러나 백 수십 년 전, 세 송이를 잃어 버리는 바람에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어 버렸지. 광량, 그자가 세 송이의 꽃이 그려진 양피지만 파괴시키지 않았어도...” 

아후달의 말에 의하면, 천화사는 서장 제일의 신비지문이었다 한다. 본래 제자를 많이 받지 않아 일대에 서너 명의 제자만을 받아들인다 했다. 그리고 광량은 천화사의 제자 중에서도 대천화(大天花)에 이를 거라 기대되는 촉망받는 기재였다고 한다.  

"헌데 어느 날 이었네. 그는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사부 몰래 천화단심기의 네 번째 그림을 익히려 했다네. 그 와중에 그만 심마를 이기지 못하고 살귀가 되어 버렸지. 그의 성취는 사형제뿐만이 아니라 당시 천화사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 났기에, 아무도 그의 일수를 막을 수 없었다네. 심지어 사부까지 나서서 그를 잡으려 했는데도 실패하고 말았지. 결국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광량이 도망을 치고 말았네. 그런데 문제는 광량이 싸우는 와중에 석장의 그림을 파괴해 버렸다는 것이었어. 후우... 문주의 심부름을 다녀온 막내제자가 사문으로 돌아 왔을 때는, 다 죽어가는 사부와 두 사형들의 시신만이 남아 있었다 하네. 문주가 목숨을 걸고 지킨 두 장의 양피지와 함께." 

아후달의 말을 듣던 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럼, 그 막내제자가 세 송이의 꽃을 알고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아후달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막내제자, 그러니까 그 당시 노납의 사부는 아직 어려서 기초에 겨우 입문 했을 뿐, 오천화(五天花)는 구경도 못한 상태였네. 더구나 오천화라는 것이 흉내만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시주도 잘 알 것이라 생각하네만.” 

그랬다. 그 속에는 단순히 꽃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꽃을 그린 선의 흐름, 다시 말해 기의 흐름을 모른다면 그것은 그저 단순한 꽃일 뿐이었다. 오천화든, 혈련화든. 

휘는 경악한 얼굴로 아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한가지를 더 물었다. 

"그럼 나머지 두 송이의 꽃은 아예 익히지 않았단 말입니까?" 

아후달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안 했겠나. 백방으로 방법을 연구해 봤지. 약간의 소득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은... 이렇게 됐네." 

아후달이 앙상한 손으로 승포를 걷어 올렸다. 무릎에서부터 잘려져 나간 두 다리가 보였다.  

"무리한 기의 운행으로 하체의 기혈이 얽혀 버렸네. 해서 하는 수없이 탁기를 최대한 아래로 모아 잘라 버렸네. 그것만이 살길이었으니까. 천화사 천년의 정화를 어리석은 이가 어설프게 흉내 내려 한 대가라 할 수 있지." 

아후달이 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한가지 부탁만 들어 준다면 이 것은 시주 것이네.” 

"무슨...?" 

"포여랍이 나에게 인연자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 데는 이유가 있다네. 어쩌면 모든 것이 그가 생각한 대로 흘러갈 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납이 따로 부탁하지 않을 수가 없구먼." 

양피지를 바라보던 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없는 소득은 휘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두 장의 양피지는 그 어떤 대가를 치루고도 얻고 싶은 물건이었다. 다만 포여랍이 생각한 대로 흘러갈 거라는 말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말씀하시지요."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나의 사문이었던 천화사는 과거 사령수라교로부터 서장을 구한 적이 있네. 그러나 그들을 완전히 멸하지는 못했었지. 포여랍의 말에 의하면 정월에 두 개의 달이 뜨는 해, 그들이 다시 문을 열고 나와 서장을 피로 물들일 거라 했네. 혹여 서장에 사령수라교가 나타나거든 서장의 포달랍궁에 가서 포여랍을 만나주게나." 

휘는 어이없는 눈으로 아후달을 쳐다봤다. 

"삼십여 년 전에 스스로 갇힌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있겠습니까?" 

"흘흘, 그는 당시 스물이 채 안 된 나이였네. 달라이라마는 나이가 많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더구나 그가 인연자를 보내 달라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 

문득 도사할배가 해 주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위대한 능력을 지녔던 고승의 환생자가 달라이라마에 오르는 것이 서장의 전통이라 했었다. 그렇다면 아후달의 말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당시의 달라이라마가 스무 살이 아니라 열 살이었다 해도.  

잠시 생각에 잠겼던 휘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모든 것을 믿을 수는 없지만, 예언의 능력을 지녔다는 포여랍이 그리 말했다면, 훗날 휘가 그만한 힘을 얻을 수있을 거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의 뜻대로 흐를 거라는 말은 굳이 휘가 승낙을 하든 안 하든, 결국은 그리 될 거라는 말, 그렇다면 망설일 것도 없었다. 일이 닥치면 부딪치면 되는 거니까.   

“좋습니다. 일단 받지요. 그리고 은혜를 입었으니 대가를 치르는 것도 당연한일, 그러한 일이 있다면 포여랍을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힘이 생기고 서장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제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겠습니다. 저도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니까요.” 

말을 맺으며 휘가 씩 웃자 그제야 아후달이 편해진 얼굴로 양피지를 툭 던져 주었다. 

“질기디 질긴 인연의 굴레를 벗었으니, 오히려 시주가 노납의 은인인 셈이야. 노납은 이제 부처님이나 모시며 마음 편히 살다 가려 하네. 그만 가 보게나.” 

휘는 손에 들린 양피지를 내려다 보았다. 막상 받아 드니 가슴이 떨린다. 그제야 문득 드는 생각. 

"그런데 왜, 제자 분에게 전할 생각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연(緣)이 이거 뿐이라는데 어쩌겠나?" 

"예?" 

"포여랍이 그러더군. 천화의 맥은 끝났다고. 대신 새로운 연이 있을 것이니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고 말일세. 그래서 비록 거둔 아이는 있지만 제자로 삼지는 않았지. 생각해 보게... 사부와 합쳐 백 육십 년을 기다려 왔네. 너무 오랜 세월을 기다림 속에 살았어...." 

아후달이 회한이 깃든 목소리로 혼잣말 하듯 웅얼거렸다. 아마도 기다림의 세월을 제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듯싶다.  

그렇게 고개를 저으며 아후달이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동굴 밖에서 굵은 목소리가 동굴을 울리며 들려 왔다.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부!!" 

천살의인연, 낙양풍운.

누군지를 아는 듯 아후달이 고개를 저으며 처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놈아! 돌아보면 피안인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이냐?" 

"그래도 사부는 사붑니다. 그리고 영등은 사부의 제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무지한 놈, 알량한 재주 하나 배웠다고 나서대기는... 시주, 시주가 저 놈에게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좀 가르쳐 주게나. 두들겨 패도 괜찮네. 아마... 조금 세게 때려야 할 거네. 흘흘흘..." 

"?" 

아후달의 말에 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동굴 밖을 쳐다 보았다. 그 곳에는 고목의 둥치처럼 통통해 보이는 승려가 자기 키보다 큰 한 자루 선장을 짚고 마치 장판교를 지키던 장비처럼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아마 그가 새벽부터 울려 퍼지던 독경소리의 주인인 듯하다. 그리고 아후달이 거두었다는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 

"사부는 저 서생같은 젊은 시주가 소승을 막을 수 있다 하시지만 소승이 보기엔...."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휙, 한걸음에 오장의 거리를 좁힌 휘가 어느새 그의 면전에 도착해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으니... 

"헉! 감히!" 

휭! 영등은 노한 소리를 내 지르며 선장을 휘둘러 휘의 허리를 쳐갔다. 순간, 영등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해쓱하니 질려 버렸다. 

분명 선장으로 허리를 쳤는데도 휘가 여전히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하얀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한다. 

"노스님께선 패도 좋다고 하시더군요."   

"귀.귀신 같은..." 

주르륵 세 걸음을 물러선 영등이 다시 선장을 들어 후려쳤다. 생각보다 강맹한 위력. 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제법 강력한 힘인 걸?' 

문득 초평우가 떠 오른다. 비록 덩치는 완전히 반대지만. 

이마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선장을 빤히 바라보던 휘의 손이 들렸다. 그리고 영등의 입에서 헛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턱, 선장의 끝이 휘의 손가락 끝에 걸린 채 더 내려가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요.요물이 사술을...?" 

영등의 더듬거리는 말에 휘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노스님께 받은 것이 있으니 노스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소. 그러니 이해 하시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은 휘였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도 없다. 헌데 조금 세게 때려야 할 거라고? 

"퍽!" 

"엇?" 

"퍼퍽!" 

"으음..." 

바람처럼 선장을 파고들며 영등을 두들기던 휘의 표정이 묘해졌다.  

바위가 박살날 정도는 아니어도 웬만 해선 한대에 쓰러질 정도의 타격은 된다. 그런데... 영등은 마치 간지럽다는 눈만 움찔거릴 뿐이다. 그렇다면... 

"뻐억! 쾅! 떠떵!" 

"아이고! 크억! 우욱!" 

시간이 지나면서 산사를 울리는 비명이 십리 밖까지 울려 퍼졌다. 지나던 사람들이 잔치라도 벌리는 줄 알고 문을 두드리지 않을까, 산사에서 돼지를 잡는다고 관청에 신고가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다. 

일각에 이은 비명소리가 끝나 갈 때쯤, 동굴 앞에는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다.  

자신의 윗사람이 맞고 있는데도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 사미승을 비롯해, 바위 뒤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 채 질린 표정의 초평우와 풍인강까지. 

한편, 손발을 이용해 영등을 두들겨 패던 휘는 노스님이 왜 패도 좋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세게 때려야 할거라는 이유 역시. 

비록 초식은 별 것이 없었지만, 영등의 몸만큼은 탄력 좋은 강철과도 같았다. 웬만해서는 고통도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선 팬 효과가 없다. 적어도 패려고 마음 먹었으면 화끈하게 패야 한다는 것이 휘의 생각이었다. 그 바람에 손발에 힘이 더 들어가고 있었다.  

"쾅!! 콰광!!" 

"쿠웩! 우왁!" 

하지만 몸만 믿고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일각이 넘어가자 영등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아이고! 그만! 그만! 알았소! 사부! 제발 말려 주시오!!" 

끝내는 영등의 입에서 사부를 찾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박 땅바닥을 기어서 동굴로 들어가는 영등을 바라보며 휘는 손을 멈추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흠, 오랜만에 주먹질 좀 하니까 기분이 좋아지는군. 조금 더 했으면 싶은데..." 

구경꾼들의 얼굴이 창백하니 질려 버렸다. 기어 가던 영등의 얼굴은 질리다 못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그 때 아후달의 음성이 구원의 목소리처럼 들려 온다. 

"그 정도면 됐네, 시주. 안으로 들어 오시게." 

휘가 안으로 들어가자 영등은 후다닥 구석으로 물러났다. 휘가 그런 영등을 보고 슬쩍 웃음을 지으며 아후달을 향해 말했다. 

"좋은 몸이더군요." 

"흘흘... 가르칠 것이 그것 밖에 없었으니, 어쩌겠는가." 

서장의 외공은 중원의 외공으로는 결코 따라 갈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신비함에 정평이 나 있던 바, 아마 아후달은 영등에게 천화사의 무공을 가르치지 못하고 대신에 비전되어 온 외공을 가르친 듯했다.  

"웅크리고 있는 내력도 제법 되는 것 같습니다만." 

"멧돼지가 주체할 수없는 힘을 갖게 되면 호랑이보다 무서운 법이지. 그래서 그냥 심어만 놓았네." 

영등을 한 번 쳐다 본 아후달이 실실 웃으며 휘를 올려다 보았다. 

"시주가 다 가지고 가게나." 

"예?" 

"어차피 여기 놔두어 봐야 일만 저지를 놈이야. 그 동안에는 내가 있어서 함부로 날뛰지 못했지만, 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거든. 그러니 어쩌겠나. 시주가 다스렸으니 시주가 이끌 수 밖에."      

그것이었다. 아후달이 영등을 패도 좋다는 데는 그런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휘가 아연한 표정을 짓자 아후달이 못을 박듯이 한마디를 덧 붙였다. 

"저 놈은 천살(天殺)의 기를 타고 난 놈이야. 마에 물들면 천인을 죽일 놈이지. 시주가 아니면 이제는 방법이 없어. 그러니 알아서 하게. 그래도 잘 다스리면 제 앞가림은 할거네." 

말인 즉, -네가 아니면 악마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책임 져라-, 그 말. 그나마 안에 심어진 힘이 쓸만하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결국 유월의 뜨거운 햇살이 구름사이로 내리쬐던 그 날, 네 사람이 사찰의 문을 나서야만 했다.  

뜻밖의 선물과 짐을 한꺼번에 떠 맡은 휘를 비롯해, 함박 웃음을 짓고 있는 초평우, 여전히 얼음덩이같은 표정의 풍인강, 그리고 통통한 몸에 자기 키보다 훨씬 큰 선장을 짚고 풀 죽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삼십 초반의 승려 영등까지.  

그리고 그 날 밤, 두 사람이 영등사를 소리없이 방문했다. 아후달이 승방으로 들어간 자시 경 쯤. 

두 사람은 사미승 영효를 윽박질러 휘의 행적을 캐 묻고는, 휘가 동굴에서 무공을 펼쳤다는 말을 듣고서 사찰의 뒤 쪽 동굴로 들어갔다. 

아후달이 기거했던 동굴로 은밀히 들어선 두 사람은 벽에 나 있는 꽃 그림을 보더니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둠 속에서 언뜻 얼굴에 거미줄이 묻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으으으... 봐라. 더 완벽해졌다. 대체 어떻게 된 놈이 며칠도 안 되서..." 

그러자 빨간 눈동자가 체념한 듯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다 틀렸다. 그 놈 잡아가기는. 어쩔래? 그냥 돌아가자." 

"련주한테 맞아 죽고 싶으면 너나 가! 나는 죽든 살든 귀신 같은 그놈 쫓아 다니면서 복수할 거니까!"  

-나는 그 놈의 거시기에 거미줄을 쳐 주리라!- 

불끈 주먹을 쥐며 마음을 다 잡는 흑살지주를 보고 유혼귀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음, 그럼 나도 안 간다." 

'떠그럴, 둘이 가야 반반씩 나눠 맞지. 미쳤냐? 나 혼자 뒤집어 쓰고 맞아 죽게?'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떠나간 휘의 흔적을 쫓기로 했다. 죽으나 사나. 이판 사판이다. 

          *            *          * 

고대로부터 수많은 나라가 설 때마다 성도가 되었던 낙양(洛陽).  

황하강 낙하 유역에 동서로 삼십 리, 남북으로 이십 리, 방대하게 들어 선 도성에는 거주하는 사람만도 백만에 이르렀다.  

게다가 주위에는 수많은 역사적 유물들이 산재해 있어, 유생들과 승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또한 낙양이었다. 그 중에서도 남쪽의 용문석굴과 더불어 낙양의 자랑이라는 서옹문 밖 백마사는 한마디로 낙양의 깊은 역사를 짐작케 하는 유서 깊은 사찰이었다.  

승려의 수만 이천여 명에 이르렀으니 불사를 드리기 위해 들린 사람이 반, 승려가 반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 백마사의 깊은 곳에 있는 승방, 몇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수근거리고 있었다. 

"어찌 하시렵니까? 아무래도 꼬리를 밟힌 듯 싶습니다만." 

상인의 옷차림을 한 중년인 중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사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눈매가 날카로운 중년인이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지금으로선 대안이 없습니다. 당금 천하에서 그만한 고문(古文)의 전문가를 찾을 수 있는 곳은 황궁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황궁에서 사람을 데려올 수 없는 이상은 서충량을 데려가는 수 밖에." 

"과연 그가 해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필사본을 한 장 가져가는 게 아니겠소?"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였다.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백염의 초로인이 몸을 일으켰다. 

"일단 가보지. 얼추 시간이 된 것 같은 데." 

"그러지요. 장숙부." 

넷 중에 제일 젊은 상인이 몸을 일으키자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도 몸을 일으켰다. 헌데 그 때였다. 

삐걱! 

승방의 방문이 열리고 중년무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백마사의 주지가 잠시 뵙자고 합니다. 어르신." 

중년무사의 말에 초로인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주지가? 음... 알았네." 

자신들이 원하던 정보를 전해준 것이 백마사의 주지 능효대사였다. 게다가 능효가 가진 강호에서의 입김을 생각해도 결코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네 사람이 밖으로 나서자 세 명의 무사가 자연스럽게 삼재진의 형태로 네 명을 감쌌다. 언제든 출수할 수있는 자세를 잡고. 

주지의 방은 그들이 머물렀던 곳에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주지의 방으로 들어가자 능효가 탐스런 백염을 쓰다듬으며 합장을 했다. 

"공연히 오시라 해서 죄송하오이다. 장시주." 

"별 말씀을. 헌데 어인 일로?" 

초로인 장인성의 의아해 하는 질문에 능효대사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인지 고문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을 한 사람 더 알아냈습니다. 장시주께서 알고자 하실 것 같아서. 허허허... 나무아미타불." 

장인성의 눈이 번뜩였다. 데려갈 사람은 한 사람이면 되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을 수록 좋은 것이다. 

"누굽니까?" 

"오래 전에 몰락한 유가장이라는 곳이 있소이다. 본래 낙양의 유명한 학자가문으로 고문에 일가견이 있어 황실에서조차 그 집안 사람을 중용했을 정도였소이다. 헌데 그 집안 사람들은 모두 원인을 알 수 없는 혈겁을 당하고 당시 황실에 가 있던 한 사람만이 살아 남았지요. 그는 가족들이 모두 죽자 황궁을 떠나 낙양으로 내려와 있었다 합니다. 요행으로 그가 있는 곳을 알아냈소이다. 게다가 마침 빈승의 사제인 능하가 그와 친했다 하니 그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장시주." 

"음,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장인성이 묻지만 능효는 후덕한 웃음을 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제야 장인성이 다시 말했다. 

"약속한 시줏돈은 본가에서 곧 보내 올 겁니다. 물론 두 사람을 찾은 몫을 말입니다." 

'욕심쟁이 땡중 같으니라구.' 

"허허허, 감사하오이다." 

'그대들 칼 든 무사들이 어찌 알꼬, 그대들이 보내 준 은전으로 헐벗고 굶주린 중생 수백명이 올 겨울을 배불리 지낼 수있다는 것을.' 

능효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는 유정룡이라 하오. 낙양성 서문거리에서 한고점이라는 자그마한 책방을 하고 있다고 하더이다." 

           *       *         * 

비바람이 몰아치던 유월 열 닷새, 낙양의 동문대로에 위치한 강안루의 이층에는 네 사람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시름에 잠겨 있었다.  

한 사람은 비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조사를 할 수 없어 걱정이었고, 두 사람은 그냥 하늘만 쳐다보며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억울해서 시무룩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고기를 눈앞에 두고도 중이라는 이유로 먹지 못하고 침만 흘려야 한다는 것이 야속해서 침울한 것이었다.  

"대형, 비가 언제나 그칠까요?" 

차가운 눈빛을 풀풀 날리는 풍인강의 말에 휘가 한숨을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낙양까지 와서 움직이지도 못하다니..." 

그러자 다른 두 사람도 이 때라는 듯 입을 열었다. 

"한판이라도 더 붙어야 되는데..." 

"오리고기가 잘 익었는데... 음." 

통통한 얼굴의 스님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끝맺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스님에게로 쏠렸다. 

순간, 땡추 영등이 후다닥 변명을 한다. 

"아! 오리고기란 식기 전에 먹어야 기름이 안 엉킨다고..." 

스님이 그걸 어떻게? 

"음, 그냥 말을 들었을 뿐이오. 전에 왕씨네 집에 염을 해주러 갔다가 굽는 것을 보고... 하하하! 먹지는 않았다오." 

에이, 먹었겠는데? 거짓말 하지 마쇼! 

"정말이오! 장씨 집에서 개고기를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개고기까지?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아니... 그게 아니고, 삼년 묵은 능사주가 있다길래, 그냥 안주 삼아서..." 

그럼 그렇지, 쯔쯔쯔...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쳐다봐야 눈만 버린다는 표정으로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창 밖을 향했다. 그 때였다. 초평우가 눈을 반짝이며 휘를 불렀다. 

"형님, 저 거지, 개방의 거지 같은 데요?" 

개방? 휘의 눈이 초평우의 눈길을 따라갔다. 거기에는 비내리는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청승맞게 하늘을 바라보는 중년 거지가 있었다. 헌데 기이하다. 거지가 동냥질에는 관심이 없고 눈알만 떼굴떼굴 굴리고 있다.   

거지를 바라보며 초평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내리는 날 동냥질 하는 거지가 있다니, 말단거지도 아닌 것 같은 데." 

휘의 눈에서 이채가 서렸다. 그랬다. 거지들도 비내리는 날에는 동냥질을 하지 않는다. 며칠 굶었다면 몰라도. 더구나 중년거지는 제법 틀이 잡힌 거지다. 그렇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 나와 있다는 말. 

"매듭이 네 개 있습니다. 개방에서도 제법 지위가 있는 거지가 분명해 보입니다. 헌데 기이하군요. 왜 나와 있을까요?" 

초평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별걸 다 궁금해 한다는 듯 영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허허! 배고픈 거지가 비오는 날이라고 동냥질을 거를 수 있겠습니까?" 

찌릿! 초평우가 모르면 입 다물고 가만 있으라는 눈빛을 던지고는 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휘가 물었다. 

"개방의 이목은 천하에서 가장 넓게 퍼져 있기로 정평이 나있지요. 그런 개방의 거지가 나오지 않을 날 나와서 서성댈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풍인강이 시퍼런 눈두덩을 문지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당연히 뭔가 알아볼 것이 있어서겠지요." 

제법이다는 눈빛을 던지며 초평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 말을 들은 휘가 벌떡 일어섰다.  

'이런 멍청한! 알아볼 것이 있는 놈이 개방을 잊고 고민만 하고 있었다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저 거지에게 물어 볼 것이 좀 있습니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휘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가자 건너편의 거지가 보였다. 그는 표시내지 않으려 애쓰며 힐끔 힐끔 휘가 있는 강안루 안을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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