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 (199/200)

모용서하의 방은 객잔의 이층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아무도 모르게 모용서하의 방에 사람이 들어갔다는 것은 자칭 고수라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일 수 밖에. 

“모용소저 계십니까?” 

유현명이 부르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 오세요.” 

방문이 열리자 모용서하가 보였다. 한 쪽에는 유모라는 여인까지. 

그리고 그들이 궁금해 했던, 용혈궁의 사람으로 보이는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흑의에 탐스런 흑염을 늘어뜨리고, 고요히 가라앉은 눈동자가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맑은 노인이었다. 노인이 눈을 들어 방문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쓱 둘러보았다.  

앞에 선 유현명, 혁무성, 우진자를 차례 차례 지나치더니, 구석에 서있는 휘를 기이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며 멈추었다. 

“흘...” 

노인이 묘한 웃음을 흘린다. 그런 노인을 휘도 뚫어지게 바라봤다. 

‘강하다! 지금까지 보아 온 그 누구보다도... 어쩌면 곡중헌보다도...’ 

첫 느낌부터 전신을 당기는 긴장에 피가 끓어 오른다. 저 노인은 누굴까? 노인과 휘의 눈싸움을 바라보던 모용서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순간 노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들어 올 필요없어! 너, 너, 너, 너. 넷만 들어 와!” 

유현명, 우진자, 혁무성, 그리고 진조여휘. 네 사람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들어서던 휘가 초평우를 향해 슬쩍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가서 쉬고 계십시오. 별일 없을 겁니다.> 

탁자로 다가서던 우진자는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 거렸다.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유현명은 무심하게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고, 혁무성은 잔뜩 긴장한 눈으로 노인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 때였다. 우진자의 뒤로 돌아가던 휘의 눈이 언뜻 모용서하의 눈과 마주쳤다.  

문득 그녀의 눈에서 묻어 나오는 아쉬운 눈빛. 왜... 저런 눈빛일까. 왜 저런 눈빛을 받는 자신의 가슴이 허전하게 빈 느낌일까.  

눈을 돌리자 노인이 흥미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노인의 눈과 마주친 휘의 눈도 깊어졌다. 기이한 노인... 

휘마저 의자에 앉자 모용서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조부님께서 보내 주신 분이세요.” 

“혼자는 아니실 테고...” 

유현명의 말에 노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밖에 몇 명이 더 있다. 단지 내가 대표로 들어 왔을 뿐.” 

딱딱 끊어지는 말투에 혁무성이 눈을 찌푸리며 나직이 말을 꺼냈다. 마치 염탐하는 듯 한 말투로. 

“몇 명이서 용혈궁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천검보 놈이 왜 여기서 설치는지는 모르겠다만, 일은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거라.” 

“보주께선 일을 끝까지 마무리 지으시길 바라고 계십니다만...?” 

“흥! 신향은 용혈궁 백리이내이다. 꼬마야. 너희들이 할 일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지.” 

“예?” 

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혁무성이 의아한 듯 되묻자 유현명이 벌떡 일어서며 눈을 크게 뜨고는 나직이 소리쳤다. 

“용혈명(龍血命)이 내려졌군요!” 

경악에 찬 목소리. 

용혈궁의 존폐에 관련된 긴급 상황이 아니면 내려지지 않는다는 절대 명령, 용혈궁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 바로 용혈명이다.  

단, 백리이내에서만 통용된다.  

용혈명을 어긴다면 그는 용혈궁 모든 무사들의 적이다. 설사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부궁주라 해도, 증거만 확실하다면 일반무사도 별도의 명 없이 임의로 처단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칫 용혈명의 위계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말. 그만큼 위험하면서도 절대의 명령이 용혈명이다. 

유현명의 말에 노인이 눈을 빛내며 답했다. 

“그래도 싸돌아 다니는 놈이라고 눈치는 빠르구나. 그래 용혈명이 내려졌다. 당대 궁주가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세번째 용혈명이...” 

“그 만큼 다급하다는 말이겠지요.” 

초평우가 입에 침을 튀기며 용혈궁을 설명할 때, 마지막으로 이야기 해준 것이 용혈명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휘의 말에 노인이 가늘게 웃었다. 

“어차피 늦으면 소용이 없으니까.” 

“적은 설마 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꼴이겠군요.” 

“클클클... 마지막 용혈명을 버린 자식의 딸을 위해 쓸 줄은 놈도 몰랐을 것이다.” 

노인이 휘를 보며 즐겁다는 듯 괴이한 웃음을 흘리자 우진자가 여전히 이마를 찌푸린 채 물었다. 

“그래도 공격한다면...?” 

“쯔쯔... 멍청한 말코 같으니....” 

노인의 혀를 차는 핀잔. 순간 우진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당신...!!” 

“허주는 그래도 멍청하지는 않았는데...” 

“...? ....어떻게 사부님을...?” 

우진자는 의아한 듯 노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러다... 

“적들이 내부의 적이라면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그랬다간 거꾸로 안에서 칼을 맞을 수가 있으니까요.”  

모용서하의 조용한 목소리에 노인에게 따지는 것도 잊었다. 그 때 이어지는 휘의 목소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 수록 지위가 사라지면 더욱 불안한 법.” 

휘가 노인을 바라보다 모용서하에게로 눈을 돌렸다. 

“일반무사조차 명을 어긴 증거만 갖추면 상위자를 처벌해도 벌을 받지 않는다...? 무서운 법이군요...” 

모용서하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언뜻 눈물조차 비치는 듯하다. 

“그래요... 무서운 법이죠...” 

휘가 의아한 눈으로 모용서하의 이슬이 맺힌 눈을 응시했다. 그러자 노인이 그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의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용혈명이 발동됐었지... 그 걸로 이 아이의 부모들은, 다시는 용혈궁에 돌아 올 수 없었다.” 

문득 휘는 모용서하를 부르는 노인의 호칭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씁쓸한 노인의 한마디. 

“이 아이의 아버지는... 나의 제자였지...” 

노인의 말에 우진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마침내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벽룡(碧龍) 공손척 선배??” 

유현명이 눈을 부릅뜨고, 혁무성은 벌떡 일어서 입을 쩍 벌렸다. 

오직 휘만이 멀뚱거리며 기이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 

벽룡 공손척, 용혈궁주 광룡 모용진광의 의형제로 용혈삼룡 중 한 사람. 이십 여 년 전, 궁주인 모용진광과 다투었다는 소문이 돌고 나서부터,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모든 일은 끝난 거와 같았다. 벽룡이 나타난데다 용혈명이 떨어졌거늘... 누가 감히 용혈궁내에서 칼을 뽑아 든단 말인가.   

면구와 금양단

모용서하의 방을 나온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 갔다. 휘 역시 방으로 돌아가 오랜만에 한가한 마음으로 생각에 잠겼다.  

표행이 멈췄으니 휘가 굳이 용혈궁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헌데... 마음이 편안해진 듯 하면서도, 왠지 한쪽 구석에선 허전한 마음이 떠 돈다.  

휘가 방에서 쉬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공자?” 

밖에서 유모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문을 열자 유모가 가볍게 고갯짓을 하며 따라오라는 눈짓이다.  

그녀를 따라 모용서하의 방에 다시 들어서니 저 만치 앉아 있는 모용서하가 보였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기이한 기분이 든다. 

유모마저 나가고, 모용서하와 단 둘이 남자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청을 울리고 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험! 무슨 일이오.” 

모용서하가 휘를 바라보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고맙다는 말씀을 하고 싶어서요.”    

“그거야....” 

“보표를 맡아서 어쩔 수없이 했다는 말씀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되요.” 

어색해 하는 휘를 보더니 모용서하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연다.  

“얼굴을 보여 줄 수 없나요?” 

흠칫, 의외라는 눈으로 모용서하를 바라봤다. 그녀가 다시 말한다. 

“나중에 만나면 얼굴이라도 알아 봐야 인사를 드리지 않겠어요?” 

“음... 어떻게 알았소?” 

'상당히 비싼 면구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 말은 하지 않고 물어 봤다. 모용서하가 훗, 웃음을 터트린다. 

“제가 가진 능력이 본래 조금 이상하잖아요? 게다가 여자들이 조금 예리한 면이 있는 편이죠.” 

약간 약이 오른 휘도 한가지를 요구했다. 

“그럼 모용낭자의 얼굴에 펼쳐진 그 묘한 기운부터 거두어 주시겠오?” 

이번엔 모용서하가 어색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아...셨나요?” 

“아니 그럼, 한 번 본 것도 아니고, 수십 번 본 얼굴이 기억도 안 나는데,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그렇게 멍청하게 보이오?” 

똑,똑 부러지는 듯한 휘의 말에 모용서하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입가에 웃음까지 매달고 붉어진 얼굴, 그녀를 보는 휘의 표정이 가관이다. 멍.... 저 여자가 저렇게 예뻤던가? 

“좋...아요.” 

모용서하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감았다. 두 손을 올려 얼굴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도 가늘게 떨리고 있다. 십여 번 얼굴을 쓰다듬던 그녀의 두 손이 머리 뒤로 옮겨가더니 궁장을 튼 머리에서 비녀 두 개를 뽑아 냈다. 순간. 

“아!” 

휘의 입에서 경탄의 표정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확연히 눈에 들어 온다. 조금 전의 뒤돌아 서면 잊어버렸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비록 달라진 것은 약간이지만, 전체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큰 눈 위에는 그려진 듯 짙은 눈썹이 신월처럼 자리잡았고, 은은히 윤기가 흐르는 피부는 맑고 고와서 사람의 피부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사실 전체적인 모습은 경국지색이니 화월용태니 하는 여인들처럼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보면 볼 수록 눈을 뗄 수가 없다. 이상하게... 이상하게... 

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자, 모용서하가 완연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보기... 싫은... 가요?” 

휘가 대답했다. 역시나... 떨리는 목소리. 

“그게.. 후... 낭자도 면구 하나 사시지 않겠소?” 

“예??”  

“이상하게 눈을 떼기가 힘드니... 면구 싸게 파는 분 알고 있소만...” 

모용서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하도 기가 막혀서... 

“푸흐흡!!” 

모용서하의 기묘한 웃음소리에 유모는 차마 같이 웃지는 못하고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휘가 나간 이후로 계속된 웃음이 일각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죠? 유모?” 

"호호호..." 

모용서하의 말에 끝내 유모도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붉게 물든 채.  

조금 전, 휘가 방을 나오기 전 옆모습을 보았다. 처음에는 왠 아름다운 남장여인이 서 있는가 했었다. 해서 일단 문 앞을 막으려 했다. 지금 방에는 조휘와 자신의 주인인 모용서하만이 있어야 하니까. 헌데, 그 때 방에서 들리는 모용서하의 떨리는 목소리. 

“조공자, 나중에 은혜는 꼭 갚겠어요.”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의 목소리.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오. 그럼...” 

맙소사! 그였다. 저 앞의 여자처럼, 아니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사람은 조휘였다. 그가 손에 든 면구를 쓰더니 얼굴을 만지작거리자 본래 보았던 얼굴이 나타난다. 유모도 입을 벌렸다. 넋을 잃고...  

유모는 휘가 나가고 난 다음에도 한참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그리고 모용서하는 그 모습을 보고 계속 웃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모...” 

“예, 아가씨.” 

“저 사람 이름이 진조여휘래요. 음... 그러니까 성이 진조여, 세 자래요. 희한한 성이죠? 나중에 그 이유를 알려 준대요. 좀 더 지나서... 지금 알려 주지... 치... 나는 화가나서 그냥 조공자라 부르기로 했어요.” 

약간 토라진 듯한 모용서하의 말에 유모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빙긋 웃음이 떠 올랐다.  

‘그렇구나... 아가씨도 벌써 스물이 넘어 사랑을 알 때가 되었구나. 하지만... 하지만.... 불쌍한 아가씨...’ 

입가에 웃음 띤 유모의 눈에는, 안개가 모이고 모여 이슬이 뭉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 모용서하도 모르게...    

미처 유모의 마음을 알리 없는 모용서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참! 그리고 유모.” 

“예. 아가씨.” 

“나... 면구 하나 사기로 했어요. 대가는 미리 줬어요. 금양단(金養丹) 한알.” 

유모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예? 다섯 알 밖에 없는 금양단을요?!!” 

“어차피 조부님께 필요한 것은 한 알이나 많아야 두 알이면 되요. 조공자가 아니었으면 이 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 금양단 한알 준다고 해서 아까울 것은 없어요.” 

“후우.... 할 수 없지요. 이미 준 것을... 그런데 면구는 왜?” 

“풋! 조공자가 쓰래요. 그게 편할 거라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래도 환안술(幻顔術)을 계속 펼치는 것은 너무 내력소모가 크거든요. 그래서 면구를 쓰기로 했어요. 음... 좀 예쁜 거야 할 텐데...” 

어이없어 하는 유모를 본체 만체 모용서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유모. 조공자의 기운이 왠지 낯설지가 않아요. 마치... 내가 익힌 지령음기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턱을 고인 채 의문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제 그 놈 갔느냐? 들어가도 되겠지?" 

방으로 돌아 온 휘는 힐끔 웃음소리가 들리는 모용서하의 방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 저렇게 웃어 대는 거지? 내가 그렇게 웃기게 생겼나?” 

품속에서 하나의 목갑을 꺼내 열어 보았다. 모용서하가 준 단약이 한 알 들어 있었다. 면구 값으로 미리 준다는...  

“속에 불을 담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했던가? 제법 쓸만한 거 같은 데... 초형에게 줘야 겠군.” 

문득 환안술을 거둔 모용서하의 얼굴이 생각나자 휘의 입가에 빙그레 밝은 미소가 하얗게 걸렸다. 

'그녀에게 맞는 면구가 있을까? 저 달처럼...' 

창 밖을 보자 하늘에는 밝은 달이 유난히 불그스레하니 볼을 붉히고 떠 있었다. 마치 누구의 얼굴처럼... 

'그런데 왜... 그녀가 웃을 때 단전이 꿈틀거렸지? 지음의 기운이 여자하고 관계가 있나?' 

지붕 위 어둠 속에서 네 개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 중 빨간 눈동자가 묻는다.  

"저.저 사람... 그 사람이지...?" 

"어.... 다 틀렸다. 벽룡이 나섰으면 늙은 잡룡들도 다 나섰다는 말인데..." 

검은 눈동자의 힘없는 말에 빨간 눈동자도 빛이 희미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련주늙은이가 잡아 먹으려고 난린데... 맨날 실패 한다고..." 

"...." 

"별 수 없어. 청부를 실패하게 만든 그 젊은 놈이라도 잡아가는 수 밖에..." 

"...." 

"거미귀신아. 뭔 말이라도..." 

빨간 눈동자가 눈알을 돌려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의 줄 쳐진 검은 얼굴이 해쓱하니 질려 있는 게 보인다. 다시 눈알을 돌려 그가 보고 있는 곳을 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젊은 놈이 하얗게 웃으며 창 밖을 보고 있는 모습이.. 

거미귀신 흑살지주가 빨간 눈동자 귀혼유사의 누런 백발을 잡아 당기며 다급히 말했다. 

"고.고.고개 숙여..." 

재빨리 고개를 숙인 귀혼유사가 힐끔 흑살지주를 쳐다 보았다. 

'병이다. 병.... 떠그랄...' 

    

              *        *        * 

하늘이 유난히 쾌청해서 길을 떠나는 이들의 가슴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이른 아침, 원우포구에는 황하를 건너기 위해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대에서 가장 큰 포구인데다, 건너면 바로 정주가 지척인지라, 온갖 상인들을 비롯해서 일반양민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선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중에는 사람들에게 팔기 위해 잡아 온 물고기를 광주리에 쏟아 놓고 소리치는 어부도 있었고,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자신들의 주루로 데려가기 위해 소리치는 어린 점소이들도 보였다.  

배를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 솟아 오르는 태양의 뜨거움을 피해 그늘로 들어 앉을 무렵, 조금은 시끄러움이 가라앉은 포구로 몇 필의 말이 들어섰다.  

사람은 많다 하지만 말과 함께 승선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자 맨 앞에서 사람들을 인도하던 장년인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뒤를 돌아 보며 입을 열었다. 

"사숙님,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아서 첫 번째 배로 건너기는 어려울 것 같은 데요?" 

"적상, 다음 배는 언젠가?" 

"한시진 정도 기다려야 할 겁니다." 

"음...." 

그들이었다. 신향을 떠나 온 백풍표국의 사람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