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가 돌아섰다. 하지만 아무도 막지를 않았다. 막아 섰던 자조차 길을 비켜 줬다.
웅경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일권은 분명 그 때의 일권과 같았다. 그는 누구고, 그대는 누구인가?'
철군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보이는 휘를 살기 가득한 눈으로 쏘아 보았다. 휘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가 송곳이 되어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놈, 죽이리라! 아버님의 명이 아니더라도 네 놈만은 죽이리라! 감히,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나를 땅바닥에 나뒹굴게 하고 돌아서다니... 내 혼을 팔아서라도 네 놈을 죽일 무공을 익히리라! 천하 만인 앞에서 네 놈을 꺾어 무릎을 꿇리리라!'
영호련이 기이한 눈으로 휘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저으며 철혈단의 무사에게 명을 내렸다.
"사공대주를 모시고 다른 단원들의 부상을 살펴봐라!"
철혈단의 무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쓰러진 단원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사공민을 위시해서 칠팔 명이 걷지도 못할 정도로 다치긴 했지만, 죽을 정도의 중상자는 없었다.
영호련의 눈이 다시 저 만치 멀어진 휘를 바라보았다.
'총령의 아이들은 모두 죽였으면서, 왜 우리들은 하나도 죽이지 않았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떨칠 수 없는 의문을 가슴속 깊이 담은 채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철군명이 이를 갈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으니...
"으드득! 일단... 돌아... 간다..."
휘가 풍인강을 쳐다보고는 빙긋 웃었다. 그러자 그가 철군명 쪽을 바라보고는 나직이 묻는다.
"괜찮겠습니까?"
후환을 말하는 듯. 휘가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 일로 고민할 것 같았으면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초평우를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옷이 찢겨지고 제법 많은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의 얼굴만큼은 밝아 있었다.
초평우가 벙긋 웃는다. 마치, 나 어땠수? 하고 묻는 것처럼.
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다는 듯.
"갑시다. 이 곳에서의 일은 끝났으니까."
거세게 흔들어 놨으니 정신이 없을 것이다. 철혈성이나 신비세력이나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을 터, 나머지는 만시량에게 맡겨 놓으면 되었다.
* * *
곡중헌은 불길이 이는 눈으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는 흑의인을 쳐다봤다.
"그래서, 모두 죽었다?"
"속하가 확인한 바로는..."
"암인을 비롯한 암객 열을 단신으로 죽일 수있는 자가 몇이나 될 거라 생각하느냐? 달빛도 없는 밤에 말이다."
"속.속하도... 믿을 수가..."
곡중헌의 눈 깊은 곳에서 암흑의 기운이 일렁거렸다.
"천하에 그러한 능력을 지닌 자는 스물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그 정도의 능력을 지녔단 말인가? 아직 젊은 자라 했거늘..."
"철혈단도 물러섰다 합니다. 령주!"
"후후후.... 철군명이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이상은 어쩔 수 없었겠지..."
"저... 그게..."
흑의인의 미적거리는 말에 곡중헌의 웃음이 그쳤다. 그러자 흑의인의 고개가 더욱 깊이 숙여졌다.
"속하들이 자세히 조사한 바로는... 그 곳에서 암흑마령의 흔적이..."
와직!
곡중헌이 태사의의 팔걸이를 움켜쥐며 눈을 부릅떴다.
"그게 사실이냐?"
"부서져 나간 나무에서 생기가 말라 버렸습니다. 그것은..."
"으음.... 암흑마령기. 그가 암흑마령을 끌어 올려야 할 만큼 다급해졌었다는 말인가? 그러고도 실패를 했다?"
곡중헌이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기자 흑의인은 조용히 곡중헌의 부름만을 기다렸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곡중헌의 눈이 뜨였다. 그가 흑의인을 바라보며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너희가 본 것을 당분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존명!"
"곧 궁에서 사자가 올 것이다. 그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하오나..."
"이 곳의 책임자는 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명심... 하겠습니다. 령주!"
흑의인을 내 보낸 곡중헌의 눈에서 어둠의 기운이 출렁였다.
"암혼."
그의 나직한 부름에 옆의 휘장 뒤에서 음울한 답이 들려 왔다.
"예, 령주."
"들었겠지? 암인과 그 형제들이 당했다. 원인이 뭐라 생각하느냐?"
"그들에겐 이번 일이 첫 번째 임무였습니다. 령주.“
“그러니까 경험 미숙이다. 그 말인가?”
“속하가 보기에는...”
“흠... 어쨌든 암객 일개조가 모두 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가 강하다는 말이겠지. 암혼, 네가 가라. 가서 그의 모든 것을 지켜보며 명을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령주.”
나직한 대답과 함께 암혼의 기척이 사라지자 곡중헌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패였다.
‘철군명이 암흑마령을 끌어 올리고도 실패했다니...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군. 음...’
* * *
철운성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철군명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 봤다.
자신이 비록 잡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 했지만, 철혈단 전체가 달려들고도 어찌 하지 못했다면 철군명만의 잘못도 아니었다.
게다가 총령의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 하지를 않는가.
“대체 그놈이 누구이기에 그리도 강하더란 말이냐?”
침음성이 섞인 철운성의 말에 철군명은 이를 갈았다.
“놈이 누구건 소자가 죽일 것입니다.”
“철혈단이 다 달려들고도 못 죽였거늘, 어찌 죽인단 말이냐? 너는 손을 떼거라. 내 따로 사람을 보낼 것이다!”
철군명이 두 손을 피가 나도록 움켜쥐며 말했다.
“소자... 신마천궁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순간, 철운성의 표정이 딱딱하니 굳어졌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어차피 명분뿐인 제자이긴 하나 저 역시 궁주의 제자입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정식 제자로 들어가겠습니다.”
그 말에 철운성이 한마디 한마디 칼로 끊듯이 말했다.
“그리되면... 철혈성의 후계권이 박탈 될 것이다.”
철군명은 고개를 들었다. 그라고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단순히 무공을 익히는 것과 신마천궁주의 정식제자로 그 곳의 후계권을 가지게 되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약한 곳이라면 복속시킬 수라도 있지만, 더 강한 곳에는 오히려 잡아 먹히게 될 테니, 어느 누가 그를 철혈성의 후계자로 인정하려 하겠는가. 심지어 철운성조차 반대할 것이다.
그는 눈에서 불길을 내뿜으며 아버지 철운성을 바라보았다.
“놈을 죽이지 않고는... 저도 없습니다. 아버님. 놈을 꺾어서... 제 앞에 꿇려놓고 죽일 것입니다!”
철운성은 자신의 아들을 말리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존심이 꺾이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그리 키워 왔으니 어찌 하겠는가. 떠나겠다 마음 먹었다면 분명 떠날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손자가 남아 있다는 것.
“네가 그리 마음 먹었다면 어쩔 수 없겠지. 허나 한가지만은 명심해야 한다. 너의 뿌리는 철혈성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심... 하겠습니다. 아버님.”
철군명의 고개가 깊숙이 숙여졌다.
‘어쩌면... 아버지라 부르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겪어 왔던 마음의 고통도, 이제는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 * *
“형님, 어디로 가실 겁니까?”
초평우가 물어 오지만 휘는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태백산의 능선을 타고 사흘 째, 종남산이 저 멀리 보이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장안이 코 앞이고, 동북쪽으로는 여산이 이어진다. 그리고 동쪽으로 쭉 가다 보면 하남성이 나올 것이다.
문제는... 휘가 그걸 모른다는 것이다. 뭘 알아야 대답할 것이 아닌가?
휘는 초평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북쪽으로 향해 있었다. 아마도 초가보가 있다는 장안이 그 쪽인가 보다.
“가보고 싶습니까?”
흠칫, 초평우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요... 제가 더 강해지면... 그 때 가겠습니다.”
풍인강을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표정이 어디를 가던 상관없다는 태도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일단은 낙양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그 곳에서 알아 볼 것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말을 하다 말고 휘가 초평우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어디로 가야 낙양입니까?”
초평우가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뚱한 목소리.
“형님, 일단은 간단한 중원의 지리부터 배우셔야... 안 그래? 풍가야!?”
풍인강이 무심한 눈으로 초평우를 바라보다가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저 쪽으로 가야 낙양이라고요? 그럼, 저 쪽은?”
초평우가 풍인강의 눈과 손 끝을 번갈아 보더니, 끝내 늑대의 이빨을 박박 갈았다.
“.....장!안!”
젠장 할! 대체 그 나이 먹도록 뭐 한 거야?
낙양으로 가던 중에 생긴일.
진령산맥 동쪽의 종남산, 중원 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도교의 성지로서, 북으로 장안을 품에 안고 있어 수 많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산이었다.
그러나 무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구대문파의 하나인 종남파가 있기에 더욱 유명한 산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인들이 종남산을 찾는 이유는 대문파 종남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게 마련.
석양이 서산머리에 살짝 머리를 걸치고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던 시각, 종남의 남쪽 작수(작水)현에 들어선 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세 사람은 언뜻 봐도 떠돌이 낭인무사처럼 보였다. 더구나 도검까지 차고 있는 것으로 봐선 당연한 생각이 들 지경이었으니... 자칭 작수제일의 점소이 괄삼도 그들을 낭인이라 생각할 수 밖에.
다만, 그 중 두 사람의 인상이 조금 싸늘하다고나 할까, 더럽다고나 할까. 좌우간 보는 이로 하여금 눈동자를 저절로 돌리게 만드는 그런 인상이 조금은 마음에 걸리는 괄삼이었다.
그렇다고 괄삼이 기가 죽을 이유는 없었다. 이 곳은 누가 뭐라 해도 종남의 영역이었고, 낭인 따위가 까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어셥셔!!"
인상이 더러운 사람한테는 약간의 양보심을 발휘해야 하겠지...
"먼길을 오셨나 봅니다. 이 쪽으로..."
참으로 투철한 직업정신의 괄삼이었다.
객잔에 들어가기 전, 가볍게 먼지를 털어 낸 세 사람이 괄삼의 안내로 자리에 앉자 그 때부터 괄삼이 자신의 최대 장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저희 용호객잔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온갖 진귀한...."
"만두!"
차가운 한마디. 괄삼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어디서 감히 자신의 말을 끊는단 말인가. 하지만... 인상이 너무 싸늘하니 일단은...
"헤헤 손님, 저희 용호객잔의 음식 중에서도...."
"오리구이."
와락, 괄삼의 인상이 조금 더 심하게 구겨졌다. 누가 낭인 아니랄까 봐 생긴 것도 꼭 늑대 같은 놈이...
'씨벌, 눈빛도 꼭 늑대새끼 같네.'
"알겠습니다요. 만두하고 오리구이, 곧 올립죠."
획 돌아선 괄삼이 막 주방을 향해 소리치려 할 때였다.
"나는..."
아! 하나 더 있었지? 그럭저럭 잘생긴 작자.
"예! 저희 용호객잔에선 음식 하나를 해도....주절주절...조잘조잘..."
마침내 한참에 걸쳐 자신의 장기를 다 발휘한 괄삼이 득의의 표정을 지으며 잘생긴 자를 쳐다 보았다. 뭘로 드시겠습니까? 하는 눈빛으로.
"나도 오리구이."
괄삼이 벌건 얼굴로 뒤 돌아가자 늑대눈빛 초평우가 휘에게 물었다.
"저 친구 어디 아픈가 본 데요? 얼굴이 빨간 것이."
휘가 대답했다.
"아마 화병이 좀 있나 봅니다. 침 맞으면 나을 텐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얼음낯짝 풍인강이 조용히 말했다.
"눈도 빨갛던데... 눈병도 있나 봅니다."
끄덕끄덕...
순간, 주방으로 다가가던 괄삼의 발걸음이 휘청, 하마터면 탁자모서리에 정통으로 이마를 찧을 뻔...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자 휘는 따뜻한 물부터 부탁했다.
잠시 후, 따듯한 물이 들어오자 목 부분의 이음매를 조심스럽게 뜯어내고는 면구를 벗겨 냈다.
오랜 만에 면구를 벗어서인지 시원한 느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만시량의 말에 의하면 최소한 열흘에 한 번은 면구를 벗고 이물질을 씻어 내야 한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땀이 나다 보면 떼가 낄 테고, 그러다 보면 면구의 틈이 벌어져 남들이 쉽게 알아 볼 테니까. 게다가 수염은 면구를 쓰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얼굴을 씻은 다음 수염까지 깎고 면구에 낀 먼지를 닦아 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풍인강이었다. 휘는 무심코 대답했다.
"들어 오세요."
덜컹, 방문이 열리고 풍인강이 들어왔다. 그는 방으로 들어서며 휘에게 다가서다가 무슨 일인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순간.
"당신 누구야?! 왜 이방에 있는 거지? 진형은? 아!"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풍인강이 후다닥 돌아섰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진형. 여자가 있는 줄도 모르고..."
퍽!
느닷없는 충격에 풍인강은 바닥의 단단함을 이마로 직접 느껴봐야만 했다.
한참만에 풍인강이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자, 그 여자(?)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초평우는 그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리고 있었다.
"이거...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서..."
휘의 목소리에 풍인강이 멍한 표정으로 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진...형?"
풍인강도 진형이라고 부른다. 진조여형은 발음이 잘 안된다나...
"크크크...."
초평우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형님의 얼굴을 보면 다들 한 번씩은 그런 오해를 하지. 그리고 한대씩 맞고 말이야."
"세상에..."
휘가 면구를 보여 주자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표정으로 풍인강이 말했다. 여전히 싸늘하게...
"그 면구 꼭 쓰고 다니십시오."
"그... 정도로 보기가 안 좋습니까?"
휘의 어색한 표정에 풍인강이 그답지 않게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었다.
"살인납니다. 살인..."
이제는 면구를 벗어도 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더 쓰고 다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휘의 표정이 침울하게 흐려졌다. 그러자 초평우는 새삼 삼살귀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삼살귀들 두들겨 팰 때나, 태백산에서 귀신같던 놈들을 죽일 때는 눈도 깜짝하지 않더니... 저 표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안쓰럽게 느껴지니... 속지 말아야지... '
어쨌든 휘는 다시 면구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오해를 받는 것 보다는 차라리 조금 귀찮은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다만.
"수염이 자라면 조금 괜찮을 것도 같습니다만..."
풍인강의 조언은 조금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침이 밝아오자 세 사람은 객잔을 나섰다.
오랜만에 씻고 수염까지 정리한 초평우와 풍인강이 찢어진 옷까지 새것으로 갈아입자, 객잔을 들어갈 때에 비하면 거지가 공자가 되어 나온 것 같았다. 심지어는 괄삼이 몰라 보고 일장 연설을 하려다가, 초평우의 '만두하고 오리구이 좀 싸줘.'라는 한마디에 허탈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작수현을 벗어나 종남산의 동북쪽을 돌아가는 길은, 장안과 여산으로 통하는 길이다 보니 관도가 제법 넓게 뚫려 있었다.
세 사람은 아침의 맑은 기운을 마시며 관도를 따라 양구령을 넘어가기로 했다. 시간이 일러서인지 관도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를 않았다.
길을 가는 중에도 초평우는 계속 중얼거리며 천양의 법문을 외우기에 정신이 없었고, 풍인강은 휘가 가르쳐 준 오보천환의 기초를 익히느라 가끔씩 좌우로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너무 정면승부만을 고집하는 풍인강이었다. 생사의 전장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이 신법이었지만, 어이없게도 그는 진천검결에 따른 보법이외에는 따로 익힌 신법이 없다고 한다. 해서 휘가 오보천환의 기본적인 움직임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까지 무공을 연마한다 해서 두 사람의 표정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중얼거리는 늑대와 흔들리는 얼음덩어리라고나 할까.
그렇게 세 사람이 양구령을 넘어갈 때였다. 저 만치 오십 여장 밖, 굽이도는 양구령 정상의 한 쪽에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서 쉬고 있었다.
마필만 해도 대여섯 필은 되어 보이는 데다 마차까지 있는 것이, 결코 적지 않은 인원이 있음을 짐작케 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 가서 보자 근 이십에 달하는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문득 마차를 바라보던 초평우가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정확히는 마차의 지붕에 꽂힌 깃발을 보고.
"아! 백풍표국!"
휘가 초평우를 바라보았다. 설명을 기다리는 눈빛을 하고. 초평우가 지체없이 입을 열었다. 이미 요 며칠간 한두 번 본 눈빛이 아니었으니.
"하남의 삼대 표국 중 하나로 정주에 기반을 두고 있는 표국입니다. 국주는 종남의 속가제자로 섬광일검 이자현이라는 사람입니다. 개국 한지 이십 여 년 만에 백풍표국이 하남의 삼대 표국에 끼일 만큼 성장한 데는 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종남이 음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순식간에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은 초평우의 말을 들으며 휘는 백풍표국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표국은 일반적으로 귀중한 물건들을 안전하게 수송해주는 그런 일을 한다고 아버지들에게 들었었다. 아마 저들도 뭔가 모를 물건을 운반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물건은 마차에 있는 듯 했고.
문득 휘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사십대로 보이는 청의인, 그는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절제된 기운, 고요히 가라앉은 자세, 언뜻 보아도 범상치 않은 고수로 보이는 자였다.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주위의 다른 자들도 그의 곁에는 쉽게 접근을 하지 않다가, 혹시라도 지나칠 때에는 공경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헌데 언뜻 그의 눈이 휘와 마주친 듯 느껴졌다. 매우 깊어 보이는 눈이었다.
청의의 중년인 유현명은 두어 굽이 아래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세 명의 무사가 보이자 안력을 돋우어 그들을 살펴 보았다. 걸음걸이가 안정되어 보이는 것이 제법 기초가 튼실한 자들인 듯 보였다.
"적상."
유현명의 부름에 한쪽에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자가 고개를 돌렸다.
"저 쪽에 오고 있는 자들, 어찌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