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200)

쾅!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사방으로 퍼지는 검기의 파편. 마른 대지에서 피어 오르는 먼지구름.

주르륵, 네 걸음을 물러서는 임가형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상대의 검이 햇살을 가르며 상단으로 늘어지는 듯 했을 때, 자신의 검은 정확히 가슴을 파고 들었다. 헌데...

늘어지던 검이 벼락이 되어 자신의 검을 내리쳤다.

그 충격에 검첨에 형성되어 있던 검기의 덩어리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러나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사이도 없이, 임가형은 검을 들어 올려야만 했다. 

전신의 내력을 끌어 올린 채.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단천락의 일초를 내려친 휘의 신형이 스윽, 임가형을 향해 미끄러져 간다. 

나아가던 신형이 언뜻 흔들린다 느껴지는 순간, 휘의 우수에 들린 만양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요요로운 만양의 그림자가 햇살에 반사되며 빛의 화살이 되어 비산한다.

"흡!"

임가형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이 터지고, 좌우로 휘둘러지는 철검에서 시퍼런 검기가 그물처럼 뻗어 나온다.

일순간, 나아가던 휘의 신형이 다섯으로 갈라졌다. 

"타앗!"

대경한 임가형의 신형이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가자, 휘의 환영도 회오리치는 바람을 따라 올라간다. 

허공에서 검을 휘돌린 임가형이 몸을 뒤집으며 검을 내질렀다. 

웅명검기 가득한 백웅파(百熊破)! 

휘도 만양을 좌우로 빗살처럼 엇갈려 내쳤다. 유성칠격사에 광섬의 검결을 담아.

햇살이 광란하며 터져 나간다!

쩌저정! 콰광!

떨어지는 힘까지 더해 내리치는 임가형의 웅혼한 검격이 휘의 일격에 흩어져 버리자, 다시 튕기듯이 삼장 밖으로 날아가는 임가형.

내려서는 순간, 그의 두 눈이 흡떠졌다. 

"헛!"

화려한 한 송이 붉은 꽃망울이 그의 두 눈동자에 맺혔다.  

만양이 허공에 한 송이 꽃을 그리자, 검첨에서 붉은 꽃망울이 맺혔다가 튕겨진 것이다.

고오오...

검첨을 벗어난 선홍빛 꽃망울이 임가형의 일장 앞에서 꽃을 피운다. 

그의 눈동자에서도 꽃이 피어난다,

화아악!

적루몽(赤淚夢)의 화려한 초현!

혈련삼화의 아름다움에,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던 사람들조차 넋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임가형은 넋을 잃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에게는 적루몽의 아름다움이 공포였다. 

찰나간에 다가오는 적루몽의 살기가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철검을 내질렀다. 

붉은 연화의 화심(花心)을 향해! 혼신의 힘으로!

"야핫!!"

시퍼런 검기가 구슬처럼 뭉치더니, 뭉친 구슬이 연화의 중심에 부딪쳐 갔다. 검기탄의 경지, 웅패진멸!

헌데...

화아악! 콰르르...

만개한 붉은 연화가 구슬을 삼켜 버렸다. 

찰나, 휘의 손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입에서는 나직한 일성.

"탄!" 

순간, 구슬을 삼키고 주춤하던 혈련화가 번갯불처럼 쏘아지더니 임가형의 가슴에 붉은 꽃을 수놓아 버렸다. 

"커윽!" 

전신을 바르르 떨며 물러서는 임가형의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일보 일보에 땅이 세치 깊이로 패인다.

찰나간에 벌어진 일.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가슴에서 피어난 혈련화가 점점 꽃잎을 벌리고 있다. 진한 혈향을 날리며.

다물어지지 않는 입으로 임가형이 물었다.

"이.이게... 대체 무슨..."

휘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임가형의 귀청을 두들기고.

"적루몽!"

임가형의 눈에서 참을 수없는 감탄이 떠올랐다.

"정말... 멋진..."

"아직 끝나지 않았소."

"물론..."

휘의 신형이 주욱 나아간다. 

'시작을 했으니 끝을 본다!'

임가형은 검을 늘어뜨리고 눈을 반개한 채 휘가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말대로 끝난 것이 아니다. 

가슴에 일검을 맞았지만, 자신의 검기에 위력이 많이 약해져 있던 상태. 

충격은 받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을 정도다. 

진실로 절망적인 것은, 도대체가 오십 여 년 강호생활에 눈앞의 젊은이가 펼치는 것 같은 검격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였다.

스윽, 들어 올리는 검에서 검기가 아른거린다. 

임가형은 이제 승부에 대한 미련을 버려 버렸다. 실질적으로는 이미 승부가 났다. 남은 것은 서로간에 풀어야 할 한(恨.)

들어 올린 검에 서린 모든 미망을 버렸다. 

검에 대한 집착도 없앴다. 

그저... 다가오는 검에 마주할 뿐이었다. 혼을 담고 마음을 담아.

주욱 나아간 휘의 우수가 허공으로 들리고, 한줄기 벼락이 만양의 끝에서 굼실거렸다. 단천락!

쾅!

굉음이 연무장을 덮었다. 

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가벼운 놀람.

'틀리다. 좀 전과는 또 틀리다. 무슨...?'

임가형의 가슴은 희열로 타올랐다.

'그거였던가? 모두를 버려야 했던가? 버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던가?'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이십여년 자신을 괴롭히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봤는데... 이제야 벽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깨달았는데... 빛살이 광란의 파도가 되어 밀려오는 것이다.

절혼광!

만양의 빛이 쏟아지는 햇빛을 가르며 밀려온다. 

임가형은 초연한 마음으로 검을 들었다.

영롱한 파란기운이 검을 감싸며 광란의 파도에 부딪쳐 간다.

콰르르.... 쩌저적!

"커억!!"

굉음에 이은 답답한 신음. 영롱한 기운이 빛살에 잘려 나갔다. 

주르륵, 밀려난 임가형의 가슴에 혈선이 그어졌다. 

혈련화에서 가지가 뻗는가 싶더니 그 곳에서 시뻘건 잎사귀가 자라난다. 

그러나 휘의 무심한 눈빛은 임가형의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임가형은 핏물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웃음을 지으며 휘에게 물었다.

"봤나?"

휘가 대답했다.

"봤소! 훌륭한 검강이었소."

임가형이 툴툴거리며 웃는다.

"크크... 이제야 봤는데... 이제야... 고맙군, 자네 덕분이야."

천천히 무릎이 구부러지는 임가형을 바라보며 휘가 고개를 저었다.

"그 검강은 당신의 것이오. 나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소."

"그런...가?"

한마디 말을 남기며 쓰러져 가는 임가형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가슴의 붉은 연화보다 더 환한 웃음이.

주위에는 언제 모여들었는지 십여명의 무사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만이 철산장의 대지를 짓누르고 있었다.

철혈성 한중분타주이자 섬서의 호랑이라 불리던 웅패검 임가형이 쓰러졌다. 

그것도 한중분타의 한 가운데서, 철혈의 도전을 받고.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강호가 들끓어 오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설령 알려진다고 해도 그저 임가형이 패배 했다는 정도일 뿐일 것이다. 

철혈의 도전은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으니까. 

그러나 세상을 집어삼키는 겁화도 불씨 하나에서 시작이 되느니...

  

            *          *            *

휘가 걸어간다.

쓰러진 임가형을 뒤로 하고 걸어간다. 

말을 잊고 굳어있던 무사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임가형이 철혈의 도전을 수락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존경했던 임가형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 주기로 한 것이다. 

자신들의 능력을 떠나서 휘를 막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가슴을 울린 철혈의 도전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기에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비응대주 호명걸 같은 사람은.

"모두 뭐 하는 건가? 저 놈을 막지 않고!?"

몇 명의 무사가 호명걸의 말에 휘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러자 휘가 무심한 눈으로 호명걸을 보며 말했다.

"그대가 막지 그러나?"

"헉!"

호명걸은 자신도 모르게 두 걸음을 물러났다.

"나는 임가형분타주와 철혈의 도전법에 따라 비무를 치뤘다! 철혈성의 이름을 걸고. 이 곳은 철혈성의 대지가 아니던가?"

휘의 전신에서 상대를 억압했던 기운이 알게 모르게 흘러나오자, 한마디 한마디에 호명걸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휘는 그를 놔두고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일전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나에게 도전하라.! 철혈의 도전법에 따라! 그렇지 않고 뒤에서 노리는 자는..."

우수의 검지가 붉게 물들었다.

"저렇게 될 것이다."

붉은 혈루가 검지 끝에 맺혔다가 튕겨졌다. 

삼장을 쏘아 가던 피보다 더 붉은 구슬이 어느 순간 확, 피어났다. 그리고.

팍!

오장 밖에 있던 정원석의 한 가운데 틀어 박혔다. 

한 송이 아름다운 연화를 세치 깊이로, 주먹만하게 그려 내며.

"약속하지!"

불씨는 던져졌다.

"약속하지!!"

단호한 한마디를 내뱉고 걸음을 옮겼다.

주춤, 앞을 막았던 자들이 물러선다.

휘가 멈추지 않고 계속 걷자, 막아 섰던 자들은 끝내 물결이 갈라지듯 쫙 갈라져 버렸다. 

저벅저벅, 그 사이로 거침없이 걸어나간다. 

누구 하나 휘의 앞을 막을 생각도 못하고 바라만 본다.

뒤쪽에 처져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있던 풍인강이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호명걸이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돌아 보았다. 그러다 두 명의 호위무사가 임가형을 끌어 안고 있자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왜 안 막는 거요? 당신들은 분타주님의 직속 호위무사가 아니오?"

호위무사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분타주님은 그에게 약속했소. 철혈성의 이름으로. 설마 호대주는 철혈성의 이름으로 한 약속을 파기할 생각이란 말이오?"

"그.그건... 철혈의 도전이 사라진 지가 언젠데..."

"철혈의 도전은 사라졌을 지 몰라도 철혈성은 건재하오. 막으려거든 호대주가 막으시오. 우리는 분타주님을 의원에게 데려가야 겠으니."

호명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휘는 벌써 웅천각을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나서지를 않는다. 물론 호명걸은 혼자서 나설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제기랄! 미쳤냐? 분타주도 깨졌는데 내가 어떻게 막냐?'

정문을 나서기까지 아무도 막지를 않았다. 

신가와 오가는 그 때까지도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교대시간이 넘었음에도 교대조가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며.

휘는 정문을 나서며 두 사람을 향해 빙긋 웃음을 지어주었다.

"덕분에 일은 잘 처리했소. 수고 하시오."

"아! 잘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휘가 신가와 오가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유유히 걸어 나가자, 뒤 따라가던 풍인강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자들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나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만약, 알았다면? 

쿡!

냉면한풍의 대명사 풍인강의 얼굴에 웃음이 떠 올랐다. 그리고.

'헉! 내가 웃다니!'

스스로 놀라 버렸다. 

진천검문이 무너진지 이년만에 처음으로 웃은 것이었으니...

수한진에 들어서던 휘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게 볼일이 있소?"

풍인강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딴에는 냉랭하게.

"당연히! 당신이 나의 오초를 가로채지 않았소?"

"그래서, 지금 하자는 거요?"

움찔, 풍인강은 하늘을 올려다 봤다.

"아직은... 솔직히 아직은 안 된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언젠가는 받아낼 것이오!"

주먹을 움켜쥔 풍인강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며, 휘는 그의 가슴이 생각보다는 차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은 영락없이 얼음판인데...'

"맘대로 하시오! 나도 지쳤으니까."

풍인강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가형같은 고수하고 전력을 다해 한판 했으니 안지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오해는 자유였다. 휘의 말은 떼쟁이 상대하는데 지쳤다는 뜻이었거늘....

웅이루에 다가가자 초평우가 보였다. 

밖에 나와 서성거리고 있던 초평우가 휘를 발견하고는 득달같이 달려왔다.

"형님!"

"초형? 왜 나와 있습니까?"

초평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거야...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철산장으로 쳐들어 갈려고..."

휘가 빙그레 웃었다.

"다 잘됐습니다. 흠, 별일 없으면 떠납시다!"

초평우가 힐끔 풍인강을 바라보고는 휘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뭡니까? 얼음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럴 일이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갑시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바빠질 것 같으니까."

휘는 초평우에게 말하며 서쪽을 바라보았다.

'불씨는 던져졌다. 철혈성이여, 어디 덤불을 안고 굴러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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