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200)

그가 바로 오랜 세월 철혈성을 지탱해 온 몇 안 되는 거물 중 하나, 임가형이었다. 

왜 사부가 임가형을 상대하려거든 조심하라 했는지, 휘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수록 휘의 마음은 싸늘히 식어 갔다.

이렇게 대단한 자가 자식의 허물은 생각치 않고 힘없는 석두아버지 같은 사람을 무저동에 처 넣었다니... 

그를 판단하고 있는 사이 풍인강이 저벅저벅 앞서 걸음을 옮긴다.

고개를 든 임가형이 다가오는 풍인강을 바라보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 놓았다.

호명걸이 풍인강의 이름을 말하며 고갯짓으로 슬쩍 풍인강을 가리키자, 임가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 나를 만나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이유는?"

"빚을 받으러 왔습니다만."

"빚이라... 내가 진천검문에 빚진 게 있었던가?"

"검의 빚이지요."

냉막한 표정에서 칼같은 눈빛이 번뜩인다. 그러나 임가형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풍인강의 눈을 직시했다.

"검의 빚은 검으로만 갚을 수 있는 것이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담겨 있다. 눈이 마주친 얼음덩이 풍인강의 눈이 잠깐 흔들릴 정도로.

그 때였다. 임가형의 뒤에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던 두 무사 중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속하에게 맡겨 주심이..."

임가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풍인강에게 말했다.

"내가 왜 나를 찾아오는 사람을 직접 만나는지 아는가? 내가 아직 늙지 않았기 때문이야. 남들은 뭐라 할 지 모르겠지만."

칠십의 나이, 당연히 늙었다. 원로원에 처박혀도 진즉 처박혔을 나이다. 그럼에도 임가형은 아직 늙지 않았다고 한다.

마음이... 마음이 아직 늙음을 인정치 못하겠다는 건가?

몸을 일으킨 임가형이 풍인강을 바라봤다.

"나가지?"

임가형이 앞장서고 풍인강이 뒤따른다. 

두 사람의 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휘도 천천히 뒤를 따라갔다.

의외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에 호통이 터지던가, 그렇지 않으면 수하에게 맡겨 처리할 것이다. 철혈성의 한중분타주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자리니까.

그런데 직접 하겠단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는다. 이미 지금과 같은 상황을 자주 접했다는 뜻.

문득 앞장서 나가는 임가형의 입가에 즐거운 웃음이 떠 오른 것처럼 느껴진 것은 휘만의 착각인가?    

웅천각의 후원에는 정원이 아닌 연무장이 있었다.

깨끗하게 손질된 연무장, 먼지 한톨 없는 검대 위의 검과 도.

그것은 누군가가 연무장을 그만큼 자주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아마 임가형일 것이고.

임가형이 검대에서 한 루 철검을 집어 들고 돌아서더니 풍인강을 향해 말했다.

"풍산학이 나와 몇 초를 겨루었는지 아는가?"

풍인강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아버님께서는 십초를 겨루기로 했다 하셨소?"

"그랬지. 허나, 실질적으로는 오초를 겨루었지."

무슨 말인지 안다. 아버님은 십초를 겨루기로 했고, 오초만에 패했다.

"나는... 당신과 십초를 겨루겠소!"

임가형이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검문의 후계자라면 자격이 있지."

그러면서 중앙으로 한 걸음, 풍인강도 따라서 중앙으로 걸어갔다.

창!

맑은 검명, 두 자루의 검이 구름사이로 내비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임가형의 뒤쪽으로는 두 명의 호위무사들이 담담한 눈빛을 한 채 서 있고, 풍인강의 등을 보며 휘가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다.

풍인강의 검은 검신의 길이만 석자가 넘어 보였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검끝을 응시한다. 마치 세상의 끝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임가형의 눈에서 피어 오르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상대는 이제 이십대 중후반 정도의 젊은 청년, 그러나 흐르는 기는 삼사십대 노련한 검사의 기운처럼 차갑게 정제되어 있다.

풍인강의 검이 천천히 중단을 향하자 임가형의 검은 오히려 하단으로 내려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풍인강의 검끝이 슬쩍 비틀렸다.

파앗!

햇빛조차 잘려질 정도의 빠른 검격이 전면으로 향한다. 

임가형의 검이 천천히 들리며 검격의 진로를 막아 갔다.

쩡!

두 자루 검이 울음을 토해내며 중간에서 부딪치자 날선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동시에 나직한 한마디.

"좋군. 풍산학이 자랑 할만 해."

분명 너무 느려서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혔다. 그것도 중간에서.

풍인강은 일수격돌로 임가형의 검이 자신보다 위라는 것을 절감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스읏! 소리없이 흘러가는 바람을 가르며 한줄기 청광이 임가형의 허리를 베어 간다. 일수 일검에 절대절명의 검기가 흐른다.

불필요한 동작이 일체 배제된 검격은 아차 하는 사이에 생사가 좌우된다.

풍인강의 검은 군더더기가 없이 너무 깨끗하다. 깨끗해서 정직할 정도이다. 저런 검은 약자에겐 두려움을 주지만, 강자에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임가형은 강자이다.

휘가 두 사람의 검을 보며 나름의 판단을 내렸을 때였다.

후웅!

임가형의 검이 원을 그리듯 쳐 올라가더니 일순간 번개가 작렬했다. 

강력한 힘이 담긴 일검이 그대로 풍인강의 검로를 차단하며 올려친 기세 그대로 상대의 검을 휘어감아 버렸다.  

취리링! 쩌정!

풍인강이 이를 악물고 검을 좌우로 털었다. 

떠더덩!

순식간에 칠검이 서로의 진로를 막아 가며 부딪친다.

한발도 움직이지 않고 부딪쳐 가는 검날에서 굉렬한 검음이 일고, 미동도 않는 눈빛에선 불꽃이 인다.

휘의 눈에도 흥미로운 빛이 일렁였다.

두 발을 지면에 박고 부딪치는 검격, 요즘에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무사들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

임가형이야 그렇다지만, 풍인강의 기세도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타앗!

마침내 풍인강의 입에서 한 소리 기합이 터져 나오고.

쩍!

허공을 가를 듯이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검이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린다.

임가형의 눈에서 번쩍, 신광이 쏟아졌다. 순간.

한마리 청룡이 꿈틀대며 치솟았다.

쾅!

굉음이 일고 검력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떨어지는 낙엽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쿵!쿵!쿵!

세 걸음을 물러서는 풍인강의 발걸음을 따라 세치 깊이의 발자국이 찍혔다.

입에서는 한 줄기 가느다란 선혈이 흐른다. 검을 잡은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다. 헌데도 창백한 얼굴에는 만족의 미소가 떠오르고 있다.

임가형의 얼굴은 가볍게 찌푸려져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분명 승부를 따지면 임가형이 이겼다. 그런데 왜? 패자는 만족하고, 승자는 불만의 표정인가?

휘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풍인강이 물러선 것은 내력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검에서는 결코 밀리지 않은 것이다. 결론은 비겼어도 상대가 임가형이라면 결코 비긴 것이 아니다. 물론 단순히 상대를 죽이기 위한 승부라면 다른 이야기지만.

"오초... 지났습니다."

풍인강이 핏물이 배어 나오는 것도 잊고 뇌까렸다.

그러자 임가형의 찌푸려진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오초 남았네."

그 때였다.

"그 전에..."

휘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 들었다.

임가형이 불쾌한 표정으로 휘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조금 있다가..."

"제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조금은 싸늘함이 가신 음성으로 풍인강이 말했다. 허나 휘의 걸음은 그 말에 상관없이 임가형의 앞으로 옮겨졌다.

"그러고 싶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오."

사실은 임가형이 온전할 때 상대하려는 게 이유지만, 초평우가 기다리니 거짓도 아니다. 그 급한 성질에 무슨 일이 언제 일어날 지 모르니까.

어느덧 두 사람 사이에 선 휘가 풍인강 향해서 빙긋 웃었다. 미안하다는 듯.

그리고 임가형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언제 웃었냐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임가형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별다르게 생각을 안 했던 자다. 

철혈성에서 왔다기에 그러려니 했다. 가끔 철혈성에서 자신에게 청탁을 하려는 자가 오거나,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후예를 인사시키기 위해서 보내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자는 뭔가가 달라 보였다.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하면서도 거침이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생각한 그런 일로 온 사람이 아니라는 뜻. 

게다가 풍인강과 자신의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강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그 사이를 들어오면서도 마치 산책을 하는듯한 표정. 

그만큼 강하다는 말이다.

"자넨...누군가?"

끝내 참지 못하고 임가형이 휘에게 물었다.

"전갈이 되지 않았던가요?"

"나는 여강두라는 사람을 모르네."

일순간, 휘의 표정에 서리가 내려 앉았다.

"당신은 기억해 내야만 하오."

반존대, 무감정의 목소리. 참다 못한 두 명의 호위무사가 소리치며 검을 빼 들었다.

"감히! 어느 분께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그러나 휘의 눈은 여전히 임가형을 바라만 볼 뿐이다.

"삼십 삼년 전의 일이오."

임가형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무언가 깊게 생각에 잠긴 임가형을 놔두고 휘가 나직하니 입을 열었다.

"내 일을 방해하면... 후회할 것이오."

옆에서 다가오던 자들이 멈칫, 걸음을 멈췄다. 머리끝이 삐죽 설 정도로 한기서린 음성이 귀청을 떨리며 울린 것이다.

오른쪽에 있던 자가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소리치며 검을 내리칠...

"조심해!"

콰직!

"크억!"

느닷없는 비명소리에 한 낮의 고요가 연무장에 내려 앉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몰랐다. 그저 청의청년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호위무사 쪽으로 움직인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경호성을 발했다.  

헌데 고개를 돌렸을 때는 비명 소리와 함께 한 명의 무사가 허공을 날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멍청하니 서 있었다.

아무리 임가형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고 하지만, 눈 앞의 일은 자신의 눈조차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자네는...?"

경악이 서린 음성. 임가형은 자신이 몇 년만에 놀라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휘는 이장 여를 훌훌 날아가 땅바닥을 뒹굴고 있는 호위무사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임가형에게 물었다.

"아직도 생각이 나지 않으시오?"

"삼십 삼년 전...?"

"그 해 누군가가 죽었소."

자신도 모르게 조금 전 휘가 한말을 되뇌이던 임가형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져 가고, 휘의 입에선 싸늘한 한풍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한 사람이 갇혔소."

"... 내 아들이... 죽었다."

"무저동에..."

"너는...?"

"그분의 이름이..."

"여...강...두!"

마침내 기억이 났다. 한 사람의 이름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 한이 서린 이름이.

휘의 천장무저의 늪에 가라앉은 것 같은 눈빛이 임가형의 싸늘해진 눈을 삼켜 버렸다.

"꼭 그래야만 했소?"

"네가 그의 아들이라고?"

네 개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철혈성에서 왔다는 건 거짓이었던가?"

"거짓을 말한 적 없소. 귀하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도 않고."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풍인강은 세상에 자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남들이 오죽하면 북해에 가서 살라고 했을까. 

그런데 휘의 변한 모습은 그런 자신조차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풍인강이 혼란을 느끼며 휘를 바라볼 때, 휘가 임가형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순간, 임가형의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검에선 새파란 검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랐다. 

검신을 타고 죽 내려가던 검기가 검첨에서 나아갈 길을 찾아 요동을 친다. 

풍인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역시 자신은 아직 임가형의 상대가 아니다. 자신의 검기는 이제 검기출의 상태, 임가형의 검기는 검기성형의 경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딱딱히 굳은 풍인강이 내심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며 주먹을 움켜쥐다가, 움찔 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츠르르....

귀청을 울리는 맑은 음향이 그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이다.

휘의 손에 잡힌 만양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완전히 빠져 나온 요요로운 연붉은 나신이 태양빛을 머금어 따뜻하게 빛나고.

"자식을 탓하기 이전에 자식을 해한 자를 벌주려 하는 것은 아비된 자로서 그럴 수도 있소. 그러나 자식의 잘못을 알고도 그리 했다면, 상대의 한(恨) 정도는 받아 줄 수 있다는 오만도 있었을 것, 과연 그 정도 오만을 부려도 되는지 보겠소."   

가슴을 떨리게 하는 고저가 없는 나직한 말이 끝났다 느낀 순간, 만양이 허공을 사선으로 그으며 올라갔다.

그러자 임가형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 간다. 

그는 볼 수 있었다. 

만양이 사선으로 올라가며 허공이 갈라지고 있었다. 만양의 잔상이 허공에 그대로 걸쳐져 있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혼신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상대는 대충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 때였다. 

휘의 입에서 나직한, 그러하기에 더 사람을 긴장시키는 음성이 연무장을 울렸다.

"나, 여강두의 자식이 철혈의 도전법에 따라 철혈성의 한중분타주 웅패검 임가형에게 도전하는 바이오!!"

쿵!

임가형의 벌어진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가슴이 벌떡거렸다.

얼마 만인가! 

철혈의 도전이라니! 

세상에 지금도 철혈의 도전법에 따라 도전을 한다는 사람이 있다니!

휘의 말이 계속 임가형의 가슴을 울린다.

"따라서 이 싸움에는 그 누구도 관여 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바이오!"

명확한 철혈의 도전이다. 

임가형은 자신도 모르게 벌건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나 철혈성의 임가형, 그대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바이다. 오늘의 도전에서 생기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지는 바 누구도 관여하지 않을 것임을..."

잠깐 멈칫한 임가형이 이를 지그시 깨물고 말했다.

"철혈성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십수년만의 철혈의 도전, 임가형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옆에 서있던 풍인강이 놀란 얼굴로 휘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가슴 뛰는 일이었다.

그도 어릴 때 말은 들었었다. 섬서의 무인들치고 그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십수년 전에 사라진 말일뿐.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낀 풍인강은 조용히 연무장의 한쪽으로 물러났다.

철혈의 도전을 하고, 받은 이상 누구도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철혈의 도전법이었다.

무사들의 피끓는 가슴이 식기도 전이었다. 

휘가 천천히 한걸음을 내딛는다. 만양이 중단으로 내려왔다.

임가형이 검기가 뭉친 철검을 들어 올려 중단에서 멈췄다. 

두 자루의 검이 서로 이빨을 드러내고 마주 본다.

이장의 간격, 지나가던 나비 한마리가 진저리를 치며 도망간다.

임가형의 검이 슬쩍 비틀리더니 시퍼런 검기가 꿈틀대며 요동쳤다. 동시에 나아가는 일검이 쏘아진 화살처럼 휘의 가슴을 향해 시퍼런 이빨을 들이댔다.

순간.

부드러운 햇살이 쩍 갈라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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