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응! 젠장, 몇 잔 먹지도 않았는데..."
넘어진 채 초평우가 웅얼거리는 말에 오삼당이 부릅뜬 눈으로 힐끔 거리고, 비틀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은 초평우의 얼굴이 푹 수그러졌다.
"진형은 모를 거요. 내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 하는지...."
-성이 진조여라고 했더니 복잡하다고 꼭 진형이라고 부른다.-
'어머니라....'
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초평우를 바라보지만 위로해 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헌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초평우가 고개를 번쩍 든다.
"참! 평산 이야기를 했었지.... 그 놈은 나보다 세살 아래의 동생이오. 놈은 내가 떠나자 사람을 보내서 돈을 좀 쥐어 줍디다. 우흐흐... 첨에는 무척 고마워 했지요. 그런데 말이오. 그놈이 돈과 함께 보낸 서신에,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적어 놨습디다. 돌아 오지 말라고 말이오. 돌아오면 가만 안 둔다나, 어쩐다나. 크크크..."
그런데 그는 돌아 왔고, 결국 그의 동생인 초평산은 사람을 보내 그를 쫓아내려 한 것이란다. 그것도 벌써 두 번씩이나.
휘는 안쓰러운 눈으로 초평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야기 대로라면, 아마 그의 동생은 행여나 그가 다시 돌아와 자신의 것을 뺏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를 내치려 한 것일 것이다.
본래 아홉 개 가진 놈이 하나 가진 사람 걸 못 뺏어서 환장인 곳이 이세상 아니던가.
"초형..."
휘가 초평우를 부를 때였다.
느닷없이 초평우가 휘를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진형!"
"예...?"
"이 초모, 별 볼일 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외다. 진형이 이 초모를 아우로 거두어 주시오!"
"예?"
휘는 기겁한 눈으로 초평우를 바라 보았다.
삼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그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초평우가 머쓱하니 웃음을 지었다.
"사실.... 내가 겉모습은 이래도 나이는 얼마 안되오."
휘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초평우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스물 여덟입니다. 죄송합니다. 늙어 보여서..."
그게 죄송할 일인가?
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제가 워낙 못나서... 그렇습니까? 하기는..."
푹 수그린 초평우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질 것처럼 한없이 수그러진다.
"그게 아니고...."
그 말에 다시 서서히 올라오고....
"아니면 받아 주십시오."
으아! 그게 아니다니까!!
"사실 저도... 나이가..."
초평우가 붉게 취한 얼굴로 피식 웃는다.
"나이가 뭔 상관입니까. 제가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는데..."
'뭐 아무리 못해도 삼십은 넘을 것 같은 데, 뭐... 게다가 섬전검을 일검에 굼벵이검으로 만들어 버렸고... 이런 사람을 언제 만나나. 초평우야, 무조건 잡아라!'
속마음은 숨긴 채, 초평우는 떨어지려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고 매달렸다.
휘는 답답한 마음에 초평우를 노려 보았다.
"후회하신다니까요! 제 나이가..."
"상관 없습니다!"
초평우도 노려보았다. 아니 정신을 붙잡으려다 보니 눈에 힘이 들어갔다.
"글쎄..."
"상관없다니까요!"
하는 수 없이 휘는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면구를 벗어 던지고 나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헌데, 면구를 벗으려니 다시 쓸 것이 걱정 되었다. 얼마나 정성을 다 해서 썼는데...
천양의 기운으로 주름까지 피고, 행여나 떨어진 곳이 있나 하나하나 만져 가면서 썼는데...
'에이, 면구야 다시 쓰면 되고...'
휘가 면구를 잡아 뜯으려고 귀쪽으로 손을 가져갈 때였다.
털푸덕!
느닷없이 초평우가 무릎을 꿇더니 흐느낀다.
"흐흐흑! 이 아우는 이제 갈 데가 없소. 형님이 안 받아 주면 떠돌아 다니다가 황야에 묻힐 것이오. 그걸 원하시오? 정말 그런 거요?"
휘는 안쓰럽다기보다 이제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 글쎄, 초형!"
"나이이야기라면 하지도 마시오. 강호가 나이 순으로 굴러가는 곳도 아니고..."
맞긴 맞는 말이다.
강호가 꼭 나이순으로만 굴러가는 곳은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강자존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게다가 항렬은 또 왜 그렇게 중요시 하는지 가끔 나이 어린 윗사람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판국이니...
그래도 휘는 참을 수 없었다.
"이래도 말입니까?"
확! 잡아챈 면구가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얼마나 세게 잡아 당겼는지 한쪽이 찢어질 정도였다.
마침내 드러난 얼굴, 하얀 살결에... 면구로 인해서 살짝 주름(?)잡힌 ...
초평우가 멍하니 휘를 바라본다. 그러다 서서히 일그러져 가는 표정.
'설마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나를 보고 다시는 형님이라는 소리는 안 하겠지. 후우...'
휘는 이제야 초평우가 이해를 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때, 초평우의 기어 가는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려 왔다.
"그럼... 누...님이라고...?"
퍽!
* * *
섬서성 서남쪽 대표적인 현성인 한중은, 촉을 넘어 사천으로 들어가는 군사적 요충지인 만큼, 이 일대에선 웬만한 무림문파들은 얼굴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관의 힘이 강한 곳이었다.
오죽하면 철혈성이 처음 자리잡을 때 무림문파들 보다 관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을까. 그나마도 한중땅이라 하나 이백여리 떨어진 천간산에 성을 건립해야 했었다.
사실이 그러다 보니 들고 나는 모든 관도에 가끔씩 몰려다니는 관병들을 보는 것은 그다지 볼거리라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곡물이 풍부하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가뭄이 계속되는 한여름에도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한중으로 들어가는 관도는 넓고도 반듯했다.
그 관도에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은 해가 중천에 걸려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미시 초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관도에 두 사람이 더 늘었다고 해서 그다지 관심이 갈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눈은 이 기이한 일행을 한 번쯤은 쳐다보고 지나갔다.
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쳐다보며 지나가자 왠지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찢어진 면구로 얼굴을 가릴 수도 없는 상황. 그저 공연히 면구를 벗었다는 생각에 아쉬움만이 더 할 뿐이었다.
'천천히 벗을 걸... 괜히 천양의 열기로 너무 딱 붙여 가지고....'
힐끗 옆을 따라오는 초평우를 바라보았다.
눈두덩이 시퍼런 초평우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다.
'어휴, 한대 맞고도 좋다고 저러니, 떼 놓을 수도 없고...'
어제, 화정루에서.
퍽! 한대 맞고 나가 떨어진 초평우에게 휘가 소리쳤다.
-나 여자 아니오!-
-그럼 형님!-
-나이도 스물 둘 밖에 안됐소!-
-나이는 상관 없다고 했잖습니까!?-
-그래도! 너무...-
-상관 없다니까요! 초평우, 한 입으로 두 말 안 합니다!-
고집쟁이 초평우가 끝내 형님이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자기가 한때 신세를 졌던 장안의 뒷골목에선 가끔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아무래도 술기운에 그런 것 같지만 휘도 지쳐 버렸다.
-맘대로 하세요! 내가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결국 그렇게 돼 버렸다.
그래도 휘가 우겨서 초평우를 초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휘가 바라보자 초평우가 씩 웃는다. 시퍼런 자국이 주름지는 줄도 모르고.
"초형, 한중에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소?"
휘가 뭘 아나. 그저 수많은 사람에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다.
"예. 인근 수백리에서 제일 큰 성입니다. 더구나 촉을 넘어 사천으로 가려면 이 곳을 거쳐야 하니 사람이 많을 수 밖에요."
초평우가 말하기를, 하늘을 지붕 삼아 천하를 돌아다녔다더니 거짓은 아니었던 듯 싶다.
휘가 한중을 간다는 말에 따라오더니, 척척 갈래진 길을 정확히 찾아 들어서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한중에 도착한 것이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열십자로 갈라진 대로가 눈에 들어왔다.
휘는 망설임 없이 우측으로 꺾어지더니 서로(西路)를 걸어갔다. 뒤쪽에는 초평우가 큰칼 옆에 차고 어깨를 쭉 핀 채 따라가고.
백 여장을 걷던 휘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쳐들더니 좌측의 허름한 건물을 쳐다 본다.
"아는 곳입니까?"
초평우가 의아한 듯 묻자 휘는 이마를 찌푸렸다.
"알아볼 것이 있어서..."
허름한 건물의 입구에는 약초로 보이는 물건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당귀... 작약... 약쑥에다 민들레뿌리 등등....
안으로 들어간 휘가 다시 나온 것은 일각여가 지나서였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초평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후우.... 대체..."
휘가 한숨을 몰아쉬자 초평우는 넌지시 물어 봤다.
"저... 왜...?"
"안 게시답니다."
"누가...?"
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 젖고는 걸음을 옮기며 초평우에게 물었다.
"혹시, 물건을 파는 곳을 알고 있습니까? 골동품이나, 뭐... 아무튼 그런 곳이요."
"하! 하! 물론! 알죠. 따라오십시오."
헛웃음을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초평우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헌데 왠지 뒤따라가는 휘의 어깨가 처져 보였다.
'염소아버지 가족들이 오래 전에 이사를 갔다니... 낙양까지 가 봐야 하려나? 무사해야 할 텐데...'
만향로
초평우를 따라 동로에 들어서자, 서로와는 다른 깨끗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초평우가 그 중 한 건물로 들어갔다.
점원으로 보이는 자가 뛰어 나오다 말고 멈칫, 초평우의 행색을 살펴보는 것이 보였다.
삐딱하니 고개를 꼰 이십대의 젊은 점원이, 커다란 도를 보더니 차마 내치지는 못하고 심드렁 하니 얕보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초평우가 눈을 부라리자 휘가 한 걸음 나섰다.
"물건을 하나 팔려 하오만..."
비록 고급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단정한 차림에 아름답기까지(?)한 휘의 얼굴을 본 점원은 눈을 크게 뜨고는 더듬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무슨... 물건이신지...."
휘는 뒤쪽의 봇짐에서 목함을 꺼내 점원에게 내밀었다.그리고 염소아버지에게 들었던 목함의 재질을 말해줬다.
"철령침목이오."
점원의 눈이 어리둥절하니 목함을 보다가 휘를 다시 바라봤다.
"그냥 나무란 말씀이오?"
"그렇소."
"속에 든 것은..."
"그냥 목함이오."
"아무 것도 안든 목함?"
휘는 점원의 말에서 그가 어이없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염소아버지가 잘못 안 것인가? 분명 아버지 말로는 같은 무게의 금과 맞먹는다고 했는데...'
"나 참! 아니 그래, 나무함을 팔려고 우리 보선원에 오셨단 말이오?"
웃기지도 않는다는 투다.
옆에 있던 초평우가 막 한 걸음 나서려 하자 휘가 손을 들어 초평우의 앞을 막았다.
"음... 아무래도 내가 잘못 안 모양이외다. 미안하오."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 같아 급히 봇짐을 싸맨 휘가 막 돌아서려 할 때였다.
안쪽에서 다급한 발걸음과 함께 초로인이 정신없이 뛰어나왔다.
"잠깐! 잠깐!"
휘가 돌아보자 초로인이 휘를 바라보더니 급히 물어왔다.
"조금 전에 안에서 듣자 하니... 철령침목이라는 말이 들리던데..."
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헌데 제가 잘못 알았나 봅니다. 저는 철령침목이 제법 값이 나간다 해서 팔려고 왔는데, 이런 고급 골동품점에선 안 사나 봅니다.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휘가 말을 하며 돌아서려 하자 초로인이 젊은 점원을 향해 빽 소리쳤다.
"이 놈아!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그러더니 휘의 앞을 막고는 최대한 선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지 마시고 물건을 좀..."
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목함을 꺼냈다. 그러자.
"헉! 목함?!"
초로인이 대경하며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철령침목으로 목함을?"
목함을 잡아가는 손이 떨리더니, 세세히 살펴가는 눈마저 가늘게 떨린다.
한참을 살펴보던 초로인은 이음새쪽을 엇비켜 틀었다. 순간 목함이 쩍 벌어졌다. 과연 전문가다운 손길, 아버지들은 저걸 알아내는데만도 며칠이 걸렸었는데...
"아!"
가벼운 탄성이 터지고, 지금은 빼내 버린, 철침이 꽂혀 있던 자국을 쓸어 가는 손길이 가늘게 떨린다.
그러다 결국 장사꾼이 해서는 안 되는 감탄의 말까지 내 뱉었다.
"철령침목을 이렇게 세밀히 다듬어서 목함을 만들다니..."
초로인이 진정한 감탄의 눈으로 휘를 바라보았다.
"공자, 이 물건... 내가 사겠소. 얼마면 되겠소?"
값을 알 리가 없다. 다만 염소아버지가 했던 말만 알 뿐이다.
"제가 듣기로는 금과 같다고 들었습니다."
초로인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고, 초평우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자 한쪽에서 시무룩하니 있던 점원이 이때라는 듯 앞으로 나섰다.
"이런 도둑...."
하지만 초로인의 성난 눈빛에 그는 말을 접어야 했다. 초로인은 점원을 눈빛하나로 짓눌러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 정도 물건이라면 그 정도 가치는 당연한 것. 내 사겠소!"
휘나 초평우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하면서도 설마 했거늘.
잠시 후, 초로인이 몇 장의 전표와 한냥짜리 금두 삼십 개를 넣은 주머니를 가져왔다.
"공자가 쓰기 편하도록 전표와 금두로 가져왔소이다."
초로인으로부터 전표와 금원보를 받아 든 휘는 조금 어리둥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주는 것은 받고 보았다. 그러자 초로인이 한껏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이렇듯 귀한 물건을 저희 가게에 팔아 줘서 고맙소이다. 언제든 좋은 물건이 생기거든 또 찾아 주시길..."
밖으로 나서며 초평우가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형님, 그게 그렇게 비싼 거였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분명 아버지는 그게 같은 무게의 금값과 같을 거라고 했는데... 그럼 삼십 냥이면 되는데... 이백 냥이라니..."
그랬다. 무게는 삼십 냥 정도였다. 다만 서로간에 오해가 있었을 뿐이었다.
휘는 무게를 말했고, 주인인 초로인은 크기로 알아 들었을 뿐.
단순한 철령침목이라면 조동인의 말이 맞았고, 정교하게 목함으로 가공된 것을 생각하면 초로인이 준 것이 제 가격이었을 뿐이었다.
품안이 두둑해지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배에선 꼬로록...
"형님, 뭐 먹으러 갑시다."
"그럴까요?"
휘도 빙그레 웃었다.
헌데, 주루를 찾아가던 초평우가 휘의 빈 옆구리를 보며 넌지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