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200)

언제고 떠날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떠난다 생각하니 가슴이 왜이리 쓰라린 걸까.

고봉천은 이래선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휘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 자꾸만 떨려 나왔다.

"그럼... 아버지들의 한을 잊어서는 안 되지. 암...."

"죄송...합니다. 사부님..."

"무슨... 나가거든, 몸조심하고."

"예. 저... 그리고..."

휘가 말을 더듬자 고봉천이 고소를 머금고 한마디.

"연연이는... 내가 잘 타일러 보마." 

그제야 휘의 얼굴에 안심의 빛이 떠 올랐다.

"...감사합...."

그러다 일순간, 휘의 표정이 다시 굳어져 버렸다.

"후우... 늦었군요."

고봉천도 씁쓸한 웃음을 베어물었다.

"그렇구나."

미처 어찌할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의 귀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려 온 것이다. 

포기하다시피 한 두 사람이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덜컥!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한 사람이 다급하니 방으로 뛰어 들었다.

"오빠!!"

이제는 다 커버린 연연의 외침이 휘의 귀에 화살처럼 꽂히자 휘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맺혔다. 살짝 일그러진 채.

"하! 하! 연연이가 이런 새벽에...."

"흥! 몰래 왔다가 도망 갈려고?"

"그럴...리가?"

"왜 육 개월간이나 나오지 않은 거야? 내가 먹을 것 안 넣어 주려다 불쌍해서 넣어 줬더니..."

"어... 그게... 뭘 좀 깨달은 게 있어서...."

"흥! 그러니까 무공이 연연이 보다 좋았다, 이 말이네, 뭐!"

"그게...."

휘의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고봉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사실 그도 휘가 몇 달씩 나오지 않은 것에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그런 것에 불만을 가져서야... 더구나 제자가 무공을 익히느라 그런 건데...- 하면서 지내 왔었다.  

그런데 연연에게 혼나는 휘를 바라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고봉천이었다.

'이거... 내 성격이 이상한 건가?'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따라와!"

그래도 연연의 한마디에 끌려가는 휘가 조금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깔깔깔!"

연연의 웃음이 오랜 만에 상무원을 울려 퍼졌다.

"그래서, 그 노인이 오빠더러 여자냐고 물었단 말이야?"

"응, 아마 눈이 안 좋은가 봐."

연연이 휘를 흘겨 보더니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냐, 아냐. 아마 눈이 좋아서 제대로 본 걸 거야. 깔깔깔!!"

"너...."

짐짓 눈을 부라렸지만 코방귀도 뀌지 않은 연연이 다짐을 받아야 겠다는 듯 강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오빠!"

"어."

"나가면... 면구 하나 사서 써."

"면구?"

"응, 너무 못생긴 거 말고, 조금 못생긴 걸로."

"....."

대답이 없자 연연의 눈에 그렁, 눈물이 맺힌다.

'속으면 안 된다. 속지말자.....'

하지만 대답을 안 할 수는 없다. 더구나 못 한다는 말은 더....

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알...았다. 연연이 부탁인데..."

빙그레, 웃는 연연의 눈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이 쏙 들어가 있다.

'크... 역시...'

문득 품 속에 있는 노인의 면구가 생각났다.

'수염을 떼고 주름을 좀 피면....'

세상 밖으로

오랜만에 마주 앉은 식탁에선 말없는 식사가 이각 째 진행되고 있었다. 

마치 말하는 것이 죄라도 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음식만 깨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답답했는지, 아니면 휘를 보내는 마음이 안타까웠는지, 정청화가 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휘아는 내 아들이나 같단다. 언제라도 마음이 외롭거든 찾아 오너라."

"예..."

어찌 휘라고 해서 모를까. 말없이 항상 따뜻하게 보살펴 준 정청화의 마음을. 

문득 답하는 휘의 눈에 슬쩍 눈물이 맺혔다.

정청화의 말을 들으니 이제 진짜로 떠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깨작거리며 식사를 하는 연연이나, 꾸역꾸역 음식만 입에 떠 넣는 사부님이나,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모두가 헤어짐을 슬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떠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휘가 마음을 다잡고 빙그레 웃었다.

"제 집이 여긴데 제가 이리 안 오고 어디로 가겠어요. 안 그러냐? 연연아."

젓가락으로 죄없는 닭대가리만 콕콕...

"응...."

"사부님, 그렇죠?"

슬쩍 실눈을 치켜 올리며...

"...누가 뭐라 하던? 당연 하지..."

깨작 깨작, 꾸역꾸역....

근 한시진에 이르는 긴 식사시간이 지나자 휘는 자신의 방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이것 저것 챙기다 보니 보따리 속에 제법 많은 것이 들어간다.

사모님이 챙겨 준 옷도 한벌 넣고, 염소아버지기 준 목함도 넣고...  

하지만 도사할배의 유물과 무저동에서 얻은 괴이한 귀면촉은 따로 품속에 넣었다. 그걸 보자 문득 흑의인의 가슴에서 보았던 귀면상이 생각났다.

"어차피 조사하려 했던 일. 그나마 떠나기 전에 한가닥 끈이라도 잡아서 다행이군. 후후... 당신, 나중에 보자구."

마치 눈 앞에 그가 있는 것처럼 중얼거리던 휘는 주위를 돌아보며 잊은 것이 없는지 살펴 보았다.

'음... 또 뭐가 있지?'

나머지 구질구질한 것들은 모두 보따리에 쑤셔 넣고 질끈 끈을 묶고 보니 왠지 멍한 기분이 든다. 

휘는 고개를 휘둘러 미련을 털어 내고는 벌떡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자 구노인이 정원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스치듯 휘의 눈과 구노인의 눈이 마주쳤다.

"많이 컸구나."

"구할아버지, 사부님 가족을 부탁할 게요."

"허허허.... 얼마나 살 수 있을 지는 몰라도, 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상무원의 식구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마."

후덕한 구노인의 웃음에는 진정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과거의 모든 연을 떠난 초탈한 모습이었다. 

휘는 그나마 구노인의 그 모습에 얼마간은 안심이 되었다. 헌데 휘가 깊숙이 인사를 올리고 뒤돌아 서려 할 때였다.

불쑥, 구노인이 등 뒤에서 허름한 천에 쌓인 길쭉한 물건을 하나 내민다.

어리둥절한 휘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구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방구석에서 썩어 가던 것이다. 주인을 잘못 만나 외롭게 지냈던 놈이지. 네가 친구 좀 해주거라."

"구 할아버지..."

"이름은 만양(彎楊)이라 한다. 아마 너와는 잘 어울릴 것 같구나."

주기로 작정한 것을 받네 안 받네 할 수도 없는 일, 휘는 감사한 마음으로 구노인으로부터 물건을 건네 받았다.

"감사합니다."

건네 받은 물건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손의 감각으로는 검같은 데 만양이라는 이름은 어째 도에나 어울릴 것 같은 이름이었다.

휘가 손으로 물건의 모양을 따라 쓰다듬자, 그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구노인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머나먼 곳에서 얻은 것이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쓰는 사람 마음에 달린 것이니, 네 마음을 담아 본다면 그리 신경 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 강호에서 그 물건을 알아보고 예로써 대하는 이가 있거든, 한 번쯤 그를 도와준다면 고맙겠구나."

뭔가 뜻이 담긴 말, 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하듯이 말했다.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구노인으로부터 받은 물건을 봇짐에 꽂아 넣고 사부님의 방으로 가려 하자, 때 마침 방 앞에 나와 있던 사부님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나중에 볼 텐데, 뭐."

왠지 펄럭거리는 한쪽 옷소매가 더욱 마음에 걸린다. 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다녀 오겠습니다."

"음... 그래."

연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사모님의 품에서 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휘는 한 번 더 상무원의 건물들을 돌아보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진짜 떠나는 것이다. 

정들었던 사람들과의 이별에 마음이 아파도, 자신에겐 가야 할 길이, 해야 할 일이 있기에.

  

             *          *            *

하늘은 쾌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초여름의 하늘에는 달랑 한점 구름만이 외롭게 떠다니고, 섬서의 대지에는 살랑거리는 미풍에 춤을 추는 억새풀만이 지나는 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휘이이잉!!

황사 섞인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 오른다.

초여름 메마른 대지에 비가 뿌려지지 않은지 어느 덧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가뭄이 들면 인심이 사나워지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라 했는데, 비라도 시원하게 뿌려 주시지... 젠장 할 하늘...'

하늘을 원망하며 투덜거리던 구룡객잔의 주인 장오는, 저 멀리 억새풀 사이로 모습을 보이는 한 사람을 보며 벌떡 일어섰다.

근 반시진만에 손님이 될 가능성을 보이는 사람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예전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을 외톨박이 손님이었지만, 요즘처럼 가뭄에 황사까지 이는 계절에는 그나마도 놓칠 수 없는 손님이었다. 

주렴을 걷고 밖으로 나가려던 장오는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뒤를 돌아다 보았다.

탁자에 다리를 떡 하니 올리고 코를 골고 있는 장한이 보였다.

'제발, 저런 떨거지 같은 손님은 아니어야 하는 데...'

한시진 전에 들어 올 때만 해도 얼마나 반가웠던가. 

술을 시키고 오리구이 두 마리를 시킬 때까지만 해도 반가운 마음은 여전 했었다.

그러다 반시진 전, 새로 온  두 명의 손님을 개 패듯 패서 쫓아 버리면서부터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 작자였다.

'씨팔, 설마?'

마음을 다 잡고 주렴을 걷었다. 

황사먼지가 휘잉 안으로 몰려 들어 온다. 

장오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 오장 안으로 다가 온 손님에게 최대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구룡객잔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지만 그는 미처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손님이 하는 행동을 바라봐야만 했다.

예비손님이 고개를 쳐 들고 깃발을 쳐다 보더니, 자신의 얼굴을 바라 보고는, 다시 깃발을 쳐다 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한마디.

"여기가 먹을 것 파는데요?"

"......?"

'그럼 당연히 먹을 걸 팔지, 못 먹을 걸 팔겠냐?'

생긴 건 멀쩡해 보이는데, 왠지 불길한 조짐이...

"외딴 곳에 있는 음식점은 조심하라고 하던데..."

'아! 씨팔, 오늘 재수 드럽게 없네.'

장오는 차마 인상을 쓰지는 못하고 조용히 뒤 돌아섰다. 주먹을 불끈 쥐고.

'검만 안 찼어도....'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떨거지 말썽꾸러기는 한 사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이 그의 발길을 돌리게 만든 것이다.

휘는 객잔의 주인인지 점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신을 반기던 장한이 아무 말없이 뒤돌아 서자, 그의 뒤를 따라 객잔으로 들어갔다.

썰렁한 객잔 안에는 코고는 소리만이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일단 한쪽의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사방을 둘러 보았다.

자기 외에 탁자에 다리를 올리고 자고 있는 사람이 객잔 손님의 전부인 듯 했다.

'원래 객잔이라는 데가 이렇게 사람이 없는 덴가?'

의문이 일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휘로선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철혈성을 떠나 온지 한나절 만에 들른 객잔은 그렇게 세상에 처음 나온 휘를 썰렁하게 반겨 주고 있었다.

  

휘가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런 말도 없이 앉아만 있자, 장오는 한숨을 속으로 내쉬며 휘에게 다가갔다.

"뭘 드시겠소?"

"뭐가 됩니까?"

"그야, 간단한 소면부터 이것저것 웬만한 요리는 다 되오만..."

휘는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코를 골고 있는 장한의 탁자를 쳐다 보았다. 거기에는 오리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저거, 오리고깁니까?"

장오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어째 식성까지도 똑 같냐!'

그의 내심이야 어쨌든 휘는 손가락으로 오리뼈를 가리켰다.

"저걸로 하죠."

그 때였다. 코고는 소리가 뚝 그쳤다.

휘는 그나마 객잔 안에서 들리던 단 하나의 소리인 코고는 소리가 그치자 무심결에 그 쪽을 바라보았다.

슬쩍 풀어 헤쳐진 허름한 옷차림, 삼십 중후반정도로 보이는 얼굴에 거친 수염. 옆에는 무식하게 보일 정도의 커다란 도. 

휘는 빼빼아버지에게 들었던 무시무시하다는 산대왕들이 생각났다. 들은 대로라면 딱 맞아 떨어지는 행색이었다.

'별로 안 무섭게 생겼는데?'

휘가 나름대로 그에 대한 평가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게슴츠레 눈을 뜬 장한의 눈과 휘의 눈이 마주쳤다. 

헌데 그가 씩 웃는다. 휘도 씩 웃어 주었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삼류무사의 아들

잠시 후, 장오가 가져온 오리고기를 먹으려 다리 하나를 찢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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