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막아서는 세 명의 무사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담장으로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담장 위에서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던 덩치가 커다란 자가 몸을 날려 덮쳐 온다.
'덩치는 곰 같은 놈이...'
그랬다. 순전히 덩치만 보고 그가 느릴 것이라 생각했다. 설령 빠르다 해도 자신이 누구인가.
그래서 그를 상대하기 전에 옆에서 달려드는 무사의 검을 우수로 휘어 감아 비켜내고는, 그 틈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충분히 그렇게 될 것 같았다. 헌데.
"어딜!"
허공에서 웅웅거리는 커다란 외침과 함께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권력이 머리위로 쏟아진다.
"헛!"
짧은 다급성과 함께 허공에서 팽그르 몸을 굴렸다. 권력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허리어름을 스치고 지나간다.
"크읍!"
허리의 옷이 찢어지며 살갗이 짓이겨지는 고통이 몰려 왔다.
발이 땅에 닺자 마자 고통을 참고 다시 몸을 튕겼다. 목표는 역시 담장 위.
일장을 솟구쳤을 때였다.
담장 위에서 다시 한 자루의 검이 찔러 온다.
입술을 깨물고 손을 휘둘렀다. 팔비산수(八臂散手).
휘링! 땅!
팔 그림자에 휘감긴 검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그 여력을 이용해 다시 담당 위로 날아갔다. 순간.
후우웅!
대기를 일그러뜨리는 진공음에 이어 칼날같은 권세가 다시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경한 공이연이 얼굴을 찡그리며 담장을 박차고 신형을 뒤로 날렸다.
담장 위로 올라갔다가는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야 하니 분해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한 쪽으로 내려서며 좌우를 훑어보는 공이연의 귀로 짧은 전음이 들려 왔다.
<뒤로 두 걸음만 물러서시오!>
동업자(?)의 전음이었다.
공이연은 낯빛이 변할 사이도 없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순간, 그는 자신의 목을 스치며 두 줄기 붉은 구슬이 유성처럼 쏘아져 가는 것을 보았다.
느닷없이 소름이 쫙 끼쳤다.
'만일 안 물러났으면....?'
그러나 생각을 더 할 수가 없었다.
파팍!
천양의 기운이 담긴 두가닥 붉은 지풍이 공이연을 향해 달려들던 무사들의 어깨를 정통으로 꿰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동시에 이어지는 전음.
<뭐합니까? 제가 뚫을 테니 따라오세요! 다른 놈들이 몰려 오기전에 갑시다!>
휙! 휘의 신형이 옆을 스쳐 간다.
공이연도 얼떨결에 신형을 날렸다.
휘의 앞을 세 명의 무사가 가로막는다. 찰나, 흩어지는 휘의 환영. 동시에 세 자루의 검이 세 명을 쳐 간다.
그러자 담장 위에서 대갈이 터지고.
"물러서!"
따당! 쩡!
"으윽!"
신음을 토하며 정신없이 물러서는 무사들 사이로 두 사람의 신형이 빨랫줄처럼 날아간다.
"타앗!"
담장 위에 있던 덩치 큰 장한이 허공에서 떨어지며 일순간에 칠 권을 내질렀다.
강맹한 권풍이 두 사람에게 쏟아져 내리자, 휘의 철검이 반사적으로 들리며, 절혼광(切魂光)!
빛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하늘과 땅을 나누어 갔다.
헌데 한순간, 휘의 눈빛이 묘하게 변하더니.
'응? 웅경?'
천지를 양단하던 빛을 누그러뜨리면서 철검에서 솟구친 검기를 사방으로 뿌려 냈다. 그러면서 허공을 향해 내질러지는 일권. 천붕(天崩)!
쾅!
정면으로 부딪힌 권력에 덩치의 신형이 훌훌 날아가고, 옆에서 달려들던 무사들은 철검에서 뿌려진 검기를 피해 정신없이 뒤로 물러선다.
그 사이 공이연은 담장을 넘어갔다. 휘 역시,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담장 위의 무사들을 떨구어 내고는 신형을 날렸다.
모든 것이 숨 서너 번 쉴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없이 벌어진 싸움은 휘와 공이연은 물론 철혈성의 무사들조차 정신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담장을 넘어간 두 사람이 철혈성의 권역을 벗어나려 재차 신형을 날릴 때.
고오오.....
막강한 경력이 실린 기세가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휘가 눈을 부릅뜨고 위를 쳐다 보았다.
곡중헌
암흑천지 어둠 속에서 회오리치는 시커먼 먹구름, 언젠가 보았던 그 기운이 사장 허공에서 휘몰아치며 덮쳐 오고 있었다!
'그 자다!!'
일순, 휘의 뇌리에 사 년 전의 광경이 떠올랐다.
상무원을 암울함으로 몰아 넣었던 그 날... 그 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눈빛도 싸늘하니 식어 갔다.
먹구름이 일장 앞에 이르자, 휘의 우수가 들리고, 철검이 먹구름을 향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쩌어억!
벼락이 먹구름을 반쪽으로 쪼개며 쏘아져 간다.
콰과과....
"우웃!"
짧은 단말마가 먹구름 뒤에서 터져 나왔다.
튕기듯이 삼장 밖으로 날아 내린 흑의 중년인의 표정이 놀람으로 굳어진 것이 보인다.
길게 찢어진 옷자락, 딱딱하니 굳은 표정. 바로 그 흑의인이었다.
휘의 싸늘하게 빛나는 눈이 흑의인을 주시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눈이 흑의인의 찢어진 가슴팍을 스쳐 지나가다가 기광을 토해냈다.
'저건?'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하나의 문양이 보인 것이다.
가슴 속에 있는 뭔지 모를 물건의 끝에 새겨진 귀면상.
흑마령주 곡중헌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로선 자신의 흑령마기가 쪼개져 버린 사실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설사 철혈성주인 철운성이라 해도 이렇듯 쉽게 흑령마기를 파기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거늘.
'대체 저자가 누구이기에...?'
생각은 잠깐, 곡중헌의 손이 들렸다.
다시 시커먼 먹구름이 두 손에 형성 되었다.
"제법이군, 늙은이."
그 한마디에 휘의 어깨가 움찔 했다.
막상 늙은이란 소리를 듣자 기분이 묘해졌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는 일. 그냥 자신을 노인으로 알고 있다면, 그렇게 알면 되는 것이다.
휘의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맺혔다. 그리고 나아가는 일보.
뒤 쪽에서는 추적자들이 담장을 넘어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일보에 신형이 좌우로 흔들리는 듯 하더니, 찰나, 다섯 개의 환영이 흑의인을 덮쳐 간다.
후우웅!
흑의인의 쌍장에서 먹구름이 쏟아지며 휘의 철검에 마주쳐 간다.
번! 쩌저적!
단천락!
단순하기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일검.
조금 전보다 더 강력한 번개가 먹구름을 쪼개어 가자 흑의인이 얼굴을 굳힌 채 쌍장을 휘돌렸다.
휘도는 먹구름이 번개를 휘감는다.
쿠구구구....
귀청을 찢어 버릴 듯한 굉음과 함께 휘감긴 두 가닥 기운이 땅거죽을 뒤집을 듯이 휘몰아친다.
휘는 이를 악물고 검을 횡으로 그어 갔다.
절혼광!
한줄기 빛이 천지를 양단하며 세상을 두 갈래로 나누어 버린다.
휘돌던 먹구름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힘을 잃고 사그라지고, 그 사이로 휘가 한줄기 바람이 되어 스며 들었다.
곡중헌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갈라진 먹구름 사이로 비친다.
휘의 신형이 주욱 늘어나더니, 철검이 곡중헌과 다섯 자를 격한 채 허공에 하나의 점을 찍어 버렸다.
쾅!
"우욱!"
대기를 찢어 발기는 격돌음.
전력을 다해 흑령마기를 운용하던 곡중헌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터져 나오고, 주르륵 물러서는 그의 어깨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강기의 여파에 나무고 바위고 닿는 것은 모두 부서져 나갔다.
공이연도 견디지 못하고 뒤로 이장 여를 물러섰다. 그런 그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강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자신이 기세의 여파에 물러서야 할 정도라니...
담장을 넘어 오던 자들도 분분히 정신없이 물러선다. 특히나 도를 쓰던 흑의중년인의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다.
세상에 흑마령주가 당하지 못하다니, 하는 표정이다.
휘는 솟구치는 핏물을 목으로 넘기고는, 어깨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물러서는 곡중헌을 바라보았다.
'아까운 기횐데... 어쩔 수 없지.'
그러다 잠깐의 생각을 접고 공이연을 향해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뭐하십니까? 놈들이 다 몰려 올 때까지 기다리실 겁니까?>
"헉!"
그러자 공이연은 꽁지에 불붙은 닭처럼 대경하며 신형을 날렸다.
휘도 신형을 날리려다 달려오는 자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흑의인들과 함께 덩치가 커다란 웅경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담장을 넘어 오고 있었다.
그를 보는 휘의 눈에 묘한 빛이 어렸다.
웅경은 자신을 일패도지시킨 노인이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약간은 어리둥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때, 한마디 전음이 그의 귓속을 파고 들었다.
<웅경, 다음에 보자구. 후후...>
그러더니 허공으로 떠올라 숲 속으로 사라져 간다.
웅경은 쫓아 갈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두 사람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흑마령주마저 밀릴 정도니 자신이 쫓아가 봐야 소용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것 때문에 발이 얼어 붙은 것이 아니다.
노인이라 생각했던 자의 음성이 의외로 젊다는 것이 그에게 충격을 준 것이다. 더구나 자신까지 알고 있는 듯 했다.
만일 목소리처럼 저자가 노인이 아니라 젊은 자라면...
우두둑, 웅경의 두 주먹이 부서져라 움켜쥐어졌다.
'세상은 역시 넓구나... 나는 진정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
지금까지 해 온 모든 노력이 헛것이었던 것만 같아 회한이 일 정도였다.
헌데 저자는 누구기에 나를 아는 것처럼 말 했을까?
웅경이 두 사람을 삼켜 버린 숲을 바라보며 굳어버리자, 곡중헌이 이채가 서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는 자인가?"
흠칫, 가볍게 몸을 떤 웅경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자입니다."
"그래?"
곡중헌도 어둠에 잠긴 숲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도 웅경과 비슷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인이 계속 공격을 했다면 과연 자신이 무사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단 두 번의 격돌에서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상대 역시 타격을 받은 듯 했지만 자신보다는 덜 받은 듯 보였다. 적어도 자신에 비해 아래는 아니라는 말.
입가의 핏물을 닦아 내는 곡중헌의 눈이 어둠 속에서 깊게 가라앉았다.
'다시 만난다면... 어쩌면 본 령주의 밑천을 드러내야 할 지도...'
한편, 휘는 앞서가는 공이연을 바라보다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소리 전음을 날리고는 신형을 틀었다.
<나중에 뵙지요.>
날아가던 공이연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뒤를 돌아 보는 그의 눈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어쨌든 자신의 목적을 이루게 해 줬고 위기에서 구해준 휘였던 것이다.
마지못한 듯 그의 입이 열렸다.
<나는.... 공이연이라 하네. 오늘의 빛은 나중에 갚지.>
'젠장! 괜히 부탁을 한가지 더 들어준다고 했잖아! 쳇!'
그래도 천하의 신영자 공이연이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이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쓰린 배를 움켜쥔 공이연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듯 사라져 갔다.
* * *
상무원은 여전히 고요한 어둠 속에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철혈대전 쪽의 소란조차도 이 곳의 고요는 깨지 못한 듯 보였다.
어스름한 새벽이 밝아오는 묘시 초, 한 줄기 그림자가 상무원의 건물 안으로 스며들었다.
고봉천은 잠결에 한줄기 바람과 함께 누군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자 슬며시 눈을 뜨고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노인이었다. 언뜻 보아도 적지 않은 나이를 먹은 듯한 청수한 인상의 노인.
어찌 할건 지 판단이 서지를 않자,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침착하니 몸을 일으켰다.
헌데, 침입자는 조금도 놀란 빛을 띄지 않은 채 오히려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고봉천은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물어 보았다.
"뉘신데 이 새벽에 고모를 찾아 오신 게요?"
응? 노인이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아!"
느닷없이 노인의 입에서 탄성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뜯어 간다.
"억!"
고봉천의 놀람을 뒤로 하고, 노인의 뜯어진 얼굴의 뒤에 나타나는 또 다른 얼굴. 하얀 얼굴이 창백해져 더 하얗게 보이는 얼굴.
"사부님, 휘압니다."
"휘아야!"
휘둥그레진 고봉천의 눈이 휘를 바라보다가 그제야 반가운 마음에 덥썩 휘를 안아 간다.
"언제 나왔느냐? 그 면구는 또 뭐고?"
빙그레 웃음을 흘린 휘는 자초지종을 사부에게 말했다.
"... 그 바람에 이제야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허!"
어이가 없는지 고봉천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뭐야? 그럼 그 총령이라는 흑의인하고 싸웠단 말이냐? 몸은 괜찮고?"
대경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휘는 무안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슬쩍 입가에 묻었을지 모르는 피를 닦아 내며.
"다행히 두어 수 겨루다 물러서서... 몸은 괜찮습니다."
고봉천이 휘의 말을 어찌 모를까. 그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어느 덧 부쩍 커버린 휘아가 대견하기 이를 데 없는 고봉천이었다.
흑의인의 무공은 전성기 때의 자신이라도 과연 몇 수나 버틸 수 있을까 의문일 정도로 강해 보였었다. 헌데 휘아가 그와 겨루고도 그의 손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커버린 것이다.
고봉천은 웬지 모를 답답함을 묻어 둔 채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어쩔 셈이냐?"
휘의 고개가 더욱 더 숙여졌다.
"휘아는... 잠깐 밖에 나갔다 올까 합니다. 아버지들의 한도 풀어 드릴 겸, 몇 가지 알아 볼 것이 있어서요."
"음....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