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200)

생각 같아서는 무작정 공격해 온 불청객의 청을 거절하고 싶었다.

헌데 저 눈빛은 또 뭐야?

처량하게까지 느껴지는 눈빛이 장난이 아니다. 불청객이 경극배우라면 모를까, 눈빛은 결코 거짓으로 지어진 눈빛은 아니었다.

꼭 염소 아버지가 가족들을 걱정하던 그런 눈빛...

'그러길래 가져 가라고 할 때 가져가지.'

잠시 책자를 만지작거리던 휘가 손을 내밀었다. 불청객이 책을 잡아 온다. 그러자 멈칫, 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재빨리 손을 거둬 들였다. 순간 불청객의 눈이 역팔자로 치켜 올라간다.

<장난하냐!!>

<아버지께서 그러셨소. 세상에는 도둑놈들이 많으니 절대 손해 보는 짓은 하지 말라고. 그러니 나는 대가로 한 가지를 묻고, 한가지를 부탁하겠소.>

나직한 전음에 공이연은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헉! 어떻게 알았지? 내가 도...'

<우선 하나, 이것을 어디다 쓰려는 거요?>

'나이깨나 먹은 사람 같은 데... 이런 게 왜... 아! 나이를 먹어서 그러나?' 

의문인 휘였다.

공이연의 복면 속 얼굴이 일그러졌다.

<꼭... 알아야 겠나?>

하얀 얼굴이 무심히 끄덕여지자, 공이연은 이를 지그시 깨물고 입을 열었다.

<으음... 내 딸... 목숨이 달려 있다. 그 구결만이 내 딸을 구 할 수 있다. 더는 알려 줄 수 없다.>

흠칫, 휘의 표정이 가볍게 변했다. 뜻밖의 이유였다. 대체 이 이상한 그림, 묘한 구결이 무엇이기에... 

하지만 휘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 가기로 했다. 

<두 번째는... 우선 복면을 벗으시오.>

공이연이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복면을 잡아가고, 스으윽... 시커먼 복면이 벗겨졌다. 

그를 아는 자가 이 모습을 봤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신영자 공이연이 저리도 고분고분하다니.... 

하지만 공이연이라고 해서 어찌 고분고분하고 싶을까, 그의 마음은 지금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딸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라고는 하나,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살아 온 육십 년 인생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를 바라 본 휘의 눈에 가벼운 놀람이 떠 올랐다. 

생각보다 청수한 인상, 만일 말로만 들어 봤던 훈장의 얼굴을 그려보라 한다면 이자의 얼굴을 그리면 될 것 같은 인상이었다.  

<됐...냐?>

<그런데, 그 껍데기는 왜 쓰고 있는 거요?>

'커윽! 귀신 같은 놈!'

속으로 비명을 토해낸 공이연이 마지못한 듯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그러자 얇은 면구 속에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시골의 농부 같기도 하고, 평범한 상인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이미 한 번 속을 뻔했던 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얼굴을 알았으니 한가지 부탁은 나중에 만나면 하겠소. 받으시오!>

고개를 끄덕인 휘가 책자를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책자를 건네 받으면서도 신영자 공이연의 얼굴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얼굴만 알았다고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세상이 얼굴만 알고서 사람을 찾을 정도로 좁다면 몰라도... 참으로 우스운 놈이었다.

까짓 거 뭘 못 해줄까. 

공이연은 지금까지 뒷간에 빠진 것 같았던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졌다. 그 바람에 그만 안 해도 될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좋네! 나중에 만나면, 하나뿐이 아니라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한가지 더 들어주지! 우허허!>  

사람이란 함부로 기분을 내서는 안 되는 법이거늘.....

좌우간 그렇게 기분 좋은 웃음을 입에 문 공이연은 후다닥 책자를 펴 보았다. 

앞 쪽에는 여전히 난잡한 춘화도였다. 

조금 더 보고 싶었지만 빤히 쳐다보는 젊은 놈 앞에서는... 좀 그랬다.

"험...."

뒤 쪽을 보았다. 석장이 남자 마침내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음양비결이 적힌 글자가...

부르르 떨리는 손만이 그의 격한 감정을 표현해 줄 뿐이었다.

휘는 슬그머니 뒤 돌아서서 서가를 따라 걸어갔다. 

이것 저것 들춰 보다보니 어느덧 서령전에 들어온 지 두시진이 흘러가고 있었다. 건너편의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책자에 눈을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를 않고 있었다.   

휘는 그냥 혼자 나갈까 하다가 그래도 인연이라고 불청객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안 나가실 겁니까?> 

움찔, 공이연의 어깨가 떨렸다. 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주위상황도 잊은 채 책자에 몰두한 자신을 꾸짖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비록 분간이 안 갈 정도였지만, 책을 순순히 건네 준 휘에 대한 고마움도 조금은 섞여 있었다.

<가세!>

책자를 가슴에 고이 모셔 놓고 공이연은 자신이 들어 왔던 창문으로 신형을 날렸다.

다시 보는 거지만 그의 신법은 참으로 깔끔하면서도 은밀하기 그지 없어, 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슬쩍 바깥을 내다 본 공이연의 신형이 창호지에 물이 스며들듯 창문을 빠져 나갔다. 그러자 휘의 신형도 서령각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처마 끝을 잡고 지붕으로 날아 내린 공이연은 좌우를 훑어 보았다.  경비들은 여전히 창칼을 손에 쥐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놈들, 아무리 그래 봐라, 이 어르신이 못 다니는가. 후후후...'

그가 경비를 비웃으며 막 신형을 날리려 할 때였다.

<빨리 안가고 뭐하십니까?>

'크어억!'

공이연의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바로 옆에서 귀신같은 그 젊은 동업자(?) 놈이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대경한 공이연은 그만 자신이 서있는 위치도 잊고,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헌데.... 

미끈. 뜨르륵...

엉겹결에 밟은 기와가 하필이면 쪼개져 있던 기와였나 보다. 반쪽 짜리 기왓장 하나가 미끄러져 내린다. 고작 기왓장 반장이었다. 고작... 

하지만 그 소리는 옷깃 스치는 소리도 들리는 이 야밤에 천둥소리만큼이나 크게 주위에 퍼져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누구냐!"

삐이익!!

곧 바로 경비무사의 외치는 소리와 호각소리가 철혈성에 울려 퍼졌다. 

의외의 상황에 공이연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꼬리를 밟힌다는 것은 초보도둑들에게나 해당 된다는 자신 넘쳤던 철칙이 무너지기 직전인 것이다.

휘의 눈에 부산을 떨며 달려오는 경비무사들이 보였다. 

외치는 소리는 하나였지만 순식간에 십여명이 몰려 오고 있었다. 아마 조금 있으면 잠자던 무사들까지 다 나올 것이다.

그런데도 공이연은 몸만 부르르 떨고 있다.

아무래도 공이연이 경신법만 뛰어난 초보도둑같이 보이는 휘였다.

"도망 갑시다!"

"어? 그래. 튀자!"

두 사람의 신형이 서령각의 지붕을 박차고 동쪽의 삼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으로 날아갔다.

"잡아라! 침입자다!"

뒤에서는 경비무사들의 고함소리가 울리고, 사방 전각에서는 무사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방문을 거칠게 여는 소리가 들렸다.

삼나무 숲을 들어가자 나무그림자가 그들의 모습을 가려 주었다. 그렇다고 모든 이의 시야가 가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정확히 그들이 가는 방향으로 몇 명의 무사들이 번개같이 달려 오고 있었다. 

은밀한 움직임, 다른 무사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결코 소리를 지르지 않으며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기이한 느낌이 전해온다. 왠지 모르게 어둠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휘의 뇌리에 신비세력의 무사들이 떠올랐다. 

그 날, 사부의 팔이 잘려지던 날 보았던 그 흑의인의 기운도 저런 암울한 어둠의 기운이었었다. 

휘의 눈이 차갑게 굳어진 채 공이연을 향했다.

<껍데기 좀 빌립시다.>

휘청, 막 삼나무 가지를 밟고 신형을 날리려던 공이연의 발이 하마터면 나뭇가지에서 미끄러질 뻔 했다. 그가 휘를 노려본다. 그러다...

<아까우시면 부탁 한가지는 그 걸로 해도 좋습니다.>

이어진 휘의 한마디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공이연의 눈이 스르르 풀어졌다. 

<여깄다. 내가 뭐 쫌생인 줄 아냐? 그냥 써라.>

곧 죽어도 좀생이 소리는 듣기 싫었는지 공이연이 눈을 부라리며 살짝 떨리는 손으로 면구를 건네 준다. 

하지만 휘는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면구를 건네 받았다.

<그럼 그렇게 하죠.>

'짜식이 사양할 줄도 몰라. 쩝... 백냥은 줘야 사는 건데... 괜히...'

탈출, 조우

그 사이 오십 여장을 더 전진했다. 그러자 철혈성의 높다란 담장이 이십 여장 앞에 시커먼 띠를 두른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속으로 환호를 내지른 공이연이 막 신형을 날려 담장을 향해 달려가려 할 때였다. 휘의 한마디가 다시 그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막혔습니다."

"응?"

의아한 눈이 휘를 향하자, 휘가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담장을 가리켰다.

"무슨...?"

공이연이 의아한 눈으로 휘를 바라 볼 때였다.

"철혈성에 왔으면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어둠 속을 울리는 낭랑한 외침과 함께 십여명의 무사들이 담장 위에 나타났다.

휘의 깊게 가라앉은 눈이 일순간 그들을 쓸어 보았다.

'제법 강한 자들.... 하지만 문제는...'

앞에 있는 자들이 강해 보이긴 해도 그리 염려할 만한 자들은 아니었다. 

휘의 예민한 느낌은 뒤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자들이 훨씬 위험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들 중에 제법 강력한 기운을 풍기는 자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돌아서며 다가오는 자들을 살펴 보았다. 그런 휘의 얼굴에는 어느새 공이연에게 받은 면구가 씌워져 있었다. 어설프게 쓰긴 했지만 어둠 속에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상대의 눈을 속이기에 충분했다.

독 안에 든 쥐로 생각했는지 그들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휘는 결코 독 안의 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물론 공이연 역시 마찬가지였고.

<치고 빠집시다!>

담장 위에는 십여 명, 숲 쪽에서 다가오는 자들의 수는 여섯, 많다면 많은 숫자였다. 

공이연에게 한마디 던진 휘의 신형이 느닷없이 다가오는 자들을 향해 주욱 늘어진다. 

미처 생각 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그들의 발걸음이 멈칫거린다. 

순간, 휘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져 버렸다. 

뒤따라 공이연의 신형도 움직였다. 헌데 그가 향하는 방향은 담장 쪽이다.  

휘가 사라지자 흑의무사들이 도검을 뽑아 들더니 재빨리 뒤로 물러선다. 일 점의 망설임 없는 대응. 

휘의 눈이 번뜩이며 빛을 발했다.

오장을 전진하다 오보천환으로 환영만을 남긴 채, 순간적으로 삼장을 전진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이장 여. 십장의 거리가 찰나간에 지척이 되어 버렸다. 

놈들의 놀란 눈이 코앞에 닥치자 휘의 우수가 들리고, 붉게 물들더니, 뒤로 물러서며 도검을 빼 드는 흑의무사들을 향해 손가락이 튕겨졌다.

파앗!

어둠을 찢으며 붉고 영롱한 지풍이 쇄도해 들어가자 흑의무사들의 전신에서 싸늘한 긴장감이 피어오른다.  

뜻밖의 상황 속에서도 도검을 휘두르는 흑의인들의 흔들림 없는 자세. 그것은 철저한 수련에 의해 만들어진 본능적인 자세였다.

따다당!!

찰나간에 앞 쪽에 있던 세 명의 검이 뒤로 밀려난다. 그러자 뒤 쪽의 세 사람 중 두 명이 번개같이 검을 찔러 온다. 

시기적절 한 합격술, 철저히 실전으로 무장된 공격전법. 찔러 오는 검 끝에 아지랑이 같은 검기가 맺혀 있다.

생각대로 일반무사들이 아니었다.

검 끝을 바라보는 휘의 입가로 싸늘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세 자루의 검이 한자 앞으로 다가오자 또 다시 휘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허공에는 흐릿한 잔상만이 넘실댔다.

흑의무사들이 멈칫하며 허공으로 고개를 들 때였다. 

어둠을 가르며 한줄기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쩌억!! 쩌저정!!

번개에 부딪힌 검날이 허리가 부러진 채 비산한다. 

"크으윽!"

튕겨 나가는 흑의무사들의 입에서는 답답한 신음이 터지고, 분분히 물러서는 그들의 가슴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솟구친다.

경악한 표정.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은 쓰러지면서도 사라지지가 않는다.  

그 때였다. 

뒤 쪽에 처져 있던 흑의 중년인이 한 자루 도를 빼 들더니 쏘아진 화살처럼 휘를 덮쳐 온다.

쐐애액!!

휘둘러지는 도에서 파열음을 동반한 도풍이 일고, 강력한 도세가 어둠을 양단하며 휘의 전신을 베어 온다.

'이자다!' 

조금 전부터 신경이 쓰였던 자. 역시나 다른 자와는 그 기세부터가 틀렸다.

하지만 그 뿐, 자신에 비해서는 모자람이 느껴진다.

도의 기세를 따라 휘의 신형이 주욱 뒤로 밀려났다 싶은 순간, 철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 받아 봐라!'

눈 깜짝할 사이, 앞의 세 흑의무사의 머리를 넘어 흑의 중년인의 도기가 다섯 자 앞에 다다랐다. 찰나!

쩌어억!

철검이 허공에 걸린 채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한줄기 벼락이 철검을 따라 어둠을 세로로 길게 갈라 버리고. 단천락(斷天落)!

쩡!

후우우웅!

강력한 도기를 뿜어내던 묵색의 도가 내려친 벼락에 처절한 울음을 토해낸다.

충격에 주르륵 다섯 걸음을 물러선 흑의 중년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그의 도를 잡은 손아귀가 길게 찢어져 피가 흐르고, 늘어 뜨린 팔은 가늘게 떨리고 있다. 

악 다문 입에서도 핏물이 넘어 오고 있었다.     

도를 놓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헌데, 자신을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자가 다시 철검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휘의 눈에 가벼운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두 명의 흑의무사들을 일패도지 시킨 일검, 광섬의 첫 번째, 단천락(斷天落)이었다. 

헌데 비록 손이 찢어지긴 했지만, 도도 부러지지 않았고 놓치지도 않았다. 

그걸 본 휘의 입가로 차가운 웃음이 맺혔다.

"좋은 칼이군! 다시 한 번 받아 보시지!"

한마디와 동시에 스윽, 휘가 한 걸음 내딛으며 철검을 들었다. 그러자 대기가 신음을 토하며 움츠려 들더니, 허공에 죽 늘어진 휘의 환영이 철검을 내리친다.  

흑의 중년인이 이를 악 문 채 창백한 표정으로 도를 들어 올리고, 좌우에서 세 명의 흑의무사들이 함께 달려 들었다. 

찰나, 휘의 철검에서 번쩍인 벼락이 네 갈래로 갈라지며 내리 꽂혔다.

단천락의 분(分)!

쾅! 따다당!

굉음이 어둠을 찢어 버리자 세 명의 흑의무사가 부러진 검과 도를 움켜쥐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흑의 중년인이 지면에 다섯 치 쯤 발을 파 묻고 반쯤 주저앉은 모습으로 넋을 잃고 휘를 바라본다. 

그런 그의 눈은 혈안이 되어 있었다. 

충격에 내기가 흔들려 실핏줄이 터져 나간 것이다.

휘의 눈도 중년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의 공격, 비록 최선을 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근 거석도 일격에 갈라 버릴 정도의 역도였다. 그런데도 그의 도를 떨쳐 내지 못했다. 

'과연...'

휘가 중년인의 핏발 선 눈을 바라보며 내심 상대의 역량을 가늠하고 있을 때였다. 

뒤 쪽에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누군가의 신음이 터졌다.

눈을 돌려 재빨리 뒤를 바라보았다. 

칠팔 명에게 둘러 쌓인 가운데, 공이연이 세 명으로부터 협공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신음은 바로 공이연의 입에서 나온 듯 했다. 

그의 옆구리 쪽에 붉은 선혈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힐끗 흑의무사들을 쳐다 본 휘의 신형이 허공에 서너 개의 환영을 남기며 사라졌다. 

흑의무사들은 또 다시 휘의 신형이 눈 앞에 환영만 남기며 사라지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부러진 도검을 움켜쥐고 두리번거렸다. 

흑의 중년인도 몸을 세우고 혈안을 부릅떴다.

하지만 휘의 신형은 그들의 예상과 달리 공이연이 있는 담장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걸 본 흑의무사들의 눈에선 안도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참으로 다른 동료들이 안다면 얼굴을 들지 못할 일이었다. 

신마천궁의 무사가 적이 달려들까 봐 겁을 먹다니. 

그러나 지금의 솔직한 심정은 저 괴물같은 노인(?)의 벼락같은 검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공이연은 빠른 발로 세 명의 공격을 피하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젊어 보이는 놈들이 의외로 찰거머리처럼 달라 붙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목적도 이뤘는데, 담장만 넘어가면 되는데....

열불이 가슴 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사십년 직업경력에 커다란 오점이 남게 생겼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까.

그러다 보니 그만 상대가 젊다고 너무 얕보고 덤벼들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는 곧바로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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