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200)

불청객은 일각도 지나지 않아 벌써 백여 권의 서책을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헌데 무엇 때문인지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본다.

'이상하네....?'

복면인, 공이연은 왠지 뒤통수가 자꾸만 간지럽게 느껴져 곤혹스럽기만 했다.

분명 자신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 곳에 들어왔다.  

그런데 자꾸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들켰다면 벌써 소란스러워졌어야 마땅하다. 헌데도 밖은 조용하기 그지 없다. 그럼 들키지는 않았다는 말.

자꾸 신경을 쓰다보니 짜증이 날 지경이다. 들고 있는 책의 글조차 잘 읽혀지지 않는다. 빨리 원하는 것을 찾아서 나가야 하는 데...

뒤를 돌아보기도 해 보고, 펄쩍 뛰어서 사방을 훑어 보기도 해 봤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서가와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 뿐.

다시 책에다 코를 처박고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아갔다.

그렇게 서령각에 들어 책을 뒤진 지 반시진 정도 지났을까, 공이연의 눈에 희열(?)이 떠올랐다. 아마도 자신이 찾던 책자를 찾은 것 같기도 하고....

공이연이 천천히 책자의 장을 넘겨 가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뭘 찾는 겁니까?>

"컥!"

귀를 울리는 전음. 공이연은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에 얼굴이 해쓱하니 질려 버렸다. 비록 복면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전음이 또 들려 온다.

<그런데 여자하고 남자하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옷까지 다 벗고... 좀 묘한 책인데 그거 가져다 뭐 하려고 하는 거요?>

그런데, 얼래? 반응이 좀 묘하다.

공이연은 후다닥 책자를 접더니 본래의 자리에 다급히 꽂았다. 

그러고는 재빨리 뒤를 돌아다 봤다.

"으헉!"

또다시 심장이 떨어지는 충격에 뒤로 물러서는 것도 잊고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분명 조금 전에만 해도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의 눈 바로 앞에 하나의 얼굴이 보인 것이다. 

거꾸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귀...귀신...?"

공이연의 육십 평생에 이렇게 놀란 적은 처음이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천장에 다리를 걸치고 있으니 당연한 상황이긴 했지만, 휘의 얼굴도 바깥에서 비친 횃불의 빛을 받아 조금 이상하게 보이기는 했다. 

게다가 일반인보다 하얀 얼굴...

휘가 다시 물었다.

<그게 찾으시는 거였습니까?>

공이연이 자신도 모르게 전음으로 황급히 대답했다. 고개를 세차게 내두르며.

<아니! 내가 왜 이런 걸...>

자신이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답을 하고 보니 그제야 자신이 왜 그런 대답을 귀신같은 자에게 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어헉!! 너... 누구냐!?>

자신은 침입자. 이자는? 모른다. 

다만 들켰으니 무조건 제압하고 봐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손을 들어 귀신같은 자의 목을 쥐려 할 때였다.

"쉿!"

멈칫.

<누가 오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요?>

그랬다. 그의 말대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직한 전음에, 공이연은 손을 뻗다 멈춘 채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쳐다보았다. 

전음소리에 적대감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의 사십 년 직업경험(?)이 말하는 느낌으로는. 

‘그럼 이 놈도... 나처럼 도...?’

공이연은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자 상대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그저 그런 키에 얼굴만 희멀건 젊은 놈이었다. 자신에 비하면 새파란 놈. 헌데 자기가 왜 이 놈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명색이 천하를 주름...잡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천하삼도(天下三盜) 중의 하나이자 경신의 대가 신영자가 아니던가.

미처 생각할 틈도 안주고 젊은 놈이 말을 걸어 온다.

<우리 싸우지 말고 서로 원하는 거나 찾죠?>

시간이 없다. 그러니 원하는 거나 찾자. 그런 말이다.

공이연도 굳이 반대할 의사는 없었다. 이 젊은 놈으로 인해서 놀라기는 했지만 자신은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 저 놈도 하고자 하는 일이 있는 것 같고. 더구나 싸워 봐야 좋을 일도 없다.

고개를 끄덕이는 공이연을 보며 휘는 씨익 웃었다. 헌데 공이연이 움찔 놀란다.

<왜 놀라는 거요?>

<거꾸로 매달려서... 머리 길게 늘어뜨리고 웃는 놈을 너도 봐봐라! 안 놀라나!>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매달려 있었다.  

휙, 순간적으로 뒤집히며 내려선 휘는 다시 한 번 씩 웃었다. 미안하다는 듯이.

그런데, 뭐야?.... 또 놀라? 

휘는 생각했다.

'본래 간덩이가 좀 작은 사람인가 보군.'

그게 아니다는듯 공이연이 말했다.

<너, 계집 아니냐?>

문득 연연의 말이 생각났다. -오빠, 여자보다 이쁘다!-

사부님의 말도 생각났다. -얼굴 가리고 다녀라. 그게 낫겠다.-

'끄응!' 

휘는 한자 한자 힘 주어 말했다.

<나! 남.자.요! 알았소?>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당신하고 같은 목적으로 들어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러자 공이연의 전신에서 싸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여차하면 손이라도 쓸 태세다.

<그럼 너도... 음양비결을 찾으러 왔단 말이냐?>

음양비결? 들어 보기도 처음 들어보지만, 휘는 불청객이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걱정 마시오. 나는 다른 것을 찾으러 왔으니까.>

약간 의문을 가지면서도 공이연은 기운을 갈무리 했다.

<좋다. 그럼 너는 네 것을 찾고, 나는 내 것을 찾는다. 서로 간섭은 안 하기. 됐나?>

<좋습니다.>

두 사람은 약간 떨어진 상태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일단은 서가를 따라 책자들의 진열 상태를 살펴 보았다.

책자들은 일단 두 분류로 나뉘어 져 있었다. 

외부에서 흘러 들어 온, 특별히 중요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드러내 놓기는 좀 그런 책자들과 이 삼급의 내부문건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휘에게 필요한 것은 내부문건이 있는 장소였기에, 휘는 망설임 없이 내부문건이 있는 서가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불청객은 외부에서 들어 온 것을 찾는 것인지 본래 있던 곳에서 계속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밤부엉이들이 짝을 찾아 울어 대는 사경 무렵, 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먼지가 수북한 서가의 구석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다.

[무저동 죄수 명부]

사부님의 말씀이 맞았다. 

어쩌면 서령각에 시일이 지난 장부들이 보관 되어 있을지 모른다 했었다. 더구나 이제는 운영하지도 않는 무저동의 장부라면 일급비밀이라 할 것도 없었으니... 

첫 장을 들추어 봤다. 

[무저동 죄수의 성명, 그리고 죄와 벌.]

장수가 족히 이백 여장은 되어 보였다. 전체를 읽으려 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 일단은 자신이 원하는 이름만 찾기로 했다.

다행히 시기 순으로 나열이 되어 있었기에 원하는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맨 뒤에는 한 여인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휘의 눈빛이 심해의 바다로 가라앉았다.

[조미양-성주부인의 시비로 적과 내통 하였음. 고문을 하였으나 자신의 결백만 주장함. 그러나 조사완료 후 증거가 완벽하여 첩자로 판결내림. 무저동에 수감. 기일 무제한. 벌-다리근맥 절단. 뇌호혈파괴. 

추: 일 년 후 그녀의 결백이 사실로 드러남. 허나 무저뇌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여 상황을 종료함.] 

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 여인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었다. 얼마나 심한 고문을 했겠는가는 안 봐도 훤한 일이었다. 

무저동에서 그런 사람들을 오죽이나 많이 봐 왔던가.

헌데 한가지 이상한 일이 있다. 그 정도 고문을 했으면서 여인의 임신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설령 몰랐더라도 그녀가 먼저 사정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뇌호혈을 파괴한 사람은 의술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일 터. 그런데도 임신에 대한 내용은 단 한 글자도 없었다. 결국은 임신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 

그럼 세 아버지나 사부님의 말씀이 어느 정도는 맞는다는 말이었다.

-네 어미는 품위가 있었다. 비록 전신이 망가졌지만...-

-궁주부인의 시비로 있었는데 임신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염소아버지 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뇌호혈이 파괴되지 않았었다 했다.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던 휘는 다시 책자로 눈길을 돌렸다. 

[진형구 - 본 성에 반기를 든 검산장의 무사들 틈에 끼어 있다가 얼떨결에 잡혀 옴.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어 죽이지 않고 일단 무저동에 수감. 기일 무제한. 벌-다리 근맥 절단.]

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빼빼아버지는 말 그대로 덤으로 잡혀 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근맥을 잘라 무저동에 집어 넣다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거기에 또 한 이름이 있었다.

[조동인 - 소성주부인의 진맥을 위해 초빙됨. 의원이라는 이유로 배와 가슴을 만지는 등 소성주 부인을 능멸함. 무저동에 수감. 

기한 무제한. 벌-다리 근맥 절단. 뇌호혈 파괴도 고려했으나 지나치다는 의견이 많아 하지 않음.]

염소아버지의 말과도 사뭇 다른 죄명이었다. 염소아버지는 절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했다. 그리고 휘도 그 말을 믿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임신해서는 안될 사람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아서라고 했는데... 소성주의 부인이라면 임신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어쨌든 더 알아 볼 일이었다.

그 뒤에 또 하나의 이름이 바로 이어져 있었다.

[여강두 - 풍혈단주 임가형의 자(子) 임지광 살해. 벌- 사형에 처하려 했으나 임지광이 양가의 여인을 간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리 근맥 절단 후 무저동에 수감. 머리에 침이 박히지 않아 뇌호혈은 그냥 놔뒀음. 완전금강두임.]

아들이 죽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렇다고 무저동에 집어 넣다니. 

세 분 모두가 강자의 횡포에 희생된 분들이라 할 수 있었다. 휘는 분노가 끓어 올랐지만 천천히 마음을 가라 앉혀야만 했다.

'언제고 이 빛에 대해선 꼭 갚아 줄 것이다.'    

마음을 삭히며 책자를 덮던 휘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앞에서부터 넘겨 가기 시작했다.

백여장을 넘겼을 때였다. 손길이 멈추었다. 

[이름:불명. 나이:불명.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본성에 침입. 자신은 지나던 길이었다고 함. 격전 중에 본성의 무사 이십 여명 사상. 장로원의 고수 다섯 명이 합세하고 나서야 겨우 제압함. 

중원의 인물이 아닌 서장의 인물로 판단됨. 말투에 서장 지방의 방언이 섞여 있음.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괴이한 무공을 씀. 죽이려 했으나 혹 관련자가 찾아 올 지 몰라 수감하기로 결정. 워낙 강한 자라 다리의 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파괴한 후 무저동에 수감.]

백이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분명 광량에 대한 수감기록이었다. 

'후... 중상을 당한자를 제압하는데 다섯 명의 장로가 달려들었다니. 헌데 서장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더 넘겨 보자 도사할배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이름:불명. 일명 미친도사. 본 성에 침입하여 밤마다 소리치며 돌아다님. 두번은 방면했으나 계속되는 미친 행각으로 어쩔 수 없이 무저동에 수감. 근맥을 자르고 뇌호혈 파괴.]

스스로 들어왔다 하더니 아무래도 들어 오기위해 미친 짓을 했던 듯 했다.

일단은 원하던 기록을 모두 찾았다.

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록들에 대해 찬찬히 생각을 해 보았다.

일단 세 아버지에 대한 것은 그 일에 관계된 자들을 먼저 알아 보아야 했다. 시간이 조금 걸릴 지는 몰라도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을 갚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휘는 고개를 돌려 불청객을 찾아보았다.

한쪽 구석에서 부지런히 책을 뽑아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가 뽑았다가 꽂은 책이 생각났다.

'뭣 때문에 혼자서 실실 웃고 있었을까?'

조금 보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건너편 서가로 발길을 옮겨 그 책을 뽑아 보았다.

공이연은 벌써 수백권의 책자를 훑어 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책자를 찾을 수가 없자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 때, 그의 눈에 휘가 책을 하나 빼 드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에 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짜식! 꼴에 남자라고.... 좌우간 남자들은 애나 늙은이나 어쩔 수... 험. 험.'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을 향해 침 뱉는 말 같았다.

피식! 휘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책자에는 뒤엉켜 있는 남녀의 그림이 난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성애를 그렸다는 춘화가 바로 이런 그림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충 넘겨 보았다. 근 이십 여장의 춘화에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체위가 그려져 있었다.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모습까지... 

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그림이다 보니...

두어 장을 남겨 놓았을 때였다.

'응?'

그 때까지는 그림만 그려져 있었다. 헌데 마지막 석장에는 글도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음을 흥하게 하고 양도 흥하게 하여 합하니 최적의 음양이 만들어지도다. 양을 흥하게 하는 방법은.... 음을 흥하게 하는 방법은... 그리하여 합하는 방법은... 이를 음양의 조화라 하니, 어찌 본좌 음양대제의 최후 최고의 걸작이라 아니할 건가.]

자화자찬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글이었다. 

무공은 아닌 듯 하지만 뭔가 기의 흐름에 대한 도리를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가만? 혹시 이것이...?'

고개를 들고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음충맞은 표정으로 슬며시 웃는다. 

마치 공범끼리의 동지의식을 느낀다는 것처럼.

휘는 혹시 하는 마음에 책을 들어 올리며 공이연에게 물어 보았다.

<이보시오. 혹시 이것이 당신이 찾는 것 아니오?'>

흠칫, 불청객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느껴졌다. 그가 고개를 세차게 내젓는다.

<미쳤냐? 내가 그런 것을 찾게.>

<아까 당신이...>

<글쎄! 아니다니까! 난 그런 책 필요없다. 젊은 너나 가져라!>

강하게 부정하는 말이 살짝 떨리기까지 한다.

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정 필요 없다면야.....>

그리고 뒤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전음으로. 슬쩍 공이연을 바라보며. 

<이상하네... 아까는 음양비결을 찾는다고 해 놓고... 여기 보면 분명 음양비결이 어쩌고 저쩌고....음양대제가... 남겼다고...>

탈출

공이연은 강하게 고개를 흔들며 돌아서다가 마지막에 중얼거리듯 들리는 전음성에 몸이 딱딱하니 굳어졌다. 그리고...

휙, 삼장을 순식간에 좁히며 손을 뻗어 갔다.

<이리 줘 봐라!>

막 공이연의 손이 책자를 잡아갈 때였다.

스윽, 기름에 미끄러지듯 휘의 신형이 움직임도 없이 뒤로 다섯 자를 밀려 갔다.

"엇!?"

공이연의 눈이 한껏 커지더니 그의 입에서 짧은 경악성이 터졌다.

자신의 손이 빗나갔다. 그것도 자기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강호의 친구들이 안다면 놀림감이 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천하의 신영자가 헛손질이라니. 공가도 갈 때가 다 되었구나. 

카카카...- 

아마 그 정도면 다행일 것이다.

<제법이구나!>

싸늘한 전음성이 휘의 귀를 후비더니, 동시에 흐릿한 손 그림자가 장막처럼 덮쳐 온다. 

휘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손짓에 살기가 없는 것이다. 

오직 손에 있는 책자만을 노리고 있을 뿐인 불청객 공이연이 왠지 밉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휘의 신형이 휘청하더니 좌우로 늘어지고, 들려진 좌수의 검지가 허공을 향해 점을 찍었다.

"흡!"

공이연은 자신의 수영이 만들어 낸 벽을 뚫고 손가락하나가 장심을 찔러 오자 그 충격에 다급성을 터트렸다. 

그의 놀란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벌겋게 부풀은 오른손을 움켜 쥔 공이연의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휘는 책자를 손에 든 채 무심히 공이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안 가지겠다고 했잖소? 남자는 일구이언을 하면 안 된다 하던데...>

'크윽! 미꾸라지 같은 놈이 끝까지...' 

이부지자(二父之子)는 되기 싫은 공이연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별 볼일 없는 놈 같으면 죽이고라도 뺏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솜씨도 범상치가 않아서 뺏고자 한다면 한바탕 소란을 피할 수가 없다. 뺏을지 자신할 수도 없고. 

어쨌든 그리 되면 경비들이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들킬 것은 자명한 일. 

'으음... 아무리 궁리해 봐도 방법이 없다. 제기랄!'

공이연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휘에게 말했다.

<하.한 번만... 보세. 끄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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