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200)

시간이 흐르면서 안개가 서서히 옅어져 간다. 정신없이 도망쳤던 벌레들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순간,

푸아아아!!!

호수 한가운데에서 붉은 동체가 솟구쳤다.

두 개의 시뻘건 불길이 동굴을 비추자 고개를 들이밀던 벌레들이 다시 정신없이 도망을 친다.

"후아아!!!"

깊고 거친 숨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두 눈에서 뿜어지는 붉은 열기가 사방을 쓸어 보았다.

"...살았나?"

휘의 입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탄식이 터졌다.

"휴우.... 하마터면 오기부리다가 죽을 뻔했다." 

팔 다리를 살펴 봤다. 아직도 붉은 열기가 가시지를 않고 있다. 

그러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휘의 고개가 갸웃거려 졌다.

손이 머리를 쓸어 갔다.

"엥?"

치렁치렁하던 머리카락은 어딜 가고, 두치 길이의 밤송이처럼 꺼칠꺼칠한 머리카락이 손에 들어 왔다.

"다... 타 버렸다.... 아니지... 조금 남았다."

문득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물 속에 비치는 그(?) 곳, 제법 거뭇거뭇하던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으음.... 많이 자랐었는데...'

그 날 이후, 휘는 호수동굴의 물 속에서만 천양의 법을 수련했다.

죽다 살아난 덕분에 얻은 소득도 적지 않았다. 기해혈에 잠들어 있던 지음의 기운이 서서히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휘의 내력이 균형을 이루며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또한 물 속에서 수련을 하다보니 좋은 점도 많았다. 아무래도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힘이 더 들었고, 힘들지 않기 위해서 물의 결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변화를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물 속에서 수련을 하다가 광섬사결을 익힐 방도를 찾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차가운 물의 기운을 즐기며 눈을 반쯤 감고 있다 보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해준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며 즐기기만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문득 문득 물방울이 맺혀 떨어질 때쯤 되면, 뭐라 형용 할 수없는 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전신감각에 느껴지는 대기의 흐름, 동시에 여지없이 물방울이 떨어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퐁!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인다. 그런데 찰나간, 떨어지는 물방울이 수면 위에 비쳤다. 

몇날 며칠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느낌이 오면 떨어지고, 떨어지면 파문이 인다. 

비록 작은 변화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휘의 머리 속에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휘둘러 보았다.

물의 결을 따라 손이 들리면 일점의 파문도 일지 않고 손이 빠져 나온다. 그리고 순간적인 그어짐. 그러나 물방울은 여지없이 파문을 일으키며 수면 위에 떨어진다.

어쭈? 한 번, 두 번... 열 번....

오기가 솟았다. 그 때부터 수없는 반복이 계속되었다. 

느낌이 오면 손날이 물방울을 베어 간다. 

떨어지고 베고, 떨어지고 베고... 

물방울이 수면에 비칠 정도되면 간격이 세치에 불과하다.

일수유의 순간, 그 사이에 물 속에서 빠져 나온 손날이 물방울을 벤다는 것은 불가능처럼 보였다.

헌데 어느 때부턴지 대기의 흐름을 전해주던 풍령의 기운이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느낌이 뇌에서 손날로 전해지기도 전에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무심히 흘러가고, 풍령의 기운이 손날과 하나가 되어 물방울을 베어내기 시작한 것은, 처음 풍령이 움직이고 삼개월이 흘러서였다.

하나를 이루었다는 생각에 휘의 입가로 희열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 다음에는 손가락을 뻗어 떨어지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꿰어 봤다. 

그것은 더욱 더 힘들었다. 

하나의 점, 찰나간에 존재하는 점을 느낌만으로 꿰뚫는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하도 반복하다보니 나중에는 무의식 중에도 느낌만 오면 손가락이 나간다.

문득 휘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러다 뭘 볼 때마다 손가락을 뻗는 거 아닐지 모르겠네. 버릇되면 곤란한데... 특히 연연이한테 그랬다가는....'

그래도 일단은 성공이나 해 놓고 걱정할 일이었다. 무저동에서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끊임없는 찌르기의 반복이 육개월을 흘렀다.

이제는 물방울 두 개가 동시에 떨어져도, 하나는 베고 하나는 콕, 찌를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물 속에서의 수련이 밖에서의 수련보다 훨씬 힘들면서도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휘가 물속에서 하루에 네시진 이상을 보내며 수련에 박차를 가한 지 일년 여.    

차갑고도 무저동의 어둠처럼 깊은 눈에 잔잔한 미소를 담고 휘의 손이 한점 파문도 없이 수면을 빠져 나오더니, 쭉 뻗은 다섯 손가락이 허공을 훑어간다.

콕!! 스슥... 팍!

수면 한치 위에서 세개의 물방울이 동시에 꿰뚫리고, 잘라지고, 비산한다. 

그러자 휘의 깊은 눈빛이 더욱 깊어지며 심해 저 아래로 침잠해 들어갔다.  

만족한 듯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서령각에서...

휘는 전과 다르게 오랫동안 밖을 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머리가 짧아 연연에게 놀림을 받는 것이 싫어서, 그러다 나중에는 자신에게 찾아 온 깨달음의 열락을 놓치기 싫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렇게 하루의 반을 물 속에서 보내다시피 하다보니 무저동에 들어 온 지도 벌써 사 년이 훌쩍 넘어가 버렸다. 

우걱 우걱 쩝쩝!

가루가 안 된 것이 다행일 정도로 부서진 과일 하나를 씹어 대던 휘의 눈이 천천히 허공으로 들렸다.

보름달처럼 둥근 천공이 보였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밖에 나갔다 온 지 어언 육개 월이 되었다.

연연은 많이 컸을까?

사부님은 연연의 등쌀에 잘 버티고 있을지...

훗!

내가 육개 월을 나가지 않았으니 아마 고생깨나 하셨을 터였다.

아니지, 이제 열 다섯 살이나 되었으니 사모님을 도와주느라 나를 잊고 지낼지도...

처음에는 닷새에 한 번씩, 그러다 나중에는 열흘에 한 번씩 밖을 나갔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한 달에 한 번으로 줄더니, 천양이 내 머리를 태워 버렸던 이년 전 그 날 이후론 서너 달에 한 번씩 밖에 나가지를 않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육개 월 째... 

아마 연연의 머리에 뿔이 서너 개는 나있을 터였다.

손을 앞으로 뻗자 한 자루 철검이 휘의 손으로 딸려 들어왔다. 

가볍게 발을 박차자 신형이 주욱 삼장을 미끄러지더니 커다란 바위 위에 내려섰다. 어릴 때 항상 누워서 천공을 바라보던 그 바위였다.

천천히 검을 내밀었다.

화르르....

붉은 불꽃이 검의 끝에서 환하게 피어 오른다.

파르르...

달아 오른 철검의 끝이 벌의 날갯짓 마냥 떨리고, 어둠의 세상에 불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첨을 바라보고 있던 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순간, 

“탄!”

검끝에서 한줄기 불꽃이 폭사되어 나갔다.  

그 불꽃이 오장 밖의 석벽에 다다랐을 때였다. 휘의 입에서 기이한 주문이 터져 나왔다.

“혈련화야, 피어라!”

화아악!

석벽에 부딪쳐 가던 불꽃이 환하게 피어난다. 

한송이의 꽃봉오리가 만개하듯이 피어난다. 

맑고 붉은 연화가 불꽃 속에서 희열을 노래하며 피어난다. 

그것은 찰나간의 일이었다.

휘의 주문과 함께 피어난 붉은 연화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그렇게 석벽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휘가 성큼 한 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흔들리는 듯한 그의 신형이 허공에 죽 펼쳐지더니, 수십의 환영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춤을 춘다. 그러다 한순간 오장 밖 벽 앞에서 차곡차곡 뭉쳐졌다. 

멋들어진 비월신영에 이은 오보천환이었다.

석벽을 바라보았다.

불꽃이 스며든 흔적은 그리 크지가 않았다. 손바닥 반절만한 연화의 흔적이 석벽에 남아 있었다. 세치 깊이로 파인 채.

“흠. 이건 조금 작은 걸?”

이마를 찌푸린 휘의 손이 허공에 들리고, 한순간에 철검을 내리 쳐간다. 

쩍!

헌데, 마치 수박이 갈라지듯 허공이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무슨...

“이건 위력은 좋은데 너무 멋대가리가 없어.”

철검을 내려친 쪽의 석벽을 바라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쳐진 굵은 선이 보였다. 하나로 보이지만 결코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선. 마치 수십, 수백줄기의 가는 벼락이 훑고 내려간 것 같은 선이었다. 

“아무래도 꽃을 더 크게 피워 봐야겠다.”

중얼거리던 휘의 신형이 삼장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러더니 허공에 다시 하나의 꽃이 피어난다. 이번에는 조금전보다 족히 서너 배는 더 커 보이는 불꽃이었다.

불꽃이 화려한 연화를 피워 낸다. 또 져 간다. 피고 지고...

그렇게 화려한 불꽃연화가 몇 번을 더 피고지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휘는 또 다시 석벽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곳에는 사람 머리통만한 연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됐다! 이 정도 크기면 연연의 입이 쩍 벌어질 거야.”

자기가 생각해도 만족스러운지 휘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났다. 

맙소사! 지금껏 한 연구가 기껏 연연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서.... 

  

휘는 아버지들의 무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부지. 밖에 나가 봐야 겠어. 아무래도 사부님 가족들이 걱정하고 계실 것 같거든. 그리고 조사해야 할 것도 있고...” 

빼빼아버지가 말한다. -나가거든 삼류무사의 아들 맛 좀 보여 줘라!-

“참! 이번에 나가면 염소아부지 가족도 찾아 볼 거야.”

염소아버지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려, 꼭 찾아가 봐라.-

“석두아부지도 조금만 기다려. 재미있는 이야기꺼리 많이 가지고 와서 들려 줄 테니까.”

석두아버지가 굳은 얼굴로 말한다. -몸 조심 해라. 마차 조심 하고... 특히 술 쳐 먹고 마차 모는 놈들 조심해야한다. 그런 놈 있으면 머리로 받아 버려!- 

도사할배와 이빨아저씨의 무덤도 찾아가 보았다.

도사할배 무덤 옆에는 자그마한 돌무덤이 하나 더 만들어져 있었다. 바로 지양선인의 무덤이었다.

'할배, 삼령문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시간 나는 대로 알아 볼 게요. 삼신주도...'

  

             *         *           *

오월의 만월은 더할 수 없이 맑고도 환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온 세상이 그렇게 만월의 품에서 잠들어 있을 때, 철혈성의 구석에 있는 무저동의 어둠 속에서 뿌연 그림자가 하나 솟구쳤다.

그림자는 들보를 가볍게 손으로 잡는가 싶더니 쏘아지듯이 십여 장 떨어진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목나무 위에서 쳐다보는 만월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거대한 나무둥치에 몸을 기댄 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만월을 감상하다가 눈을 상무원 쪽으로 돌렸다.

'조용하군.'

자시가 넘어가는 시각, 조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시각이었다.

휘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상무원으로 바로 가 봐야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을 테니 기껏 해야 가서 잠 밖에 더 자겠는가.   

문득 그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흠, 밤손님이 한 번 되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 데?"

무슨 생각일까.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지체없이 곧바로 이어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휘의 신형이 만월이 있는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거대한 전각군이 있는 동쪽으로 한 줄기 유성이 되어 날아갔다.

십여채의 거대한 전각군이 한 채의 커다란 건물을 중심으로 빙 둘러 지어져 있었다.

가히 과거 철혈성의 위엄을 보여 주는 것만 같은 거대한 대전.   

그 곳이 바로 철혈성의 중심지이자, 철혈성의 모든 대소사가 결정되는 철혈대전이었고, 주위로 지어진 건물들은 철혈성의 주요 

세력들이 운집한, 한마디로 철혈성의 팔과 다리 같은 곳이었다.

그 중 서쪽에 위치한 풍혈단의 건물 지붕 위에 하나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내려앉았다. 워낙 은밀히 움직여서 인지 주위를 도는 순찰무사들 중 그 누구도 그림자의 출현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휘는 지붕 위에 내려앉자 마자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어느 누구도 자신을 보지 못했다. 밖의 경비만 보고 대충 움직였다면 들켰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원의 경비는 삼엄하기 그지 없었다.

가로 세로로 겹치며 돌아가는 순찰무사들이 적어도 이십 명은 되어 보였다. 

게다가 제법 절도 있는 동작들이나 흔들리지 않는 눈빛들은 그들이 결코 삼류무사 따위가 아니란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음... 사부님의 말에 의하면 무사들의 숫자가 배는 늘었다고 했다.

게다가 그간 철혈관의 삼관을 모두 통과한 자들의 수 역시 수십에 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철혈관의 일 이관을 통과한 자들은 더욱 많다는 말.'

몇 년 사이에 철혈성의 힘은 주위의 문파들이 경계심을 가질 정도로 커져 버렸다. 아니 그들이 미처 경계심을 가질 시간도 없이 커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철혈성주와 연합했다는 그 신비세력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세력의 무사들 역시 성내에 삼십 여명이 기거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휘의 관심은 결코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건물들의 배치를 둘러보았다. 

중앙의 철혈대전을 중심으로 사방에 네 채의 건물들이 둘러 서 있고, 그 뒤로도 십여채의 전각이 줄지어 지붕만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철혈대전 전면에서 남쪽으로 뻗은 청석로는 그 너비만 십수 장에 이를 정도로 넓게 뚫린 채, 이백 여장을 뻗어 가다 거대하게 솟은 정문에 다다른다. 

철혈대로였다.

과거에는 철혈대로가 시작되는 정문 앞에 철혈의 도전을 원하는 자가 울리는 철혈고가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휘의 눈이 철혈대로를 바라보다 횃불에 비친 진천각 너머의 낮은 지붕을 인 건물에서 멈추었다.

'저 곳이 진천각,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사서와 고문서들을 보관한다는 서령전인 것 같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여전히 경비무사들은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휘의 신형이 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소금쟁이 마냥 지붕 위를 스쳐 가더니 훌쩍, 옆쪽의 건물 위로 날아갔다.

오장의 거리. 소리없이 날아간 신형이 깃털보다도 더 가볍게 처마를 밟고 내려섰다. 그리고 또 미끄러져 간다.

서너 번 이어지자 순식간에 세 채의 건물을 지나쳐 갔다.

그렇게 네 번째 건물 위에 내려서고, 마침내 진천검단이 거주하는 진천각에 내려 설 때였다. 

'엇?'

이십 여장 건너편 건물의 지붕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휘의 눈에 들어 왔다.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나 결코 좋은 뜻으로 들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휘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의외로 불청객들이 많군.'

자기 자신까지 벌써 하룻밤에 둘이면 많은 것이 아닌가?

'철혈성을 견제하는 곳의 첩자인가? 아니면 밤손님?'

지붕 위에 낮게 엎드린 채 불청객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매우 조심스런 움직임, 일체의 소리를 배제한 행동은 그의 실력이 간단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불청객이 지붕의 결을 따라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러다 처마의 끝에 이르러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점 소음도 없이 칠장 떨어진 건물위로 몸을 날렸다.

휘의 눈에 가벼운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칠장을 난다는 것은 경공의 고수들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체의 소음도 없이 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탄력을 받기 위해선 바닥에 그만큼 힘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일, 그러다 보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날 수 밖에 없는 법이다. 그런데 불청객은 그러한 소리도 죽인 채 칠장을 난 것이다.  

불청객은 건너편 건물에 내려서자마자 조심스럽게 창문이 있는 곳의 처마로 가더니, 발을 처마에 걸치고는 거꾸로 창문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불청객의 목적이 그 건물에 있는 듯 했다. 헌데 자신의 목적지도 그 건물이 아니던가. 바로 서령각 말이다.

일단은 불청객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휘가 가까이 가기 위해 막 진천각의 지붕에서 몸을 일으킬 때였다.

처마에서 스르륵 미끄러지듯 떨어지던 불청객의 신형이 창문 바깥 쪽에 달라 붙었다. 

순간, 창문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듯하더니 불청객의 신형이 창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놀라운 잠입술. 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더 이상 지켜 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휘의 발이 가볍게 바닥을 밀었다. 단 두 걸음에 십여 장이 좁혀진다. 그리고 또 한 걸음.

스윽, 소리없이 칠장을 날아가던 휘의 신형이 허공에서 뒤집어지자 다섯 개의 환영이 허공을 유영한다. 그리고 그 환영이 사그라졌을 때, 그의 존재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서령각의 천장에 달라붙은 휘의 눈이 불청객을 따라 움직였다.

무엇을 찾는 것일까.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서책을 빠르게 훑어 가는 불청객의 얼굴은 복면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체격이 그리 크지 않은 데다 구부정한 허리는 불청객이 노인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아직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어둠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상당한 고수일거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소리없이 움직이는 경신법을 봐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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