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200)

휘아의 입에서 다급한 고함이 터졌다.

흑의인이 슬쩍 휘아를 돌아보았다. 차가운 광망이 얼음덩이같은 눈에서 쏘아져 나온다.

뛰어오던 고봉천이 멈칫하더니 소리쳤다.

"휘아야! 너는 나서지 마라!!"

그 때였다. 휘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달려오는 사부님의 등 뒤로, 저 멀리 건물 뒤쪽에서 이 곳을 바라보며 불안에 떨고 있는 정청화가 보였다. 그녀의 품 속에는 입이 막힌 고연연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내력을 입으로 모으고, 전력을 다해 전음을 펼쳤다.

<오지...마세...요... 절대...>

정신없이 정청화가 고개를 끄덕인다.

<연연을 데리고.... 그래요... 구할아버지에게.... 가세요...>

느닷없이 구노인이 생각났다. 헌데 할멈이나 청아는 그렇다 쳐도 구노인은 왜 모습을 안 보인단 말인가. 그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하지만 당장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정청화가 연연을 억지로 끌고 건물 뒤편으로 사라지는 걸 본 휘아는 흑의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멈칫했던 사부가 다시 연화문이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흑의인의 고개가 다시 사부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걸음을 내딛는다.    

그 때, 조용히 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철군명이 히죽 웃더니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총령께선 잠시 멈추어주십시오."

흑의인이 철군명을 쳐다보았다.

"제가 부탁 드린 것은 저 두 사람이었지요."

흑의인은 약간 불만이 서린 눈으로 철군명을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 생각 했는지 무심하게 뒤돌아 섰다. 

철군명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총령."

그 사이 고봉천이 피를 게워 내고있는 연화문의 앞에 도착했다.

"연...아우."

"크윽... 형...님."

"조금만 참게. 조금만. 내 성주께 말씀 드려서..."

고봉천이 연화문의 어깨를 끌어안고 다급히 소리치자 그것을 바라보던 철군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사숙께선 뭔가 착각을 하시고 있군요."

"군명.... 네가 어찌..."

고봉천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러나 이어진 철군명의 한마디가 고봉천의 불길을 사그라뜨렸다.

"고사숙 역시 죄를 피할 수 없음을 모르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무.무슨...?"

그 말뜻을 모를 고봉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모두의 파멸이니까. 

"이미 증인은 확보되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어느 정도는 짐작했지만 이들의 행보는 너무 빠르다. 너무 빨라서 대처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다.

암담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절망이 스멀거리며 온몸을 타고 기어 오른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을!!

그것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 자칫하면 모두가 죽는다. 놈은 피를 원하고 있다.

방법... 방법...

'아!! 사부님!'

고봉천의 고개가 번쩍 들였다.

격하게 흔들리던 눈빛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입가에는 고졸한 미소가 물렸다.

철군명의 눈에 기이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고봉천이 천천히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너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조용히 돌아선 고봉천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하나의 길쭉한 목함을 가지고 나왔다. 그 속에는 한자루의 한자도 안 되어 보이는 비수가 한 자루 들어 있었다.

"네가 한가지 잊은 것이 있구나. 하기사 나도 너무 오래 되어 잊다시피 했으니..."

담담한 한마디, 철군명의 눈매가 씰룩거렸다.

"전대 성주이시자 나의 사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한가지 물건을 맡기셨지."

"물건이라고요?"

"그래, 물건. 바로 이것, 철혈비 말이다."

비수를 바라보는 철군명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뿐, 비릿한 웃음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놀랍군요. 정말. 그 물건은 십여년간 보이지 않아 사라진 것으로 알았거늘... 허나 사숙. 철혈비로 뭘 어쩌시겠다는 것입니까?"

고봉천이 무심한 눈으로 철군명을 바라보았다.

"철혈비를 가진 사람은...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가 있다. 모른다면 성주에게 물어 보거라. 이제야 그분께서 왜 이물건을 나에게 맡겼는지 알 것도 같구나."

철군명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휘아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사부님에게 그런 물건이 있었다니.'

그 때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휘아의 귀로 흑의인의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릿느릿 파고 들었다.

"용서라.... 용서... 자신은 살 수 있겠군."

고봉천의 눈이 굳어졌다.

철군명의 눈이 번뜩이며 다시 차가운 빛을 발했다.

"하하하!!! 고사숙께 그런 물건이 있었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사실 저도 고사숙을 죄인취급하고 싶지는 않았었습니다."

저 놈이 무슨 생각으로...

"아버님께서도 고사숙님을 용서하실 수 밖에 없으실 테니... 고사숙께는 참으로 잘 된 일입니다."

철군명이 잠깐 말을 끊더니 휘아를 돌아보았다.

"헌데 어쩌지요? 사숙의 제자도 죄를 지었으니 말입니다."

"네가... 무슨 소리를..."

"죄를 집행하는 저의 앞을 막았으니 죄도 큰 죄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충분히 말이 됩니다. 고.사.숙! 휘사제는 반도를 잡으러 온 저의 행사를 막았단 말입니다!"

고봉천의 표정이 딱딱하니 굳어져 간다. 휘아의 표정도 굳어져 버렸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 놈은 작정을 하고 왔다! 내가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까지 파악하고 왔다. 결국은 어떻게든 피를 보겠다는 말인가? '

찬바람조차 싸늘한 장내의 살풍경에 멀리 도망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철군명의 입가에 서린 조소만이 더욱 짙어져 갈 뿐이었다.

반각이나 지났을까, 기득염을 쫓아갔던 세 무사가 돌아왔다. 그들의 무거운 표정으로 보아 기득염을 잡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철군명은 별다른 추궁도 하지 않은 채 오직 고봉천만을 노려 보았다.

'후후후... 어찌 하시겠소? 사숙.'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고봉천이 침음성을 흘리며 천근만근 무거운 입을 열었다.

"으음... 한가지 묻겠다."

나직한 음성이 고봉천의 이사이로 흘러나왔다.

"말씀하시지요."

"나에게 벌을 준다면 어떤 벌을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느냐."

'무슨 뜻으로 묻는 거지?' 

철군명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소를 흘리며 천천히 입술을 띠었다.  

"기껏 해 봐야 무공을 폐하는 정도겠지요."

휘아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부릅떠진 두 눈으로 철군명을 쏘아봤다.

고봉천은 두 눈에서 불길을 뿜어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정녕 그것을 원하느냐?"

"무슨...?"

휘아가 등줄기를 타고오르는 불안감에 번개처럼 돌아서며 자신의 사부를 쳐다보았다.

그 때였다.

고봉천이 철혈비가 든 목함을 휘아에게 던지고는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일장 가량 떨어져 있던 연화문의 장검이 그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런!!"

철군명이 대경하며 검을 잡아가고, 만근바위처럼 서 있던 흑의인이 한걸음 내딛었다.

목함을 받아 든 휘아가 굳은 얼굴로 돌아서며 철군명의 앞 쪽을 가로 막았다.

하지만.... 

철군명은 미처 검을 뽑기도 전에 멈춰 서야만 했다.    

흑의인의 절대무심 할 것 같던 눈동자도 파르르 떨렸다.

고봉천의 왼손으로 빨려 들어간 장검이 사선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를 거슬러 올라간 장검이 오른쪽 팔꿈치 부위에서 방향을 틀더니, 차가운 검광이 팔꿈치를 그대로 가로질러 간다.

팍!!!

선홍빛 핏줄기와 함께 팔꿈치부근에서 잘려진 고봉천의 오른팔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핏줄기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사람들의 가슴을 격랑의 파도 속으로 밀어 넣었다.

누구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홱 뒤돌아 선 휘아의 두 눈이 부릅떠지고 경악에 찬 비명이 상무원을 뒤흔들었다.

"사부님! 사부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구도 예상 못했던 일이 눈 앞에서 벌어져 버렸다.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이를 악 다문 고봉천이 철군명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평생 검과 신법만을 익혔다. 그러나 이제... 검을 버릴까 한다."

휘아가 울부짖었다.

"사부님!!! 손부터....!!!"

휘아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고봉천이 냉랭한 목소리로 철군명을 향해 말했다.

"아직도 나에게 줄 벌이 더 있느냐?"

철군명이 아연한 눈으로 고봉천을 바라보았다. 

설마 자신의 팔을 자르다니, 그것도 검을 익힌 자에게 생명과도 같은 오른팔을...

"있느냐! 없느냐!? 발마저 자르랴!!?"

추상같은 일갈이 철군명의 귀를 송곳처럼 파고 들었다.

"없....습니다. 그 정도면... 아버님께서도 용서하실 겁니다."

"그래? 없다!? 그럼 됐다! 그만 가거라!"

꿈틀, 철군명의 이마가 깊은 골을 만들었다.

"하지만 휘사제는....."

"그만!!!"

고봉천이 천둥같이 소리쳤다. 그러고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휘아를 바라본다. 그런 그의 눈에선 자애와 안도의 빛이 은은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철군명의 귀에는 여전히 천둥이 치고 있었다. 

"철혈비는... 내 팔이 잘려 나간 순간부터 휘아의 것이 되었다!! 그러니... 그 누구도 휘아를 벌한 자격이 없다! 군명!! 설사 성주라 해도 말이다!!!"

휘아의 가슴이 태풍을 만나 것처럼 격랑을 쳤다.

그랬다. 그것이었다. 

사부는 자신을 위해서 팔을 버렸다. 

검사에게 목숨과도 같은 팔을.... 개에게 던져 준 것이다.

어찌.... 어찌하여... 사부님!!!

"이익!!!"

휘아가 번개처럼 돌아서며 철군명을 노려봤다. 그런 휘아의 눈에선 불길이 일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망설이고 있는 철군명이 보였다.

용서치 않으리라! 내 용서치 않으리라! 사부님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휘아가 두 손에 혼신의 내력을 끌어 올릴 때였다.

<휘아야... 안 된다! 자칫하면 다른 사람까지도 휘말려든다!>

한 소리 전음이 귀청을 울렸다.

다른 사람? 연연이... 사모님... 오, 맙소사!

휘아의 두 손이 힘없이 내려졌다. 두 눈에서 일던 불길도 방울진 눈물에 꺼져 버렸다.

"사...부님! 크흑!!"

바람을 타고 비릿한 피냄새가 사람들의 콧속을 파고 들었다.

헌데, 왜? 왜! 피냄새가 역겹게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가.

염부경도, 연화문도, 심지어 철군명의 뒤에 시립한 채 서 있던 세 명의 무사들 조차도, 그 어느 누구도.... 가슴이 떨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때였다.

아무 말없이 조용히 서 있던 흑의인에게서 나직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만 가지. 오늘은.... 그대가 졌다."

"총령!?"

철군명이 소리치며 돌아보자 흑의인이 북풍한설 같은 목소리로 한자 한자 끊어 말했다.

"돌.아.간.다!"

부르르... 떨리는 어깨를 추스르며 철군명이 고봉천과 휘아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안다. 다만 두 사람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질시 섞인 오기가 솟았던 것이다. 

질시의 불길로 타오르던 눈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 뒤 돌아섰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고사숙. 갑시다!"

돌아서던 흑의인이 멈칫하더니 고봉천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진짜 남자다! 그것이 그대와 그대의 가족들을 살렸다!”

떠나간다. 피의 회오리를 몰고 왔던 철군명이 떠나간다.

상처입은 사람들만을 남겨 놓은 채 뒤돌아 상무원을 나선다.

고봉천을 안은 휘아의 눈에 차가운 불길이 일었다. 세상을 태워 버리고도 남을 불길이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오직 검붉은 피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휘아의 가슴에는 피보다 더 붉은 한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다려라! 철군명! 잊지 말아라! 철군명! 오늘의 일을 절대 잊지 말아라!! 강해져 있어라! 내가 찾아갈 때까지 얼마든지 강해져 있어라! 그래야 무너지는 절망도 더 클 테니까!!!'

"휘아야...."

사부님이 부르신다. 힘없는 목소리, 기력이 탈진한 듯한 목소리...

"사부님.... 크흐흑!!! 사부님!!!"

팔꿈치 주위의 혈맥을 점해서인지 피는 더 이상 뿜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지금까지 흘린 피가 너무나 많았다.

휘아가 고봉천을 끌어안고 오열할 때였다.

"아빠!!!!"

"아악!! 여보!!!!"

정청화와 연연이 비명 섞인 눈물을 흘리며 달려나오고 있었다.

그녀들을 바라보는 고봉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아. 다 끝났어. 이제....’

상무원의 봄

"놔두어라. 지나침은 오히려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하오나, 아버님!"

"누가 뭐라 해도 봉천은 나의 사제다. 성의 무사들 중 그를 따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번 일만 해도 너무 지나친 처사였다는 말이 분분하고 있는 실정임을 너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철혈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의 무사들이 철혈금령을 무시해도 된다는 소리나 같다. 그리고.... 이미 오른 팔이 잘린 사람을 너무 견제한다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고."

철운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철군명은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그림자처럼 앉아 있던 흑의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죽이는 것보다 살려 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소."

흑의인을 돌아 보는 철운성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총령도 그리 생각하실 줄은 몰랐소. 헌데 무슨 이유라도 있소?"

"그를 죽인다면 한순간의 난국은 해결할 수 있을 지 모르나... 무사들 중 상당수가 떠나갈 거요. 하지만 그를 살려둔다면, 그를 따르던 자들도 어쩔 수 없이 성주의 명에 복종할 수 밖에 없을 것이오. 팔이 잘린 무사를 따를 철혈의 무사들이 얼마나 있겠소? 그리고... 공연한 생각일 지는 몰라도 그의 제자라는 아이, 왠지 눈에 거슬리는 게 있소."

"음?"

철운성의 눈에 가벼운 놀라움이 떠올랐다. 

제자라면 진조여휘라는 이상한 성을 가진 아이를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자신이 본 바로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는 아이였다. 

헌데 자신에 비해 결코 하수가 아닐 거라 생각되는 이 자가 그 아이를 인정하다니.

"흠.. 총령이 그 정도로 보았을 줄은 몰랐구려. 군명아."

"예.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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