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끈 주먹을 움켜쥔 기득염의 하얀 눈썹이 잘게 떨렸다.
고봉천의 눈이 질끈 감겼다.
'최악의 상황이다. 소성주가 나섰을 정도면 이미 모든 방도를 정해 놓고 왔다는 말.'
휘아의 입이 말을 잊고 닫혀 버렸다.
철군명이 자신을 지나치고 있건만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자신이 나서서 막는다면 오히려 상황만 키울 뿐이다.
머리 속이 온갖 생각을 담고 급박하게 돌아갔다.
'사부님만큼은 무사해야 한다. 그 어떤 일보다도 그게 우선이다.'
결론은 결국 하나였다. 헌데 어떻게 해야하지? 당장 방법이 없다.
염부경이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침착하게 말했다.
"이 곳은 상무원이오. 소성주의 사숙이신 고봉천님의 거처요. 소성주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없구려."
철군명이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기며 하얗게 웃었다.
"나도 압니다. 다만... 사숙님의 거처에 반도들이 스며들었다는 연락을 받고 왔을 뿐이지요."
"그럼 찾아보시구려."
염부경이 고개를 돌려 방안의 고봉천을 바라보았다.
"소성주께서 반도들을 찾으러 오셨다는군요. 어찌하시겠습니까?"
"나는 말장난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염단주."
"나 역시 소성주와 말장난을 하고 싶지 않소."
철군명이 씩 웃더니 뒤쪽의 세 무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다섯, 모두 대항하기에 죽였습니다."
싸늘한 바람이 피비린내를 담고 장내를 휘돌다 담장을 넘어갔다.
철군명이 다시 염부경을 바라보았다.
"모두 죽었다는군요. 밖에서 서성이던 반도들 말입니다."
염부경과 연화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 혹시 그자들이 연숙부의 수하들이 아닙니까?"
"네... 네가..."
연화문이 새파란 안광을 번뜩이며 철군명을 노려봤다.
수하 다섯을 대동하고 와서 밖에 남겨 놨다. 감시를 목적으로.
헌데 소란이 일고 있음에도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저 놈이 죽였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하들일 것이었다.
평소 수하들을 자식처럼 대했던 연화문의 눈이 노기를 담고 철군명을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본 단주의 수하들을 죽였단 말이냐!!"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듯이 연화문의 입술을 뚫고 대갈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철군명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더욱더 차갑게....
"자격이라.... 이거면 되겠습니까? 연.숙.부!!"
그의 손이 품속으로 들어갔다 싶은 순간 빠져 나왔다. 그런 그의 손에는 하나의 금색영패가 휘황한 빛을 발하며 들려 있었다.
"철혈금령!!"
염부경의 입에서 대경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순간.
"감!히!! 철혈금령을 보고도 뻣뻣이 서있는 것을 보니, 그대들이 정녕 반도들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군!!"
철군명의 천둥같은 호통이 상무원을 뒤흔들었다.
부서져라 이를 악다물고 있던 염부경이 천천히 무릎을 구부렸다.
"삼.삼가... 순찰단주 염부경이... 금령주를 뵈오..."
연화문의 눈이 거세게 떨렸다.
"이.이.이.... 크으...."
"연화문!! 그대는 철혈금령을 거역할 것인가?!"
"연.연화문...이... 철혈금령을...."
서서히 구부러져 가는 연화문의 등이 폭풍을 만난 난파선처럼 떨린다.
철혈금령의 명은 성주의 명과도 같다. 철혈성의 무사라면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권위의 힘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철혈금령의 힘이었다.
그걸 보는 철군명의 눈에 득의의 웃음이 가득 찼다.
'후후후.... 이제 시작일 뿐이다.'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보던 철군명의 시선이 방안의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기장로님, 그만 나오시지요."
나직한 목소리가 살얼음처럼 바닥에 깔렸다.
"내가 왜 나가야 하느냐?"
"하하하! 설마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기장로님께서 철혈금령을 따르지 않으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흥! 나는 철혈금령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말로만 들은 금령의 명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냉랭한 기득염의 목소리에 철군명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사실이 그랬다. 보지도 않았는데 말만으로는 따르게 할 수 없다.
참으로 묘한 상황이었다. 철군명은 기득염이 당연히 철혈금령을 봤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등 돌리고 앉은 그는 자신이 봤을 때부터 결코 한 번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었다. 그러니 무작정 강요할 수도 없었다.
내 손에 든걸 보라고 해 봐야 지금와서 쳐다 볼 그도 아니니까.
조금 전 밖의 수하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기득염이 암담한 마음에 몸을 돌리려 했을 때였다.
<기숙부, 돌아보지 마십시오.>
흠칫, 귓속을 울리는 전음에 앞을 바라보았다. 눈을 반쯤 감고있는 고봉천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저 아이는 뭔가 방법이 있기에 쳐들어 왔을 겁니다. 게다가 진천검단의 무사들을 임으로 죽였다는 것은 그만한 권한을 지녔다는 것이겠지요. 그럼 무엇이 그만한 권한을 저 아이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서.설마?>
<저로선 철혈금령을 빼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으음..."
기득염이 절망의 신음을 흘릴 때, 밖에서 들리는 염부경의 놀라는 소리.
“철혈금령!”
기득염이 경악으로 입이 벌어지자 고봉천의 전음이 다시 귓속을 파고 들었다.
<보지 마십시오! 아무리 절대권한을 가진 금령이라도 보지 않은 사람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성주께서 직접 오셨다면 모를까,
장로의 신분인 기숙부께 금령이 있으니 보라, 마라, 강제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군명 저 아이가 명을 내릴 수있는 것은 금령이 있기 때문이지 결코 소성주라는 지위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제 뒤에 뒷문이 있습니다. 기숙부께선 그저 군명을 볼 필요없이 뒷문으로 나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기득염의 눈에 번쩍 빛이 뿜어지다가 수그러 들었다.
<자네는...>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 저들은 저에 대한 증거를....>
전음을 보내던 고봉천의 몸이 거세게 떨렸다.
'증거는 없어도... 증인들이 있다.'
기득염 등이 철혈성의 일부 간부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이끌거라 말했다지 않던가. 그들은 그 말을 사실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연화문의 말과 기득염의 말을 믿지 않을 사람이 철혈성에 몇이나 될 것인가. 그러니 그들은 자신이 기득염과 같은 편이라 말할 것이다.
맙소사!!
고봉천이 아연한 심정에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기장로님 그만 나오시지요?"
"흥! 나는 철혈금령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말로만 들은 금령의 명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냉랭하게 대꾸한 기득염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봉천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망설임 없이 뒷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나갔다.
<미안하게 됐네. 자네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랄뿐이네.>
귓전을 울리는 기득염의 전음에 고봉천의 눈이 다시 질끈 감겼다.
'이미 늦은 것 같소이다.'
기득염이 뒷문으로 나가자 철군명이 빠르게 소리쳤다.
"뒤쪽을 막아라!"
일갈에 세 명의 황의무사가 몸을 날렸다. 가히 폭풍같은 기세였다.
결코 일개 일반무사들이라고 믿을 수 없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연화문이 놀라 소리쳤다.
"저들이 바로 이 번에 새로 왔다는 성주의 호위무사들인가?"
철군명이 연화문을 돌아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렇소! 아마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이오. 아니지... 연숙부나 단주님은 보지 못할 지도 모르겠구려."
말을 마치자 철군명의 왼손이 올라갔다. 그러자.
휘이이잉!
찬바람 마저 질려 버릴 정도로 싸늘한 기운이 장내로 날아 들었다.
휘아는 장내의 돌아가는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뭐가 뭔지 모르는 사이에 상무원이 얼어붙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미처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 때였다. 등줄기를 타고 한줄기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막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휘아야.>
사부님의 전음이 귓속을 파고 들었다.
방안을 바라보자 사부님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문득 얼마 전에 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으로 내력을 모았다.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 기운에 실었다.
'잘 되어야 할 텐데...'
사부님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을 하듯이 입을 달싹이며, 파동에 기운을 흘려 보냈다.
<사...부..니...>
어색하지만 된 것 같았다. 사부님의 눈에 이채가 서리는 것이 보인다.
<돌아보지 말아라. 그리고 이 사부가 하라는 대로 하거라.>
사부님의 눈이 웃고 있다. 아마 자신이 보낸 전음 때문인 듯했다.
<절대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라. 특히 대들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라. 우리 휘아가 나의 제자라면 결코 사부의 말을 거역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알았지!?>
'사부님...'
휘아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사부님은 오직 어린 제자만이 걱정 되는가 보다.
<예... 사부님...>
철군명은 자신의 앞에 내려선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흑암처럼 느껴지는 육 척의 흑의중년인, 굵은 눈썹에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든 것 같은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이 저릴 정도의 차가운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총령께서 도와주셔야 겠습니다."
흑의인이 철군명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하게."
철군명이 연화문과 염부경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했다.
"앞에 계신 두 분의 무공을 폐해 주십시오."
연화문의 눈이 부릅떠졌다.
"네.네 놈이 감히!"
염부경이 벌떡 일어섰다.
"아직 확실한 것도 없거늘, 무슨 죄로!?"
철군명이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흑의인이 죽 앞으로 나아간다.
"죽이면 편할 것을 번거롭게 하는군."
그러면서 염부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라! 삼초를 받아내면 용서해 주지."
광오한 흑의인의 말에 두 주먹을 움켜쥔 염부경이 신형을 날렸다.
"내가 바로 폭산장 염부경이다. 미친 놈아!!"
후우웅!!
뻗어낸 쌍장에서 강력한 기운이 휘몰아치며 흑의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러나 흑의인은 미동도 없이 자신을 쳐 오는 염부경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콰아아!!!
염부경의 쌍장에서 일어난 폭풍같은 기세가 흑의인의 석자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약하군."
무감동한 말 한마디가 흑의인의 입에서 튀어나오더니 검은 구름이 염부경을 덮어 버렸다.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러서!!"
얼굴을 일그러뜨린 연화문의 악쓰는 소리가 미처 주위사람들의 귀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쾅!!
"크으윽!!"
일성굉음과 참담한 신음이 함께 울렸다.
휘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부님! 사부님!
'엄청...나다.'
염부경의 가슴이 너덜너덜 해진 것이 보였다. 단 일수였다. 아무리 분노에 이성을 잃었다지만, 능히 일류고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염부경이 단 일수에 치명상을 입었다.
하지만 휘아가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저렇게 빠른 변화라니....'
염부경의 가공할 기세가 흑의인의 가슴에 다다랐을 때였다.
흑의인의 손이 먹구름 속에서 빠르게 휘돌며 염부경의 기세를 가닥가닥 끊어버리더니, 시커먼 뇌전의 갈고리가 염부경의 가슴을 찰나간에 헤집어 버리는 것이 보였다.
말이 일수지 족히 수십번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대체 저자가 누구이기에...?'
놀란 눈으로 흑의인을 바라볼 때였다.
연화문이 비명같은 호통과 함께 검을 빼어 들었다.
"이 놈!!!"
쏘아진 살처럼 신형을 날리는 연화문이 검과 하나가 되었다.
허공이 갈라지고 빗살이 내리쳐졌다.
흑의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제법이군."
스치듯 비치는 감탄, 하지만 그 뿐이었다.
흑의인의 신형이 흐릿하니 뒤로 물러나는 듯하더니 두 손이 좌우로 엇갈렸다.
빗살같은 검기가 교차한 흑의인의 두 손 사이를 헤집었다. 아니 헤집는 것처럼 보였다.
콰직!
무쇠조차 갈라 버릴 연화문의 검이 흑의인의 두 손 사이에 갇혀 버렸다.
대경한 연화문은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비틀어 빼내고는 신형을 뒤로 튕겼다. 그러자 뒤로 물러서는 연화문을 따라 흑의인이 따라붙는다.
먹구름같은 수영(手影)을 동반한 채.
이를 악문 연화문은 땅바닥에 닿을 듯이 몸을 눕혔다. 시커먼 먹구름도 방향을 틀어 내리 꽂힌다.
팽그르르...
일순간에 다섯 바퀴 몸을 굴린 연화문의 신형이 이장을 벗어나더니, 검을 바닥에 찍으며 벌떡 일어섰다. 순간.
"헉!"
연화문의 입에서 절망의 다급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다가 온 흑의인의 쌍수가 뇌전이 되어 가슴으로 꽂히고 있었던 것이다.
연화문도 이를 악물고 흑의인의 어깨에 검을 내리 꽂았다.
우두둑! 꽈직!
"끄으...."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에 장원이 가라앉았다.
연화문의 벌린 입에서는 비명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핏물이 배어 나오는 이사이로 그르륵거리는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연아우!!"
방에 있던 고봉천이 더 이상을 두고 보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어깨에 비스듬이 꽂힌 검을 털어낸 흑의인의 고개가 그 쪽으로 돌아갔다.
휘아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사부가 뛰어오고 있다. 흑의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차갑게 맺히는 것이 보인다.
"안돼요! 사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