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200)

"할 수 없군. 일단은 그 놈들에게 맡기는 수 밖에."

머리를 든 고봉천의 입가로 미소가 스쳐지나 갔다.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몸으로 때우지 뭐."

다음날, 느닷없이 고봉천이 휘아를 불렀다. 방이 아닌 후원의 연무장에서.

"부르셨습니까?"

"그래, 요즘 수련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훗! 

진짭니다, 라고 말을 하려다 차마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부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져 있다.

"사부님의 얼굴이 너무 굳어 있는 것 같아서 그만 제자가 농담을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니다. 사실 웃음이 나오려고 했거든. 하하하."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고봉천이 말했다.

"내 너의 수련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일까 생각해봤다. 사실 무공이라는 것이 무작정 무서를 보고 익히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거든."

가벼운 대답과 함께 한자루 철검을 건네 준다.

"철혈십팔검부터 유성십삼검까지 연속으로 펼쳐 보아라."

철검을 받아 든 휘아의 표정이 신중하게 굳어졌다. 

처음 초식의 형을 배울 때는 매일 사부 앞에서 검을 펼쳤었다. 

하지만 요 근래 한달 간은 거의 혼자 익히다시피 했었다. 아마 그동안의 성취를 시험해 보시려나 보다.

천천히 철혈십팔검의 기수식이라 할 수 있는 철혈입기부터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철혈팔상, 철혈부원.... 

철혈산동, 철혈금파...

한자루 철검에서 부는 바람이 연무장의 모래먼지를 휘말아 올린다.

전신공력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철검에서는 대기를 짓누르는 힘이 느껴진다.

철혈검의 시전이 끝나자 검세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그럼에도 흐름은 마치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휘의 신형이 일장을 뛰어오르더니 유성만리가 펼쳐진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유성추월, 유성난산분으로 변화한다.

떨어져 내리는가 싶으면 한바퀴 휘돌고, 검력을 빌어 다시 튀어 오른다.

휘돌던 모래먼지들이 휘를 따라 솟구치며 검끝으로 모인다. 

그 광경을 무심하니 지켜보는 고봉천의 속마음은 놀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휘아의 능력이 놀랍기만 하구나. 철혈검과 유성검은 엄연히 그 흐르는 변화의 맥이 틀린 데도, 마치 하나였다가 갈라진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 없다. 저러한 것은 누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후우웅.....

휘돌던 모래먼지들이 허공에서 뻗어지는 검극을 따라 사방으로 

비처럼 뿌려진다. 유성낙화우.

땅에 내려선 휘아가 철검을 쭉 앞으로 뻗었다. 떨어져 내린 모래먼지들이 쐐기처럼 뭉치며 앞으로 뻗어 나간다. 유성탄비격.

"하앗!"

휘아의 입에서 일성 기합이 터졌다. 뻗어나가던 모래먼지들이 일순간 터져 나가더니 이장 앞의 나무둥치에 박혀 들어갔다.

파바바박! 

유성탄천파.

조용히 숨을 고르며 검을 거두는 휘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직 유성십삼검을 연속으로 끝까지 펼치기에는 내력이 받쳐 주지를 않았다. 그나마 끝까지 펼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노력이 뒷받침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천히 돌아 선 휘아가 허리를 숙였다.

"사부님의 눈을 어지럽히지나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고봉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러웠다."

예? 움찔 고개를 들었다. 헌데 사부가 웃고 있다. 

"빙빙 도는걸 계속 봤더니 무척 어지러운 걸? 후후후."

세상에, 사부가 저런 농담을?

"네가 펼치는 검의 형(形)은 이제 더 이상 내가 손 봐줄 것이 없을 것 같다."

"아닙니다. 아직은..."

"물론, 수련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형이 잡혔다는 것일 뿐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너에게 도움을 줄 사람을 부르기로 했다."

"예?"

"너도 잘 아는 사람이다."

고봉천이 빙그레 웃었다.

"종자정등이 내일부터 교대로 올 것이다. 그들이 너와 비무를 해줄 것이다. 그저 익히기만 하는 무공과 비무가 무엇이 다른지 아마 또 다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실전은 더더욱 그러하지. 한마디로 죽은 무공과 살아 있는 무공의 차이라 할 수 있을까?"

휘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가 가장 취약하다고 생각하던 것, 그것이 바로 실전에서도 자신이 아는 바를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했던 부분이었다. 헌데 마침 사부가 그 부분을 짚어 왔다.

"하지만 네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은 나의 부탁대로 너에게 조금 심하다 할 정도로 몰아 부칠 것이다. 그 점을 미리 알고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야."

고봉천도 사실 처음에는 그게 걱정이 되었었다. 

특히 종자정은 결코 비무라고 해서 사정을 봐줄 놈이 아니었다. 꽁지에 불붙은 맹수, 그게 종자정이었으니까. 

그래서 많이 망설였었다. 하지만 어차피 험한 길을 걸어가야 할지 모르는 휘아였다. 그렇다면 더 강하게 키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고봉천의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은 마음이 아플지 몰라도 나중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린 제자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한다.

"성취가 있기 위해선 아픔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그것도 네 아버지들이 해준 말이냐?"

"석두아버지가 말로 가르쳐 준 것 중 제일 그럴 듯한 말이었어요. 온 몸을 두들길 때마다 말씀하셨죠."

휘아는 속으로 말했다.

'아무리 아파도 그 말이 멋있게 느껴져서 아프단 소리도 못하고 맞았어요...'

고봉천은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진짜 무식한 양반, 말 한 마디 던져놓고 애를 그렇게 패다니...'

빛과 어둠(가제)

무연관천심법을 끌어 올리며 조용히 무아의 상태를 즐기던 휘아의

눈이 슬며시 뜨였다.

"후우... 오늘은 어째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구나. 삼주천도 제대로

안 되는 것이..."

아무래도 내일부터 벌어질 비무수련에 신경이 쓰였다.

평소 같으면 자기 전에 세 번 이상의 대주천을 행할 수 있었으나 오늘은 두 번을 행하기도 전에 중도에서 멈추어야만 했다.

몸을 일으키고 창문을 열어 봤다.

어느덧 창 밖 정원의 나뭇잎들이 달빛 아래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성큼 다가 온 것이다. 

위대한 자연의 변화는 휘아에게 충격적으로 다가 왔다. 

얼마 전, 짙푸른 나뭇잎들이 불타오르듯이 붉게 변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연연아! 나뭇잎들이 죽으려나 보다. 피처럼 붉어져. 큰일났다!"

연연은 그런 나를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었다.

"오빠도 참, 가을이 되면 나뭇잎들이 단풍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

당연한 일이란다. 당연한 일....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지만 오직 자신에게만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들도, 사부도, 이런 것은 가르쳐 주시지 않았었다. 

붉은 단풍은 연연말대로 단풍이 들어서 그런 거라고 한다. 처음으로 알았다. 그런데 노란 잎들은....

"연연아! 네 말대로 단풍이 들면 빨갛게 변해야 하는데 저것은 노랗다! 저건 틀림없이 이상이 있어서 그런 거지? 사람도 아프면 얼굴이 노래지잖아?"

"쳇, 단풍은 빨간 것도 있고, 노란 것도 있고, 갈색으로 변하는 것도 있어."

"그...래?"

"그러다가 겨울이 되면 다 떨어져."

또 다시 충격적인 말이었다.

"다 떨어진다고? 잎이 다 떨어지면 가지만 남잖아? 그럼 보기 싫을 텐데, 안 떨어지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안 떨어지게 해. 그리고 내년이면 다시 새잎이 나올 텐데, 뭐 하러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오빠가 너무 게으르니까 그런 엉뚱한 생각이 나는 것 같아."

연연이 한바탕 연설을 풀어놓고 허리에 손을 척 얹는다. 

"안 되겠어! 오늘은 수련시간을 두 배로 늘릴 거야!!"

크윽! 또 꼬투리를 잡혔다.

그래서 그 날은 연연의 지도(?)를 무려 두 시진에 걸쳐서 받아야만 했다. 

훗! 한편으로는 웃음이 떠오른다.

남들은 당연한 것이 자신에게는 그저 신기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구노인이 가지를 치는 것도 다음해에 더욱 아름다운 꽃과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고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짐이 아니라 순환이라는 것이다. 

나고, 변하고, 지고, 또 나고.... 자연의 위대한 법칙이란다. 

자연의 위대한 법칙...

문득 휘아의 머리 속으로 한가지 생각이 스치듯이 떠올랐다.

손을 앞으로 뻗고 천천히 하나의 그림을 그려 봤다.

혈련삼화의 첫 번째 꽃이었다.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선들, 그러다 처음의 선과 다시 이어지고 또 반복된다. 

헌데 하나의 꽃을 그려 가던 손이 두 번째 꽃으로 이어진다. 조금 더 복잡하고 큰 꽃으로. 

처음으로 해 보는 방식이었다. 하나하나는 그려 봤어도 꽃 위에 또 다른 꽃을 연이어 덮어 피워 보는 것은.

피우고 변화시키고 또 변화시킨다. 

어떤 꽃이 그려질까. 그대로일까? 아니면 새로운 꽃이 피어날까. 

이어짐이 조금 어색하지만 그런 대로 새로운 꽃이 그려진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등줄기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맴 돈다. 어느 순간, 달아오른 기운이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왜 이러지?'

이를 악 물었다. 

지금 그 기운을 끌어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몰랐다. 잘못하면 창문이든 어디든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온 집안 식구들이 놀라서 다 튀어 나올 것이다.

내기는 억누른 채, 세 번째 그림으로 연결해 갔다.

아름답고 커다란 연꽃이 두 그림 위에 모양을 갖춰 간다.

어렵게 어렵게 그림이 완성되어 가려 할 때였다. 

휘돌던 내부의 기운이 의지를 밀어내고 손끝을 뚫고 나오려고 발버둥을 친다.

"익!"

의지와 본능의 싸움이 벌어졌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설마 내 몸 안의 기운이 제 멋대로 움직이다니.

이사이로 핏물이 흐른다. 

'제길! 이게 무슨 일이야?'

이제는 오기가 솟는다. 내 기운도 내 맘대로 못 다스린다는 것을 휘아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붉게 변한 얼굴이 단풍잎처럼 달아 오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볼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끝내 세 번째 꽃을 완성했다.

핏물이 흐르는 것도 잊고 휘아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하하!! 이겼다! 건방지게 말이야! 어디서 지 멋대로!!'

그림을 완성하고 손을 거두어 들이자 미친 말처럼 뛰놀던 기운도 수그러졌다.     

눈을 감고 천양의 법을 암송하며 독맥 속으로 숨은 기운을 찾아 갔다.     

척추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반응한다. 

씩, 한 번 웃은 다음 입가의 핏 물을 닦고 오른손의 검지를 내밀었다.

"자! 이제 나와 봐!"

독맥의 기운이 꿈틀댄다.

"나와 보라니까! 주인의 명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운 명령, 하지만 다음에 벌어지는 일은 결코 우스운 광경이 아니었다.

독맥을 급격히 타오른 기운이 양경을 타고 빠르게 흐른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에 검지 끝으로 몰려들었다.

화악!

붉은 불꽃이 검지에 맺혔다.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의 불꽃이었다.

첫 번째 꽃부터 그려 갔다. 아름다운 꽃이 허공에 붉게 매달렸다.

첫 번째 꽃 위에 두 번째 꽃이 그려진다. 

강렬해진 빛이 휘아의 눈을 부시게 할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며, 마치 꽃이 살아서 피어나는 것만 같다.

"아!!"

입에서 무의식 중에 탄성이 터졌다. 검지가 움직였다.

세 번째 꽃이 그 위를 덮어 간다.

수백개의 꽃잎이 불타오른다. 

피어나던 꽃잎들이 꿈틀댄다. 

속박에서 벗어나 환한 날개를 펼치려 한다.

그 때였다.

"크음...."

답답한 신음이 이사이로 흘러 나왔다. 핏물도 다시 흐른다. 

손이 거두어지자 허공을 수놓았던 불꽃연화가 환영만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꿈을 꾼 것만 같다. 

입가에 흐르는 피만 아니었다면 꿈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휘아의 얼굴에 만족의 웃음이 환하게 피어났다.

"역시, 자연은 위대한 것이야! 그렇게 벽에 막혀 애타게 하던 것을 한순간에 뚫어 버리다니 말이야! 하하하!!"

정원에선 그의 성취를 축하하기라도 한다는 듯 구름 사이를 뚫고 내리비친 밝은 달빛이 환하게 웃음짓고 있었다.  

                  *         *         *

교교한 달빛이 천간산자락을 내리비칠 때, 철혈대전이라 칭해진 거대한 대전에 어둠을 등지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흔들리는 황촛불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쳤다.

한 사람은 중후함이 전신에서 느껴지는 중년인, 다른 한 사람은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단아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청년의 물음에 무거운 기운을 흘리며 태사의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눈을 떴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버님께서 하신다면 어느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네 사숙이나 원로들이 말릴지 모른다.”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들일 뿐입니다.”

“그래도 상당수 사람들이 그들를 따를 것이다.”

“제가 아는 아버님은 몇 몇 이리 따위를 무서워 할 분이 아닙니다.”

“후후후.... 귀찮을 뿐이지...”

“정 귀찮다면 치워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순서란 힘있는 자가 만들지. 허허허...”

중년인이 차가운 눈빛을 흘리며 웃자 청년의 허리가 깊게 숙여졌다.

“훗날 아버님의 결단이 옳았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중년인이 물었다.

“그자들에게서 연락은?”

“이삼 일이면... 상당한 지위를 지닌 자가 올 거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가 누구든, 감히 나와 독대 할만한 자가 아니거든 받아들이지도 말거라. 알았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단아한 인상의 청년, 철군명의 확고한 대답에 중년인, 철운성의 얼굴에 차갑고도 묵직한 웃음이 한 줄 걸렸다.

‘나는 나를 무시하는 자와 손잡을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         *         *

어느덧 힘겹게 매달렸던 낙엽들도 제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떨어져 버리고,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찬바람만이 여민 옷깃 사이로 비젖은 참새새끼마냥 파고 든다.

희뿌연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십이월 초이틀, 찬바람을 북녁 저편으로 날려버리는 한 소리 맑은 기합소리가 상무원의 후원 연무장을 떨쳐 울렸다.  

지나가던 겨울 철새들이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지 고개를 내빼고 내려다 보다 깜짝놀라 푸다닥 날아가고. 

"타앗!"

휘돌던 신형이 바닥으로 깔리자 머리 위를 한자루 목검이 스치고 지나간다. 순간, 좌수로 바닥을 치고 빙글, 옆으로 돌았다. 동시에 우수에서 그려지는 검영이 상대의 가슴을 찔러 간다.

"엇!"

가벼운 놀람의 소리.

"제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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