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4화 (164/200)

문득 자책감이 들었다. 

만일 적이였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일 것이다. 물론 적이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 마음을 놓았다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적이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질 않는가.

휘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영호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호기심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궁금해서... 다른 책과는 조금 틀린 것 같기도 하고."

"흠!"

영호련은 슬쩍 휘아의 손에 들린 책자를 응시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 같으면 그런 것 볼 시간에 다른 책 한 권이라도 더 보겠네."

"그런가?"

'사람마다 틀리니까. 하긴 어쩌면 내가 헛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휘아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대도 다른 사람하는 일 간섭할 시간에 다른 책 한권이라도 더 보시지."

"훗!"

가볍게 웃는 영호련의 하얀 치아가 살짝 보인다. 휘아 역시 빙그레 웃더니 다시 고개를 책 속에 파 묻었다. 그러자 영호련이 한마디를 남기고 뒤 돌아섰다.

"언제고 그 면사 속의 얼굴을 보고 싶군."

휘아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그녀는 뒤돌아 걸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들었던 그 어떤 여인의 특징과도 틀린 영호련의 행동과 말에, 문득 그녀가 어떤 여인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잠시 뿐이었다.

휘아는 책자의 선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는 선의 나열 뿐이다. 그나마도 한쪽으로만 그어진 선.

책을 덮고 아쉬움 속에 책을 제자리에 내려 놓으려다 문득 탁자를 바라보았다. 

가득한 먼지가 책모양 비슷하게 이지러진 채 자국을 남기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먼지는 더욱 쌓여 갈 것이다. 자신처럼 어떤 내용이든 책과 인연이 닿은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후우... 인연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

책을 본래의 자리에 내려 놓았다. 

탁!

헌데 아쉬운 마음에 미처 먼지를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세게 내려 놓았나 보다. 

먼지가 확! 피어 오른다. 

휘아의 눈이 찌푸려지고, 피어오른 먼지를 피하려고 고개를 돌릴 때였다.

먼지가 횃불에 반사돼 마치 비산하는 유성처럼 빛난다. 

순간적인 현상이었다. 

먼지는 피어오르다 말고 다시 내려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휘아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휘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다시 책자를 바라 본 것은, 책자를 내려 놓은 지 근 일각 이상이 지났을 때였고, 떨리려는 손을 진정시키고 책자를 다시 집어 든 것은, 그러고도 다시 일각이 지난 다음이었다.

휘아는 눈을 반개한 채 천천히 책자의 첫 장을 넘겼다.

헌데 괴이하다. 책자를 거꾸로 들고 있다.

아래로 내려그은 선이 보인다. 아니 올려 친 선이... 

하지만 휘아의 눈에 보인 것은 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먼지였다. 먼지가 피어 오르던 그 동선이었다. 수천 수만개의 무게도 없을 것 같은 먼지들의 흐름.... 

책자를 다시 원래 대로 돌리고 보았다.

내려그은 선, 떨어져 내리는 먼지들의 동선... 

한줄기가 아닌 수백줄기의 선, 지금까지는 이것이 수백 번, 하나씩 내려그은 거라 생각했었다. 

허나... 그것이 착각이었다. 당연한 착각, 누구라도 할 수있는 착각 말이다.

선은... 찰나간에 그어졌다. 단 한 번에 그어진 것처럼. 

세상에... 찰나간에 수백줄기의 선을 내려 긋다니... 아마 누구에게든 그 말을 한다면 미친 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당연히...

[미친 자가 아니면 보지를 말아라.]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전율이 마치 혈련삼화의 진정한 무서움을 알았을 때와도 같다. 

희한한 일이다. 분명 이것과 그것은 정반대라 할 정도로 가는 길이 틀린 데도 전율만은 똑같이 느껴진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더니... 그런 것인가?

한 장을 더 넘겨 보았다.

보인다. 하나를 보니 둘도 보인다. 아직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옆으로 그은 선들, 이것 역시 찰나간에 그어졌다. 다만 첫 번째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좌우로 그어졌다는 것만이 틀리다. 단순하면서도 확실히 틀리다. 그 결과는 똑같이 그을 수 있을 때 알게 될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 장을 넘겼다.

빛이 폭발한다. 가운데 점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비산(飛散)한다. 

'인간이 과연 이정도의 빠르기로 힘을 비산 시킬 수 있을까?'

당연한 의구심이 휘아의 마음을 지배했다. 허나... 지금 자신이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네 번째 장을 보려던 휘아는 멈칫 손을 멈추었다.

혈련삼화는 세 송이의 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세 개의 선을 보았다.

혈련삼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變)과 환(幻)의 극의였다.

세 장의 그림에 있는 것은 단순한 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쾌(快)의 극의였다.

완전 상반된 길을 가고 있다. 헌데 마지막 장의 점은 무엇을 표현하고자 그린 것일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장을 넘겨 보았다.

하나의 점이 보인다. 그냥 찍은 점이 아닌 둥글게 그어 만든 점이.

수백줄기의 선이 둥글게 말려 하나의 점이 되었다. 휘아는 집중해서 점을 바라 보았다. 순간.

휘아는 책자에 그려진 점이 면사를 뚫고 자신의 눈을 파괴해 버릴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조금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아마 세 개의 선을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점을 느끼게 된 것 같았다.

"크읍!"

답답한 신음이 입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황급히 눈을 감고 가만히 무연관천심공을 끌어 올렸다. 헌데도 눈 앞의 점이 사라지질 않는다. 이를 지그시 깨문 휘아는 신주령을 암송하며 천양의 법을 끌어 올렸다.

단전에선 무연관천심공의 기운이 내부를 다스리고, 독맥에선 척추를 따라 천양의 기운이 위로 치고 올라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천양의 기운이 풍부, 백회, 인당을 거친 다음 눈 주위를 휘감았다.  

그제야 눈 앞의 점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흐아.... 큰일날 뻔 했구나."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하마터면 자신의 눈이 멀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휘아는 무의식 중에 중얼거렸다.

"중(重).... 인가? 집(集)?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던 휘아에게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어떻게 익히라는 거지?"

그랬다. 그 어디에도 구결이 없다. 무공에 대한 설명은 더더군다나 없다. 

어떻게 익히지? 

하는 수없이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보았다. 

혈련삼화를 생각해 보았다. 꽃이 그려진 선의 흐름을... 

그러자 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찰나간에 내리 그었으되 각 선마다 순서가 있다. 먹물이 겹쳐진 순서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장을 보았다.

역시 먹물이 겹친 순서가 있다.

세 번째도... 비산하는 순서가 있다.

문제는 순서를 찾는다는 것이 백사장에서 바늘찾기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순서를 안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네 번째의 점은... 

'후...순서 마저도 알 수가 없다.'

현재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휘아는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기로 했다.

이 책자에 숨겨진 진실은 누구도 쉽게 찾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역시 서로 극을 달리는 혈련삼화가 아니었다면, 광량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먼지가 비산하는 광경을 봤다 하더라도 도저히 찾지 못했을 것이다. 

찾기는커녕, 세상에는 별 미친 자가 다 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 책자를 보았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아쉽기는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기로 하고 책을 놓았다. 더 이상 보았다가는 심력이 고갈 될 것만 같았다.

책을 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가의 끝에서 영호련이 뭔 가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은 것 같다.

천천히 걸어서 다른 것들을 둘러보았다.

한 번씩은 스쳐 본 것들이 대부분이다. 

'대사백께서 전체를 보라는 말씀을 남겼다고 하셨는데...' 

아직은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사부님께서 삼 개월에 걸쳐 찾고도 못 찾았다는 것을 이틀만에 찾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휘아는 급한 마음을 버리기로 했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자신은 당분간 철혈무각에서 하루의 반을 보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급할 것이 없는 것이다. 

급하게 서둘러서는 볼 것도 못 보고 지나갈 뿐이니까.

점심을 먹고 이것 저것을 들춰 보고 있을 때 영호련이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찡긋 웃고 나가는 것이 무언가를 찾았다는 말처럼 느껴진다.

영호련이 나간 뒤 잠시 다른 책들과 편들을 살펴보던 휘아는 다시 괴책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다시 한시진 정도를 미동도 없이 바라보다 책자를 내려 놓았다.  

"이정도가 한계인 것 같구나."

더 이상 보면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했다. 

"첫 번째 장의 순서를 외우는데도 내일까지는 외워야 할 것 같구나."

혈련삼화와는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혈련삼화가 그림은 쉽게 외우고도 그 변화의 축을 익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면, 이것은 뻗은 선의 순서를 익히는 것부터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기의 운용에 대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극의가 상반된 무공, 호적수였던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알려지지 않은 무공은, 휘아의 호기심에 불꽃을 심어 주고 있었다.  

"그래. 볼만한 무서(武書)가 있더냐?"

사부께서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물으신다. 휘아 역시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볼만한 무서야 많지요." 

"호! 그래? 허허허! 이제 휘아가 말도 많이 늘었구나."

잔잔한 웃음에 진심이 흠뻑 묻어 있었다. 휘아는 사부의 그 모습이 좋았다. 

하지만 괴책자의 비밀을 완전히 밝히기 전에는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중에 놀라게 해 주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사부가 다시 물어 온다.

"내 듣기로 철혈관을 통과한 기재들이 철혈무각에 들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만."

"두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둘 다 대단해 보였습니다."

사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정말이냐?"

"예. 지금 봐서는 그렇습니다."

"그럼 나중이라면?"

"휘아는 사부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가 않습니다."

"하하하!!!"

끝내 호탕한 대소가 상무원에 울려 퍼졌다. 

고봉천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하나 얻은 제자가 총명한 것도 기분이 좋을 일이지만 순수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태도가 더욱 고봉천의 기분을 좋게 해주고 있었다.

"유성십삼검의 수련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사분데 사부의 무공쯤은 완벽히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틈나는 대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 않을 수도 없구요."

"응?"

"연연이 가만 놔두지를 않거든요."

"푸하하하!!"

다음날 연연이 아침 일찍부터 휘아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음... 오빠. 어제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아버지가 그렇게 웃는 걸 처음 봤거든."

"어. 연연이가 훌륭한 사부여서 오빠의 무공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지."

"정말?"

"그럼!!"

결코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그 얘기 말고도 다른 이야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연연이 밝은 얼굴이 되어 기뻐하고 있다. 오늘따라 예쁜 얼굴이 더욱 예쁘게만 보이는 연연이었다. 

'휴! 오늘은 이걸로 무사히...'

휘아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 내릴 때였다. 강한 의지가 담긴 연연의 한마디가 휘아의 가슴에 화살을 꽂아 버렸다.

"그럼, 내일부터 더 열심히 시켜야지!! 오빠도 좋지??"

       

    *            *             *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철혈무각을 들어가자 종자정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휘를 바라보았다.

"어째 진공자의 어깨가 늘어진 것 같구먼."

성이 진조여라 했더니 귀찮다며 진공자라고 한다. 쩝 남의 성을 바꾸다니...

"예,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터벅 터벅 안으로 들어가 일단 괴책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 갔다. 

헌데 그 때였다. 

한 사람이 휘아의 앞을 가로 막았다. 

스무살은 넘어 보이는 청의의 청년이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그의 키가 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자신이 비록 큰 키는 아니었지만, 마주서자 가슴팍에 얼굴이 닿을 정도의 차이였다. 

"무슨 일입니까?"

휘아가 물었다. 그러자 장신의 청년이 냉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가 상무원 고사숙님의 제자인 휘아라는 아이냐?"

아이?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무각 안에서 다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제이름이 휘인 것은 맞습니다만 그러는 분은 누구신지?"

"나는 네 사부의 사형 되시는 분의 제자 되는 사람이다. 사부께 너에 대해서 들었다."

복잡한 것 같아도 별다른 뜻은 없는 말이다. 그냥 '너와 사형제다' 하면 될 것을 뭐이리 복잡하게 말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저와 사형제간이다, 이 말인가요?"

"그렇지! 간단히 말하면."

"알았습니다.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

기분이 나쁜지, 장신의 청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비켜 주지를 않는다.

"고사숙이 사형에게 그리 대하라 하던가?"

"아닙니다."

"그럼 예의를 차려야 하지 않겠느냐?"

"사부께선 모르는 자에겐 함부로 숙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뭐라고?"

청년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해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 죽을 휘아도 아니었다.

"앞에 계신 분께서는 저의 사부님을 뵌 적이 있으십니까?"

"그건... 말씀은 많이 들었다."

유폐되어 있다 해서 찾아 오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러면서 뭐? 예의?

"저는 저에게 사형이 있다는 말도 못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만 비켜 주시지요."

"건방진!!"

휘아의 고개가 발딱 치켜 세워졌다.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한 후에 예의를 차려도 늦지 않다 생각합니다만."

두 사람의 눈빛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러나 휘아의 얼굴은 면사에 가려져 있었다. 청년은 면사로 인해 휘아의 얼굴을 볼 수없자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이런 곳에서 면사를 쓰다니 웃기는 놈이군."

"사백께서 보시고도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셨거늘, 그 분의 제자라는 분이 왜 뭐라 하는지 모르겠군요."

단 한마디도 지지 않는 휘였다. 

청년의 일그러진 얼굴이 분노에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는 이 곳에서 더 이상의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철혈무각의 규칙 중 하나, -철혈무각 내에서는 절대 무공을 써서는 안 된다.- 라는 규칙 때문이었다.

낡은 무서가 많은 이 곳에서 무공을 썼다가는, 자칫 무서가 손상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기에 생긴 절대규칙이었다.

휘아는 청년을 보며 더 이상의 자극은 자신에게도 유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자신의 힘이 약한 것만은 분명하니까.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릴 기회가 생기면 그 때 인사를 드리지요. 그럼."

옆으로 비켜가는 휘를 보면서도 장신의 청년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화는 나는데 손을 쓸 명분이 없다. 더구나 철혈무각의 절대규칙까지 어기면서 손을 쓴다는 것은 더욱 더 그러했다.

새파란 눈빛을 휘아의 등뒤에 꽂은 장신의 청년이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사공민이라 한다. 언제고 만날 기회가 오겠지. 그 때 보자."

화난표정으로 무각을 나가는 사공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휘아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언제고 마주칠 날이 있겠지. 하지만 그 때가 되어도 네 맘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가라앉은 마음 그대로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또 다시 끝없는 선(線)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어느덧 철혈무각을 들락거린 지도 열흘이 되어갔다.

휘아는 오직 괴책자의 선에 대해서만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열흘이 되던 날 오후가 되어서야 끝끝내 책자에 그어진 선들의 순서를 머리 속에 집어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집념의 결실이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시작은 한 것이다. 

그 동안 일차로 철혈관을 나왔다는 기재, 팔인을 철혈무각에서 모두 만나 보았다.

개 중에는 영호련이나 웅경처럼 마음에 드는 자들도 있었고, 사공민처럼 잘난 척하는, 보기 싫은 자들도 있었다.

그 중 두 사람은 성주의 제자였다. 하나의 이름은 유자강이라 했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라는 것이다.

'사형? 글쎄, 불러 달라면 불러주지. 내가 이 곳에 있는 동안에는...'

철혈무각에서 돌아온 휘아가 사부님을 찾아간 것은 저녁식사가 끝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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