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200)

기나긴 이야기였다. 흥망성쇠가 뭉뚱그려진 이야기였다.

무림을 뜨겁게 달궜던 젊은 영웅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스러져간 철혈의 도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때부터 철혈성은 말 그대로 종이고양이가 되어 버렸다. 대사형이 사라지고 나서부터지..."

마치 모래속으로 스며드는 빗물처럼 고봉천의 말이 가라 앉았다.

뜻밖의 이야기였다. 언뜻 듣기는 했었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이백 명도 되지 않는 무사들, 그나마 일류라 할 수있는 고수들은 삼십 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그 정도로도 중소문파에서는 제법 강한 문파라 할 수 있지만, 예전의 성세에 비하면 이할도 채 되지 않는 전력이었다.   

거대한 전각군이 수리 보수할 돈이 없어 방치되고 있는 판국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무저동의 철광석조차 적지 않은 도움이 되어 무저동을 폐쇄시키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화산과 종남의 선언이 있었기에, 봉문한 본성을 욕심내던 자들이 겉으로나마 칼을 들이대지 않는 게지."

한탄스런 음성이 방안을 휘돌다 내려앉는다.

"최근에 성주이신 이사형께서 제자들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성주의 심중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짐작은 간다만.... 그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 게다가 철혈관을 다시 열었다는 말도 들었다. 철혈무각을 개방했다는 말도 들리고..."

철혈관은 무인의 몸을 만들기 위한 관문이었다. 

근력, 지구력, 정신력을 기르는 세 개의 관문으로 된 철혈관은 험한 만큼 통과하기만 하면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의 몸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문제는 그만큼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열 명이 들어가면 세 명정도가 통과할 정도였다. 십년 전에는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 통과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들어가는 사람이 적어지자 나오는 사람도 적어졌다.

그러다 보니 철혈관의 유지비만도 벅차 할 지경이 되었다. 결국은 오 년 전에 관문을 폐쇄해 버렸다.     

그런 철혈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고육지책이었으니...

먹고살기 위해 철혈관을 타 문파의 제자들도 이용할 수 있게 개방을 한 것이다. 그 대가로 적지 않은 돈을 받고. 

고봉천은 통탄할 마음이었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철혈성의 사람들도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 어찌할 건가. 

성주의 마음도 결코 편치 만은 않았으리라. 

고봉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 간다.

"철혈관은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허나...."

어느 순간 말을 이어가던 고봉천의 눈빛이 굳어진 채 휘아를 똑바로 직시했다.

"허나... 철혈무각은 네가 꼭 들어가 봐야 할 곳이다. 나는 성주께 제자를 들였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되면 네게도 철혈무각에 들어갈 수있는 자격이 주어질 것이다."

철혈무각은 철혈성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상징적인 곳이었다.

이백 수십 년에 걸쳐 얻은 무공이 모여 있는 곳, 하지만 절정의 무공은 없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비록 철혈무각에 들어가는 것이 성주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있는 곳이라지만, 십인대주 이상만 되면 한 번 쯤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곳이었으니, 그런 곳에 절정의 무공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극소수는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고봉천이었다.

"우리 사형제들만 아는 이야기다만, 대사형께선 그 곳에서 힘을 얻었다. 그렇다면 그 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다. 찾지 못해서 그렇지."

사부의 대사형, 무적철검 철운양. 

좀 전에 들었을 때 가슴을 뛰게 했던 이름이다. 

위대한 무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사람. 자신에게는 사백이 되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 곳에서 무엇을 찾고 못 찾고는 너에게 달려 있다. 이사형은 그 곳에서 무언가를 찾기위해 삼년을 허비했다. 그러다 거의 미칠 정도가 되어서 포기해 버렸다."

휘아가 놀란 표정으로 고봉천을 올려다보았다.

"삼년이나 찾고도 못 찾았어요?"

"그렇다. 후우.... 원래 순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면 그 때부터 편협한 성격이 된지도...."

고봉천의 눈가에 아련한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다만... 대사형이 지나가는 말처럼 남긴 말이 있다. -드러난 것을 보면 볼 수없고 무념으로 보면 볼 수있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드러난.... 무념으로..."

독백하듯이 중얼거리는 휘아를 바라보던 고봉천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자신도 그 말을 듣고 철혈무각에서 석 달을 보냈었다. 비록 자그마한 것을 얻기는 했지만, 끝내 사형이 얻었을 법한 절정의 무공은 찾지 못했었다. 그래도...

'혹시 아나? 휘아가 찾을 지...'

철혈성에 대한 이야기로 하루를 다 보냈다. 휘아도 이제는 철혈성에 대해 조금은 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기본적인 무공을 배우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휘아가 들어오자 고봉천은 우선 휘아의 몸상태를 점검해 보기로 했다.

겉으로 봐서는 약한 몸 같으면서도 일전에 나무를 내려 올 때 보여 줬던 모습이나, 내부에 간직한 제법 많은 내력을 봐서 그리 우려할 정도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비록 오랫동안 유폐되어 있었고, 무공을 수련한지도 오래 되었다 하지만, 그정도는 보고, 생각할 수 있을 능력은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정확한 신체의 상태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야 현재의 신체에 맞는 무공을 전해 줄 수있을 테니까.

일단 손 끝에서부터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헌데 미처 팔을 살펴 보기도 전에 고봉천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져 버렸다.

'굉장한...'

상아 빛 근육이 마치 탄력 좋은 무소의 뿔을 여럿 겹쳐 놓은 것 같다. 한점 불필요한 근육이 보이지 않는다. 누르면 튕겨 나오는 근육은 그 어떤 것보다도 부드럽다.

고봉천은 여태껏 이런 근육에 대해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근육이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대체... 이런 근육이라니..."

휘아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석두아버지가 가르쳐 줬어요. 몸이 튼튼해야 뭐든지 할 수 있다면서..."

휘아의 말을 들을 수록 고봉천은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석두아버지가 가끔씩, 아니 자주, .....매일, 두들겨 팼다는 말에 벌컥 성을 냈다.

"아니! 그 양반이 애를 잡으려 작정했나? 도대체 어린애한테 무슨 짓을 ....험 험..."

소리치다 무안한지 헛기침을 하는 사부의 모습에 휘아는 빼빼아버지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아예 애를 잡아라! 잡아! 무식한 놈!!-

그 분도 사부처럼 소리쳤었다.

"어쨌든.... 더 이상 단련에 대해선 걱정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어깨를 거쳐 다리까지 살펴 본 사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 난다. 

"됐다. 철혈관을 거치지 않는 것을 조금은 걱정 했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구나. 정말 대단한 아버지를 두었었구나. 휘아는..."

"예...."

다음에는 내력을 살펴 보았다. 헌데 명문을 통해 휘아의 몸에 내력을 밀어 넣던 고봉천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손을 뗀 고봉천이 휘아를 보며 물었다.

"이상하구나. 분명 너에게서 느껴진 것은 족히 이십년은 수련한 것 같은 내력이었는데 어째 단전에 고인 것은 극히 미미한 내력뿐이니...."

"저도 잘은 몰라요. 단지 힘을 끌어 올리면 몸 전체에서 힘이 몰려들다가 어느 순간 위아래로 갈려요. 그리고 힘을 풀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려요."

문득 고봉천은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아래도 아니고 위아래라고 했다. 게다가 사방에서 몰려들었다가 다시 온 몸으로 퍼져 나간다고도 한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휘아가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테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네가 익힌 삼령문의 법이라는 것에 그런 효능이 있는 것 같구나. 좀더 두고 봐야겠다만 탁한 기운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 뭐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생각하고 배우면 될 테니까."

"예, 사부님."

부드럽던 고봉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한마디 한마디 조용히 흘러나오는 말에도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일단 내공심법부터 시작해야겠다. 이 사부가 가르쳐 줄 심법은 무연관천심법이라는 것이다. 본래 이름은 철혈관천이라 불리는 강((强)을 주요시 하는 것이었다만, 인연이 닿아 얻은 무연심공을 참오하면서 부드러움(柔)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에서도 철혈이라는 말을 뺀 것이다."

휘아의 눈도 한없는 무저의 늪처럼 가라앉았다. 내려 앉는 것은 무엇이든 빨아들일 것처럼.

"사부는 익히기는 했지만 대성하지는 못했다. 무연심공을 너무 늦게 익혔기 때문이다. 허나, 너라면 능히 대성 할 수있을 거라 생각한다. ...휘아야. 부단한 노력만이 모든 완성의 첩경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             *           *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지 열흘이 흘렀다.

아직 기본적인 것을 배울 뿐이지만, 휘아는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여 익혀 나갔다. 그중 하나가 철혈십팔검이었다.

철혈십팔검은 철혈성의 무사라면 누구나 배우는 검식이었다. 

사부께선 철혈십팔검에 각종 무기의 특성이 모두 들어있다며 검을 주무기로 삼든, 그렇지 않든, 절대 소홀히 하지 말라 하셨다. 

새벽에 일어나 운기행공을 하고 나면 제일 먼저 철혈십팔검을 펼쳐 본다. 한시진에 걸쳐 모든 정신을 집중해 반복하다보면 등에 땀이 배일 정도이다. 

그러는 사이, 해가 둥실 소령산 너머로 얼굴을 내민다.

하루에도 몇번씩 반복되는 수련이었지만, 휘아는 절대 급하게 마음 먹지 않기로 했다. 

이미 무저동에서부터 반복된 수련이 몸에 배었기에 그리 지루한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더구나 철혈십팔검은 빼빼아버지에게 배웠던 무공에 비하면 훨씬 고급무공이 아닌가. 

까짓거 삼재검이나 팔괘권 가지고도 몇 년을 익혔거늘... 

"후우... 이제 형(形)은 그럭저럭 잡혀 가는 것 같구나."

뭉툭한 철검을 갈무리하며 이마에 배인 땀을 닦고 돌아 설 때였다.

아침 식사를 하자며 연연이 찾아왔다. 

무공을 배우면서부터는 사부님의 가족과 식사를 같이한다. 

모두가 휘아를 반겨 주었다. 특히 사모님이신 정청화가 더 좋아 했다. 아들이 하나 생긴 것 같다나.

잠시 머뭇거리자 연연이 빽 소리친다.

"오빠 뭐해? 식사하러 안가?"

"어? 어, 그래. 가자!"

며칠 전이었다. 

복면을 벗은 모습을 보고 싶다고 어찌나 졸라 대는지 한 번 보여 줬었다.

"우와! 오빠 되게 이쁘다!"

기왕 같은 말이면 멋지다고 해야지 이쁘다가 뭐야? 

좌우간 그 때부터였던 거 같다. 아침마다 데리러 오는 것이.

어제도 보여 달라는 것을 장난하느라 얼굴 닳는다고 안보여 줬다. 그랬더니 삐쳤나 보다. 말투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다.

쫄랑거리는 연연과 같이 정원을 가로질러 갈 때였다. 

정원에서 나무를 손질하는 구노인이 보였다. 자주 보는 모습이었다. 이상할 것도 없는 모습이었다.

헌데 오늘따라 자꾸 시선을 잡아 끈다. 휘아가 구노인에게 정신을 집중하자 연연이 토라진 목소리로 휘아를 불렀다.

"오빠! 연연이 말 안 들을 거야?"

헛! 안 듣는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하루종일 연연의 수다에 시달리는 것을 감내할 거라면 몰라도.

"그럴 리가? 이렇게 이쁜 연아의 말을 어찌 오빠가 외면한단 말이냐?"

"피이...."

그래도 이쁘다는 말에는 기분이 좋은지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

'휴.... 나도 많이 늘었군. 풋!'

웃음을 흘리던 휘아의 눈이 다시 구노인에게로 향했다. 연연은 기분이 좋은지 더 이상은 따지지를 않는다.

구노인의 손이 가지하나를 친다. 잘린 나뭇가지가 떨어진다.

또 다른 가지를 친다. 또 떨어진다.

휘아의 눈이 못이 박힌 듯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쳐다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가지를 바라본다.

'분명 잠깐 멈췄다. 칼은 지나갔건만 나뭇가지는 잠깐 붙어 있었다.'

흔히 빠르게 가지를 치면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무게 때문에 바로 떨어진다. 붙어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구노인이 친 가지는 그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천천히 자르는데도.

구노인이 힐끔 휘아를 바라보았다. 의미 모를 미소가 구노인의 입가에 매달린 것처럼 보인다. 

구노인이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구... 이 녀석들이 떨어지기 싫은가 보구나."

모든 것이 그야말로 잠깐 숨 한두 번 내쉴 정도의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연연하고 세 걸음 정도가 벌어진 짧은 시간이었다.

"빨리 와! 오빠! 뭐해?"

"아.알았다."

그 날부터 한 달이 흘렀다. 

가끔씩 구노인의 가지치는 모습이 떠올랐지만 휘아는 억지로 잊기로 했다. 아니 잠시 깊은 곳에 담아 놓기로 했다. 아직 자신이 깨닫기에는  스스로가 모자란 감을 많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도 내 말을 듣고 빙그레 웃기만 하셨었다. 다만.

"구노인은 내가 어렸을 때도 이 곳에 계셨던 분이시다. 그분의 진실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혹 돌아가신 사부님이라면 아실까? 아무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분인데, 휘아가 마음에 드셨나 보구나. 하지만 우선은 기본을 충실히 하는데 전념하거라. 인연이 있으면 뭔가 배울 수 있겠지."

그렇게 한 말씀만 하셨었다.

하루하루가 흐를 수록 내력을 도인하는 것이 자유로워졌다.

단전에도 내력이 고이기 시작했다. 온몸에 퍼져 있던 내력이 무연관천심법의 운용결에 따라 단전으로 모이고 있는 것이다. 사부께서 짐작했던 이십년의 공력이었다. 

하지만 휘아는 또 다른 기운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기운은 무연관천심법의 운용결에는 움직이지 않던 기운이었다. 오직 삼령문의 법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운이었다. 

휘아는 망설이다가 사부님께 여쭈어 보기로 했다. 잘못된 내력의 운용은 자칫 큰 화를 불러 온다 들었던 것이다. 

휘아의 말을 들은 고봉천은 속으로 크게 놀랐지만 전처럼 표를 내지는 않았다. 그간 휘아 때문에 놀란 경우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면역이 된 것이다.  

"흠. 그래?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두 가지를 다 익힌다 해도 그리 무리가 가지 않을 성 싶구나. 어차피 따로 노는 기운이라면 말이다."

"예. 사부님."

"그리고 그 혈련삼환가 뭔가, 그것은 소득이 좀 있느냐?"

"그저 겉만 핥고 있는걸요."

휘아는 사부에게 뭐든지 감추지 않겠다고 작심한 때부터 모든 것을 사부께 다 말했었다. 오보천환도, 혈련삼화도.

일전에 걷는 법을 배웠다는 휘아의 말에 사부는 빙그레 웃으며 한 번 해 보라고 했다가 기겁하며 놀랐었다.

"맙소사! 오보천살의 오보천환!!"

그리고 휘아에게 다짐을 하게 했었다.

"절대 남에게 함부로 보이지 말거라. 네가 힘을 얻을 때까지는."

오보천살 이진생은 은원이 복잡한 사람이라는 말도 그제야 들을 수 있었다. 아직도 오보천살과 은원이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광량에 대해서는 사부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했다. 다만, 매우 심오한 무공 같으니 꾸준히 익혀 보라는 말만 했다. 아직 일천한 깨달음만을 얻은 휘아의 시전에 고봉천도 혈련삼화의 무서움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덧 무저동을 나온 지 석 달이 흘렀다. 

휘아의 나이도 열 일곱이 되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들이 나름대로 신경써서 생일을 챙겨 줬었다.

"며칠 틀린 게 문제냐? 그래도 생일은 있어야지!"

휘아의 생각대로라면 오늘이나 내일쯤이 아버지들이 만들어 준 생일일 것이다.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작정했으니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들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휘아는 무저동이 보이는 숲을 찾아갔다.

'쳇! 그거 조금을 기다리지 못하고...'

오늘도 숲을 찾아 왔다. 하지만 무저동을 보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숲 사이로 보이는 무저동은 이제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죄수가 없으니 지킬 사람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무저동은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어찌 보면 휘아에게는 잘된 일이기도 했다.

잠시 무저동 쪽을 바라보다 설래 설래 고개를 저은 휘아는 고목나무 위로 신형을 날렸다.

이제 이장 정도는 가뿐히 뛰어 오를 수 있었다. 사부께 배운 비월신영으로. 

다시 두 번을 더 도약하자 전에 자신이 사부를 만났던 곳, 움푹 파인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즘은 이 곳을 자주 찾는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태양과 좀더 친해지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천양의 법을 익히기 위해선 이 곳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끔씩 무저동에 가까이 다가가 볼 수도 있었으니....

아래서는 보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휘아는 좀더 주위를 살펴 본 후 옷을 벗었다. 면사도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아빛 나신이 드러났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 쏘는 햇빛이 휘아의 나신을 두들겨 댔다. 

두 눈을 감은 휘아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붉은 열기가 피어 오른다. 아지랑이는 허공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다가 서서히 휘아의 전신모공으로 빨려 들듯이 사라져 간다. 두 번, 세 번 반복될수록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뚜렷한 형상을 갖췄다.

몸도 붉게 달아 올랐다가 다시 본래의 색깔을 찾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 반시진은 족히 지났을 때였다. 

휘아는 두 눈을 뜨더니 긴, 너무 길어서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긴 숨을 내 쉬었다. 

한 달 열흘이 되었다. 태양과 친해보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그리고 찾은 방법이 태양에 몸을 맡겨 보자는 것이었다.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으니 나뭇잎이 햇빛을 반쯤 가린 숲을 찾았고, 숲을 들어와 보니 아무도 볼 수없는 이 곳이 생각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몸이 타는 줄 알았다. 이를 악물고 천양의 법을 암송하며 기운을 이끌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마침내 머리에 머무르던 기운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전신을 태울 듯하던 기운들이 천양의 법을 따라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수한 양의 기운이었다. 

시일이 지나자 천양의 기운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길을 따라 자리잡기 시작했다. 바로 양기의 바다, 독맥의 혈, 척추의 선을 따라 곳곳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태양과도 친해지고 천양의 기운도 커지고.

그리고 약하긴 하지만 또 하나의 기운이 점점 모양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단전에 자리 잡았던 차가운 기운, 일명 영양제의 기운이 천양의 기운을 식히기 위해 본신의 기운과 합쳐지면서 음맥에 깨알만한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휘아는 몸을 돌아보았다.

상아빛 피부에 이제는 조금이나마 황동빛이 돈다. 햇빛을 보는 것도 그리 무리가 가지 않았다. 이제는 면사를 벗어도 될 성 싶었지만 사부님의 말도 있고 해서 당분간은 그대로 쓰기로 했다.

헌데 천천히 옷을 걸치는 휘아의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요즘 사부님께서 뭔가 심각하니 고민하시는 것 같던데...."

십여일 전부터 사부님의 안색이 굳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인지는 모른다. 다만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휘아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옷을 다 입은 휘아는 면사를 걸치고 거목 위에서 뛰어 내렸다.

한줄기 바람에 실리듯 자연스런 그의 몸놀림은, 지나가던 새조차 감탄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오죽하면 고봉천이 기본신법을 건너 뛰어 곧바로 비월신영을 가르쳐 줬을까 싶을 정도였다. 

땅을 밟기가 무섭게 다시 뛰어오른 휘아가 장원의 담을 넘어 사부의 방으로 갈 때였다.

저 만치 누군가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백의를 입은 중년인, 결코 일반무사에게서는 볼 수없는 중후한 기품이 풍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지?' 

처음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석 달간 이 곳을 찾은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 상무원을 찾아 온 것은 그의 관심을 끌고도 남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언뜻 봐서도 대단한 기운이 풍기는 자라면 더욱 더 그러했다. 

가만히 서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 상대 역시 의외라는 눈으로 휘아를 바라본다.

그자와 삼장 거리로 가까워지자 휘아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뉘신지요? 이 곳은 함부로 들어 올 수없는 곳입니다만...."

"누구냐라..."

중년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재미있는 것이라도 발견한양 눈매를 씰룩거렸다.    

"그러는 너는 누구지?"

"저는...."

일시지간 할 말을 찾지 못한 휘아가 머뭇거리자 중년인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투로 몰아 부쳤다.

"너는 누군데 내 집에 와서 주인더러 누구냐고 묻는 거지? 더구나 얼굴까지 가리고 말이야."

내 집? 주인?

"저는 이 곳에 살고 있습니다만 대체 어른께선 뉘시기에 그리 말씀을...."

휘아가 면사 안에서 얼굴을 굳히고 대답할 때였다. 한소리 나직한 음성이 뒤쪽에서 들려 왔다.

"휘아야. 물러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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