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200)

그리고 그 것은 또 하나의 운명이었다.

'이상하다?' 

십여장을 기다시피하며 전진하던 휘아의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휘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철혈성과 지금의 철혈성과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버지들이 잘못 알았을 수도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상하다.

팔패의 하나라는 대철혈성이었다.

당금 강호에서 가장 강하다는 여덟개 세력 중 한 곳인 것이다. 아버지들의 말에 의하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곳이 바로 철혈성이었다. 

헌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올씨다 다.

무저뇌옥을 지키는 사람만 해도 열 명은 된다고 했었다. 그리고 정기적인 순찰무사들이 있으니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가 본 사람은 처음의 두 사람이 전부였다. 그들마저도 자신들의 할 일을 하자마자 도망치듯 떠나 버렸다.    

순찰무사는 아예 보지도 못했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비가 와서 그런가? 비가 오면 사람들이 게을러진다고 하던데....'

휘아로서는 도무지 알 수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조심에 조심을 해야 한다.

스슥, 스스슥. 이십 여장을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숲이 끝나 가고 있었다. 저 앞쪽이 밝게 보이는 것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이 끝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숲이 끝나고 길게 둘러진 담장이 보였다. 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대철혈성의 인원이 천명도 넘는다 했었다. 무저뇌옥은 그렇다 해도 그렇다면 다른 곳이라도 사람이 보여야 했다. 아무리 비가 온다고 해도 지나치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니...  휘아로서는 머리가 빠개지도록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우선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우측에 커다란 고목이 한 그루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중간에 얽어진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비를 피할 정도는 될 듯했다. 

다시 갈고리를 써서 나무위로 올라갔다. 

역시 생각대로다. 고목이라 그런지 한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어 휘아 한 사람 정도는 충분히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위에 펼쳐진 굵은 나뭇가지로 인하여 빗물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래쪽에서는 자신을 볼 수없는 위치이기도 했다.

웅크리고 앉아 멍하니 앞을 보았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반시진 전만해도 자신은 무저뇌옥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깥세상에 나와 있다. 그렇게도 염원했던 곳. 

진녹의 나뭇잎, 빗물을 머금은 갈색의 나무들, 좌우로 늘어선 전각들.

그가 살아오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아니 모든 것이 처음 본 것들 뿐이다. 심지어는 질척질척한 땅의 흙까지.

공연히 눈물이 나온다. 아버지들은 이 모든 것을 잃고 이십 수년을 뇌옥 속에서 살아 오셨다. 아무 잘못도 없으면서. 

'그에 대한 보답은 어떻게든 내가 받아 낼 것이다. ....불쌍한 아버지들을 대신해서....'

살짝 복면을 걷어 봤다.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빛이. 

아버지 말에 의하면 오늘같은 날씨는 구름이 많이 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탈출하기가 더욱 어려울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빛도 견디기가 힘들다. 만일 해라도 뜬다면.... 나는 눈을 감고 다녀야 할 것이다. 

'옷도 두껍게 입어야 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헛! 이런!"

휘아가 흠칫 놀라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위가 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다. 

푸드득! 삐비빅!

휘아의 일장 앞 나뭇가지에 앉아 졸고 있던 야조 한 마리가 깜짝 놀라 날아 오른다.

비는 멈추어 있었다. 

휘아는 천천히 복면을 벗어 봤다. 앞이 어둑하기는 했지만 눈은 더 할 수없이 편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것이 잘 보인다. 순간. 

"아!"

휘아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저 높이, 하늘에 점점이 박힌 보석들이 빛나고 있었다. 

'별, 별이다!' 

말로만 들었던 별이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이 하늘에 떠 있었다.     

"이야! 진짜 멋지다!!"

그 것은 경이 그 자체였다. 

수많은 별들이 흐르고 있다. 내가 되어 흐르고 있다. 붉은 색, 푸른 색, 가지각색의 별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뽐내며 하늘을 수놓고 있다. 그리고....

"헉!"

휘아는 급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고개를 동쪽으로 돌렸을 때였다. 커다란 빛이 눈 가득 들어 온다. 너무나 밝아서 눈을 뜰 수없을 정도다. 하지만 눈에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문득 아버지들이 말한 달이 생각났다. 

"맞아! 저건 달이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바라보자 그럭저럭 바라볼 수가 있었다. 마치 석두아버지의 민대머리가 번쩍번쩍 빛나는 것 같다.

"정말 멋지다!"

흐르고 있었다. 별도, 달도. 나뭇잎에 가려 졌다가 다시 보이고, 가려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별들의 환상적인 향연에 휘아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알 수없는 기운이 자신을 감싸 온다.

무겁고도 맑게 느껴지는 기운이... 

흠칫, 휘아가 놀라 뒤돌아 서려 할 때였다. 차가운 밤 공기를 가르는 묵직한 목소리가 휘아의 뒷덜미를 지그시 낚아챘다.

"너는 누구지?"

고봉천은 비가오고 난 후의 맑은 하늘을 아주 좋아 했다. 더구나 밤에 펼쳐지는 별들의 군무는 항상 그에게 화두를 던져 주는 스승이었다.

오늘도 거세게 내리던 비가 멈추고 하늘이 맑게 개더니, 끝없는 별 무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이런 날일 수록 유성우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성우가. 

오죽하면 고봉천을 가리켜 강호의 말 많은 사가들이 유성비월객(流星飛月客)이라는 별호를 붙여 줬을까, 할 정도로 그는 유성우가 쏟아지는 밤을 좋아 했다.

한잔의 철관음으로 마음을 달래던 고봉천은 흥이 동하는지 오랜 만에 거실을 나와 밤 산책을 하고 있었다. 

살짝 젖은 청석로는 중년의 발걸음을 더욱 애절하게 붙잡는다. 나뭇잎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심술 굳은 바람결에 흩날리다 그의 어깨에 살며시 떨어진다. 

고봉천은 그 모든 것이 다 좋았다. 

매일같이 이런 기분만 느낄 수 있다면, 이 곳에 유폐되어 지낸 십 년 세월도 그리 아깝지 만은 않을 것 같았다.

'후우... 벌써 십 년이구나.'

회한이 깃든 한숨이 그의 이사이로 새어 나왔다.

유성비월객 고봉천은 철혈성의 전대 성주인 철혈패황 철무경의 넷째 제자였다. 

대제자인 철운양, 둘째 제자이자 현 철혈성주인 철운성, 셋째 제자인 혁수명, 그 다음이 고봉천이었다.

그는 철혈성을 한 때 무림팔패에 올려 놓았던 철혈의 도전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성주에게 대들었다가, 후원인 상무원(霜霧院)에 유폐되었다. 

가족들은 출입이 자유로워도 그만은 절대 상무원을 나가서는 안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 할 수있는 일이란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비오고 난 뒤의 하늘이나 쳐다보며 별을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일 정도로.

비 젖은 담장을 따라 걷던 고봉천이 상념에서 깨어나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것은, 한없이 맑은 하늘에서 십여 줄기의 유성우가 서쪽 소령산 너머로 쏟아져 내릴 때였다.

"정말 멋지다!"

어디선가 들려 오는 탄성.

'응?'

분명 어린 소년의 음성이었다. 청량하고도 여린 음성은 결코 어른이 낼 수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헌데.

'이 곳에 남자아이가 있던가?'

그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은 한 상무원에 남자아이는 없었다. 계집아이는 있어도.

오랜 만에 기운을 끌어 올려 주위를 탐색해 봤다.

'어?'

지상이 아니었다. 나무 위, 그것도 제법 높은 나무 위였다. 

고개를 들자 담장 밖의 거대한 고목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기운이 고목 위에서 느껴진다.

'이상하군.'

이 곳 상무원은 결코 아무나 가까이 올 수 없는 곳이다. 게다가 야밤에 나무 위라니.... 불청객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은 잠깐, 고봉천의 신형이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신법을 펼치는 것이 얼마 만이지?'

비월신영(飛月身影)이라는 신법이었다. 십 년간 상무원에만 있었으니 신법을 펼칠 기회가 언제 있었을까. 그래도 녹슬지는 않았는지 둥실 떠오른 신형이 순식간에 고목 위로 날아간다. 

얽혀진 고목의 나뭇가지를 밟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보인다. 뭔가 거적같은 것을 뒤집어 쓴 사람이. 게다가 손에는 복면까지 들고 있다.

'적인가?'

고봉천의 오른손 검지가 밝게 빛을 발한다. 관월지(貫月指)였다.

그가 침입자를 제압하기 위해 관월지를 쏘아 내려 할 때였다. 

순간적으로 고봉천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몰래 침입하기위해 복면을 쓴 자가, 복면을 벗고 있다니... 

문득 조금 전에 들었던 맑은 음성이 생각났다. 그 음성대로라면 침입자는 어린 소년이다. 

고봉천은 손을 내리고 조용히 기운을 흘려 상대가 도망갈 방위를 가로 막은 다음, 복면을 벗어 들고 있는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하얀 옆모습이 보인다. 달빛을 받은 얼굴이 하늘의 달빛 보다도 더 환하게 보인다. 생각대로 어린 소년의 얼굴이었다.

'대체 누구지?'

의문이 일었다. 헌데 그 때였다. 

소년이 움찔 몸을 떨며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다. 

왜? 설마?

'저 아이가 나의 존재를 눈치챘다!'

믿을 수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누구던가. 아무리 십년간 상무원에 처박혀 있었다지만 그래도 한때 천하를 질타하던 유성비월객이 아니던가?

고봉천은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뒷덜미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너는 누구지?"

휘아는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뭔가 알 수없는 기운이 자신을 감싸고 놓아주지를 않는 것이다. 

'안돼! 여기서 잡힐 순 없어!'

신주령의 법문을 외우며 혼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순식간에 온몸을 휘돌던 기운이 아랫배 쪽에 뭉쳐지더니 사지백해로 퍼져 나간다. 휘아의 이가 악물렸다.

그 때, 위 쪽에 있던 사람이 다시 물어온다.

"너는 누군데 이 곳에 있는 것이냐? 이 곳은 아무나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인 줄 몰랐단 말이냐?"

고봉천은 부드럽게 물으면서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분명 내공을 연마하지 않은 아이처럼 보였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년의 전신에서 제법 강력한 힘이 꿈틀 대는 것이 아닌가. 

어이 없는 일이었다. 저 정도의 내력을 감지하지 못했었다니. 

만일 적이었다면?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있던 적이, 멋모르고 다가간 자신을 느닷없이 공격 한다면?

등줄기로 싸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너무 오래 쉬었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움켜쥐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휘아는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저 사람은 자신이 무저뇌옥에서 나온 사람이란 걸 모른다. 아니 알 턱이 없다. 그렇다면....

일단 끌어 올렸던 기운을 풀어 버리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미처 몰랐....어요. 하늘의 별이 하도 멋져서...."

밖에서는 나이 먹은 사람에게는 존댓말을 써야 한다고 했다. 잘못하면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게 강호라 했었다.

고봉천이 다시 되물었다. 

"몰랐다? 그럼 너는 이 곳이 어딘 줄은 아느냐?"

"...."

휘아가 알 리가 없다.  

"몰랐다고 했잖아요..."

일단 저 사람은 손을 쓸 생각이 없는 듯하다. 내가 덤벼들지 않는 한. 

자신을 에워 싸고 있던 기운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표정도 그리 사납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기사 무저뇌옥 죄수들의 귀신같은 행색만 보아 온 휘아에게, 어떤 자가 사납게 보일까마는...

휘아의 속마음을 알길 없는 고봉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철혈성에 사는 사람이 이 곳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저는 이 곳에 온지 얼마 안됐어요. 그래서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요."

교묘한 대답이었다. 거짓도 없고 진실도 없는 말이다. 

무저동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됐으니 거짓도 아니고, 온 곳을 밝히지 않았으니 진실서도 벗어나 있다. 

하지만 고봉천은 휘아가 무저동에서 나왔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으니, 그저 흔들림없는 맑은 눈동자로 보아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있을 뿐이다.

조금 전에 일었던 강력한 기운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고봉천은 그저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라고 속편하게 생각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단히 노력을 했다면 이 삼십 년의 내력을 갖는 다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헌데,

'이 곳에 온지 얼마 안됐다고?'

문득 고봉천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뜩인다. 

입가로는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럼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진조여 휘... 남들은 휘아라 불러요."

"흠. 특이한 성이구나. 휘아라.... 헌데 어디에 속해 있지?"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오래 망설일 수도 없었다.

"온지 얼마 안 됐다고 했잖아요. 아직...."

"그래?"

고봉천은 문득 자신의 기분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자신도 왜 그런지는 정확히 알 수없는 일이었다. 그냥 눈 앞에 있는 소년의 눈을 쳐다보다 보니 기분이 좋아질 뿐이었다. 

말 그대로 티없이 맑은 눈동자. 

느닷없이 나타난 자신을 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배짱. 

모든 것이 그의 기분을 좋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묻는 말도 기분 좋게 나온다.

"흠! 아직 배치받은 곳이 없단 말이지?"

"....예."

사실이 그랬다. 뜻이야 어쨌든.

"알았다! 그럼 나를 따라 오너라!"

"아저씨를요?"

아저씨.... 오랜 만에 들어 본 소리였다. 고봉천의 입가에 잔주름이 그어졌다. 

"하하! 그래! 아저씨를 따라오너라!"

고봉천이 나무아래로 가볍게 신형을 날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신형을 나무위로 날리려 할 때였다. 그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뜨여졌다.

본래 아래에 내려서던 그는, 어린 소년이 내려오기에는 나무가 너무 높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올라가 데리고 내려 오려고 했었다. 

그런데... 소년이, 휘아가 밧줄을 이용해 바람을 타 듯이 가볍게 바닥으로 내려서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 것은 신법도 뭣도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자연스러운 몸놀림이었다. 바람과 한 몸이 된 것 같은 몸놀림이었다.

"제법이구나."

진심이 서린 감탄이었다. 그걸 느낀 휘아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냥 전에 많이 하던 놀이일 뿐이에요."

"그래? 가자!"

이제는 쏘아진 화살이다. 오직 앞으로 갈 수 있을 뿐, 뒤로 물러날 수 없는 길이다.

'그래, 어차피 멀리 도망갈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가까이 있다 보면 오히려 아버지들을 구할 기회가 많아질 것이 아닌가. 

휘아는 앞장서 가는 중년인에게 자신의 패를 던지기로 작심했다.

염소아버지가 가끔씩 쓰던 문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 그대로... 

게다가 첫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도 한몫 했고, 또 지피지기라는 말도 있지를 않던가.

철혈성 깊숙이 자리잡은 상무원은 다섯 채의 단층 가옥으로 이루어진 독립된 후원이었다. 

규모로 봐서는 족히 이삼십 명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데도 나와 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늦은 밤이라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두리번거리는 휘아의 마음을 알았는지 고봉천이 나직이 말을 했다.

"여기에는 우리 가족 셋을 포함해서 여섯 명 밖에 없다." 

그렇다면 더욱 기이한 일이다. 도대체가 헷갈리는 일 투성이다.

"사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세 명의 가솔을 보내 준 것만 해도 고마워 해야 할 일이지."

독백하듯 중얼거리는 고봉천의 말에 처연한 심정이 묻어 나온다. 왜 그럴까? 철혈성은 강호에서 유명한 대문파라 했는데.... 

어째 처음부터 이상하더니 아버지들의 짐작대로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휘아가 생각에 잠긴 채 걸어갈 때였다. 제일 안 쪽의 건물로 다가간 고봉천이 휘아를 돌아보았다.

"여기가 내 방이다. 일단 들어 오너라."

말을 마친 그는 휘아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안하고 방문을 잡아 당겼다.

"헉!"

휘아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이 터지자, 의아한 고봉천의 눈길이 휘아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은 휘아의 머리 속이 맹렬히 회전했다.

"제가... 눈이 안 좋아서 갑자기 밝은 빛을 보면 눈이 아프거든요."

"허! 등잔불을 보고 눈이 아프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군."

어이없다는 고봉천의 말에 휘아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천을 가지고 다녀요. 가리면 좀 났거든요."

손에 든 머리카락으로 만든 복면을 보여 주었다. 그제야 고봉천은 왜 휘아가 복면을 손에 들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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