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200)

"나중에... 알게 될 거다."

그렇게 휘아는 여자의 무서움을 머리 속 깊이 간직하고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철광석 중에서도 홈이 많이 파인 돌을 골라냈다. 그 다음에는 넓적한 돌을 골라냈다.

그리고 넝마같은, 아니 진짜 넝마 옷을 몸에 걸쳤다. 

전신을 둘러싼 옷이어서인지 거치적거렸지만, 안 입으면 염소아버지가 화낼 것 같아서 걸쳐야만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동인이 휘아의 품 속에 목함과 머리카락복면을 넣어 주었다. 

휘아는 느낄 수 있었다. 염소아버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강두가 머리카락 밧줄로 연결한 두 개의 갈고리를 건네 주었다. 못쓰는 정을 휘어서 만든 갈고리였다. 갈고리를 통해서 석두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진다. 

석두아버지가 휘아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한중에 가거든 돌팔이네 가족 찾아보는 거 잊지 마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세 아버지 중 혼인을 하고 가족을 이루고 있었던 사람은 염소아버지 뿐이었다. 다른 두 아버지들은 떠 돌아 다니느라 혼인도 못해보고 이 곳에 잡혀 들어 왔다.   

말로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어서 때를 놓쳤다고 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휘아가 당연하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당연히 찾아 봐야지! 내 가족인데!"

차마 말을 못하고 있던 조동인이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그래... 크흑!"

일전에 이런 저런 바깥세상을 이야기 할 때, 각자의 가족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빼빼아버지와 석두아버지는 혼인도 하지 않은데다 살아 있는 가족이 없으니 할 이야기도 없었다. 다만 염소아버지만이 한중에 의원을 열고 가족이 있다 했었다.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었다고 들었다. 자신이 느닷없이 잡혀 오는 바람에 자신이 여기에 있는 줄도 모른다고 한다. 지금은 밖의 가족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염소아버지는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 버렸다고 하지만, 아마 하루도 잊은 날이 없었을 것이다.

물끄러미 염소아버지를 바라보던 휘아가 팔을 뻗어 그의 작은 체구를 끌어 않았다.

"아부지. 걱정마. 휘아는 꼭 살아서 나갈 테니까. 그래서 아부지를 가족들에게 데려다 줄 거야. 휘아 믿지?"

"그.그래.... 엉엉!!"

"이씨.... 오늘은 휘아가 세상으로 나가는 날인데 왜 자꾸 울어? 나도 울고 싶어 지잖아!!"

눈자위가 붉어진 여강두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 때였다.

스르륵.....

줄이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세 사람은 눈물 가득한 눈을 들어 위를 쳐다 봤다. 조동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려...온다...."

바구니가 내려오고 있었다.

한을 싣고, 절망을 담고 내려오던 바구니가 오늘은 희망을 담아가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다.

"준비해라!"

바구니가 바닥에 닿았다.

세 사람은 바구니에 철광석을 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홈이 많이 파이거나 굴곡이 많은 광석을 먼저 집어 넣었다. 조금씩 띄어서.

그 위에 넓은 돌들을 올려 놓았다. 그리고 제일 위에다 일반 철광석을 얹어 놓았다.

마침내 바구니를 다 채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이는 것은 보통 때와 같은 양이지만 무게는 훨씬 가볍게 되었다. 

두 아버지가 서로를 마주보더니 바구니의 양쪽을 잡고 고개를 끄덕인다. 휘아는 손을 뻗어 밧줄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흔들었다. 다 실렸다는 신호였다.

가볍게 한 번 출렁인 밧줄이 천천히 감겨 올라가기 시작했다. 

두 아버지가 양쪽에서 바구니를 눌러 댔다. 서서히 올라가던 바구니가 세자 높이까지 올라가자 휘아가 재빨리 밑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머리카락 밧줄이 달린 갈고리를 바구니의 양쪽에 걸었다. 

바구니의 높이가 넉자가 되었을 때, 휘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조동인과 여강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바구니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어 내고, 휘아의 몸이 밧줄에 걸린 채 서서히 바구니를 따라 허공으로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위에서는 무게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는지 머뭇거림이 없이 계속 감아 올리고 있다.

일단은 성공적인 출발이었다.

멀어진다. 아버지들의 얼굴이 멀어진다. 

입을 반쯤 벌리고 올려다보는 석두아버지의 큰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 귓바퀴를 적시고 있다.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고 있는 염소아버지의 작은 얼굴이 더욱 작아져 가고 있다.

"아부지!! 빨리 올게!!"

한 소리 외치는 소리에 손을 흔드는 두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다. 휘아가 소리쳤다.

"아부지! 내 이름이 뭐지??"

"휘...아..."

"그럼 내 성은??!!"

"....."

"휘아 성은.... 진...조...여...!! 그러니까!! 진조여휘가 내....이름이야!!! 알았지??"

".....어.... 진조여휘가.... 우리 아들....이름이다..... 어헝!"

울음 섞인 조동인과 여강두의 목소리가 작게 울린다.

십장.... 이십 장.... 오십 장.....

까마득한 점처럼 보이던 두 아버지의 모습이 끝내 눈에서 사라져 가고, 휘아의 눈에 매달렸던 눈물 방울이 뚝,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져 갔다.

'아부지! 아부지! 나 올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해!'

휘아도 알고 두 아버지도 안다. 그것이 단지 희망사항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누군가가 무저뇌옥에서 탈출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저들은 틀림없이 무저동 안으로 조사단을 파견할 것이고, 아버지들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희망이라면, 목숨만이라도 붙어 줘 있기 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육십여 장을 올라가자 동공이 급격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동굴의 벽면이 눈 앞에 보일 정도까지 좁아졌다.

그 때였다. 휘아의 눈에 가로로 길게 찢어진 동굴이 하나 보였다. 언뜻 보면 볼 수없는 위치였다. 안력이 뛰어나지 못하면 볼 수 없는 거리였다. 

일장 정도를 더 올라가자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 동굴을 볼 수있는 위치는 불과 이삼 장을 지나는 그 순간 뿐이었다.

'혹시? ....설마...'

바구니를 흔들면 건너 갈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었다. 한 번 실패하면 다시는 무저뇌옥을 나갈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음식을 내려 보내지 않으면 아버지들의 목숨도 위험하고.

얼마를 더 올라 갔을까, 빛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일반인 같으면 아직도 어둡다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휘아에게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밝기였다. 새삼 염소아버지의 생각이 옳았음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복면을 꺼내 뒤집어 썼다. 그러자 눈을 뜰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올라 갈수록 빛은 더욱 밝아지고, 복면 속에서조차 눈을 뜨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랬다. 이제 천공의 입구는 불과 십장 정도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실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아버지들의 말대로 인공으로 쌓은 석벽이 보였다. 전신이 긴장으로 후끈 달아 올랐다. 휘아는 긴장을 풀기위해 신주령을 암송했다.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이 빛은 더욱 밝아지고, 어느 순간, 휘아의 실눈에 무저뇌옥의 입구로 보이는 석벽의 끝이 보였다.

밧줄을 움켜 쥔 두 손에 땀이 고였다. 머리 속으로는 쉴 새없이 신주령을 외우며 대기의 법 중 풍령의 호흡을 끌어 올렸다. 

그 것이 실제상황서는 얼마만한 힘을 발휘할지 모른다. 동굴 속에서는 풍령의 호흡을 한 채 몸을 날리면 삼장 정도는 거뜬히 날았었다.

그걸 보고 아버지들이 얼마나 즐거워 했던가. 우리 아들이 하늘을 난다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리다. 바구니에 매달린 상태에서 얼마만큼의 반진력이 있을지 의문인 것이다. 그래도 석벽까지는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위에 있는 철혈성의 무사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빨라야 할 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다만 휘아로서는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석벽의 끝이 다가 왔다. 순간.

'이 때다!'

파앗!

있는 힘을 다해 바구니를 차고 갈고리를 잡아당기며 몸을 날렸다.

환한 빛이 휘아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아찔한 현기증에 머리가 멍할 정도였다. 하지만 휘아는 멈출 수 없었다. 아니 절대 멈추어서는 안되었다.

철혈성

지금은 무저정(無底井)이라 불리는 무저뇌옥의 입구에서, 물레를 돌리고 있던 철혈성의 말단무사 정가는, 바구니가 거의 다 올라오자 숨을 크게 내쉬며 옆의 동료를 돌아 보고 소리쳤다.

"동가야! 좀더 힘 좀 써봐라! 어제 술 먹은 게 아직도 안 깼냐? 좀 있으면 비가 쏟아질 텐데, 비 맞고 갈래? "

"지랄 하네! 힘은 나만 쓰고 있고만. 너나 힘 좀 써......" 

동가성의 무사가 정가를 노려보며 한 소리 할 때였다. 

출렁!

"헛! 뭐야??"

느닷없이 바구니가 출렁이더니 뭔가 거적처럼 보이는 것이 바구니의 밑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놀랄 틈도 없이, 거적덩어리가 순식간에 무저정(無底井)의 난간을 넘어 쏜살같이 날아간다.

"으악!!"

정가의 비명에 동가마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귀.귀신......?"

몸을 날린 휘아는 아찔한 현기증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를 악물고 난간을 잡은 손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석벽을 박찼다.

휙! 

순식간에 난간을 타 넘은 휘아의 신형이 삼장을 쏘아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도약,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무저정으로부터 십장을 벗어났다. 

눈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 온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이를 악물고 가늘게 실눈을 뜬 채 앞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나무들이 십장 높이로 솟아 있다.

'나무라는 것들이 뭉쳐 있는 곳, 숲이다!'

염소아버지가 말한 숲이라는 곳을 향해서 혼신의 힘으로 땅을 박찼다. 

세 번을 더 도약하자 숲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가늘게 뜬 눈에 푸른 나뭇잎이 하늘을 덮은 게 보인다.            

짙푸른... 녹색... 처음으로 보는 색깔이다.

정가는 놀라 소리치다 동가가 주저앉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타.타.탈출...이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정가의 목에서 새어 나왔다. 동가가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막 숲으로 들어가던 휘아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정신을 가다듬고 아픈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푸른 색을 느낄 수도 없을 만큼의 충격이 눈을 통해 전달 됐다. 

이를 악물었다.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숲이다. 

휘청! 흔들리는 신형이 유령처럼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해 안으로 쏘아져 갔다. 

오보천환. 

몇 개의 가로막는 나무와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하는 휘아의 신형은 유령의 몸짓, 바로 그것이었다.

정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동가의 눈이 놀람으로 휘둥그레졌다.

숲을 향해 쏘아져 가던 거적대기가 나무를 향해 돌진하는 듯 하더니 흐릿한 잔상과 함께 그대로 나무를 통과해 사라지는 것을 본 것이다.  

"으으으... 유.유령.... 진짜 귀신이다!!"

"맙소사!! 대낮에 거적귀신이...."

툭! 툭! 투두두둑!

짙은 먹구름 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유령이 지나간 자리를 굵은 빗방울이 가로막아 버렸다.

"동.동가야.... 우리가 지금 뭘 본 거냐....."

주저앉아 있던 동가가 어정쩡하니 일어나다가 망설이며 대답했다.

"나.나는.... 아무 것도 못 봤다.... 정가야.... 너... 뭘 봤는데...?"

"나? .....나도... 못 봤다. ....아무 것도...."

"그래, 우리는 아무 것도 못 봤다..... 그렇지?"

"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는,

-말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숲 속에 들어간 휘아는 아무도 뒤따라 오는 것이 느껴지지 않자, 커다란 나무아래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 안았다. 

눈을 찌르는 통증에 머리가 멍해졌다. 

염소아버지가 햇빛의 무서움을 말할 때만 해도 설마 했었다. 그런데 그 말조차 햇빛의 무서움을 반도 표현 못한 것이었다. 설마 눈을 가렸는데도 이 정도의 고통이라니... 더구나 시커먼 먹구름에 가려 햇빛은 보이지도 않건만...

그렇게 휘아가 웅크리고 있을 때였다. 허공에서 무언가가 떨어진다. 그리고 주위는 더욱 어두워졌다. 

천천히 눈을 떠 봤다. 강하긴 하지만 조금 전보다는 훨씬 약해졌다.  

손을 땅바닥에 대고 지음의 법 중, 지령흡기의 술을 행해봤다. 그것은 땅의 기운을 빌어 자신의 기운을 채우는 술(術)이었다. 일반적으로 시간이 많이 걸려 그 효과를 빨리 볼 수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잠깐사이에 일단 눈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것만으로도 휘아는 도사할배에게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할배... 고마워.'

문득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느껴졌다. 생경한 느낌. 움켜쥐자 차가운 감촉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고개를 쳐 들었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비였다. 

말로만 들었을 뿐, 처음으로 비라는 것을 본 휘아는,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하늘에는 호수도 없고, 물을 담아 놓을 만한 데도 없는데...'

비가 얼굴을 때리자 고개를 내려 앞을 바라보았다. 

무저뇌옥의 입구에서 놀란 외침이 들렸었다. 헌데 아무도 뒤따라 오는 것 같지는 않았었다. 

푸른 나뭇잎 사이로 저 멀리 무저뇌옥의 입구가 보인다. 

두 명의 무사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저 들이 쫓아 왔더라면 과연 자신이 도망갈 수 있었을까? 자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명의 무사가 바닥에 있던 바구니를 드는 것이 보인다. 

'제발...제발...'

바구니 속의 물건을 무저뇌옥에 쏟아 넣는다. 

'아! 다행이다!' 

가장 염려 했던 일 중의 하나가 음식의 중단이었다. 헌데 저들은 음식을 아버지들에게 보내 주었다. 비록 밀가루로 만든 만두와 잡다한 소채가 전부였지만, 그것은 무저동 안의 두 아버지에겐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훗날 저들과 만날 기회가 닿는다면, 나는 저들에게 오늘의 고마움을 갚아 주리라. 

빼빼아버지가 그랬었다. 원한은 백배로, 은혜는 천배로 갚아야 하는 것이 사람이 행해야 할 도리라고. 특히 남자라면.

나는 빼빼아버지의 말을 실행할 거라고 다짐했다. 비록 백배, 천 배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주위를 돌아보던 두 명의 무사가 정신없이 빗속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탈주자를 찾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아니 아예 찾을 생각도 안 하는 것 같다.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후 우....."

휘아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눈 앞에서 나뭇잎이 비바람에 흔들린다. 새파란 진녹의 떡갈나무 잎이었다. 

휘아는 새삼 나뭇잎을 보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녹색, 처음으로 보는 색깔이다. 

도사할배나 세 아버지에게 들었기에 나무에 매달린 잎 색깔이 녹색이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빨간색은 피색이고, 검은색은 질릴 정도로 보아 온 어둠의 색깔이다. 하지만 녹색은... 휘아에게 신비의 색깔이었다.

"아름답다...."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둘러 쓴 넝마가 너무 젖어 몸에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안되겠다. 어디로든 일단 몸을 피해야겠다.'

생각 같아서는 계속 비를 맞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넝마 옷이 몸에 달라붙는 감촉은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게다가 떠나간 무사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일단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 보았다. 

무저동의 건너편은 절벽으로 가로 막혀 있다. 높이만도 이십장이 훌쩍 넘을 것 같다.

좌측은 숲이 이어지다가 그 끝에 한 채의 커다란 전각이 서있다. 

염소아버지가 알려 준대로면 무사들이 굉장히 많이 산다고 했으니 저긴 안되겠다.

우측은.... 헉! 거긴 훨씬 많은 집이 있다. 아무래도 철혈성의 본전이라 할 수있는 곳 같다.

'그럼 어디로 가지?'

휘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끄러미 손에 들린 갈고리를 쳐다 보았다. 휘아의 입가로 씩, 웃음이 떠오른다. 

'좋았어! 한 번 올라가 보자!'

갈고리에 매달린 머리카락 밧줄의 길이는 칠장 정도.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빗줄기가 얼굴을 세차게 때린다.

밧줄을 늘어뜨리고 갈고리를 휘돌렸다. 삼장 정도 높이에 가로로 걸쳐진 굵은 나뭇가지가 보인다.

휙!

떨어지는 비를 가르고 솟구친 갈고리가 나뭇가지를 휘 감았다.

뽀르르... 다람쥐가 울고 갈 정도로 빠르게 밧줄을 타고 올라간 휘아의 신형이 나뭇가지 위에 올라선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나뭇가지 위에 올라서자 눈 앞이 확 트여 보인다. 순간적으로 밝은 빛에 아찔하기도 했지만, 이미 한 번 겪은 바가 있기에 전보다는 훨씬 빨리 눈을 뜰 수 있었다.

빗줄기 사이로 뒤쪽 숲 너머에 작은 집들이 보였다. 

우측의 거대한 전각군은 휘아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철옹성처럼 느껴졌다. 

좌측의 한채 거대한 전각은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그 곳도 휘아에게는 여전히 부담이 가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한 곳 뿐이다. 

뒤쪽, 나무사이로 슬쩍 드러나는, 지붕이 낮은 집들이 모여 있는 곳.

휘아는 재빨리 나무에서 내려와 숲 뒤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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