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200)

돋았다. 허나 성상의 말을 가로막은 이가 배행한 윤재관이었다.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옵사니다."

"왜 짐을 가로 막느냐? 네 눈에는 저 꼴이 고이 보이느냐?"

"전하, 망극하오나 신의 말을 한번만 가려 들어 주옵사이다. 의륭저를 지켜라 내려 보낸

지밀위들을 모다 저가 골랐나이다. 충심이 금석 같으며 허투로도 헛일을 아니 하는 이들

이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술상 받아질 것이면 필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소신이

먼저 사정을 알아볼 것입니다. 사사로운 미행을 하심이라, 예로 납시셨다 하는 것은 아

모도 모르는 일. 행여 이곳으로 친림하신 이유가 알려질 것이면 중전마마께서 예에 머

물고 계신다 알려질 것이라. 그렇게 되면 옥체의 안위에 더 큰 위험이 아니겠는지요?"

장내관도 윤재관의 말이 옳다 나섰다. 전하께서 듣자 하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 

허면은 짐은 예에 있을 것이니 재관이 너가 가서 사정 알아보고 오너라 분부하셨다.

말머리를 돌려 윤재관이 횃불 밝힌 아래 멍석 깔고 술상 받은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벌떡 일어나는 군졸들이 윤재관을 알아보고 읍을 하였다. 무어라무어라 설명하였다.

돌아온 윤재관이 벙싯 웃었다.

"짐작한 그대로입니다. 중전마마께서 번을 서느라 집에도 가지 못하고 그저 낮밤을 고생

하니 안되었다 하시어, 주안상을 내리고 위로 삼아라 하셨다 하옵니다. 병정들이 술상

받은 터라 지금은 의륭저 권속들이 대신하여 번을 보고 있습니다. 안심하옵소서.

중전마마 하명이 아니라 할 것이면 술 한 방울 입에 댈 자들이 아니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짐도 예서 보고 있었노라 너가 다가가자 술잔 내던지고 손이 허리춤

의 장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안심하였다. 정신은 말똥하다 그 말이지. 안심하여도 될

참이야. 헌데 짐은 어디로 들어간다?"

"외사랑채 통하는 옆문을 열어 두라 말을 하여 두었습니다. 가옵소서. 그가 문을 열어

두고 기다릴 것입니다."

왕은 싱긋 웃으며 말고삐 잡아당겼다. 윤재관이 안내하는 대로 외사랑으로 난 옆문을 거

쳐 천천히 의륭저로 스며들었다. 한참 만에 뵈올 그리운 지어미 생각에 그저 가슴이 설

레는구나.

"다소간 곤하시면은 침수 준비할 것입니다. 아이고! 그런데 무문당 마님은 어찌 그리도 

글을 잘 읽으시노? 쇤네가 아주 배꼽이 빠져 죽는 줄 알았나이다. 내일 또 읽어주신다

하니 쇤네는 오직 그것만을 기대려지는 것입니다."

한편 별당. 윤상궁이 헛허허 웃으며 중전마마 귀밑머리를 내려드리는 참이다. 소세하시고 

양치 마치었다. 병풍 치고 매화틀 놓아드린 복이 나인이 방을 나가자 선이 년이 들어와

금침 펼쳐 드리었다. 중전마마께서도 방금 전까지 무문당 마님이 읽어주는 <배수옥전>

들으며 허리 부러지게 웃었던 참이다. 고운 옥안에 아직도 환한 웃음빛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참으로 잘도 우스개를 하지? 이 중전도 전하께서 골계담을 하실 적에

그리 재미나고 우스운 이야기는 없다 하였는데 말야. 이이는 전하보다 더한 분이라? 

홋호호. 그보다 자리 들기 전에 내가 무엇 좀 먹었으면? 한참 웃다 보니 다시 시장기가 

도는 것이다. 내가 자꾸 이리 입맛이 당기니 어찌하지? 후에 환궁하여 나를 보시면은

톳이 되었다 놀림하실 게야."

"아이고, 마마, 드셔야지요! 진즉에 말씀을 하셨으면 저가 소반과 올려라 하였을 것입니

다. 무엇을 드릴까요? 말씀만 하시면은 다 대령을 할 것입니다."

"말간 감주에 얼음 부숴 넣고 시원하게 미실 것이야. 허고 두텁떡도 먹고잡소만, 그것은

없을 것이다?"

"왜 없을 것입니까? 마마께서 즐겨 잡수시는 것이라 하여 오후서 김상궁이 한 동구리 이

고 나온 터입니다. 쇤네가 감주랑 배랑 하여 올려드릴 것이니 젓수시옵소서. 하지만은

다시 체기가 오를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잡수고 명일 또 드시옵소서."

사가의 친 어미인 양 다정하고 찬찬하였다. 돌아앉은 윤상궁이 중전마마 소반과 하여 드

려라 문 밖의 나인에게 명하였다. 나인이 들어와 중전마마 의대 위에 휘건 둘러드리고 

금동 협자로 고정시키었다. 이내 주칠 팔각 소반이 들어왔다. 말간 감주 보시기에 깎은

청배며 멀건 딤채 국물까지 곁들여 두텁떡 쟁반을 올려드리었다.

맛난 떡 한 개를 냉큼 젓수시던 중전마마, 문득 가녀린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서도 두텁떡을 참 좋아하시거든. 예에 계시면은 필시 달려들어 짐이 다 먹을 것

이다 하셨을 게야. 참 맛나게도 드시는 분이시거든? 망극하게 어수에 직접 들고서 냠냠

드시고는 고 손가락에 묻은 고물까지 혀로 핥아 드시는 것은 아모도 모를 것이오."

"홋호호, 원래 대전마마께서 그렇게 소탈하십니다."

"그러게 말야. 이 중전이 궐에서 나온 지가 벌써 닷새째인데 몇 번이나 요날까지 만이오,

다짐을 하셨거든. 내 생각하시어 더 계시다 옵소서 서찰을 주셨지만.... 필시 이 몸을 

그리워하고 계실 것이다. 나도 용안을 뵙고 싶으니 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고?"

"이리 예로 나왔지?"

화답하시는 옥음따라 문이 열리었다. 성큼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분은 바로 지금 중전

마마께서 그리워하였던 주상 전하였다.

"중전 또한 짐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짐작하였거든. 그 말이 딱 맞은 것이야! 

핫하하! 아직 두텁떡이 남았으면 짐도 주어! 짐이 다 먹을 것이다."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다. 저도 모르게 마마! 하고 큰소리로 불러지었다.

수줍음 많은 분이 너무 좋아 고운 옥안이 새빨갛게 변하였다.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마주한 전하께서도 훤한 용안에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찌 오셨나이까? 필시 신첩 보자시려 오신 것이지요? 망극하옵니다. 아이고, 밤길에

어찌 오셨을까? 볼이 이렇게 싸늘하구먼요."

무거운 몸 이끌고 일어나려 하는 중전의 어깨를 굳이 눌러 도로 앉히었다. 제일 먼저 어

수를 이불 아래 넣고 확인을 하시었다.

"복중 넘어 칠월이라. 밤기운이 차니 혹여 차가운 방에서 주무시다 고뿔 아니 걸릴까 근

심하였소. 부대 비가 거처하는 방을 따뜻하게 하여 줍시오 사고께 부탁을 하였지? 아랫

목이 아주 설설 끓는구려? 이 집 비복이 성실하도다. 상급을 내려야지. 핫하하.

곤전이 짐 만져주지? 말을 타고 오느라 쌀쌀하였다."

중전마마 작고 다정한 손길로 왕의 얼굴을 만져주고 먼저 갓부터 끌러 드리었다. 서로 

이마 가까이 하여 눈길 마주 얽었다. 잡은 손으로는 온기가 나누어지고 천지간에 두 분

밖에 없는 느낌. 어느새 방안에는 아래것들 자취 하나 없다. 

다정한 손길로 지아비 용체 감싼 도포를 벗겨드리었다. 지난번에 중전마마께서 전하 

생신 턱으로 직접 말라 지어드린 옥빛 도포라, 전하 싱긋 웃으며 자랑하였다.

"짐이 비가 직접 하여준 의대 입고 왔지? 참 잘 어울린다 모다 부러워하는 것이야. 늘 

귀하게 여기옵고 의롱 속에만 넣어두었는데 말야. 금일 그대 보러 온다 나서면서 생각나

서 입었다오. 도승지가 이것 보아하면서 참으로 영묘로운 침선이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라. 한결 짐의 용색이 빛이 난다 부러워하였다오. 어찌 보이오? 그대 눈에도 짐

이 멋지어 보이오?"

말씀은 옷 자랑이되 결국은 중전의 칭찬이다. 편안한 동저고리 바람이 되신 전하, 그동안

굶주렸던 그리움과 정해를 펼치지 여념이 없다. 날로 잡아먹어도 시원찮을 터이다. 

작은 얼굴 쓰다듬고 입술 삼키고 손잡아 어루만지었다. 그 며칠 떨어져 지낸 동안 얼마나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는지.

중전도 또한 그리운 분을 뵈니 행복하다. 늠름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신첩이 보고잡았지요?

어리광을 하였다. 

"궐 안에 계셔도 산실에 들어있으니 못 뵙기는 같으되 말야. 출궁하신 연후에 그 참 이상

하지? 같은 담 안에 아니 계시다 싶으니 퍽이나 쓸쓸하였어. 교서 쓰다가 멍하니 달만 

바라보고 있으니 곁에 있던 도승지가 짐의 심회를 읽어내고 미행 나가시면은 신이 배행을

할 것입니다 이리하는 것이야. 인간사 살아가는 도리가 그 근본은 똑같으니 가정사 화목

이라. 짐이 중전을 은애함이 사사로운 부부지간보다 더하였으면 더하였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리운 사람 보고지고 하여 무작정 궐문을 나섰다오. 짐은 이렇게 중전을 보니 너

무 좋아! 그대도 짐을 보니 좋으니?"

"차마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랍니다. 어제는 꿈에서 전하를 뵈었지 무에야요? 

꿈 턱이라 전하께서 오셨나이다."

중전의 볼을 어루만지며 왕은 언제 올 것이오? 조심스럽게 의중을 떠보았다.

기분 같아서는 오늘밤 당장 말 등에 태워 모셔가고 싶었다. 

그러나 첫눈에 보아지기로도 중전의 용색이 한결 화사하게 회복이 되었구나. 초췌하여

산실을 나가실 때의 힘겹고 어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냥 편안하고 행복한 옥안

이다,. 이곳에서 즐겁구나 느꼈다.

"당장에 소첩이 따라 갈 것입니다. 홋호호. 마마 말 등에 타고 가야지. 아니지? 그러면은

아기가 놀라 아니 되겠구나. 전하, 언제 갈까요? 신첩은 즐거웁되 전하께서 안타깝게 여

기시는데 어찌 계속 머물 것입니까? 내일 당장에 환궁을 할 것입니다."

"그리는 마소! 짐이 보기에도 궐 문 나서실 적 그때하고 지금의 모습이 확연히 틀리나이

다. 화사하고 밝으니 예가 비의 몸에 맞는곳이라 할 것이오. 그리 즐거우시다 하는데

어찌 당장에 들어오라 재촉을 하겠소? 한 사나흘 더 계시되 짐이 실로 적적하고 쓸쓸하

니 수일내로 환궁하오."

"허면은 딱 사흘만 더 있다가 갈 것입니다.신첩이 정말 예서 즐겁고 편안하여요. 아, 글

쎄. 새벽마다 부마도위께서 직접 신첩의 방에 불을 때주신답니다? 망극하고 송구하와요.

여기 잠시 누우시어요. 지존께서 사가에 오래 머물지는 못하실 것이되 계실 동안은 

편안하셔야지."

킥킥대며 주상전하, 중전마마 끌어안고 금침 안으로 파고들었다. 귓전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니 중전마마도 함께 웃음소리 내었다. 둘만 아는 장난이다.

앙탈하고 뒹구시는구나. 지엄한 궐도 아니요 보는 눈 없다 싶으니 다소간 방탕하신

것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뵈온 터라 서로 그리운 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중전은 지아비가 강하게 원하는대로 부끄럽다 하지 않고 자리옷 고름 끌러 풍염한

젖가슴을 드러냈다. 만월처럼 가득 부풀어 오른 젖무덤 위. 진분홍빛 유두는 아기씨 

가진 터이니 연자주 빛으로 짙어졌다. 어미 될 날이 멀지 않은 고로 전하께서 빨아

대자 하얀 젖줄기가 입으로 흘러 든다. 왕은 마치 주린 어린애처럼 지어미 가슴에 달라

붙어 그 달큰한 액체를 삼키었다.

"앞으로 아기씨 나오기 전에 이리 미리 빨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놈이 젖을

많이 먹지. 음. 그 맛이 장히 맛나다! 중전이 향기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

으되 젖까정 향기로울 줄은 몰랐소이다? 짐이 향비라 한 것이 딱 맞는 말이야. 핫하하."

탐스런 수밀도 마음껏 어루만지고 자꾸만 젖줄기를 빨아대시는구나. 두툼한 입술 아래

중전마마 예민하시어 제말 그만하옵시오, 하고 절로 신음 흘린다.

그러나 전하, 게서 멈추지 않으신다. 슬슬 어수를 동산같이 부풀은 아랫배로 가져갔다.

속치마 뒤집고 욕심껏 쓰다듬었다. 아기씨도 오랜만에 부왕전하 오신 줄 알았다. 눈으로

보기에도 알아챌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인다. 왕은 장난스럽게 귀를 대었다.

"원자는 게에 잘 있는고? 이 부왕이 심히 너를 보고 싶느니라. 어마마마 힘드시니 너무

설치지 말고 얌전하니 게에 있다가 때 되면은 조용히 나오너라. 너 이놈 때문에 부왕이

홀아비 신세이니 나오면은 볼기를 때려줄 것이다. 핫하하. 어이구, 이 놈 보소? 성이 난

다고 막 발로 걷어차는 것이야? 나오면은 심히 개구쟁이가 될 것 같소이다! 핫하하.

어이쿠, 이놈! 어마마마 아프시다. 발길질 그만 하래두!"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떠벌떠벌. 그만큼 중전과 태중 아기씨가 귀하고 소중하다는 말

이다. 새벽 별이 파랗게 돋을 때까지 서로 손을잡고 도란도란. 그 동안 있었던 이야기 나

누며 다정하게 한 몸처럼 누워 꼭 안고 있었다.

야속하도다. 문 바깥에서 흠흠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전하. 시각이 밝아질 사. 이제 회궐하심이 가한 줄 아옵니다. 이미 말에 등자 올렸나이

다. 조금 더 있으면 동이 틀 것입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갈 것이다 하는 말이 목까지 차 올랐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 

부스럭거리며 마지못해 일어났다. 지엄하신 지존께서 사사로이 궐을 비움은 절대로 불가

한 일. 하물며 전하의 미행이 알려져서 좋을 일이 없다. 중전마마께서 의륭저에 머물고 

있다 함이 알려질 터라. 난처한점이 많을 것 같았다.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알았다. 짐이 이내 나갈 것이다. 잠시만 기대려라."

이미 한 밤을 꼬박 샌 참이다. 중전마마 여린 눈시울에도 무겁게 잠이 묻었다.

머리 밑에 베개 고여 주고 아랫배 안에서 놀고 있는 아기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 주시었다.

그리고 미적미적 방문을 나셨다. 발을 내미니 장내관이 신발을 신겨 드리는데 이미 이른

아침이라. 맑은 하늘에 실금 같은 햇살이 청신한 기운으로 돋고 있었다.

비로소 의륭위가 사랑채에서 나와 전하께 인사를 드리었다.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

다. 훌쩍 말 등에 오르시며 한마디 치하하시었다.

"새벽마다 부마도위께서 직접 비의 방에 불을 때주실 정도라 하니 참말 송구하오. 사나흘

후에 곤전을 회궐케 할 것이니 그때까정 부탁하오. 비의 얼굴이 많이 편안하더구먼.

의륭저 권속들이 다 잘하여주는 줄 아오이다. 자, 짐은 가오!"

새벽빛 받고 돌아가시는 주상전하 이하 일행들. 방안에서 달게 곤한 잠에 빠진 중전마마

또한 까마득히 모르신다.

깊은 어둠 속. 지킨다 하여도 허술한 의륭저 후원에 뱀 같이 스며든 그림자라. 은밀히

숨어 있다가 중전마마의 목줄을 누르려 하였던 흉적이 있었구나!

거복이 놈. 계속하여 의륭저 주변을 맴돌며 감시를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번을 보는 병

졸들이 술상 받아지는 것을 살피고는 이날이로다. 쾌재를 부른 것이다. 선이 년과 미리

약조가 된 터라. 뒷담 뛰어넘어 미리 후원 구석에 숨어 호시탐탐 노리며 밤이 깊어지기만

을 기다렸다. 아뿔싸, 그 밤에 주상전하께서 기별도 없이 갑자기 미행을 나오실 줄이야!

범 같이 사납고 용맹한 지밀위사가 따라 나왔다. 대여섯이나 달라붙어 전하께서 들어가신

별당을 빙 둘러 지키니 어떤 놈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냐? 게다가 그 상감마마, 새벽이

밝아질 때까지 아니 나오시는구나. 도무지 저가 접근할 기회가 없었다. 별당을 습격하기

는 커녕 제 몸 들킬라 간이 졸았다. 어둠 속의 구덩이에 꼼짝도 못하고 숨어 있다가 날이

밝아졌다. 전하께서는 떠나시되 이미 사람들이 오가는 시각이다. 중전마마 근처로 다시

아랫것들이 들어가 주변을 방비한다. 근접도 할 수 없음이다. 결국 허탕을 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제길. 참, 재수 더럽다! 가래침을 뱉으며 거복이 놈 다시 담을 타고 몰래 사라지는구나

그런 흉악한 사정을 아무도 모르니 이를 어찌하란 말이냐?

<끝>

  

무저동

서(序)...........

철혈성(鐵血城)이 이백 여 년 전, 처음으로 섬서 한중에 자리를 잡고 천간산 계곡에 자신들의 터전을 지을 때의 일이었다.

후원을 공사하던 중 인부 하나가 계곡의 안 쪽에서 시커먼 구멍 하나를 발견했다. 

깊이 백장, 입구의 넓이는 일장에 불과하나 아래 쪽은 거대한 공동(空洞)으로 마치 지옥의 입구를 보는 듯했다.

철혈성의 수뇌부에서는 삼개 월에 걸친 정밀조사 끝에 그 곳을 뇌옥(牢獄)으로 쓰자는 결론을 맺었다.

어느 곳이고 죄인들은 있는 법이고, 그들을 가둘 뇌옥을 짓는 것은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에게 무저동(無底洞)은 훌륭한 뇌옥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돈도 적게 들고 감시자 역시 몇 명만 있으면 되었던 것이다.

철혈성에서는 그 곳에 다시는 햇빛을 볼 수없는 죄인들을 수감시키기로 결정했다. 

때로는 자신들에게 대항을 했으나 죽이기에는 부담이 되는 자들을 수감시키고, 때로는 죽여 봐야 이득 될 것도 없고 놔두자니 껄끄러운 자들도 수감시켰다.

그렇게 이백 년이 흐른 후 철혈성이 무림팔패(武林八覇)의 하나로 우뚝 서게 되었을 때, 무저동의 뇌옥은 죽여 봐야 자신들의 체면만 구기는, 그저 귀찮은 자나 처리하는 쓰레기통 같은 역할로 밖에 쓰여지지 않았다.  

감히 철혈성에 대항하려는 자들도 없었지만, 철혈성의 이름으로 누구를 죽인다 해서 자신들을 귀찮게 할 자들이 없었던 것이다.

강호의 일그러진 정의가 그 모든 것을 정당화 시키고 있는 세상이었으니....

      *        *          *

무저뇌옥의 입구에는 한 채의 정자가 하늘을 이고 서 있었다. 

정자를 가로지르는 들보에는 바구니가 달린 밧줄을 감아 올리는 바퀴가 매달려 있었고, 밧줄은 무저뇌옥의 입구 옆에 있는 물레에 감겨 있었다. 

하늘이 먹물을 뿌려 놓은 듯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인 어느 봄날아침이었다. 

무저뇌옥의 입구에 세 사람이 말없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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