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8/200)

수다가 부쩍 늘었다. 게다가 며느님 중 중전마마와 비슷하게 출산할 분이 있었다. 

서로 둥실하게 부른 배를 잘난 척 내놓고 은근히 경쟁하였다. 아기씨가 얼마나 움직이느

냐, 회임한 터로 몸이 어떻게 달라졌더라 서로 자랑질이었다.

게다가 공주께서 기별하여 부원군 댁에서 찬모가 건너왔구나. 끼니때마다 중전마마께서

옛적 즐겨 드시던 반찬을 마련하여 수라상을 차려 올렸다. 입맛에 맞는 반찬만 올려진

상을 받으시니 저분질이 한결 낫다. 바깥 공기 쏘이며 동무들과 우스개 소리, 투호 놀이

며 이리 저리 산책도 하시니 그렇게 심하던 체증도 쑥 가신듯 없어졌다.

"내가 체기가 그리도 아니 가셔 고생을 하지 않았소? 이곳에 내려오자마자 쑥 내려가는

것 좀 보소? 필시 답답한 정심각에서 너무 움직이지 아니하고 앉아만 있어서 그러하였던

게요. 어지럼증도 하나 없잖어? 사람은 그저 움직여야 하는 것이야."

중전마마 태평하게 이런 말씀을 하실 정도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음이 편안할 사

산실에 있을적 사위스럽고 괴롭던 그 기분이 그만 어디론가 사라졌다. 유쾌하고 즐거웠

다. 모체가 편안하고 회복이 되니, 따라 태중 아기씨도 기운차게 잘도 노시는구나.

심지어 너무 세게 걷어차니 중전마마 낮잠 주무시다 설핏 깬 참이었다. 약이 오른 모후

마마, 여리고 작은 손으로 아랫배를 아프게 걷어차는 고사리 발을 탁하고 때려줄 정도였

다. 

"가만히 있지 못하겠니? 너가 몹시도 고약하여 이렇게 태어나기 전부터 이 모후를 아프

게 하는구나."

귀한 아기씨 태에 담고 있는 몸이다. 회임중인 중전마마께서 산실을 함부로 벗어남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며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마 내어 보내 주실까? 중전은 솔

직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원시원한 성품이 딱 사내 같은 명온 공주마마, 내가

상감께 고변하여 윤허를 받을 것이다 하고는 냉큼 나서시었다. 긴가민가 기다리고 있으려

니, 그 저녁에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오시었다.

"저가 주상과 담판을 지었으니 오늘밤에 당장 나가십시다?"

놀랍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얼떨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악독하고 음침한 기운이 시시각

각 정수리를 쏘는 불길한 이곳에서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지아비 전하께서 섭섭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면서도 못 본 척 외면하였다. 냉큼 가마타고 나와 버린 터였다.

"답답하고 심란하니 마음이 허한 겝니다. 옥체 불편하고 기운이 없을 시에는 잠시 분위기

를 바꿔봄도 좋은 것이오. 며칠 의륭저로 납시어 바깥바람 잠시 쐬고 들어오소. 사고께서

맛난 것을 많이 하여 주신다 하니 잘 젓숩고요. 부대 기운을 차리어 들어오셔야 합니다! 

모처럼 궐 문 나서신 것이니 부원군도 만나 회포를 푸시고요. 환궁 할 적에는 반드시

좋은 얼굴 하고 돌아와야 하오! 짐이랑 약조하오 응? 귀한 우리 중전."

십 리나 말을 타고 가마 옆에서 마냥 따라오시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몇 번이나 권하

니 마지못해 말머리를 돌리신다. 허나 끝내 섭섭하고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끝끝내 다시 돌아 달려왔다. 가마 문을 열라 하더니 한참 동안 손을 어루만지며 놓지를

못하였다.

"많이 그리울 것이니 시간 나시면은 어찌지내시는지 짧은 서찰이라도 보내주오. 짐은 그

저 비의 생각만 할 것이라. 한 닷새 계시되 사정 보아서 몇 날 더 묵어도 될 것이오.

기별하면 짐이 모시러 갈 것이니 잘 지내오. 부대 조심하고요."

서슬 푸른 유등산 수박이 한창 철이라 상에 올랐다. 시원한 속살을 냠냠 몇 쪽이나 드시

고는 윤상궁을 돌아보았다.

"이 씨 모아 심으면 아기씨 거둘 것이니 잘 간수하오."

여간 해선 아니 하시는 실없는 농담까정 하신다. 몇 해 전, 철없던 시절에 아기씨 가진

다고 꽃씨를 뿌렸다가 창피당한 일을 스스로 웃음거리 삼으시는 것이다.

"씨 모아 심어두면 꽃이 피고 이 중전이 아기씨 또 가질 것이니 이번은 틀림이 없을

것이오! 홋호호."

유난히 기분이 좋으신 이유가 있었다. 산실 나온 이후로 뵙지 못한 사친이 다녀가신 것

이다.

"기억나시는지요? 이는 마마께서 어린 날 제일 즐기시던 반찬입니다. 소채 즐기시고 옥

체 정히 간수하시는 것은 알지만은 때때로 비린 것도 좋다 하옵니다. 이 아비가 부러 

사람을 갯가로 보내어 장만해 온 것이니 제발 이 아비 보는데서 모다 젓수시오. 마마."

그 엄한 기풍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들고 오신 것은 커다란 굴비 두름이었다.

알이 땡땡하니 차고 황금빛 배딱지가 싯누렇다. 크기도 참으로 장하니 어른 두 뼘이나 

가는 대딱이었다. 수라상 오르는 놈도 이 정도로 싱싱하거나 통통한 놈이 드문 터다.

얼마나 고르고 고른 놈일지 짐작하였다. 가난한 집 살림에 굴비 한 마리 구우면은 고소

한 냄새에 침을 꼴딱 꼴딱 삼켰다. 귀한 찬이라 조모님 상에만 올리었지. 혹여 한 점

아니 주시나 잠시 곁눈질을 하던 어린 소혜 아씨 중전마마. 어진 조모님. 효성 지극하여

모르는 척, 꾹 참고 김치 조각만 집어먹는 어린 손녀님이 안쓰러웠다. 맛난 머리부분으

로 반 뚝 잘라 밥그릇에 얹어주며 다 먹어라. 나는 입맛이 없단다 이러하였던 굴비이다.

지금은 그보다 더 맛난 것이 상에 올라도 비린 것이 싫어 저분질 아니하시는 처지가 되

었다. 하지만 모처럼 그놈을 보아하니 입맛이 아니 돌 것이냐? 찬모가 새로 지은 하얀

쌀밥에 고놈을 숯불에 구워 깨 살살 흩뿌려 낮것으로 차려내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사친을 뵈오지니 좋은 터. 고소한 굴비 냄새가 유난히 회를 동하였다.

중전마마 모처럼 입맛이 오르시니 상 받으시어 한결 맛나게 젓수신다. 망극하게도 부원

군께서 따님 상머리에 붙어앉아 저분으로 가시 헤치고 통통한 살이며 알집이며를 발라

수저에 올려드리었다. 중전마마 새로 담은 풋남새 겉절이 하여 금세 수라 한 사발을 다

비우신다. 옆에 배행한 윤상궁이며 전의가 행여 저렇게 드시다가 혹여 다시 체기가 

오르는 것이 아닌지 근심하였다. 하지만 끄덕도 없이 상을 물리신다.

그런 다음 어린 소녀마냥 사친의 팔을 꼭 부여잡고 후원을 한 바퀴 도시었다. 정답게

속내 이야기, 못다 한 사연들을 다 털어놓으시고 산책을 하셨구나.

중전마마께서 막 석수라상을 물릴 즈음, 명온공주께서 건너오셨다.

"이곳에 나오시니 보시어요! 당장에 젓숩는 것이 장하고 순조로우시지요. 침수 편안하시

니 이내 용색이 회복이 되셨구먼요. 마마, 즐거우신지요?"

"의륭저에 내려와서 마냥 호사합니다. 저가 톳이 되었다고 상감께서 놀라실 것이야요.

이 중전이 촌것이라 사가의 맛이 맞는 게지요. 우리 아기씨 또한 잘도 노시어 오늘 낮에

는 낮잠을 자다가 하도 걷어차시니 놀라 깨었을 정도랍니다."

중전마마 사방을 살피다가 옥음을 살며시 낮추었다. 사위스러운 것을 가리듯이 의지하고

신임하는 분께 속삭였다.

"사고께만 말씀을 드립니다. 정심각서는 언제서부터 이 중전이 눈을 감고 있어도 어지럽

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그저 날마다 악몽이었답니다. 심사와 몸이 편치 않으니 아기씨

노는 양도 다소 둔하여진 것이 느껴졌어요. 고생을 많이 하였지요. 헌데 예에 내려온 이

후로는 그것이 다 사라지고 편안하옵니다,. 실로 전하께서 기달리지만 않으시면 예서 계

속하여 머물고 싶을 정도입니다. 음, 내일도 나, 그 굴비 구워주시오? 실로 그것을 즐기

니 내일도 그것 하여 다시 한 그릇 다 비울 것이다."

명랑하게 웃으시는 분 앞에서 마주 흐뭇하게 웃으셨다. 허나 명온공주께서는 어쩐지 깊

은 생각에 잠기신 표정이었다.

"참, 사고께 이 중전이 부탁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부탁이라니요? 무엇을 원하시든 다 이루어드릴 것입니다.말씀을 하여 보셔요."

"첫날부터 생각은 하였습니다만, 의륭저 지키는 병사들에게 주안상 좀 마련하여 주십사

하고요. 오늘 다녀가신 사친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 중전이 내려와 의륭저 권속들이 욕을

본다 하시었나이다. 하물며 군졸들이 고생이 심한 지라 내?예에 내려온 이후 집에도 

가지 못하고 밤낮으로 번을 서니 어찌 그것이 사람 사는 형편일 것입니까? 다소간 위로

라도 하여 주어야 그것이 도리이지요. 이 밤서 사고께서 신경 좀 써 주시어요."

"분부 봉행하오리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생각을 하였지만은 번을 서는 처지인지라 술상을

내림이 온당할까 망설였습니다만은....."

"아이고, 이 태평시절에 무슨 일이 생길것이라고 그리 근심하십니까? 이 후원 초당이야

말로 금역이더구먼요. 들어오는 문만도 열개가 넘나이다. 제 곁에서 항시 같이 잠을 자는

윤상궁이며 선이가 있고 또한 전하께서 보내신 정위사가 그림자처럼 따르는 형편입니다.

낼 모레면 내가 환궁을 해야 하니 그 전에 고생한 턱으로 술상 한번 내려줌이 온당할

것입니다."

중전마마 어진 말씀 곁에서 인제 되었다 쾌재를 부르는 것이 바로 윗목의 선이 년이었다.

중전이 궐에서 나온 터로 되었다 기회를 보아 고년을 후려 잡을 참이다. 항시 기회를 보

았다가 살며시 문을 열어 두어라 이미 희란마님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차이다. 야밤에 선

이 년이 문을 열어주면 거복이가 담 타고 넘어 들어 주무시는 중전마마 부른 배를 걷어

차고 목을 졸라 죽일 것이다 이런 천인공노할 계획이 서 있었다.

그러려면 중전마마를 지키는 병졸들 주의를 산만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저가 먼저 나서

서 병졸들에게 술상이라도 하사하시지요 할 참이었다. 그런데 이리 저가 입을 벙긋 하지

않고도 중전마마가 먼저 군졸들에게 술상 내리라 하니 이제는 일이 성사가 되는구나.

속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술 먹는다 시끄러울 참에 저가 눈치 보아 살며시 별당 뒷문을 열 것이다. 항시 눈에 가시

라 어디를 가든지 중전마마 곁에서 그림자처럼 시위하는 정일성이라는 지밀위사에게는

특별히 술잔에 탈 약까지 소매 춤에 넣고 있는 선이 요년! 되었다. 이 밤이 기회이니 

오늘서 큰마마 소원이 이루어질 참이구나. 속으로 씽긋 웃고 있었다.

주안상 잘 차비하여 바깥에 내보냈다. 중전마마께서 하사하시는 상이니라, 마음껏 들라 

분부를 하였다. 명온 공주 몸을 똑바로 하고 중전마마를 바라보았다.

"마마, 이 사고가 묻자옵기, 대답을 하여 주십시오. 언제부터 그리 체기 오르고 음침한

기운을 느끼시며 악몽을 꾸기 시작하셨는지요? 그 전에 말씀하신 대로 재성의 계집이 금

침 진상한 그때부터가 맞나이까?"

"이유 없는 의심이라,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겠나이다 사고. 저가 그렇다 할 것이면 잉첩

에게 어진 덕을 보이지 못함이라. 이를 아시면은 전하께서 비가 부덕이 없고 마음이 넓

지 못하다 타박하실까 두렵거든요. 허나 오직 사고께서만 알고 계십시오. 제 짐작에 그때

부터가 분명하였나이다. 허나 기이한 일이니 저가 그것을 받자마자 꼴 보기 싫어 손에 대

어 보지도 않고 바로 선이를 시켜 중궁전 뒷방에 두어두어라 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이가

이 중전을 상대로 음험한 살을 쏘았다 할 것이면 그것이 기화일 것인데 어째서 아무런

사기도 없는 정심각서 내가 그런 기분을 느꼈을 것인지요? 휴우- 이 중전의 덕이 아직

부족한 것입니다. 그나마 그 여인이 주상 전하를 진심으로 사모한 것은 사실일진데 성총

이 적수인 이 중전은 밉다 할 것이되 전하의 피와 살을 이어받은 아기에 대하여서는 해

칠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라 이리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은, 내가 정심각을 벗어나서

의륭저에 내려오자마자 몸이 쾌락하고 편안하니, 분명 게에 무슨 사위스러운 일이 생겨

있기는 있습니다."

"전하께서 철통같이 방비하시며 날마다 쓸며 닦는 정심각이 아니옵니까? 근심하시는 그

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몸이 나날이 무거워지시니 아무래도 옥체 편안치 아니하시고 그

러다 보니 잠이 설쳐지는 것은 당연지사. 잠이 모자라니 헛것이 보여짐은 당연한 귀결이

라 할 것입니다. 너무 근심하지 마옵소서."

그때 문이 열리고 집안의 동무들이 밤놀이하자 몰려들었다. 낭랑한 목청으로 골계담을

기막히게 잘 읽으시누나. 공주마마 따님으로 한씨 가문에 출가한 무문당 마님. 잠시 본가 

나들이 오신 터로 등 뒤에서 짠하고 꺼내 드는 것이 바로 여인네들이 읽으면 아니 된다

금지한 방각본 소설 <배수옥전>이 아니냐. 이 중전도 기막히게 좋아하는 고로 오늘밤도

몰래 좋은 소설책을 구해 오시오 슬쩍 사정하였다. 마당쇠 놈에게 은밀히 엽전을 주고

사오라 시킨 문제의 바로 그 소설이다. 

중전은 보료에 비스듬히 반만 누워 팔걸이에 고개를 걸치신 편안한 자세를 하였다.

편안하게 빙 둘러앉은 동무들과 함께 눈을 반짝이며 기다린다.

무문당 마님이 읽어주실 글에 기대를 잔뜩 한 얼굴이다. 몇 줄 읽지도 않는 터인데 금세

자지러지는 여인네들 웃음소리가 방문을 울렸다. 흐뭇한 광경을 문밖에서 바라보시던 

공주마마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흘렀다. 안채로 돌아가 항시 곁에 두시는 교전비 상궁을

따로 부르셨다.

"야심한 시각이나 아지는 아범과 같이 지금 당장 자운궁에 다녀오너라. 대부인 마님을

뵈옵고 전하기, 이 공주가 조용히 마님과 그집 강선달을 청한다 하니 밝은 날 반드시 와

주십시오. 심히 긴한 의논을 드릴 것이 있는지라 반드시 와 주십시오. 하여라."

공주마마 키운 유모상궁 허씨가 제 지아비와 더불어 급히 의륭저를 벗어났다. 이러는데

군졸들에게 하사할 주안상이 다 치비되었다 하는 찬모의 고변이 들었다.

"오냐. 머슴들에게 시켜 모다에게 상을 날라다 주어라. 음식이며 술도 넉넉하게 떨어지지

않도록 많이 내가고 중전마마께서 특별히 베푸시는 은전이니 박하다 모자라다 하는 소리가

나와서는 아니 될 것이야. 특히 별당에 상주하는 그 무장은 전하를 곁서 뫼시는 지밀위사

이니 그 지체가 퍽이나 높으신 야안이라. 약주도 귀한 것으로 장만하고 따로이 상을 잘

마련하여 보내드리게."

찬모가 상을 안고 별당 문을 넘어서니 석상같이 연못가에 서 있던 정일성이 돌아보았다.

"무엇이오?"

"중전마마께서 무장에게 밤낮으로 고생하신다 특별히 하사하신 주안상이옵니다. 이 중전

지키려 집에도 못 가고 이리 낮 밤이 없이 번을 서니 어찌 그것이 사람 사는 꼴이라 할

것인가? 부대 이 약주 받으시고 잠시간 고생을 잊도록 하오 이러하셨나이다,"

"내가 목숨으로 중전마마와 태중 아기씨를 지키라 지엄한 어명을 받은 터로 어찌 한 방

울인들 술을 입에 댈 것이오? 술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지게 하며

사람을 방탕하게 하니 그 지엄한 책무를 잊게 하는 것이라. 나는 이 술상을 감히 사양할

것이오."

마루에 앉아 지켜보던 선이 년이 안 되겠다 싶었다. 정위사가 감히 중전마마께서 하사하

신 주안상을 사양하옵니다, 일러바쳤다.

"홋호호. 그이가 원래 그렇게 책임감이 강하고 충성심이 금석이니라. 상의 하명을 그저

철석같이 봉행하느라 그런 것이지. 이렇게 단 한치도 헛틈이 없는 것이야. 어찌 만고의

충신이라 하지 않겠느냐? 정위가는 바깥에 있는가?"

"예. 중전마마~!"

"이 중전을 생각하는 그대의 충심이 어찌 곱다 하지 않으리? 허나 이 중전이 술상 내린

뜻은 취할 만큼 마시고 책무를 다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오. 그저 고생이라 적적하니

한잔 술 받으라 하는 것일세. 선이는 내려가서 위사에게 딱 석 잔만 따라 드려라. 

그 이상은 내가 권하여도 아니 마실 분이라 함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더 이상 사양

하지 마시게나. 내가 이리라도 그대를 위로하여야 마음이 편할 것이니 그대는 이 중전의

뜻을 헤아려주기를 바랄 뿐이오."

이렇게까지 권하시는데 사양함도 도리가 아니었다. 정일성은 망극하게 한 무릎을 꿇고 

선이년이 따라주는 술잔을 받았다. 비록 나인이 따른 술이되 중전마마께서 하사하시는

잔이니 고개를 돌리고 그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원래 술이라면 두주불사. 없어서 못 먹지 있다면 다 마셔버려야 하는 호탕한 술고래가

아니던가? 중전마마를 배행하여 나온 이래. 팔자에 없는 금주였다. 그 술 한 잔이 얼

마나 달았을까? 

이런, 이런! 요 베라먹을 년. 요요 엉큼한 썩을 년을 보았나? 아차차, 일났도다.

그가 고개 돌린 짧은 순간, 선이 년 소매에서 나온 약가루가 슬며시 술병에 떨어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사단이되 믿고 있는 사람이다. 의심치 않았으니 짐작치도 못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정일성. 다시 거푸 두 잔을 더 받아 마셨다. 그 술에 혼몽한 졸음을

일으키는 미혼약이 섞여 있으니 이것 참 근심이구나. 그러고서 시침을 딱 뗀 선이 년.

새침하게 내외하여 다시 마루로 올라가 옆방에 들어가 버린다. 문풍지에 손가락 구멍을

뚫어 보아하니 제 염두대로 일이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참으로 이상타. 자꾸만 졸음이 쏟아지는지라 어쩔 줄 몰라 하며 정일성이 

어푸어푸 세수만 하였다. 얄미운 웃음을 샐긋 머금고 어둠 속에서 지켜 보고만 있을 뿐

이다. 허나 요년, 네가 행한 악한 짓을 어디 하늘님께서 그냥 두고 보실 줄 알더냐?

더없이 저를 신임하고 제 사정 보아주며 어여뻐하신 주인을 배신하고 사지에 내몰려 

하는 흉특한 간계가 성공할지 어디 두고 보자구나!

그럼 그렇지! 요년, 너 딱 걸렸다.

아무 것도 미리 짐작하지 못하였으되 주상전하께서 의륭위 잠저에 오셨구나.

"허어, 저것, 고약하구나. 번을 서는 병사들이 이렇게 술상을 받고 있느냐. 군기가 엉망

진창이다. 어찌 저런 것들을 믿고 중전의 안위를 맡길 수 있으랴? 저 고약한 것들 모다

당장에 주리를 틀어라."

막 동구로 들어오시면서 보아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었다. 철통같이 중전 계신 곳을 지켜

라 그리 당부하고 골라 내보낸 병사들이라. 헌데 이것들이 눈을 부릅뜨고 번을 서도 시

원찮을 판에 감치 창칼 끌러놓고서 방탕하니 술잔 들이키고 있어?

격하고 화급한 성정에 열불이 아니 돋으실 수 없는 노릇이다. 벌써 미간에 퍼런 심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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