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라 하지만 이렇게 생으로 떨어져 얼마나 적적하고 그리우셨을까?
"그리 하옵소서. 지존께서 궐문을 사사로이 나서심은 온당치 못하다 할 것이되 백성사정
알자 하시며 나서기도 한 두 번이 아니지요. 은애 하심이 이리도 다정할 사 어찌 신이
전하의 심회를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까? 헛허허."
황이는 쓰던 문방사우와 교서 두루마리를 단정하게 갈무리 하며 말을 이었다.
"신도 두어 달포 전에 셋째 것 아비가 되었사온데 내자가 파주 처가서 출산을 하였습니
다. 승지의 중책을 맡고 있는 것인지라 상께 아뢰어 윤허를 받고 궐을 나가야 함은 알지
만은, 아무리 그러하여도 내자와 갓 태어난 어린 것이 보고 싶어짐을 참을 수가 없었나
이다. 이는 인간사 가장 자연스러운 근본이니 아무리 중책을 맡았다 하여도 이것을 참
을 수가 없다 싶었지요. 그래서 결국은 체면을 무릅쓰고 밤새 말을 달려 게까정 가지를
않았겠사옵니까?"
"허어, 그래서?"
"삼경 넘어 처가에 도착을 하였는데 후원 초당에를 들어갔더니, 인제 막 몸을 푼 내자가
말로는 어찌 오셨느냐, 곧 돌아 가옵시오 하였지만은 완연히 기쁜 티가 절로 나며 좋아
라 하는 것이 눈물겹더이다. 갓난 것은 잠을 자고 있으니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할머니
옆에서 잠을 자던 졸망한 어린것들이 자다 말고 이 못난 신에게 아버지 오셨다 좋아라
날뛰며 매달리고 볼을 부비고 난리를 치는 것이라. 그것이 바로 인간사 사는 재미다 이리
싶었나이다. 헛허허."
"말만 들어도 경의 집안이 화락하고 웃음 넘치는 줄 알 것만 같소. 허허, 부럽구먼."
"뉘는 안해와 어린 것을 챙기고 은애하는 것에 대하여 소신더러 경박하고 사내답지 못
하다 흉을 보는 것도 있사옵니다만은, 소신은 그리 생각지 않나이다. 내조라 할 것이면
사나이 일에 있어 근본이며 내실이 안정되어야 사내가 마음 놓고 큰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공자께서도 가난한 집안의 알뜰한 내자는 참으로 홍복이니 아끼고
은애함이 당연한 것이라 하였사온데 소신 같은 필부야 그저 성인의 그런 가르침에 충실
하옵지요. 가당찮은 이야기로 괜히 주상전하의 귀를 더럽혔나이다. 헛허허. 신의 모자
란 허물로 삼으시옵소서."
허물없이 아뢰는 도승지의 이야기에 가득히 미소를 지으며 왕은 손을 저었다.
감출 수 없는 부러움이 용안에 자욱하였다.
"허물이라니!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유쾌한 이야기로고. 경의 말은 참으로 사리분별
바르고 귀감이 될만한 이야기였어. 짐 역시도 경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거든.
생각해보면, 짐이 어질고 총명하며 부덕 높은 우리 중전과 같은 이와 연분 맺지 못하여
하잘것없는 계집을 안곁으로 삼았다 할 것이면 지금껏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정사를
어지럽히는 어리석은 왕이었을 게야. 천한 잉첩의 치마 자락에 휘둘려 천지분간 못하고
미혹한 터로 제멋대로 종사를 더럽히는 허수아비라 우세당하고 있었겠지. 경망은 송구
하고 민망한 짐의 이 속내를 알 것이다. 알뜰한 내조가 사나이 일에 있어 근본이라 함
은 만고의 진리이니 우리 중전께서 그 전에 이 왕의 잔인한 조롱을 받고 그저 뒷방
차지 구박이 극심하였을 때도 조용히 참으시며 허물을 말없이 가려준 것은 경도 잘 알
것이오. 그런 어진 터이니 한결같이 어리석은 짐을 아껴주고 은애하여 주신 것이라.
그이의 정성으로 눈을 바로 뜬 것이 아니겠소? 참으로 그이는 짐에게 그저 생보살이요
선녀라 할 것이야. 짐이 오늘날 이나마 정신을 차려 왕 된 위엄을 되찾았다 하면은 오직
비의 덕분이라! 게다가 이날서는 턱하니 회임을 하시어 사직의 대통을 이어주시기까지
할 것이니 어찌 그이에게 고맙고 감사하지 않으랴? 하물며 우리 중전께서 의대까지 손수
지어준다는 얘기는 아마 경이 처음 들을 것이야?"
내관에게 미복 준비하라 명한 왕이 돌아서며 황이에게 자랑을 하였다.
"짐의 속의대까정 비가 다 지어준 것이거든. 그냥 짓기만 하던가? 향물 뿌려 다림질하여
깃마다 꽃수를 놓아주니 바로 짐은 비의 정성과 사랑을 입고 있다 할 것이야. 속의대
말고도 버선이며 수건이며 줌치랑 심지어 용포까지 다 말라준다오. 그이의 침선 솜씨가
얼마나 영묘로운지 경은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야? 상선은 의롱 속에 걸어둔 도포 한번
꺼내오너라."
두 해 전, 어린 중전마마께서 정성으로 지어준 무명 도포. 지아비 전하께 처음 지어드린
의대이다. 소박한 그 옷을 왕은 지금껏 세상에서 제일가는 보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깨알같은 바늘 땀 하나하나가 바로 중전마마 정성이요 지아비 향한 수줍은 연심이 아닐
것이냐? 그저 사모하옵니다. 신첩을 보아주소서 애원하는 애틋함의 결정체라. 어찌
귀중하고 사랑스럽지 않을 것이냐? 새삼스레 소중하게 쓰다듬다 왕은 황이에게 보라 내
어주었다.
"이것 좀 보아! 경도 아마 이리 영묘로운 침선은 처음 볼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 중전
의 손끝이거든. 짐이 도통 아까워서 감히 어깨에 걸치기가 무서운 것이야. 참으로 공규
높으시기로 따를 여인이 없는 참이니 짐이 어찌 장가를 잘 들었다 하지 않겠어? 저기에
놓인 가리개도 중전의 솜씨이니 거의 신기라 할 것이야."
"아이고 전하, 참말 아름다웁나이다."
상감마마 비위 맞추어 듣기 좋으라 아첨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중전마마의
솜씨가 기가 막히오 하는 소리는 호조좌랑의 입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보아하니
그분의 솜씨는 그저 짐작한 것보다 수십 배는 더 윗길이었다. 연치도 어리며 지엄한
지존이다. 바늘귀 한번 감지 않아도 될 분의 솜씨가 수십년 수침에 골몰한 상침보다
더하였지 못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 두루마기 지으신 것을 따져보니 주상께서 한창
월성궁 계집에게 미혹하여 중전마마를 모질게 소박주실 그때였다. 무정한 지아비께 정
성으로 의대를 장만하여 드린 터로, 이 바늘땀 하나하나가 중전마마 한숨이요 눈물이었
다.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를 것인가? 이런 정성뿐인 의대를 받으신 후, 아무리 냉정하고
쌀쌀맞은 분이라 하여도 속으로는 감사하다 싶었을 게다. 중전마마 일편단심 고운 정성
을 느끼셨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 곁에서 뫼신 황이도 그러하였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토록 허무하게
월성궁 여인이 주상의 성총을 잃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 여인에 대한 정분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고 가며 자라온 깊은 첫사랑이었다.
젊은 주상의 동정을 바친 첫 여인이라, 끈끈한 집착은 또 얼마나 대단하였을 것인가?
솔직히 희란 마님에 대한 주상의 은애함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풋정은 아니었다.
깊고 첩첩하여 감히 어떤 여인하고도 견줄 수가 없었다. 물불 가리지 않는 사춘기의
열정이다. 얼마나 치열했을까? 게다가 혈육 하나 없는 홀홀단신 어린 왕이 보위에 오른
후 가졌을 커다란 압박감과 외로움을 씻어주는 곁붙이다. 의지할 수 있다 믿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월성궁 여인이며 외숙인 좌의정이었을 것이다.
격하고 편협하며 한번 미치면은 앞 뒤 가리지 않는 성정이시다. 희란 마님에게 미쳐
그녀가 시키는 대로 저지른 어리석은 일이 어디 한두가지였으랴.
길러준 경덕궁 의모님들을 다 내쫓고 유일한 혈육인 왕대비전과도 척을 져서 문안인사
도 칠 팔 년을 하지 않으셨다. 조하의 어진 선비들 다 쫓아내고 뇌물 바쳐 벼슬 얻은
간신들로 조하를 채우신 터였다. 민생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저 풍류잡이라. 사시사철
향락에 세월아 네월아 하신 터였다. 사직의 안주인인 중궁전을 간택할 때도 무엄하게
월성궁 계집이 손가락질하였다 주상과 신첩의 사이 방해되지 않을 것으로 허수아비
노릇 시킬 계집을 뽑으십시오. 하여 집안 볼 것 없고 부원군 세력 없는 중전마마를
간택케 하였다는 험한 소문까지 퍼졌다. 그렇게 위세 당당하였다. 손가락 하나로 주상
을 오라 가라 할 정도이며 심지어 용안에 제 비위 맞추지 않았다 하여 손톱자국까지 낸
다 하지 않던가? 그런 여인이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못났다 무시한 중전마마에게 밀려
났다 홀라당 성총을 잃고 몰락이라. 과연 누가 짐작하였을까?
'보기만 하여도 현란하고 풍염하여 모란꽃과 비교한다 하는 월성궁 여인이 그 화려한
미모와 격정적인 정해로 주상을 그저 거미줄처럼 칭칭 동여맨 것이었지. 어질지는 몰라
도 초라하고 못났다 하였던 중전마마께서 어찌 전하의 성총을 전부 빼앗았는지 실로 궁
금하였거늘...... 월성궁 여인만을 총애하시어, 보잘것없다 구박하시어 심지어 부름하시
기도 존대는 커녕 이것저것으로 물건인 양 부르며 조롱하여 버려두신 중전마마였지 않더냐?'
헌데 이상한 일이다. 언제적부터 그렇게 주상 당신이 먼저 구박하고 뒷방 두어두신 분을
향해 은애함이 깊어가는 것이 보였다. 괜히 겉으로는 심술부리고 짜증내면서도 슬금슬금
교태전에만 들어간다. 겉태로야 예전마냥 그저 억지트집을 부렸지만, 누가 한마디 중전
마마에 대한 궂은 소리를 하면 절대로 못참아하였다.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분이시지. 그런 분이 외사랑을 하였던 게야. 수줍어서 차마 말도
못하고 곁에서만 빙빙 돌던 일이라.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무도 몰랐었다.'
오죽했으면 갈가마귀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헌데 어찌 주상께서 그런 희란 마님을 버리고
그리도 못났다 박대하던 중전마마를 향해 그토록 깊은 사랑을 품으셨던 것일까?
그러나 이제 황이는 그 의문에 대하여 해답을 찾았다 생각한다. 아름답고 정성뿐인 도포
를 보던 순간이다.
'항시 따뜻하시고 다정하시었다. 전하께서는 비록 겉으로는 강하고 도도하신 분이되 실상
천지간 외롭고 쓸쓸하신 분이 아니냐 언제나 따스한 배려와 정성에 목말라 하셨다.
월성궁 여인이 성총을 이용하여 제 욕심만 차리고 겉으로 시늉뿐인 정성이었으니 그는
거짓이었다. 언제고 그 속임수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지. 중전마마께서 비록 가례
초입부터 전하께 그저 수모 받고 박대 당하였으되, 당신의 순결한 정성을 지아비 전하
께 늘 바친 참이라 어찌 그 정성과 마음을 몰랐으랴.'
드물게 중전마마와 나란히 앉아 강학을 하실 때도 있었다. 아니 보시는 척하면서도 넋을
잃고 중전마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립고도 은근한 빛이 용안에 가득하였다. 제발 그대도
짐을 좀 보아주어, 사모하여 주어 애원하는 듯 하였다.
'어느 누구도 먼저 전하께서 중전마마를 홀로 외사랑하였음을 모를 것이야. 이 의대를
보아하니 인제야 전하께서 중전마마를 먼저 사모하게 된 이유를 알 것만 같아. 이 정성,
이 지순함을 어떤 사내가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니 두수 아우도 그 무엄하여
기막힌 심사를 간직한 것일 테고 말야.'
미리 섬돌 아래 내려서서 왕을 기다리며 황이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중궁전 정조를 더럽힌 음적이다 하는 기막힌 누명을 쓰고 현산으로 귀양 간 강두수.
황이와는 친분이 극히 깊어 형님 아우하며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지조 높고 고결한 선비로서 그런 망신은 일생 가야 지워질 수 없는 억울한 상처.
자진을 해서라도 이 몸과 중전마마의 누명을 씻을까 이 아우가 밤마다 생각을 하였나이
다."
복권되어 억울한 죄가 풀리었다. 환도한 그가 다시 성균관 진감으로 입시하였다. 위로
삼아 주석을 마련한 그때였다.
'허나 저가 자진을 하면 무엇인가 거리낀 것이 있어 죽었다 말할 것이라. 저의 이름에는
상관이 없되 청명하신 중전마마께 애먼 누명이 더해질까 두려웠습니다. 차마 죽지 못하고
강잉히 수치를 견디고 참아냈나이다. 이제 다 지나간 광풍이옵니다만은...."
다 지나간 바람이다. 인제는 술자리의 농거리. 황이가 술잔을 주며 우스개 하였다.
"어이하여 지엄하신 중전마마를 여인으로 한번 곁눈질하였다가 그리 욕을 치루었노?"
강두수와 그의 안해 문씨는 부부지간 아름다운 표상이었다. 서로 사모하고 존경하는 사이
로써 귀감이라. 이름이 높았다. 반듯하고 곧다. 길이 아니면은 가지 않는 고결한 인품으
로 소문난 강두수 그가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릴 리가 만무하다. 하물며 다른 여인도
아니고 지엄한 지존이신 중전마마를 향해 감히 언감생심 연심을 가졌을 것인가?
그리하여 한마디 가벼운 농담이었다. 그때까지 도승지는 꿈에서도 그 속내를 짐작을
못했다.
헌데 이 이 좀 보소? 염직하고 맑으며 강직한 그가 술잔을 단숨에 마시더니 탁 놓았다.
황이를 똑바로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핏발이었다. 옷깃을 여미고 눈 똑바로 뜬 채 경건
하게 대답을 하는데 기가 막혔다.
"꽃이 볼품은 없어도 꿀 많고 향기 진하면 벌 나비 날아들어 오래 머무는 법입닏,.
형님께서는 사사로와 이 아우더러 아무도 모르는 속내를 물으시는데 딱 한번 고백을
할 것입니다. 이 비밀은 관에까지 지고 가시기 바라옵니다. 이 아우, 감히 말씀 드립니
다. 중전마마께서 사가의 처자이시고 저가 상가전이라 할 것이면 목숨을 걸어놓고 그
처자를 안해 삼기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영리하고 다정하시며 어지시오. 또한 여인의
부덕이 높으사 손끝 야무지시니 못하는 일이 없사옵고 남의 어려운 사정 먼저 헤아리는
그 덕성이 참으로 넓고 깊어 도무지 범인으로서는 따라갈 수가 없는 분입니다.
그 눈빛은 연화이옵고, 미소 지을 적에 볼 것이면 바로 관세음보살의 미소라.
지엄하신 분을 두고 이런 말을 하면 대역죄라 할 것이지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분이시오."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허어, 이런 사람 보았나! 식전 자네가 술에 취하여 참으로 제정신이 아니구먼!"
황이의 엄숙한 힐난 앞에서 그 사내의 미소가 애잔하고 쓸쓸하였다.
"말을 하자면은 참말 첩첩하옵니다. 형님. 난생 처음으로 그 분 때문에 술도 퍼먹어 보
았고, 어찌 나는 신분이 미천하여 이 어여쁘신 처자를 그저 고두하고 마주 바라보지도
못하나 싶어 속이 문드러진 것이니.... 늘 구박덩어리로 소박 받으시는 귀한 분의 그
가련한 모습을 볼 것이면 딱 죽고만 싶었습니다. 이 아우, 형님. 심지어 손 부여잡고
궐 문 넘어 같이 도망치자 말하고 싶었나이다. 평생 초부라도 좋으니 산골서 둘만 숨어
살자 애원하고 싶었나이다. 민망하고 수치스럽습니다. 저는 이미 심중으로 안해를 배반
한 것이라, 진정 부끄럽고 망극하옵니다."
그때 솔직히 황이는 뒤로 넘어갈 뻔 하였다. 중전마마의 심사는 어떠한 것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는 중전을 한 여인으로 사모하였다 하는 고백이 아니냐, 그때 두 사람이 정분
이 났다 하는 구실은 일면 사실이었던 게다!
인품 고결하며 학문의 경지 유별나고 허투로 헛된 농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하는 강직한
강두수이다. 그런 그가 이런 고백까지 할 것이면 중전마마에 대한 강두수의 사모지정은
깊고도 질긴 것이었다. 돌 같은 사내를 매혹시킬 정도라, 중전마마 숨겨진 아름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싶었다.
"알면 알수록 고우시며 아름다운 분입니다. 참으로 상감마마께서 국모는 기가 막힌 분으
로 잘 간택한 것입니다. 형님, 이것으로 이 아우의 심중 말을 끝낼 것이니 평생 혼자만
아옵소서. 이 아우 문드러진 심사라 이미 깨끗이 자른 후입니다. 중전마마도 모르고 하물
며 저의 안해는 더더욱 모를 것이며 저 자신도 잊었나이다."
그러고서 헤어졌다. 전하께서 만에 하나 이 일을 아시면 당장에 강두수 목이 남아나지
못하리라 싶었다. 평생 도승지 혼자만 간직할 비밀이라. 입다물고 넘어가자 싶었다.
전하께서 여염집 선비마냥 용포 벗으시고 옥색 비단 두루마기에 옥관자 두른 갓을 쓰고
나오신 것은 그때였다.
대궐 후문이 조용히 열렸다 닫히었다.검은 그림자가 대여섯 그 문을 나섰다. 주상 전하
께서 타신 날랜 말을 가운데 두고 등에 장검을 짊어진 윤재관을 비롯한 지밀위사 대여섯,
도승지 황이와 장내관이 호종하였다. 급히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가 잠이 든 도성을 어지
럽혔다. 그 말들이 달려가는 곳이 어디냐? 당연히 의륭위의 저택이다.
상감마마께서 지어미 그리운 정을 참지 못하고 말달려오시는 그 시각.
중전마마께서 퍽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었다.
부마도위이신 의륭위 박이서 대감 이하 모든 식구들이 여간 조심함이 아니었다. 귀한
아기씨 마마 회임하신 중전마마를 감히 누거로 모시고 온 터다. 그 망극함과 황공함이
하늘을 찌르는 차였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정성을 다하였다.
바늘끝만큼이라도 불편함이나 불쾌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실로 그 대접이 정중하고 극진하여 중궁전에서보다 더 호사를 합니다 치하를 하실
정도였다. 의륭저 큰 며느님 머무시던 후원 연못가 별당에다 중전마마 거처를 마련하
였다. 인제 아침저녁으로 슬슬 찬바람이 불어오는 참이다. 공주께서 하가를 하실 적에
모후이신 왕대비전하께서 직접 하여주신 비단 솜 얇게 두른 차렵이부자리 내어다가 깔
아 드리었다. 새벽이면 불목하니도 시키지 않고 부마도위가 직접 주무시는 방아래
아궁이에 불을 지펴 드리었다. 매운 연기가 나면은 아니 좋을 것이다 하여 향목으로 만
든 백탄만 골라 때는 정성이니 오죽할까?
한참 철이니 연못에 붉고 하얀 연꽃이 장한 구경거리였다. 명온 공주께서 입 꼭 다문
연꽃봉오리 안에 차주머니를 넣었다. 이슬 맑은 아침, 저녁때 넣어둔 차 봉지를 꺼내어
정한 물로 화롯불 피워 중전마마께 차상 보아드리었다. 꽃잎 속에 잠겨있던 차는 유난히
향기가 진하고 운치롭다. 중전마마는 그 찾잔을 들 적마다 궐에 돌아가면 나도 전하께
이리 하여 드려야지 다짐이었다.
연치 비슷한 사촌시누이 되시는 분도 두 분, 의륭위와 공주마마 슬하로 이미 성가한 아드
님 많으시니 며느님만도 여러분이다.
적적하게 홀로 지내시던 정심각하고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중전마마 윤상궁에게 내내
하소연하기 바로 예가 사람 사는 곳이오, 좋구려. 한숨을 몇번이고 내쉬며 부러워하였다.
같이 담소하며 장난질 칠 동무도 많구나. 비슷한 또래라 중전은 이곳으로 내려오신 이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