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200)

홀아비 생활을 열 달 동안 하라 한다. 가슴이 덜컥 떨어지고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러나

왕대비전하의 완강한 고집은 까딱도 없었다. 사뭇 엄하시었다.

"법도가 그러합니다. 혹여 중전께서 옥체 잘못 간수하여 아기씨에게 탈이 나면은 좋으시

겠소? 지아비이신 전하께서 그를 잘 알고 먼저 근신하셔야지요. 태교는 부모가 모두 하는

것이예요. 물론 모후께서 가장 조심을 하시는 것이지만 부왕 되실 전하께서도 마찬가지로

옳고 번듯하게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아기씨에게 사기가

덤비지 않는 것이오. 매사 조심함이 필요합니다. 내 말을 명심하여 잘 처신을 하시구려."

"기쁘게 하명을 받자올 것입니다. 마마"

왕은 나붓이 대답하는 중전을 향해 찌릿 눈으 흘겼다. 무어라, 하명을 받아? 짐을 열 달

동안이나 홀아비 신세로 만들어 놓았는데 무엇이 기쁘단 말야? 저절로 입이 불퉁하게 

댓발이나 튀어나왔다. 아이쿠, 좋은 일 하나에 나쁜 일 하나로구나. 저이를 지척에 두고

서도 건드리지 못할 참이라, 그립고 아쉽고 갈증이 차서 딱 말라 죽을 참이다.

그러나 왕 또한 어쩔 수 없다. 법도라는데! 엄히 대답을 재촉하는 조모를 향하여 마지못

해 그러 하옵지오! 말만 하였다. 어쨌든 아기씨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 하니 겁이 좀

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 대답하면서도 아앙불락. 속으로 뉘가 그 말을 듣나? 홀로 중

얼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저렁 여하튼둥, 지금 오직 기쁨과 즐거움뿐인 곳은 교태전이다.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이라 하면, 오래도록 기대리던 지어미 회임 소식 들은 젊은

상감마마요, 자랑스럽기로 치면은 턱 하니 배태하여 정궁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참인

중전마마였다. 단 한시도 마주잡은 손을 풀지 못하는고나. 싱긋 생긋 서로 나누는 눈길

이 얽히어 좋아 죽는 정분이다. 대견하고 장하고 어여뻣다.

아이고, 빨리 좀 우리 둘만 있게 하여 주시지!

저녁 늦도록 회임하신 여인네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며 몸가짐 조곤조곤 타이르시며 아

니 나가시는구나. 몇 번이고 힐끗힐끗, 노인께서 곤치도 않으신가? 야심한데 왜 창희궁

에 아니 나가시나. 빨리 나가시어 침수듭시지. 흥! 철없는 우리 상감마마, 차마 말은

못하고 원망 가득한 눈초리로 곁눈질만 하시누나.

마침내 왕대비께서 몸 조심하오 당부, 당부하시고 나가시었다. 배웅하고 돌아서자마자,

왕은 냉큼 생고집을 부려 중전을 넓은 등에 기어코 업고야 말았다. 생각 같아서는 수백

리 길이라 하여도 이 어여쁜 사람을 업고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회임. 이것 할만 하구나. 중전은 난생 처음 전하의 등에 업힌 대호사를 하였다.

나붓이 중전을 보료에 앉히고는 작은 손을 잡아 용안에 대고는 실없이 말도 않고 벙싯

벙싯 웃기만 하였다.

"짐이 무엇을 하여 주까? 그저 말만 하오.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이다. 고운 비단옷 하여

주까? 아니면은 금강석 박은 보배 떨잠 하여주까? 어이구, 이 가엾은 사람을 어찌 하지?

짐이야 원자를 얻게 되었으니 좋지만은 비는 이 여린 몸으로 열 달 동안 무겁게 아기씨

담고 있어야 하니 말야. 가엾고 불쌍하여 못 견딜 참이다. 참, 무엇 드시고 싶은 것이

없소? 많이 젓수셔야 하오, 그래야 태중 아기도 강건하지요. 음, 하귤을 드실 것이야?

여봐라, 곤전께서 듭시게 소반과 대령하여라."

신이 난 상감마마, 큰소리로 소반과를 재촉하였다. 자신이 드실 생각은 아예 없다.

상머리에 딱 붙어 앉아 중전은 손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게 막았다. 손수 어수 들어 

연하여 노란 귤을 열 개 넘어 까 주었다.

"젓수시오. 많이 젓수시오. 응?"

아무리 참으려 하여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마냥 행복하니 저절로 즐거운 웃음이

터졌다,. 주상전하의 환한 웃음소리가 뒤로 숨죽인 중전마마 수줍은 웃음소리가 즐거이

얽히었다. 방문 안 즐거운 광경에 문 밖의 엄상궁이며 윤상궁, 몽상궁과 박상궁 모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참이다.

"천하를 다 얻으신 기분이실 겝니다. 이제는 저가 근심이 하나 없어요! 실로 중전마마께

서 전하의 복록이십니다. 필시 단번에 원자 아기씨를 생산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때 사가에서 들어온 음식 치레를 정신 없이 드실 적부터 알아보았답니다. 홋호호

헌데 아까 왕대비마마께서 따로 지내시라 하셨을 적 용안을 보셨는지요? 그저 앙앙불락이

시더군요."

몽상궁의 말에 윤상궁이 한마디 하릴없는 근심이었다.

"잠시도 곁에서 떼 놓고 싶지 않은 분 아닙니까? 휘강전 마마께서 반드시 따로 지내라

하명하셨으니 원참! 아이고, 필시 이 밤에 그 그리운 정을 다 푸실 겝니다. 중전마마 옥체

에 행여나 누가 아니 될지, 근심이오."

"그것을 모를 분이 아니시니 근심 마오. 하지만 과연 전하께서 휘강전마마의 하교 말씀

대로 순순히 중궁전에서 물러나실까요? 잠시라도 아니 보면은 그립고 속이 타서 안절부절.

마냥 좋아 죽는 정분이신데 억지로 떼어놓자 할 것이면 두 분이 서로 그리워 못살 겝니다.

아마 필시 주상 전하께서 아니 나간다 깡고집을 부리실 걸요?"

아니나 달라? 그렇지 않아도 방안에서는 지금 전하, 중전마마께 애원하고 계시는 중이었

다. 지아비 손길 피하여 저만치 새침하게 돌아앉은 중전마마, 애걸복걸 전하께서 무릎

꿇고 애원하여도 요지부동이다.

"아이, 우원전으로 가시라니까요! 할마마마 하교 말씀을 못 들으셨나이까? 신첩 곁에

오시면은 절대로 아니 된다 하셨지 않습니까?"

"딱 이 한밤만 같이 있는다니까? 마냥 떨어져 지내야 하는데 한번만 보아주오. 응?

짐을 이렇게 생짜 홀아비 신세로 만들어놓고 중전은 마음이 좋아? 딱 한번만!

그냥 손목만 잡고 잔다니까? 정말이야. 약조할 테야. 뉘가 건드린다 하였니? 괜히

먼저 이런다? 짐이 명일부터는 말을 잘 들을 것이니까, 이 밤에는 우워넌 가라 말하지

마오. 비와 우리 아기씨랑 딱 한번만 같이 자고 싶을 뿐이라고."

"허면은, 금침 두 채 내리라 할 것이어요?"

"아, 두 채든 세 채든 내리소? 짐은 그냥 예만 있달지면 좋다니까!"

그렇게까지 애원을 하는데 끝내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금침 두 채 내려 손만 잡고 잔다 약조하고 한발 물러났다. 전하께서 서온돌에

머무르는 것을 간신히 허락하였다.

선이 년이 들어와 금침 두 채를 펴드리었다. 처음에 왕은 약조한대로 점잖게 한 뼘

만치 떨어져 펴 놓은 요 안에 쑥 들어가 눕는 척 하였다. 이불 깃 사이로 서로의 손

내밀어 꼭 잡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 마마, 어쩐지 허전하고 쓸쓸한 심사가 똑같았다.

정분이 회복된 이후로 한방에서 다른 금침 펼치고 지낸 적이 어디 있는가? 심지어 중전

마마께서 달거리를 하실 적에도 같은 금침, 한 베개 베고 누워 꼭 안고 주무셨다.

헌데 이밤의 일이라, 비록 떨어져 있기는 한 뼘이되 마음으로 느껴지는 거리는 천리만리

인듯 싶었다. 서로가 조용하니 억지로 잠을 청하여 보았다. 아쉽고 미진하여 침만 꼴딱

꼴딱 삼키고 있구나. 이윽고 상감마마, 아이고, 나는 모르겠다 하면서 중전 이불 속으로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나, 약조 아니 지킬 테야. 중전이랑 같은 금침에서 잘 것이야!"

"아이고, 마마. 이러지 마옵사이다!"

놀란 중전은 앙탈하였다. 가녀린 팔로 넓은 가슴을 토닥토닥. 억지로 나가라 밀어내어

보지만은 어찌 힘센 사내의 힘을 이길 것이냐? 은애하는 지아비 하는 꼴 좀 보소.

인제 헤어지면 다시는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데 어찌 하란 말이야? 징징 우는 소리까정 

내는구나. 마음이 자꾸 약해진다. 결국 예전처럼 같은 금침 한 베개를 베고 꼭 안았다.

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회임 하였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야 말았다. 아직은 납작한 아랫배를 슬슬 쓰다듬는 일이다.

이 안에 우리 아기씨 있거니. 그저 애틋하고 귀엽고 고맙고 장하였다.

"예에 우리 아기가 들어 있는 것이라 이 말이야? 신기하다. 응? 참말 신기하여. 얼마나

자랐을까? 보소, 중전. 짐이 어젯밤서 백호 꿈을 꾼 것이 아니겠어? 그래서 소격전 태

사에게 하문하였기로 비가 회임을 할 것이다 알았지 무에야? 헌데 이미 이 놈이 태중에

있었다 하니. 핫하하! 헌데 언제 회임을 한 것일까? 비는 짐작할 것이잖어? 언제 아기씨

를 잉태한 것 같아?"

푹하니 가슴에 안긴 작은 얼굴이 빨갛게 변하였다. 따끈한 입술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때, 눈 오는 날에..... 동굴 안에서..... 음,음? 그러하였구나! 유쾌한 웃음소리가

문풍지를 새어 나왔다. 

"우리가 천지신명 앞에서 혼인한다 맹세하고, 토지신이며 삼신할미에게 금돈으로 공물

을 받쳤더니 말야. 참 잘하였지? 우리 소원을 들어주신 게다. 산중 동굴서 잉태된 터이

니 원자가 나오면은 야생짐승같이 씩씩할 게야. 음, 음. 짐이 또 그때처럼 그리할까

보다."

"손만 잡고 주무신다 약조하셔 놓고서? 아이 마옵소서. 신첩을 가까이 하시면은 아기씨

에게 아니 좋을 것입니다."

"흥, 어제도 삼경 넘어까정 안겨놓고서? 하루 상관이 그렇게 차이 진다던가? 만약에

지금 회임 한 줄 몰랐다면 짐이 가까이 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것이면서?

다 생각 나름이라고."

왕은 깡고집을 피웠다.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나중엔 냉큼 일어나 두 손 모으고 싹싹

비는 시늉까지 하였다.

"살아가는 일이란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것이 제일 좋다 하더라. 당장 내일부텀 우원전

에서 침수해야 하니 말야. 출산하실 때까정 이 아름다운 맛매를 못 볼 참이라. 갈증

나서 못살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딱한 터이니 짐을 밀어만 낼 것이니? 딱 한번만 이

밤에 허락하지? 응? 짐이 알아서 아기씨 아니 다치게 할 참이다. 참말 자꾸 야속하게

굴 것이면 중전을 미워할 테야?"

지아비께서 이렇게 안달복달 애원이라. 심약한 중전은 끝까지 버틸 수가 없었다.

못 이기는 척 아이, 이러시면은 아니 되옵니다. 하면서도 슬며시 여린 팔로 목을 끌어

안았다. 어느새 자리옷은 풀어져 금침 바깥으로 내 동댕이쳐지고 젊고 아름다운 두

나신이 한줄기 노래로 얽히었다.

<제8화> 피접 나가신 날에....

달은 밝으나 같이 볼 사람이 없구나.

밤은 길되 같이 웃으며 온기를 나눌 분은 곁에 아니 계시는구나.

남들은 짧다 하는 여름 밤. 풀벌레가 찌르르 구슬피 울고 얄미운 달빛은 심란하게 곱기

만 하다. 도무지 적적하여 못 살겠도다. 만삭인 중전을 아무도 몰래 의륭저로 피접을

내보낸 후 짝 잃은 기러기요 졸지에 생짜 홀아비가 되었다. 상감마마 밤 내내 우원전

침전에 홀로 누워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시각은 이미 야심한데 도무지 잠이 찾아오지 않는구나. 쓸쓸하고 허전한 것이 가슴이

한쪽 뭉텅 뜯어져 나간 듯하였다. 그 사이로 휑한 바람소리가 스산하게 들고나는 듯

하였다.

'이것이 참말 몹쓸 병이로다.'

왕은 벌떡 일어나 지창을 활짝 열었다. 의륭저가 있는 동쪽을 향하여 목을 길게 뺐다.

'중전이 궐에 계시어도 산실에 듭신 터라 보지 못하는 것은 똑같은데 말야. 겨우 담벼락

하나 넘어갔다고 이 마음이 이토록 허전하구나. 참말 큰일이로다. 오직 한 사람, 비의

곁에서만 행복하고 충족이 되니 어찌 할 거나? 휴우-'

짙은 한숨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의륭저에 잘 도착을 하였다 모르겠구나. 사고께서 중전을 잘 돌본다 하였으니 걱정은

하지 않되, 궐 안에서조차 그이를 해치려 손을 쓰는 흉악한 것들이 있는 형편으로 행여

방비가 허술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침이 되자마자 재관이를

시켜 호위 무장들을 서넛 더 몰래 의륭저로 보내어야 하겠다. 일성이가 늘 곁에 붙어있

다 하여도 마음이 영 편안치 않거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왕은 다시 차갑기만 한 이부자리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억지로 고

독한 잠을 청해보았다.

자 이리하여 궐 내 아는 이 거의 없이 몰래 중전마마께서 의륭저로 내려가신 지가 벌써

닷새째다. 

그날 오후, 왕은 도승지를 앞에 두고 서안에 팔을 기댄 채 낭랑한 옥음으로

세제 개편에 대한 교서를 쓰게 하고 있었다.

심중에 묻어두었던 어지를 막힘 없이 불러주시니 아무리 달필이라 하여도 도승지 황이

의 손이 성상의 목청을 따라가기가 바쁘다. 그러다가 왕은 문득 내관더러 창을 열어라

하였다. 시원한 바람이 청량하게 불어 들어왔다. 맑은 바다 빛 하늘 위로 붉은 너울이

뉘엿뉘엿 내리기 시작하였다. 저절로 심중이 상쾌하고 또한 기운이 번쩍 났다. 허되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용안에 심회가 그득하였다. 

오정에 중전마마께서 보내신 고운 사간을 받았다. 너 닷새나 지나서 금세 들어오시오?

하였기로 예정대로라면 이날, 중전마마께서는 회궐을 하셔야 했다.

의륭저에 내려가신 후 즐겁게 잘 주무신다 채증도 씻은 듯이 가셨으며 저분질도 한결

나아졌다 적어놓았다. 항상 적적한 궐에서만 계시다가 동무 많은 곳에 가셨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연치 비슷한 의륭저의 따님, 며느님들과 더불어 소란스러이 지내시니

그 동안 심심하셨던 것을 다 잊고 한창 장난질에 행복하다 한다. 그런 글을 읽은 터

인데 당신이 보고잡다 하여 당장에 들어오시오 야속하게 재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서찰을 들고 온 윤상궁더러 

"곤전께서 게서 즐겁다 할것이면 사나흘 더 있다가 오시라 하여라" 분부하였던 것이다.

허나 말은 그리 하였으되 애잔한 지어미에 대하여 그리운 것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말 못하고 그리워만 할 뿐이다.

"불 더위라 하더니 인제는 바람이 서늘하구먼."

"처서가 지나간 터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돋을 때입지요. 헌데 전하, 어찌

용안에 심회가 그득하시옵니까?"

항시 곁에 시립하여 지내는 터라, 황이는 용안에 어린 기색이 다른 날과는 다르다 함을

이내 눈치챘다. 온화하고 민첩하며 맑은 인품, 깨끗한 일솜씨와 더불어 주상의 가장 큰

신임을 받고 있는 총신이다. 다른 사람에게와는 달리 사사로이 시시콜콜한 심중의 의사

를 도승지에게만은 털어놓는 형편이었다. 왕이 싱긋 웃었다.

"음음, 남들이 들으면 짐이 놀림감이 될 것이야. 핫하하. 경이 짐과 사사로우니 말을 

하는데 말야. 지금 문득 중전의 생각을 하였다오. 아모도 모르는 일인데. 지금 비가

의륭저로 내려가 계신 터이거든. 이 근래 어쩐지 사위스러운 기분을 자주 느낀다 하고

없던 어지럼증 심하며 체기가 가라앉지 않아 짐이 근심한 것은 경도 알지 않소? 하여 

중전의 그 사정 보아진 명온 사고께서 말씀하시기 잠시간 자리를 옮기면은 기분전환도

될 것이다 하여 성동에 며칠 모시고 내려갈 것입니다 하시었지. 짐 생각에도 그리하면

괜찮을 것 같아 보내드린 터인데 벌써 내려가신 지가 닷새나 되는 터란 말이지. 잘

계시는지 궁금도 하고 또 그립기도 하여서....."

심중의 정해를 털어놓는 용안이 다소 붉었다. 황이는 어진 미소 담담히 지으며 고두만 

하였다.

"명온 사고께서 비를 자청하여 모셔간 터이니 워낙에 다정하신 분이라 짐 못지않게

알뜰히 보살펴 주실 게야. 또 출산하신 며느님들 많으사 중전이 게서 동무 삼아 오랜

만에 즐겁다 하시기는 하되, 짐이 그이가 심히 보고 싶소. 워낙에 금일은 회궐을 하셔

야 하나 나가신 이후 그저 즐거웁다 서간을 보내주신 지라 차마 빨리 들어오시오 말을

못하였거든. 의륭저 식구들이 곤전을 대함에 있어 하나도 빠짐없이 정중하고 정성이라

하니 짐이 근심은 없소만은....."

말꼬리가 흐려졌다. 괜스리 벼루에 놓인 붓을 툭툭 털어보며 왕은 말을 이었다.

"산실에 들어가 계시니 뵙지 못함은 같으되, 그래도 비가 짐과 함께 이 궐내에 계시다

싶은 것과 궐 밖으로 나가 있는 것은 또 다른 마음이 들어서 말야. 어쩐지 금일은 

매사 심드렁하고 무엇에도 마음이 아니 가오."

도도한 성격에다 보위 오른 지존으로서 자존심이 유난히 강하여 심중의 말씀을 거의 털

어놓는 일이 없는 분이다. 그런데 그런 분이 이 정도로 말씀을 하시었다. 그 심사가 얼

마나 울적하고 그리운 것인지 황이 그가 짐작하지 못할 것이냐? 도승지는 붓을 놓았다.

하염없이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상감마마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그렇게 심란하실 양이면은 잠시 미행하사 의륭저로 납시겠사옵니까?"

"음, 음..... 참으로 그리할까? 경이 짐을 배행하겠느뇨?"

불감청이언정 고소원.

냉큼 반색을 하였다. 용안에 미소가 사뭇 가득하였다. 요렇게 말을 해주는 이가 없었으

니, 중전을 뵙자하여 사사로이 궐 문을 나서겠다 군입도 떼지 못하였다. 의륭저로 나갑

시오 한 말에 아니다 한마디 사양도 없다. 냉큼 그리할까 나서는 것에 황이는 더 환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화급하고 무엇이든 하고 싶다 할 것이면 무작정 다 하셔야 하는 성정이다. 그런 분이 진

득하게 그저 참아야 하였으니 그 동안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하물며 중전마마와 상감마

마 그 정분은 뉘가 와도 끊을 수 없고 견 줄 수 없을만큼 깊고 강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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