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200)

그 말씀에 다시 지난밤 뜨겁고 진진했던 일이 생각나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이다.

생각만 하여도 숨이 가쁘고 아득하게 황홀하였다. 잠시간 눈이 마주친 두 분 마마, 동시에

지난밤 일을 떠올리고 있었겄다? 은밀히 둘만 안느 붉은 웃음을 나누었다.

왕은 돌아서서 주머니 풀어 당혜 값을 셈하였다. 신기료장수가 신을 싸는 동안 두 사람은

좌판에 놓여진 각종 신을 구경하였다. 이것저것 들었다 놓았다 신기하게 바라보던 왕의 눈에

손가락 한 마디도 아니 되는 앙증맞은 아기씨 꽃신이 탁 밟혔다.

"햐, 고 놈! 귀엽기도 하여라. 내 엄지손가락만 한 것이라. 어찌 이리도 앙큼맞게 귀엽기도 한가

내가 이것 사 주께. 후에 우리 아기씨 낳으면은 이것 신기게 말이오?"

나중에 사옵시오!하며 싫다는 중전의 반대를 물리치고 억지고집 부리었다. 왕은 끝내 그것을

사고야 말았다. 턱하니 중전 손안에 안겨주었다. 어서 회임하여 아기씨 낳으소 하는 바람이었다.

돌아서며 자기도 모르게 중전은 살며시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실로 기이한 꿈이지 무어야? 생산 날 그 밤에 전하를 모시고 같이 침수하였다가 꿈을 꾸었다.

후원 부용지 맑은 물에 노니는 황금 잉어를 건진 것인데, 장면이 바뀌어 계산 골 소녀시절을 

보냈던 초옥 연못에 그 잉어를 풀어넣었다. 헌데 그놈이 연못에 가득 차서 산더미같이 커지더니 

용이 되어 날아간다. 온몸이 싯누런 황금용인데 달같이 커다랗고 환한 여의주를 두 발톱에 움켜쥐고 

있던 것까지 기억이 생생하였다.

'이미 내 몸에 아기씨가 들어있을지도 몰라. 이번 달거리를 보아지면 알 것이니 오늘 내일 새로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마 동굴에서 전하를 받아들인 그때에 아기씨가 잉태되었을 것이다.'

중전의 심중에서 흐르는 복잡하고 미묘한, 그러면서도 조심스러운 생각을 모르는 왕은 신기료

전을 나와 비단전도 가자 채근하였다.

"그만 하옵시오, 신 한 켤레로 이미 만족합니다."

기어코 고집 부리며 앞장서서 비단전으로 쑥 들어간다. 중전도 마지못하여 못이긴 듯이 따라

들어가는구나. 명국에서 들어온 연초록빛 비단 치마감에 저고리는 연다홍빛.

중전은 전하께 새 도포 지어드릴 것입니다 하며 연청색 고운 톡톡한 비단을 서너 필 또 골랐다.

할마마마 치마감도 하여 주시오 저가 직접 의대 지어드릴 것입니다 응석을 하니 왕도 신이 났다.

"요 치마감은 내가 고를 것이다."

"그러하여 주시어요. 할마마마께서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왕은 중전과 의논을 하여 왕대비전하를 위한 옷감을 골랐다. 점잖은 옷빛과 자주빛 비단을 집어 

들고 값을 치렀다. 윤상궁이 저만치 서 있는데, 유모도 한 필 하여주까? 호기를 부리었다.

얼떨결에 따라 나온 윤상궁이 참말 횡재라, 값비싼 비단 한 필을 선사 받고 입이 벌어지는구나.

"재관아, 너도 이리오너라. 정초가 멀지 않으니 안해 가져다 주어라. 노상 내 곁서 밤낮을 새우니

이리라도 환심을 사야 하지 않겠느냐?"

윤재관에게도 턱 하니 연분홍 비단 한 필 하사하였다. 오늘 따라 나온 두 사람이 잠자다가

얼떨결에 횡재한 셈이다. 비단전 주인은 속으로 대체 어떤 집 선비이길래 저토록 호기있게

돈냥이나 푸는고?생각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왕은 난생 처음 돈 쓰는 재미에 정신이 없다.

보고 듣고 거동하시는 양이 마치 소꿉놀이하는 어린애들처럼 들뜨고 재미난 모습이다.

뒤따르는 윤상궁과 윤재관도 그저 흥겨워 빙그레 따라 웃었다.

"신첩에게 좋은 것을 많이 사주시나 저는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으니 어찌 하리오? 저에게도

은전 몇 푼 있으니 약과 사드릴 테야요."

"약과 싫여. 내가 단 것 싫어하는 줄 알면서? 저 앞에 떡 파는 노인 있기로 경단 사주어.

나는 수수경단이 제일 좋더라."

중전은 떡 파는 노파 앞에 다가가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수수경단에다 수리치 떡에다 인절미까지

듬뿍 샀다. 덤이라 귀 떨어진 바람 떡까정 하나 얹어주는구나. 여럿 먹을만큼 듬뿍 들고 와 

고개를 외로 꼬고 지아비에게 내밀었다. 열 개 남짓 받은 수수경단 냠냠 다 드시고 그 손가락에

묻은 거물꺼정 핥아 드시는구나.실로 맛이 있도다 입맛을 다셨다.

소탈하며 격의 없고 젊은 연치라 거침이 없으신 터이니 뉘가 보아도 지엄하신 지존인 줄을 모른다.

"저잣거리 떡 맛이 달콤하니 집안 숙수들을 예로 내보내야 할 것이야. 핫하하. 재관아, 짐들을

말에 실어 두어라 마님이 힘이 들 것이다."

떡 다 드신 후에 또다시 왕은 중전을 한 발 뒤에 딸리고 신이 나서 저잣거리를 싸돌아 다녔다.

엿장수 가위 돌리는 것도 신기하다 연방 감탄하시며 한참 동안 보시었다. 수염 허연 노인이

보는 정초 토정비결도 다른 사람틈에 끼어 쪼그리고 앉아 들여 보는데 재미가 있다.

짓궂게 웃으며 내 사주팔자도 보아주오 하고 은전 한 푼을 내밀었다.

"정오 년 유월 스무 엿새. 미시 생이라 하였소이다. 내 팔자에 자식 복이며 관운은 얼마나

되는지 보아주오!"

얼치기 복술이니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재미였다. 노인은 산가지 뽑아 사주를 보아 하는데 문득

기이한 낯빛을 하고 앞에 앉은 왕의 용안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자꾸만 보시오? 내 사주팔자가 형편없소?"

"선비께서는 실로 귀한 사주이시오. 참으로 기이할세라! 이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팔자이거든.

허나 이는 꼭 좋은 것은 아니오. 선비께서는 아마 조실부모 하였을 것이며 형제도 없을 것이오.

일복은 쌓였으니 항시 짐에 치여 살 것이오. 허나 일복에 비해 기이하게 관운은 없으니 과거시

험은 항시 불합격일것 같소이다. 하지만은 선비께서는 실로 초반보다 중반이 낫고 중반보다는

후반이 나을 것이니 타고난 복록은 무궁하시오. 귀한 자식을 얻을 팔자이니 아들만도 오형제가

보이는구려. 내가 사주관상 보아한 지 오십 년인데 선비같이 귀한 사주 가진 분은 처음이오!

다만 무척 고집이 세서 다소간 일이 막힐 때가 있을 것이오. 그때는 곁에 있는 뱀띠, 개띠하고

의논하면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오."

왕은 킥킥 웃었다. 노인의 말이 틀린 것은 별로 없다 싶었다.조실부모라는 말도 맞고 형제없다

함도 딱 맞추었다. 지존이니 과거시험 볼 일이야 없을 것이니 관운이 없다 함도 그리 보면은

제법 맞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은근히 노인께서 신기 많으니 내가 다소 섬뜩하오. 헌데 귀한 자식 얻을 팔자라 하는 말은

듣기가 좋소이다. 내년 신수에 자식 하나 얻을 괘가 있소이까?"

"내년에는 그 소원을 이룰 것 같소이다 그려. 헌데 불길한 별자리가 같이 떠 있으니 조심하여

안해를 돌보시오. 호사다마라, 좋은 일 곁에는 항시 마가 끼이는 법이오. 그 말을 유념하시오."

왕은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일어섰다. 점쟁이 노인의 말을 다 믿을 것은 아니나 기분이 좋았다.

내년에 자식 하나 얻는다는 말에 여하튼 기분이 좋다. 구중심처 교태전에 앉은 중전을 누가

감히 위해할 것이냐? 그 말은 흘려들었다.

'여하튼 제법 맞는 말을 많이 하니 내년에 필시 중전이 회임을 하기는 할 모양이로다."

기분이 마냥 좋아진 왕은 다시 중전을 뒤에 두고 저잣거리를 이리 저리 거닐었다.

괜히 필요도 없는 밀초도 한 번 사보고 손바닥만한 화각 참빗도 하나 중전에게 사주었다.

지엄하신 지존이니 태어나서 지금까정 오직 궐 안에만 지내셨다. 이런 저잣거리 구경은 왕에게도

난생 처음이다. 허니 어찌 신이 나지 않으랴? 덤이니라! 하면서 윤상궁에게도 묵직한 금가락지

하나 사주었다. 벙긋이 웃으며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윤재관에게도 노모 가져다 주어라, 하시며

금입사 장도칼 달린 노리개도 하나 사주었다. 전낭차고 이것저것 척척 골라 사고는 값 치르는 

경험은 처음이라 어린애처럼 신이 나고 즐거워하였다.

흥정하는 것도 은근히 이골이 나니 명국서 들어온 손면경을 살적에는 두 푼이나 깎기까지 하였다.

"내가 에누리는 잘하거든? 핫하하. 이 거울은 할마마마께 가져다 드립시다. 아마 짐이 직접

샀다 하면은 놀라실 것이라?"

호탕하게 웃으시는 그 모습이 어찌나 잘나고 훤칠한지 모른다. 등 뒤에서 사람들이 소곤소곤 감탄

이라. 그 칭찬 소리가 전하 귀에까정 들려왔다. 지나가는 노류장화들까지도 한번씩은 돌아보는

잘난 선비가 아니냐.

"길가는 저 선비 좀 보소, 참말 훤칠하고 잘났도다. 오데 사는 귀인인고?"

"온 저잣거리가 훤한 터이니 저리 잘난 사내는 처음일세. 안해도 얌전하니 어여쁘고 말야.

실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그려."

두 분의 어굴이 동시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낯 뜨거운 칭찬은 난생처음이었다.

중전은 더 깊이 장옷에 얼굴 파묻고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왕도 면구함을 떨치기 힘들

어 괜스리 헛기침을 하였다. 모르는 척 중전과 윤상궁을 돌아보았다.

"어이 시장타. 시간이 그럭저럭 맞춤하니 주막에서 국밥 사먹고 옥동엘 갑시다 그려.

아까부텀 김이 설설 나는 주막의 국밥을 먹고 싶었거든. 참말 먹음직스러운 것이야?

재관아 너도 이리 오너라."

내외를 하니 중전마마와 윤상궁은 방으로 들어가고 전하께서는 차일 친 아래 노상의 평

상에 시정잡배모양 턱 하니 걸터앉았다. 그 모습에 윤재관이 망극하여 몸 둘 바를 몰

라 하였다. 정갈한 방으로 모시겠나이다 아뢰었다.

"그만 하렴. 사내들은 다 예서 밥을 먹고가지를 앉느냐? 그보다 막걸리라고 한 잔 하려

무나! 목이 컬컬할 것이다? 이보시오. 주모! 예에 먼저 막걸리 한 사발씩 주시오."

호기 있게 소리치니 맵시 있게 어려머리하고 자주빛 뒷댕기 감아 돌려 은비녀 찌른 새끼

주모가 냉큼 달려왔다. 개다리소반에 썩썩 썰어 담은 톳구이에 염통이며 간이며 안주 한

접시에 기름붙이 한 접시 더, 철철 넘치게 막걸리 한동고리를 대령하였다. 논다니라 하여

도 눈은 있다. 참으로 잘났고나, 마주앉은 두 선비. 저잣거리에서는 보기 드문 귀골이며 

미남이다. 살그머니 눈꼬리에 추파를 담고 실웃음을 흘리었다. 호리낭창한 허리 흔들며

괜찮다 하여도 굳이 저가 술잔을 채워 주는구나. 왕은 다소간 어이없고 기가 막혀 헛허

웃었다. 이윽고 국밥이 나왔다. 뚝배기에 설설 끓는 잡탕 국밥 한 그릇에 김장 딤채 한

보시기. 햐, 고놈. 먹음직스럽기도 하여라 하며 냉큼 수저를 들라 하였다. 허나 윤재관

이 뺏듯이 성상의 수저를 가리고는 저가 먼저 전하 앞에 놓인 국밥을 기미하였다. 혹여

모를 일이니 긴장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만하여라. 되었느니라. 무슨 일이 있을 것이냐? 너도 먹으련? 실로 짐 따라 다니느라

시장할 것이다."

그 많은 국밥 즐거이 다 젓수시고 나니,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었다. 참으로 흥겨운 표

정이시다. 하도 맛나게 자시니 뚱뚱한 주모가 기뻐하였다. 그 선비께서 엄청 시장하셨구려

하면서 덤으로 한 국자 더 퍼주는 지경이었다.

"실로 잘난 분이시니 우리 주막이 다 훤하옵니다. 홋호호. 세밑 장 보러 나오신 듯 하오

만은 그래, 장은 잘 보셨소이까? 오랜만에 장이 번잡하니 이 주모도 돈냥깨나 세는 참이

라. 살 맛이 납니다 그려."

"대강 살 것들은 샀소이다. 주모가 이리 후덕하니 복 받을 것이오. 핫하. 사는 꼴들이

다 어떠하오?"

"올해는 작년과 달리 풍년 이상 되었다 하고요, 주상전하께서 작년 가뭄 턱이니 기민들

에게 곡식도 넉넉하게 풀어주시고 세금도 다소 탕감하여 주시니 살기가 웬만한 모양입

니다. 월성궁 쪽 그 요망한 것들이 쪽을 쓰지 못하니 우리 백성들이 살기 편한 것이 아

니겠습니까요? 입은 비뚤어졌다 하여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실로 올해 나라 사정이 제대

로 돌아간 것은 바로 전하께서 미혹서 깨어나신 때문이라. 어지신 중전마마께서 기어코

성총 차지하실 줄을 알았다오! 선비께서는 모르실 것이오만 중전마마께서 해마다 철철이

가난한 이 의대 지어 궐 밖으로 내보내시어 의지할 곳 없고 불쌍한 노인네들 의대하여

입히시었답니다. 그런 덕성 높은 중전마마를 곁에 두시니 어찌 전하께서 성군이 아니

되실 것인가? 예에 오는 객들이 모다 입을 모아 칭송한답니다."

옆에 있는 윤재관이 황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그러나 왕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빙긋이 웃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용안에 깊은 빛이 어리었다. 지금 무슨 생각

을 하고 계신가? 성상의 무거운 속내야 천하에서 오직 당신만이 알 일이라. 잠시 한가하

게 주모를 상대로 이 말 저 말 붙이고 응대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얼마 후 낮것을 마친

중전이 윤상궁을 뒤에 딸리고 방에서 나왔다.

"나는 맛나게 먹었거늘, 부인께서는 잘 자시었소?"

중전 역시 주막의 국밥이 처음이다. 달게 젓수시었다. 방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잣거리 국밥은 그대도 처음이라 신기하였을 것이야. 담에 또 한번 나오십시다. 보시오

주모. 실로 솜씨가 좋으니 장사가 잘 될 것이오. 가자구나. 재관아. 마님 가마 이리로

오라 하여라. 금세 옥동으로 갈 것이다."

주막을 나선 일행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어물전이었다. 사친 댁 세찬꺼리 삽시다.

주장하였다. 비린내 묻는다 하여 아무리 말려도 직접 어물저네 들어가시어서는 싱시안 도

미며 조기며 민어며 한참 내려다보시었다. 궐에서만 계시는 주상이시니 상에 오른 찬품만

드셔 보았지 생물 그대로 쌓인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갖가지 비린 것들을 한참 보고

겨냥을 하더니 게 중 싱싱하고 큼직한 민어 한 마릴르 손가락질 하였다. 이 놈을 싸주오

하였다. 장사치가 그놈을 새끼줄로 묶어주었다. 냉큼 셈을 치르고 왕은 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민어를 직접 받아 들었다. 망극한 윤재관이 저가 들 것입니다. 하고 빼앗으려 하

였다.

"되었느니라. 짐이 산 것이니 직접 들고 갈 것이니라. 보시오. 싱싱하오?"

중전을 돌아보시며 환하게 웃으시었다. 중전도 전하께서 마냥 좋아라 하시니 함께 즐거

워 고개 끄덕이며 웃었다.

"내가 장가를 든 지는 네 해이되, 처갓집 세찬거리 장만하여 드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구

나. 이것으로 부원군께서 집을 다소간 보아주셨으면 좋겠소이다. 핫하하. 가십시다. 시간

이 촉박하오."

민어 한 마리 대롱대롱 어수에 들고 말을 타시었다. 중전이 탄 가마가 상감께서 탄 말의

뒤를 따랐다. 옥동 부원군 댁에 도착하니 이미 겨울 해는 서쪽으로 한참 기울었다.

흠흠 헛기침을 한 상감께서 직접 "이리 오너라!" 부름하였다. 손님을 맞이하러 청지기가

달려 나오다가 그만 납작 엎드렸다.망극하여라. 주상 전하께서 납시었구나. 감히 눈도

들지 못하고 벌벌 떨며 문부터 활짝 열어제쳤다. 집사가 버선발로 달려 나오고 이윽고

기별 받은 부원군께서도 황망히 달려 나와 흙바닥에 고두하였다.

"그만 하오. 짐이 몰래 나온 것이니 격식은 그만 따지시오. 중전이 사친이 그립다 하기

짐이 생신 선물로 예에 모시고 나온 것이거든. 참, 이것부터 받으시오? 저잣거리에서 직

접 산 놈이니 부원군 댁 세찬 거리라. 핫하하. 윤상궁은 중전을 안에 모시어라. 많이 걸

어 발이 아플 것이니 다리 좀 주물러 드려야 할 것이다. 짐은 사랑채로 갈 것이다.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니 재관이는 말 안장 내리지 말고 여물이나 주어라."

그때까정 어수에 들고 계시던 민어를 부원군에게 직접 건네주시었다. 아아, 이리 망극하

고 황공할 데가 어디 있는가? 금세 환궁하셔야 하니 급한 대로 김익현은 왕을 사랑채에

뫼시고 차상을 올리었다. 향기 좋은 녹차 한잔이 개운하게 입을 씻어낸다. 깊은 향기를

천천히 음미하며 왕은 사랑채를 휘 둘러 보았다. 연못은 얼어있고 눈이 쌓인 정원은 적

요하였으며 학 둥우리는 짚으로 이엉을 이었다. 조촐하고 기품 넘치는 풍경이 청빈한

부원군 인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집이라 싶었다.

"짐이 부원군께 옥동 집을 하사하기는 하였으되 나와 보지를 못하였기로 궁금하였소이다.

흠, 안온하고 기품이 있으니 터가 좋소이다. 절로 화락한 기분이 드니 실로 사람 사는

집꼴입니다. 허나 집이라 함은 그 안에 사는 사람에 딸린 것이 아니오? 부원군께서 세상

버린 부부인에 대한 은애지정이 깊은 줄을 아나 중전이 외동딸이라. 노년이 이토록 쓸쓸

하시니 아무래도 새 사람으로 안방을 채우셔야 하지 않습니까?"

왕의 말씀이 은근하였다. 부원군께 재혼을 권하시는 참이었다. 궐 안의 왕비가 외로운

부친 생각에 항시 근심이라. 아버님을 뵈오시거든 전하께서 아버님께 한번 운을 떼어 보

십시오 부탁하였던 것이다. 김익현이 왕의 말에 조용히 웃었다.

"늙고 병들은 신이 어찌 또다시 새 인연 맞이하여 가지를 벌리겠습니까? 조용히 지내다가

때 되면은 가문에서 똑똑한 아이 하나 양자로 들이어 대를 이을까 합니다. 중전마마께서

이 아비 걱정하시는 뜻을 아오나 제 팔자가 외로운 터라, 훗날 외손봉사 받을 듯 하옵니

다. 후에 원자아기씨 탄생하시면 이 늙은 할애비를 기억이나 해주실까 모르겠사옵니다."

"실로 짐도 근심이오. 중전께서 이제 회임을 하셔야 할 것인데, 지난번에 옥체 상하신

탓인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짐도 그러하거니와 중전께서도 걱정이시라, 말은 못하나 초

조합니다."

젊은 왕은 솔직히 마음에 들은 근심을 드러냈다, 중전에게 말을 하였다가 괜히 초조해하

는 사람에게 더 부담을 줄까 봐 입을 봉하고 있었다.

김익현은 자신이 며칠 전에 꾼 꿈을 말할까 망설였다 괜히 입을 벌려 동티가 나는 것은

아닐까. 그저 담담하게 웃고 말았다. 참말 신기한 일이지. 사나흘 전 새벽에 잠시 쪽잠

이 들었다. 그때 생생한 꿈을 꾸었던 것이다. 천둥벼락에 놀라 하늘을 날던 어린 용

한 마리가 초당에 툭 떨어졌겄다? 발톱을 눌러 초당 우물에 넣었더니 이 놈 좀 보소? 금

세 무럭무럭 자라 우물에 가득 차서는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려 하였다. 기어코 발톱에 

매달려 잡아 눌렀기에 바둥대는 용과 한판 씨름질을 하다 꿈에서 깨어났다. 이는 필시

태몽이었다. 중전마마께서 거처하시던 초당에서 떨어진 용이라. 이내 중전마마께서 회

임을 하시겠구나 확신하였다.

"어의께서 이르시기를, 오래 회임을 못하는 여인에게 행화 꽃을 말린 것을 복용시키면

은 즉효라 하였나이다. 신이 준비를 하여서, 그렇지 않아도 한번 입궐하여 마마 뵈옵고 전

하려 하였습니다. 회임이야 하늘의 일이니 기다리면 꽃 소식 오듯이 올 일이라. 너무 근

심 마옵시오."

"부원군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한결 마음이 풀립니다 핫하. 언제고 입궐하시어 짐도 보고

중전께도 즐거움 주시오. 인제 그만 일어나려 하오. 짐이 몰래 궐을 비운 고로 난리가

났을 것이오."

왕은 훌쩍 일어나서 마루로 나갔다. 윤재관이 허리를 굽히고 전하께 신발을 신겨 드렸다.

중전과 부원군더러 작별인사를 나누라 분부하시고 잠시 말 등에서 기다리신다. 안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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