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200)

일은 없을 게요."

그렇게 하여 길고 긴 하루가 끝이 났다. 그 다음날 중전마마. 웃어보시오 하신 전하의 

간청 따라 상긋 웃으며 대전에 보내드리었다. 하지만 홀로 복동이 무덤까지 산책을

하시는 그 얼굴은 다시금 우울하였다. 아무리 잊자 하여도 함뿍 정을 준 미물이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차이니 어찌 마음 편안하시랴.

"필시 극락왕생 하였을 것입니다. 마마. 복동이도 전하께서 그 악독한 계집과 무도한

어린 놈을 대처분하신 것을 알 것이니 원한을 풀었을 터입니다. 이제 그만 잊어버리십

시오."

곁에서 윤상궁이 듣기 좋게 위로하여 아뢰었다. 왕비는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그럴 것이다 싶네. 그놈이 내게 베푼 은혜가 많으니 내생에선 필시 인간으로 환생할

것이다 싶어. 그보다 악형 당한 아이는 좀 어떠한가?"

"별탈은 없사오나 심신이 지치고 쇠약한지라 사가로 내보내 요양케 함이 옳으리라 사료

되옵니다. 아까 죽을 먹는다 하는 은채 말을 들었나이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도 욕을 본 사람은 오직 그 아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걸세.

가엾은 것이 날벼락이라. 사가로 내보내되 한 두어 달포 푹 쉬게 하여주고 비용도 넉넉

히 보내주오."

중전은 돌아서서 아직도 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난 복동이 무덤에 꽃을 가득히 놓아주었다.

여기까지 오시면서 꺾었던 길섶의 하얀 구절초 꽃잎이다. 마치 사람에게나 이르듯이 찬

찬히 속삭였다.

"종종 와서 너를 볼 것이니라, 복동아. 오직 너가 내 벗이었다. 내게 베푼 은혜가 어디

한 두 가지이겠느냐?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며 주상 성총을 돌이켜주었다. 말 그대로

복덩이였느니라. 허니 내가 너를 어찌 잊을 것이냐? 오가는 길에 자주 너를 보려고 일

부러 예에다 너를 묻어준 것이다. 허니 쓸쓸하다 생각 말고 부대 극락왕생하여라."

허고 이제 나도 못 참을지니 월성궁 계집의 목을 반드시 베고 말 것이다. 

중전마마 심중의 말 한마디 끝까지 발설치 않고 꾹 씹어 삼키었다.

'그 계집이 살아 있는 한은 바로 다리 아래 뱀 한 마리 둔 것 같이 사위스럽고 불길한

것이다. 지금껏 내가 전하의 심사를 생각하여 그나마 주상이 바라시는 계집이니 참고

가납을 할 것이다 하였기로 더 이상은 그 계집과 나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네 목숨으로 찾아준 주상전하의 성총이라 내가 이제 다시는 아니 빼앗기련다.

전쟁이라 하였느니!!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네 복수를 아니 해줄줄 아느냐?

그깟 계집이라 절대로 전하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것이니라!'

돌아서는 중전마마 입술이 야무지게 다물려 있었다. 희란마마를 상대로 드디어 칼을 뽑

아 든 중전 마마 수완이 어떠할지 그저 궁금하구나.

<제6화> 꽃신과 민어 한 마리

새벽부터 소슬소슬 첫눈이 내렸다.

첫눈 나리면 서경당에서 같이 서설 구경합니다 약조하였다. 그 아침에 왕은 중전과 더불어

침향정에 올라 좋은 눈 구경을 하였다. 그러고서 대전에 나가셨는데 오후 무렵 중궁전에

사람을 보냈다.

"눈 내린 날이라 이 밤을 호젓하게 우리 둘만 서경당에서 지냅시다 전하라 분부하셨습니다."

밤수라 대전에서 받으시고 조하 일 늦다이 보신 후에 장내관만 딸리고 듭시었다. 

시각이 어중간하였던지라 은근히 시장하시었다보다.

"출출하오. 떡 구워 주어."

어린애처럼 청하였다. 하여 중전은 곱게 웃으며 곱돌화로 빨갛게 피어 오른 잉걸불 위에 멀찍하니

석쇠를 걸쳤다. 가래떡을 올려놓고 노릇하니 구워냈다. 달콤한 석청을 발라 아~ 하고 벌린 주상 입에다

쏙쏙 넣어 주었다.

문 바깥에는 난분분 난분분 흰 나비 같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구나. 창문 열고 검은 종이 위 뚝뚝

떨어진 백색물감방울인 양 함박눈 내리는 광경을 설설 끓는 아랫목 비단금침 속에 발 집어넣고

구경하는 운치야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말랑말랑한 가래떡 구이에, 하얀 분이 난 양주 곶감이며 살얼음이 낀 수정과를 냠냠 젖수신다.

철없는 어린애들 소꿉장난처럼 마냥 행복하다. 장내관이 잘하는 도깨비 아야기에다, 옛날 전하

께서 기르던 복술이 이야기도 나왔다.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왕이

불쑥 버선발을 내밀었다.

"발톱 잘라주어. 까마귀가 형님 할 정도로 길었단 말야."

병환 중일 때 항시 손발 소제를 중전이 하여준 터라, 인제 왕은 다른 누구에게도 그일을 

맡기지 못했다. 은가위를 챙기며 중전마마 눈을 곱게 흘겼다.

"엊그제 잘라 드리께요, 하였더니 싫다 하시며 십리 밖으로 도망가셔 놓고서? 전하께서는 청개구리

이셔요. 하잘 때는 마다하시고서 말야, 이번엔 벌로 살까정 피나게 자를 테야요,"

"어어, 그러지 말라고! 짐은 중전이 가위들고 덤비면은 참말 겁이 난단 말이지."

왕이 짐짓 엄살을 피며 도망가려는 시눙을 내었다. 중전은 작은 은가위를 들고 까르르 웃었다.

냅다 큰 발을 잡아 눌렀다. 어린애처럼 순순하게 단풍잎처럼 좌악 벌린 손톱 다 자르고 살뜰하게

다시발톱까지 다 잘라주었다. 전하, 가까이 다가온 중전의 머리타래에 코를 대고 흠흠 하였다.

"짐은 그대한테서 나는 향기가 참 좋아. 꽃내도 이렇게 향기롭지는 않을 것이다? 헌데 창희궁

가서 왜 그렇게 오래 있었소? 중전은 짐이 수라를 하는지 아니 하는지도 관심도 없지? 무정한지고.

인제 중전이랑 같이 상 받지 아니하면 밥맛이 없단 말야. 야속한 사람이로다. 오늘 짐이 은근히

화가 났소."

부르퉁하게 투정질이다. 중전은 은대야에 찰랑찰랑한 물속에 수건을 담가 꼭 짜서 지아비 손과

발을 닦아 주며 다정하게 말하였다.

"모처럼 할마마마께서 내명부 어른들을 뫼시고 큰 상 내려 주신 날입니다. 사고께서 궐밖에서

광대들을 데리고 들어오시어 구경이 좋았사온데 저가 일어나면 자리가 파작이 날 것이니

차마 일어나지 못하였지요. 게서 웃고는 있었지만은 밥맛 없기는 마찬가지였사와요.

신첩이 인제 버릇이 없어져서 전하께서 한술 입에 넣어주신 것만 맛이 있거든요?'

"흥, 말만 잘하지? 그런 사람이 들어와서 짐도 아니보고 바로 중궁전으로 들어가니?

중전이 짐 생각을 하였다는 말은 도무지 못 믿을 참니다?"

잠시도 떨어져서는 못 견딜 그리움이라. 실상 왕은 오늘 다소 화가 난 참이었다.

쉴 참만 되면 중궁전으로 내달리는 지아비 사모지정이라. 그를 알면서도 창희궁에 나가 날이

저물어 돌아온 중전이 조금은 섭섭하고 얄미웠다. 하루종일 기다린 줄 알면 말야 돌아오신 즉시

편전으로 나와서 고운 얼굴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헌데 그냥 중궁전 들어갔다 하니

다소간 약이 올랐다.

중전은 생긋 웃으며 대야며 수건이며 물리고서 연해 들어온 양치물을 올렸다.

"저도 편전으로 나갈까 하여 미리 사람을 보내어 틈을 보았답니다. 헌데 심각한 의논중에 저가

어떻게 방해를 할 것입니까? 대신 신첩이 소반과 보내드리어 잠시간 위로하여 드렸잖습니까? 홋호호

신첩이 다리 주물러 드릴게요."

중전은 괜스레 골 내고 타박 질을 하는 왕이 정말 귀여웠다. 꼭 심술궂은 어린 남동생인듯,

몸만 컸지 어린애라.

"입 맞춰 주어! 그러면은 이 날 짐을 버리고 실컷 혼자서 재미 본 일을 용서하지."

"아이고, 우세스러워서 못살 것이다. 몰라요!"

말은 그리하면서도 중전은 소리 나게 지아비 왕의 볼에 쪽하고 입을 맞춰주었다.

그 사이를 놓칠세냐. 엉큼한 손이 슬그머니 봉긋하게 부푼 가슴 골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이고머니나. 또 이러하신다?'

도망갈 사이도 없이 딱 잡혀버렸다. 옷고름이 풀리고 향기로운 비단 치맛자락이 훌러덩

허공으로 날아갔다. 질질질 금침 안으로 끌려들어가면서 중전이 쫑알쫑알 방탕하다, 민망하다 

항의하였다.

"흥, 만날 짐이 다정하게 희롱하여 주는데도 항시 중전은 수줍어하고 화들짝 놀라고 그러더라?

요기에 딴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이지? 요렇게 만지는 것이 싫어?"

"아이, 몰라요!"

"흥, 항시 모른다고만 하더라? 모르긴 무에를 몰라? 짐이 이리 곱다이 어루만져 주는 것이

싫으냐 좋으냐 물었거늘? 말 하여봐. 짐이 손대는 것이 정말 싫여?"

"아이, 몰라요. 아이고, 아이고, 전하-"

풀려진 속저고리, 어여쁘고 소담한 젖가슴이 활짝 드러났다. 오똑 솟은 연분홍 꽃순을 덥석

삼켜보았다. 사탕 탐하듯이 쪽쪽 빨아보았다.

"제발 이러지 마옵사이다. 늘 아랫것들이 보든 아니 보든, 신첩을 희롱하시니 낯 뜨거워

죽을 참입니다. 곱다 여기시니 좋기는 하지만은요, 참말 민망하여요. 날이면 날마다 사랑을

받으니 책을 읽을 적에도, 고변 받을 적에도 마마의 손길만 생각난단 말입니다. 신첩을 시정

논다니처럼 방탕하게 만드셨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짐도 그런걸? 대전에 앉아 있어도 요 어여쁜 것이 눈앞에 오락가락하여 참을 수가 없거든.

책임지소!"

"신첩 또한 잠시라도 전하를 뵙지 못하면은 두렵고 안타깝고 가슴이 불안하옵니다. 아름다운

용안만 떠오르고 웃음이며 목소리만 들리니 이것이 바로 지독한 광증입니다. 이 병을 어찌

고칠 것인지 도무지 감이 아니 잡힙니다."

"그 병을 고치긴 왜 고치여? 짐도 같은 증세이구먼. 이리 서로 정분 좋은 부부지간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짐은 중전에게 아주 홀딱 반한 것이거든? 빨리 짐의 의대도 벗겨주어. 짐이 아주

급하단 말야!"

함박눈이 사락사락 마당에 쌓여 가는데 문 하나 사이 두고 두 분 마마의 연정도 눈빛처럼 쌓여만

간다. 서로의 품에 안겨 긴긴 밤을 달디 단 희롱과 진진한 그 재미로 즐기는 것이며 물리도록 청춘의 

꿀을 따는구나. 즐겁고 행복하고 화려한 밤이로다. 아이고 짜릿하고 달큰해서 인제 더 이상은

말 못하겠네.

야무지게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날이다. 중전마마 생신 날이 돌아왔다.

두 분 마마께서 사냥을 나가셨다 돌아오신 그 달포 후였다. 온 넋과 육신으로 하나 되어 얼린 

동굴에서의 그 일은 왕에게나 중전 모두에게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하여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점잔을 빼고 법도에 얽매이는 왕도 아니요 왕비도 아닌 것이

었다. 그저 사모지정에 빠진 여염집 남녀였다. 첫눈에 반하여 서로의 힘이 되어주며 평생 믿고

헌신하기로 천지신명에게 맹세한 반려가 되었다. 그렇듯이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 두 분 마마는

비로소 엄숙한 혼약을 맺은 진실한 부부가 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인제 두 사람 다 하나 

그늘이나 섭섭함이 없다. 마음에 담긴 거리낌 따위는 티끌처럼 사라지고 은애하고 사모하는

정만이 넘쳐 어쩔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토록이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이의 생일이 돌아온 터다. 왕이 어찌 가만히 있을 것이더냐?

이미 그 며칠 전부터 좋은 선물을 산더미같이 줄 것이다 이리 허풍을 하였다.

작년서 학사 강두수가 새 한 쌍 선사하였다. 억지 섞인 심술로 중전을 후려 잡은 일이 있지

않느냐. 실은 그것이 불 같은 투기심이라. 

중전은 비로소 왕의 배배 틀어지고 꼬인 심사를 알게 된 참이었다. 단순히 아랫것들에게

사사로이 선물을 받았다 하는 것이 노화의 이유가 아닌 게다. 왜 그대는 짐이 아닌 다른 사내

에게서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가? 하는 불만이 구박의 진실한 이유였을 게다.

속으로 중전은 어린애 같으신 마마, 하고 빙그레 웃고만 말았다. 

허나 왕이 하도 "좋은 것을 줄 테야." 하고 호언장담. 은근히 생일날을 기다린 것도 사실이었다.

헌데 이것이 왠일인구? 밤에 내전에 들어오셨는데 며칠 전부터 잔뜩 선물을 줄 것처럼 한동안

자랑질하시더니 말야. 어수에 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중전마마, 뾰로통한 얼굴로 짐짓 앵토라

졌다.

"흥, 신첩이 오직 이날만 기다렸사와요. 선물 주마, 하신 말씀을 참으로 믿었거늘 빈손이시라?

몰라요! 섭섭하여 죽을 것이다."

욕심이 도통 없고 소박한 성정인줄 뉘보다 더 잘 안다. 섭섭한 듯 눈치 주며 설풋 부리는 심술이

또 다른 애교인줄 모를 것이냐? 왕은 손사래를 저으며 싱긋 웃었다.

"짐이 약조한 고로 어찌 그냥 지나갈 것인가? 섭섭해 마오. 그대를 위해 준비한 거이 예 있소이다."

말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엄상궁이 붉은 보자기에 싼 것을 안고 들어와

중전마마 앞에 놓아드리었다.

"옥매화요. 엄동설한에 꽃망울을 틔웠기로 기이하여 짐에게 진상을 한 것인데 중전에게 드리려구요.

옛소. 생신 선물이오."

키가 서너 치 밖에 안되는 작은 나무에 송알송알 꽃망울이 맺혔다. 

줄기와 가지가 울퉁불퉁 풍상이 짙다. 비늘같은 껍질이 얽히고 비틀어지니 필시 몇 십 년 묵은

고목 분재가 분명하였다. 

동래포는 야스다국과 왕래가 잦은 곳이다. 하여 그곳의 풍습이 흘러 들어온 것이 많다 하였다.

이 분재 기술도 그 중 하나였다. 늙은 가지에 맺힌 분홍빛 섞인 하얀 꽃망울이 처녀아이 볼처럼

화사하게 톡톡 터지는 중이었다. 고아한 향기가 삽시간에 온 방을 채웠다.

청신하면서도 순결하고 진한 방향이 아름답구나. 이야말로 설중매였다. 매운 듯 순결한 매와

향기가 꼭 봄을 맞이한 듯 하다. 바깥서는 난분분 난분분 한설이 내리는데 방안은 봄빛이니

어찌 장관이 아니랴? 실로 기이하고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귀한 보석 황금 패물보다 향기로운 화초를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는 중전마마이시다.

매화꽃마냥 고운 웃음이 입가에 함박 맺혔다. 어린아이처럼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였다. 

조용한 성품임에도 이토록 귀하고 좋은 선물에 마냥 흥분을 한 것이다. 조용한 눈빛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아, 어찌 이리 곱고도 희귀한 것을 신첩에게 주십니까? 편전에 두시고 완상하시지요?"

"편전보다 교태전에 매화 분이 더 어울리는걸? 내전에 고운 향기가 가득하니 짐의 발길이 어찌

예로 옮겨지지 않을 것인가? 언젠가 그대가 매화꽃 수놓은 가리개를 주셨기로 짐이 이날 매화

분으로 화답합니다."

두근두근, 이 사람이 이 선물을 보고 얼마나 좋아할까.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왕은 빙그레 웃

었다. 중전의 작은 손을 토닥토닥 어루만지며 덕담을 하시는구나.

솔직히 말이야 아니 하였지만 중전에게 무엇을 선사할까 고민을 많이 하였다.

헌데 고심 끝에 이것이다! 하시며 금세 결정한 선물이 바로 이 매화분이었다.

진상된 꽃을 보자마자 금세 중전의 정결한 얼굴이 떠올랐다. 또한 우연의 일치이니 중전께서 수놓아

우원전의 침전에 두신 가리개에도 백매 한 가지가 수 놓여진 터라. 왕에게 어린 중전은 어여쁜

매화아가씨였다. 고운 화초를 몹시도 아끼는 이이니 이 선물을 좋아할 것이다 짐작하였다.

역시나 중전이 귀한 꽃 앞에서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중전은 지아비께서 주신 귀하고 아름다운 꽃 선물에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좋아하였다. 환한 웃음을 머금고 공손히 치하를 하였다.

"전하, 실로 감사하옵니다. 이토록 귀한 선물을 주신 참이라. 저가 너무 좋아 잠이 오지 않을것

같나이다. 후에 신첩도 귀한 선물을 반드시 하여 드릴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선물을 하는지 두고 보아야지. 핫하하. 중전은 무엇이든 잘 기르니 이 매화도 해마다

꽃을 피울테지. 인제부텀 생신 때 일너 화초 한 분씩을 드릴 것이니 중궁전을 작은 원림으로

피워 보시오. 교태전이 사철 향기로울 것이다."

왕은 마냥 흐뭇해하며 덕담을 하였다. 중전이 대례를 치르고 궐에 들어온 이후, 안해의 생신을

챙긴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에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작년에 처음으로 선물이요, 하고 복동이를 데려다 주시기는 하였었다. 허나 그것은 강두수가

중전에게 새 한쌍을 가져다 준 것을 보고 투기심으로 짐도 준다 말야 하며 어깃장을 놓은 것이지

진정한 선물은 아니었다. 좋은 뜻보다는 노여움과 분심으로 앙앙불락이었다.

짐이 지아비이거늘 감히 네 놈 학사 따위가 비에게 선물을 주느냐? 나도 네 놈 못지 않은 장한

선물을 줄 것이다! 이런 철없는 경쟁심이었을 뿐이다.

헌데 어렵고 긴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마주보게 된 사람. 애틋한 정분은 나날이 더 고웁고 귀

하였다. 그런 이가 맞이한 생신이다. 단 한 분인 사랑스런 정인에게 무엇을 줄까?

중전의 성정이 소박하니 사치를 싫어하여 패물거리도 좋아하지 않았다. 겉볼새 번듯하고 화려한

것들은 반기지 않는 사람이라, 단 한번도 소문나게 생신상도 못 차리게 하는 이가 아니냐.

일가친척 불러다 큰 잔치 베풀어 주리오? 하였더니 단번에 고개만 흔들었다.

생긋 웃으며 복사 빛 볼을 붉혔다.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전하의 마음만 주십시오."

마음이야 물론 흠빡 그대의 것이지. 허나 왕은 귀하고 고맙고 사랑스러운 이를 위해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정표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어제 동래포 부사가 기이한 화초분을 여럿 진상

하였다. 그중, 중전을 꼭 닮은 매화 분이 첫 눈에 딱 뜨이었다. 옳다, 이것이다! 하였다.

"중전께서 궐에 들어오신 이후 한번도 짐이 생신을 챙겨드리지 못한 참이라, 올해 들어 지난

해까정 다 할 참이다. 이 화분은 첫해 생신 선물이고요, 두 번째 선물은 다른 것이오."

동그랗게 눈을 뜬 중전의 귀에 가져다 대고 왕은 두 분만 들리는 목청으로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며칠 내로 우리 둘이 미행을 다녀옵시다. 항시 궐 안에서 답답하게 지내시는 고로 바람을 쐬러

사가로 나가고 싶어하질 않았소이까? 같이 저잣거리라도 가보십시다. 짐이 게서 중전 당혜 한켤레

사 줄 테야. 실은 짐이 매화 분 보기 전서는 그대에게 당혜 한켤레 선사할 것이다 하였기로

신은 발에 맞아야 하는 것이 아니오? 저자에 나가서 그대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보시오. 그리고

둘이서 옥동 부원군 댁에도 다녀옵시다. 그리고 말야. 비가 참말 좋아할 선물이 하나 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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