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중궁전에서 사람이 와서 잠시 알현키를 청하옵니다."
"들라 하라."
윤상궁이 허리를 굽히고 들어왔다. 그녀는 작은 소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전하, 거동을 무사히 다녀오시어 감축 드리옵니다."
"그만하다. 중전이 보내었니?"
"예, 전하. 원행에 옥체 곤고하지는 않으시는지 문후 인사를 전하라 하셨나이다.
직접 다린 삼차를 보내 드리니 드옵시고 기력 회복하십시오. 그렇게 전하라 분부하셨
사옵니다."
"중궁에 어수선한 일이 있다 하더니, 짐 생각 먼저 하여 이런 것을 부러 보낸다더냐?
여하튼 세심하고 다정하기는..... 짐이야 항시 다니는 거동인데 별일이 있으려구?
무사히 다녀왔다고, 걱정하여 주시어 감사하다 전하여 드려라. 실상 옥체 미령한 이는
그이이지 짐인가? 이리 가져오너라. 중전의 정성이니 단숨에 마시었다 하여라."
소란하고 정신 없는 와중에도 지아비 안부부터 챙기는 지어미 정성 앞이다.
울적한 용안에 저절로 벙싯 미소가 돋았다. 윤상궁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전하께
청자 찻잔을 받쳐 올리었다. 향긋한 삼 향기가 정신을 맑게 하여준다. 급한 성정이시니
뜨거운 것 못 드시는 줄 알고 적당하게 식힌 삼차 한잔이 왕의 입안에, 가슴속에
오래도록 향기로운 여운으로 남았다.
비로소 풀려가는 왕의 기색이다. 그를 잠시 살피던 윤상궁은 조용한 목청으로 중전의
긴한 전갈을 비로소 아뢰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 중전마마께서 여쭈옵기를 조하의 급한 일이 끝나시고
용체 다소간 편안하시면은 중궁전에 잠시 한번 옥보 옮기실 수 있으신지 묻자오십니다.
어제 궐 안에서 큰 사단이 났는지라...."
"짐이 이미 후원에서 있었던 그 사단을 다 들었느니라. 들어오던 길로 내금부에 들러서
처분을 끝내었다. 중전더러 걱정 말라 하여라 헌데 지금 어찌하고 계시느냐?"
"전의감이 아까 심기 편안하게 가라앉히는 탕제를 올리었나이다. 수라상 오르기 전에
드시고 잠시간 누워 계신 터였나이다. 실로 쇤네가 중전마마 곁에서 뫼시기 꼬박
네 해이나 이처럼 슬퍼하시고 그 물같이 담담한 성정을 놓으신 모습은 처음 뵈온 터
이옵니다. 복동이놈이 죽은 꼴을 보고 심지어 기함하시어 정신까지 잃으실 정도였습니다.
그토록 상심이 크신지라. 혼절에서 깨시었는데 맨발로 다시 달려나가 그 죽은 놈 끌어안고
눈을 떠라 애끓게 소리치시니 중궁전 아랫것들이며 창빈마마며 모두 아니 우는 이가
없었나이다. 마마 당신께서 잘 보살피지 못하여 이리 네가 죽었도다 하시며 옥루를
흘리시니 망극하기 이를 데가 없었나이다. 아까 전에 후원에 복동이놈 직접 묻어주시고는
다시 한번 눈물 흘리셨나이다."
윤상궁이 조근조근 아뢰었다. 중전마마께서 그토록 슬퍼하고 상심하여 심지어 혼절까지
하였다는 말에 전하, 한숨을 푹 쉬었다.
"...... 왜 아니 그러겠니? 그놈이 중전에게는 소생이라 하여도 될 놈인데, 젖도 떼지
못한 것을 데려다 키운 이가 중전이잖느냐. 그정을 견줄 데가 없을 테지. 먼저 가서
전하여라. 짐이 궐을 하루 비운 터라 다소 조하 일이 남았으니 이것만 끝내고 교태전으로
갈 것이다. 제발 우지 마오, 하여라. 그이 우는 꼴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느니라.
허니 제발 짐이 들어갈 적서 웃어 주오 하여라."
몇 번이고 우지 마라 당부하고는 윤상궁을 내보내었다. 그러고는 아까 펼쳐놓은 두루마리
여전히 읽으시지만 어쩐지 건성이다. 왕은 갑자기 서안에 한 팔을 괴고 도승지를 건너다
보았다.
"경은 이럴 적에 어찌 하노?"
"예, 전하?"
뜬금없이 묻자오시는 말씀이 황당하다. 황이가 놀라 다시 되물었다. 젊은 왕은 북북
두 손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난처하다 그 뜻이다. 용안이 어느새 붉었다.
"음음. 그러니까 말야. 경은...... 내자랑 불편해지면 어찌 해서 그 마음 풀어주느냐고?
중신들 중에서 제일 금슬이 좋다 소문난 이가 경이라면서? 한번도 큰 소리 난 적 없고
정분이 비길 데 없이 좋아 오히려 사내대장부로 망신이고 소문 장하더구먼?"
부러움마저 섞인 왕의 채근에 황이가 허허 웃었다. 고개를 조아렸다.
"황공하옵니다. 신이 무에 그리 소문날 만치 금슬이 좋겠습니까? 그저 남들마냥 안해
존중하고 예법에 따른다 이 정도이옵니다. 부질없는 헛소문이 그리 장하옵니다."
"그러지 말고 짐에게 좀 일러주지? 그대가 부부지간 정이 두텁고 애틋하다 함은 짐이
여러 번 들었는걸? 조하 중신들 중에 안해 존중하고 다정하기로 도승지를 따를 이가
없다고 말이야. 그렇게 금슬이 첩첩한 데는 남들 모르는 비결이 있을 것이 아냐?
빼지 말고 짐에게도 제발 좀 일러주어. 무어."
오가다 한번 내뱉는 이야기도 아니다. 허물없이 스치는 농담도 아니다.
몹시 진지하였다.
"그대도 들었을 터이지만, 중전이 아끼던 사슴을 어이없이 잃고서 몹시 심사가 상하였어.
짐이 그이를 위로하고 싶은데 말이야. 방법을 알아야지. 경이 좀 가르쳐주어.
도통 여인네 마음을 모르겠거든? 중전이 속이 상하여 울고 있는 꼴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황이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더 깊이 고두하였다. 곁에서 뫼신지 이미 세 해가 넘되
상감마마께서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낸 것은 처음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런 깊은
속내 심사를 펼쳐놓은 이유는 단 하나. 남들에게 물어서라도 상심한 중전마마 속을
위로하고 달래주시고 싶다 하는 강력한 소망이다. 전하께 교태전의 그 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만치 귀한 존재라는 말이었다.
"신이 무에 특별한 비결이 있겠나이까? 그저 항시 존중하고 아낄 뿐입니다."
"짐도 중전을 존중하고 아끼지만 알야. 이날서는 그런 것으로는 아니 될 것 같아.
복동이를 잃고 중전의 속이 무척 상한 것이거든? 음. 중전에게 무엇을 선사하여 볼까?"
"그것도 좋은 생각이십니다. 좋은 선물을 해 드리고 잘 위로하면은 대부분 여인네들이
좋아하고 마음을 푼다 들었나이다."
"하지만 무엇을 갖다 줄 것인가? 패물이며 꾸밈거리는 안돼. 그이는 그런 것 제일 싫어
하는 사람이니까. 성정이 소박하여 비는 장하고 화려한 패물 붙이를 도통 좋아하지 않아.
무엇이 좋을까?"
"허면은 중전마마께 꽃을 좀 보내드리면은 어떨까요, 전하? 고운 것을 좋아하시니 마음이
다소간 위로가 되실 것입니다. 허고 금세 새 사슴을 데려다 주신다 약조하시지요.
한마디 지아비 따스한 위로가 제일이라 합니다. 예서 이러지 마옵시고 빨리 중궁전 드옵
사이다. 전하께서 중전마마의 그 상하여진 심사 이해하여 주심이 가장 큰 위로가 될 것
입니다. 진심이 제일 큰 방책인 줄 아옵니다. 헛헛. 예에 계셔도 전하의 마음은 건성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만 일거리 걷어들고 물러날까 하옵니다."
왕은 싱긋 웃었다. 훌쩍 일어나며 황이를 바라보며 실쭉 웃었다.
"경도 말야. 인제 능구렁이가 다 되었군. 짐의 흉중을 제 것인양 읽으니 말야. 흠.
꽃이라. 다시 사슴 가져다 준다 약조를 하라 이 말이지?"
중얼중얼. 도승지에게 배운 수단을 익히니, 속문드러진 안해 비위 맞추는 방책이다.
대전 넘어 중궁전으로 교자를 타고 가던 왕은 갑자기 화원에 이르러서 교자를
멈추라 명하였다. 다짜고짜로 꽃밭에 성큼 들어간다. 한창 철인 국화라, 탐스럽고
싱싱한 가지만을 골라 무작정 함부로 꺾으시었다. 한아름 가득 안고 돌아섰다.
무거우니 저를 주옵사이다 장내관이 안절부절 청하여도 싫다 하신다. 굳이 짐이
들 것이다 하시며 마다하였다. 그러고서는 다시 교자를 타더니 가자! 하시었다.
그 시각. 교태전 중전마마.
하도 심란하니 서책을 펴놓고 앉아 있으되 도통 책장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한 무릎 세우고 이마를 괴고 있는데 울적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였다.
옆에 앉은 윤상궁이 기어코 한마디 타박질이었다.
"부대 웃으십시오 하고 당부까정 하신 터입니다. 옥안 고이 풀어보십시오. 심란하신
줄은 알지만은 중전마마께서 울적한 모습 보시면 상감마마께서 더 걱정하실 것입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윤상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하께서 듭신다 하는 고변이
들었다. 문이 열리고 지아비 상감마마보다 먼저 꽃다발이 들어왔다.
"꽃을 가져왔어. 중전이 꽃을 좋아하니까. 짐이 직접 꺾어서 가져온 것이야. 이 꽃을 보고
우지 마오. 그대가 우는 것이 제일 싫어. 짐 가슴이 무너지거든. 다른 사슴을 데려다
줄 것이오. 복동이보다 더 귀하고 어여쁜 놈으로 여러 마리 가져다 줄 것이니 더이상
상심하지 마오. 아니, 아니다! 사슴 잡으러 갈적에 중전도 데려갈게. 그리고 말야,
고약한 짓 저지른 어린 놈을 엄히 처분하였어. 복마전 같은 월성궁 편액을 떼어 도끼질
을 해버렸다니까! 다시는 비가 그 일로 마음 상할 일은 없을 게야. 어미며 어린 놈
둘 다 엄히 꾸짖고 우마차 태워 재성으로 유형 보내버렸어. 그러니까, 짐이 중전
문드러진 속내 다 헤아린 참이니까 제발 우지 마오."
준비한 위로의 말을 쉬지 않고 좔좔 읊었다. 문득 말을 끊고 꽃더미에 파묻혀 빤히
바라보고 있는 중전의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찰랑찰랑. 분홍빛
입술에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대 위하여 무엇이라도 다 한다는 지아비의
서투른 위로에 감격한 눈빛이었다. 왕은 가슴이 뭉클하였다. 애잔하고 미안하였다.
"이리 오시오."
중전의 작은 몸을 꽃다발과 함께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아니 울 것이지?"
"예, 전하."
"우지 마오.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되 비가 우는 것만은 진정 무서워. 짐이 용렬하고
못나서 그대를 울린 것만 같거든. 부덕한 과인이 불측한 인연을 잘못 맺은 고로
그 업보를 중전이 대신 받는 것만 같이 괴로워. 다시는 그대 울리지 않겠다고 천지신명
에게 맹세하였어. 복동이보다 더 어여쁜 놈으로 꽃사슴을 많이 잡아다 주께
허니 상심 마오. 오늘의 일을 다 잊어버리시오. 응?"
"마마, 성은이 망극하여 차마 말이 아니 나옵니다. 지극정성으로 신첩을 위로하여 주시니
단번에 우울한 기운이 다 가시는 듯 합니다. 저가 복동이를 잘 묻어준 고로 극락왕생을
하였을 것입니다."
"암만. 중전의 목숨을 살리고 제 본분을 다한 놈이라 그놈의 후생은 좋은 곳일 게요.
자 앉으십시다."
왕은 중전의 손을 부여잡고 자신의 곁에 앉혔다. 두 팔로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고
위로하였다. 지아비 다정하신 말씀에, 진심뿐인 정성에 중전의 얼굴에 어렸던 슬픈
기색이 한결 사라지고 밝아졌다. 천천히 어제의 전말을 아뢰고 난 후 다소간 반성하심
이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탄식하였다.
"이럭저럭 일을 신첩이 알아 처리하였습니다. 다소간 거리끼는 것은.... 정강헌의 어린
아이를 흥분하여 모질게 매질을 한 것입니다. 어미 마음이 무척 아팠을 것이라 사료되
옵니다. 신첩이 지나치게 엄혹한 행동을 한 듯하여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소반과가 들어왔다. 중전이 두 손으로 바쳐드리는 식혜 한 모금을 마시며 왕은 흥!
하고 비웃음을 날렸다.
"비가 어질어 그 정도로 자비로운 처분을 한 터요. 흥, 다른 사람 같으면 바로 참형이라
저깐 것이 무어라고 사사로이 대궐을 침입하여 중전이 키우던 미물을 감히 죽인단 말인가
어린 놈이 그런 흉악한 심보를 가진 것을 처음 보았소. 흥. 같잖은 짓거리 모다 그 어린
놈 키우던 어른들 탓이지 무어! 어미며 유모며 글스승이며 다 대처분을 하였다.
죽는날까지 도성 출입을 금하고 제 젖어미 집에서 열 보 이상은 바깥에 못나오게 하였소.
그것으로 분한 심사를 위로하오."
"비록 저지른 짓은 악하나 어린 아이 커가는 싹을 자른 터라. 엄한 처분을 듣자오니
그럭저럭 흔쾌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만 하오. 그놈이며 어미의 성정이 실로 인간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모질고 독하니
그들에게는 어진 덕을 베풀 가치가 없소! 오죽하면 짐이 월성궁 편액을 쪼개버렸을까?
중궁의 불쏘시개로 삼아라 하였으니 이제 짐에게는 그 인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이요. 곤하오. 짐이 장시간 말을 탄 것이기 쉬고 싶소이다. 침수합시다 그려."
중전은 서둘러 내관을 불러 전하 침수 보살펴 드리라 분부하였다. 동온돌 건너간 왕이
자리옷 차비하는 그 동안 명국의 자개 화병을 꺼내어 가져다 주신 국화꽃으로 곱게
꽃꽂이를 하였다. 형형색색 소국이 소담하니 어울렸다. 자개 문갑에 올려놓은 화병이
운치롭다.
얼마 후 두 분 마마 함께하신 서온돌 침전에 불이 꺼졌다. 윤상궁이 돌아서서 마루 끝
에 선 장내관 소매를 잡아 끌었다.
"상선 영감. 말을 하여 보시오. 전하께서 환도하시다가 월성궁부터 먼저 들어갔다 하더
니 어째서 그 불여우가 사단을 간교하게 가리지 못하고 엄한 대처분을 받았던가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혁이 놈과 희란마마를 재성으로 위리안치를 시킨 후에,
그것도 모자라 월성궁 편액을 도끼로 내려쳐서 쪼개버리시고 내탕금이며 아랫것이며
모다 물려라 하셨다는 소식은 담박에 쫘악 궐까지 퍼졌다.
주상의 성총이 떨어졌다 하여도 그 세월지정이 길고 짙다. 설마 아무리 그러하여도
그렇지. 희란마마더러 가혹한 대처분을 단번에 내리시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다. 솔직히 윤상궁은 전하께서 미리 환궁을 하시기 전에 월성궁부터 듭셨다는
소식에 욱하니 열불이 치솟았던 참이다.
'필시 요망한 그 계집이 이번 일을 간교한 혀로 잘 단속하여 전하를 미혹하였을것이다.
유야무야 없던 일이 되면 이것 어찌하지?'
후다닥 중전마마 앞으로 차고 들어갔다. 목청 높여 강하게 주장하였다.
"전하께서 들어오시면은 어제의 전말을 소상히 아뢰어 그 계집을 대처분하여 끝장을
내버리십시오. 그렇게 악독한 것들에게는 어진 덕을 베풀 필요가 없습니다."
헌데 전하께서 중전마마가 간청하기도 전에 일을 다 끝내셨단다. 속 시원하게 복마전
같은 월성궁을 내쳤다 하니 그 전말이 어찌 아니 궁금하랴?
"연유가 있지 무에요? 듣자 하니 대처분을 받을만 합디다!"
"궁금하니 말씀을 좀 하여 보시오."
"참말 어린 놈 입버릇이 고약도 하지? 세상에 전하 앞에서 중전마마를 내쫓아 목을
베고 채찍으로 매우 치리라 무도하게 욕을 하지 않았겠소?"
장내관의 말에 윤상궁 눈이 휘둥그레졌다. 월성궁 계집이 감히 중전마마를 상대로 이년
저년이 예사라 하는 소문은 들었다. 허나 어린 놈까정 감히 성상 앞에서 그런 입질을
자불거릴 줄이야!
"뭐라구요? 아이고, 고놈, 입질 한번 독하구나!"
"그러게 말야. 제 죽을 구멍을 판 게지 그런 말을 들으신 후, 성상께서 불같이 노하셨
지. 냅다 따귀를 치시고 어린 놈 입질을 보아하니 그 어미 무도한 성정을 알아본다 하시
며 벽에 걸린 장검을 내려 목을 치겠노라 호령을 하시었다오. 지밀위에게 소리쳐 분부하
시기를 고약한 모자를 당장에 끌어내라. 짐이 어리석어 성정 무도하고 고약한 계집 하나
사춘기 어린 날에 잘못 건드리어 이런 꼴을 보고 살아야 한다 자탄을 하시더군.
직접 이것들 목을 쳐서 더럽게 뿌린 씨앗을 거두리라 하신 터라오. 당장에 목이 뎅겅
날아갈 것 같이 격하셨는데 그때 정경부인께서 방에 뛰어들어가더군."
"흥, 그 노인네. 장히 염치없어라? 희빈마마께서 그 꼴을 보시었으면 당장에 혈육지연
끊자 하셨을 것이다?"
"누가 아니람? 여하튼 노인이 발치에 엎드려 통곡하며 간청하기를 오직 이 이모를 보시사
우리 마마를 용서하시라, 이 늙은 것을 죽이고 대신 어린 놈을 살려주시라 간청한 것이
야. 솔직히 전하께서 노인에게 다정하고 정이 깊으시잖소? 어찌 그 간청을 외면하리?
결국 장검을 내던지시더군. 목숨은 살려주되, 성총 받을 자격이 없다 일갈하시었소.
쫓아내고 다 물려라 하신 것이지. 쪼개진 월성궁 편액을 중궁전 불쏘시개로 하자고
짊어지고 왔다오. 전하께서 필히 그리 하라 엄명하셨기로 내가 새벽에 그리할 참이오?"
"아이고, 시원하여라!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씻겨나가는 기분이오. 흥, 고 계집이
드디어 제 무덤을 제가 팠구먼? 평상시 하는 짓이 간교하고 악독하며 천지분간 못하는
무도함이라. 내가 언제고 그렇게 될 줄을 알았다! 세상에 말야요. 어린 놈 업어다 준
나인더러 무에 죄가 있다고 악형을 가하여 다 죽여놓았어요. 그 아이가 간신히 정신
차려 돌아와 전하기를, 아주 가관입디다? 상전인 양 마루에 앉아 주리를 틀어라 호령
하면서요, 꼬박꼬박 중전마마를 향하여 이년 저년 하였답니다. 고런 꼴 보고 배웠으니
어린 놈도 그 모양이지 무어야? 기가 막혀서!"
장내관이 같이 공분하였다. 중얼중얼 싸잡아 윤상궁과 같이 욕하였다.
"알만 하오. 그 계집 입질버릇이 원래 그렇소이다."
"중전마마께서 그 말씀을 듣잡시고 불같이 노하시었지요. 사생결단 엎드려 빌어도 시원
찮을 판에 무엇 그리 잘했다고 저가 먼저 삿대질이냐. 반드시 본보기를 보일 것이다
벼르신 터랍니다. 전하께서 미리 대처분을 하신 터이니 그나마 중전마마 분이 다소간
풀리신 참입니다."
"이제 월성궁 여인에 대하여 전하께서도 남은 정이 하나 없어요. 칼 들어 목을 치리라
하셨을 적에 그 계집은 전하께 죽은 사람이 되었지. 앞으로는 그 여인이 궐을 어지럽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