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200)

잘디잔 빗금 같은 상처가 손바닥에 핏줄기로 새겨졌다. 그런데 그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였다.

"창빈 어마마마께서...... 정업원 들어가시고 나서..... 짐은, 짐은..... 혼자 많이 

울었소이다!"

"망극하옵니다! 신첩이 죄를 받을 것입니다. 마마 심기를 이토록 불편하게 하여 드린

것이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괴로우시면 더 이상 마옵소서!"

성상의 용체에 난 상처. 손바닥에 난 여린 핏자국에 놀랐다. 중전은 하도 당황하여

핏줄기에 혀를 대어 빨았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왕은 이것으로 모두 다 털어놓자

하듯이 아랑곳 않고 말을 계속하였다.

"낮밤으로 월성궁에 드나들며 사모하는 여인 품 안에서 방탕하게 살았소. 그렇게 잊어

버리자 하여도 허나,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생모라 하여도 그분만큼 살뜰할

수도 다정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헌데 그런 분을 버렸어요! 온갖 수모를 주고 마치

쓰레기처럼 내버렸습니다. 사춘기 풋정이라 은애한다 믿은 계집 하나 얻자고 그런 분을

버렸어요! 못히었습니다. 예, 가슴에 박힌 가장 큰 대못이었어요! 짐 또한 후회하였지만,

그날부터 후회하였습니다. 몇 번이고 정업원에 가서 짐을 용서하고 다시 돌아오십시오

하고 간청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못하였어요! 짐은 그렇게 말을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곧고 고결하신 분이니 짐의 그런 간청 받아 주시지도 않을 분이었고, 또, 짐 스스로 못나

실덕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지라......"

거짓말처럼 굵은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중전은 가만히 그를 안아 줄 도리밖에 없었다.

무엇을 어찌 말을 할 것이냐? 괄괄하고 도도하며 당당하였다. 거칠 것 없고 높디높은 

지존으로 사는 분이다. 이런 분의 가슴 안에 입으로 내어 차마 말하지 못하는 서럽고

아프고 괴로운 말이 이렇게도 많았다니.

"아, 그래요. 그것이 벌써 구년입니다. 짐이 내수사로 하여 정업원에 곡식을 보내어도..

어마마마께서는 받지를 않으시고 다시 돌려 보내셨어요. 짐이 월성궁 누이와 연분을 

맺고 있는 한은 궐이 있는 북쪽은 바라보지도 않겠다 하시며 북창을 막아버리셨다 합디다.

그런데 짐이 무엇을 더 어찌 하리요? 살아 계신 한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는 뜻이니...... 그렇게 어마마마를 다 잃어버렸소이다. 짐은 이렇게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인간이오!"

소리 없는 깊은 오열, 후회와 회한과 아픔이 점점이 새겨진 사내의 눈물. 중전은 왕의

볼에 흐르는 굵은 눈물을 닦아주며 문득 월성궁에 도사리고 앉은 계집에 대한 미움으로

몸서리를 쳤다.

'저 하나로 인해 이분께서 잃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 계집은 알고나 있을까?"

그를 가슴 사이에 안아주며 중전은 사그라드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렇게 이 분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척을 져가며 일편

단심 순정을 바친 터이다. 그런 사랑과 정성을 받은 그 계집은 이 분께 무엇을 하여

주었더뇨?

'제 치마폭에 휘어감아 허수아비로나 만들었지. 호화사치며 권세 누리는 수단으로 이용

함이 전부였다. 고 것이 감히 전하를 능멸함이 그토록 장하였던 것이로다.'

중전 자신을 아프게 하고 박대 받게 한 이유조차도 실상은 전부다 저에 대한 일편단심의

성총. 전하께서는 진정 모든 정을 다 저에게 주었거니. 그런데 그 계집은 그런 분을 대

함에 있어 대체 어찌하였던가?

'그리도 과분한 성총을 받았으면, 조금이나마 염치가 있다 할지면 차마 성상의 위엄을

호가호위하여 간특한 짓을 벌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헌데 그 계집의 성정이 참으로

무도하고 간악하니 전하를 기만함이라. 태연하게 이용하여 제 속셈차림이 그리도 장하

였다. 심지어 감히 용안에 손톱 자국까정 낼 지경으로 천하에 방자하게 굴었지.'

진실을 가장한 거짓은 언제고 드러나는 법이다. 전하께서 이제 월성궁 계집년에게 미쳐

천지분간 못하고 지샌 시절을 부끄러워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중전은 주먹을 꼭

쥐었다.

'이렇게 마마를 능멸하고 기만한 너를 내가 용서할 줄 아느냐? 그대로 돌려줄 것이니

어디 두고 보자구나! 내게 하였던 무도한 행동은 참을 수 있었다. 허나 이렇게 일편단심

그저 외롭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정하다 싶었던 누이에게 함뿍 정을 주신 그 죄뿐인

전하를 상대로 저지른 너의 방자하고 악독한 일들은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중전은 왕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위로하여 생긋 웃었다.

"마마, 신첩이 있사옵니다. 이 세상사람 모두다 전하를 비난하여도 신첩만은 믿고 따를

것입니다. 신첩이 갈 것입니다. 백날을 정업원 앞에서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어마마마를

모시고 들어올 것입니다. 전하를 용서하여 달라고 주청을 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신첩이 전하를 위해서 무엇을 못할 것인가. 전하를 위해서라면은 목숨까정 내놓을 것입

니다. 마마 가슴속에 맺힌 것들을 신첩이 다 풀어 드릴 것입니다. 신첩에게 전하가 전부

입니다. 신첩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것입니다. 허니 너무 상심 마옵시오."

"정말 비가 창빈 어마마마 모시고 와 줄 것이야?"

"예, 반드시 그러할 것입니다.살뜰하고 다정하신 어마마마께서 살아계신데 어찌 이렇게

외롭게 사실 것입니까? 마마, 걱정 마십시오. 허니 망극한 옥루를 제발 그치시옵소서.

신첩의 가슴이 찢어집니다. 눈물은 신첩의 몫입니다. 성상께서는 눈물을 흘리면 아니

되십니다."

고운 지어미가 차분차분 위로하여 주고 눈물을 닦아준다. 지존 된 위엄으로 차마 토로하지 

못했던 외로움과 후회이며 가슴 아픈 일들이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왕은 작은 손을

붙잡고

"중전은 짐에게 하늘이 내려준 복이고 생보살이야."

몇 번이고 진정으로 말하였다.

"그대가 짐의 곁에 있어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 지 말로 차마 할 수가 없을 참이야.

평생 감사하고 은애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오."

제헌원의 하루. 그렇게 왕은 중전의 말로 오랫동안 왕대비마마에게 가졌던 섭섭함이며

오해를 풀어냈다. 참깨 털듯이 가슴 깊이 묻어둔 회한과 실책을 툭툭 털어냈다.

척을 져 그저 외면하였던 정업원의 창빈마마 이하 윗전의 일에 대하여 매듭을 풀었다.

참으로 가슴에 깊이 후회하였으나 쓸데없는 자존심과 지존된 도도함으로 빼지 못하였던

큰 못이 중전덕분으로 빠진 셈이다. 손 꼭 부여잡고 제헌원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마냥

가벼웠다.

<제5화> 월성궁 편액을 쪼개고 난 후

월성궁을 나온 왕의 눈빛에는 시퍼런 빛이 튀고 있었다. 대궐을 향해 말을 달리는데 입을

꾹 다물고 말고삐만 움켜잡고 있다. 뒤따르는 호위밀들이며 내관들 전부다 오스스 한기로 

몸을 떨고 있었다. 입 꾹 봉하고 급하게 말을 달리는 왕의 뒬르 따르기만 하였다.

모두 다 짐작하기로 오늘밤 궐 안팎으로 피바람 장할 것이다 간을 조이는 참이었다.

어린 놈이라 하나 사사로이 금원에 침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지존의 안위에 큰 구멍이 뚫린 셈이다.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일이었다.

금부며 비변사이며 전부다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궐 안이 온통 뒤숭수알 것이라 짐작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광희문으로 들어선 왕은 우원전 쪽이 아니라 말머리를 돌려 외행각 동편의

내금부로 들어갔다.

이미 넓은 마당에는 금부도사 강희명이 삼정승 육조 판서 모다 세워두고 그날 궐 안팎을

지키던 무장들을 전부다 오라로 묶어놓고 문초하고 있었다.

베옷입고 머리 풀고 목을 길게 내밀고 있는데 아무도 입 열어볼 염치가 없는 얼굴이다.

병조판서 남준이 등채를 치켜들어 "저 놈들 모다 주리 돌려라!" 호령호령하고 있는

즈음이었다. 바로 그때 왕이 들어섰다.

아이 하나 때문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수백여 명의 군졸들이 형벌을 당하고 있는 행각

마당을 가로질러 왕은 아무 말 없이 석계원의 용상으로 걸어가 앉았다. 

단 아래 한철위가 한 무릎을 꿇고서 고두하여 절하였다.

심각한 얼굴로 전하께 이 날 일을 설명하려 하였다.

"전하, 참으로 망극하고 통탄할 일이옵니다. 이 날 이 몸 이하 내외금부 아랫것들이 모다

죽을 것입니다. 감히 외인이 사사로이 금원을 침입하여 중전마마 사슴을 죽인 일이..."

"이미 짐이 그 사단을 들었다. 그만 하라! 형틀 세울 필요 없다. 어린 놈 하나 때문에

생목숨 수백 개가 왔다 갔다 한다며는 사리에 맞지 않다. 다음서부터 조심하고 잘하여

이런 일이 다시는 없으면 되는 것이다."

"전하! 허나 이 놈들을 용서하시면 앞으로 엄연한 군기를 어찌 세울 것입니까?

참으로 망극하기 그지없으나 엄벌을 하셔야 함이 당연하리라 보옵니다."

병판 남준이 우렁우렁한 목청으로 불가하다 주장하였다. 강직하고 꿋꿋한 한철위도 

수염을 떨면서 더 깊이 고개를 숙이었다.

"신은 이미 죽기를 각오하였습니다. 죄를 주옵소서. 대궐을 지키는 막중한 책무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리 아이라 하나 사사로운 침입을 막지 못하였나이다!

하물며 중전마마께서 아끼는 미물을 상하게 하여 지존의 심기를 무척 상하게 한

터입니다. 어찌 감히 살기를 바랄 것입니까? 이날 신을 비롯한 모다가 죄를 

받을 것입니다. 부대 신의 목을 참하여 주십시오!"

죽여주십시오!- 무장들 모두다 흙바닥에 엎드리어 고개 떨어뜨린 채 소리쳤다.

죄를 청하는 소리가 대궐 마당을 울렸다. 피곤한 듯 어수로 이마를 짚으며 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엄한 대궐을 지키는 소임을 다하지 못한 죄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하겠지. 허나, 어찌 이 많은 목숨을 후원 사슴 한 마리

죽었다고 벨 것이냐? 사람 사는 일인데 실수는 할 수 있을 것이지."

나직하나 단호한 옥음이 너른 마당을 울렸다.

"금일의 사단에 대하여 짐은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이 없다. 어찌 이들이 죄를 지은

것이냐? 독하게 성정 가지고 일부러 금원에 침입한 그 어린 놈이 제일 큰 죄를 지은

것이지! 목을 벨 것이면 그 어린 놈 목부터 먼저 베어야 사리에 온당하다 할 것이니라.

이 날 일을 기화로 이렇게 많은 이들 대 처분함은 짐도 마땅치 않거니와 중전 역시

어진 사람이니 필시 그는 박대할 것이다. 허니 꿇어 엎드린 이놈들 모다 목숨은 살리라

단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괘씸하니 곤장 오십대씩 친 후에 삭주 국경으로 번을 서게

내쫓아라! 그보다, 짐이 알고 싶은 것은 어린 놈을 지키던 정강헌 수하 두 놈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

"큰 칼 씌워 옥에 가두어 두었나이다. 당장에 참할 것을 중전마마께서 하교하시기,

죄인 처분하는 일은 궐의 주인이신 전하께서 들어오시면은 결정하실 일이라 하시어

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환궁하시기만을 기대리고 있었나이다. 어찌 하리까?"

"수하가 감히 주인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되 그놈이 어린애가 아니냐? 수하라 

하여도 어른인데 어린 주인이 잘못된 일을 할 적에는 막아야 함이 도리겠지. 

헌데 그놈들은 그 일을 못하였다. 결국 어린 놈이 금원에 침입한 대죄를 지은 것이다.

허니 그놈들을 책임 물어 당장에 압송하여 죄를 묻고 대대손손 장성 쌓는 곳에서 노역을

명한다."

"분부 거행할 것입니다."

"허고 그 어린 놈은 이미 짐이 처분한 즉, 대역무도한 죄를 지은 것이니 아무리 어리다

하여도 절대 용서할 수가 없다. 도승지는 교서를 내려 그놈을 베옷 입혀 우마차에 태워

재성으로 유배를 보내라. 짐이 살아있을 동안 그 어린 놈은 절대로 도성 출입을 금할

것이다. 재성에서도 바깥 열 보 이상 벗어나지 못하리라. 사사로이 들고나는 놈이

있을진대, 당장 목을 베리라! 허고 그 어린 놈을 보아하면은 그 어미 무도한 성정을

알만하다. 성총을 받을 자격이 없음이다. 그 어미에게 내린 궁명을 박탈하고 하사하던

재물전부 물려라. 어린 놈과 더불어 재성으로 위리안치 할 것이다. 이로써 일을 끝내라!"

추상같이 하명하시는 옥음이 심히 엄하였다.

그렇게 사리분별 맞추어 가리고서 왕은 훌쩍 용상에서 일어섰다. 평상시 격하고 욱하는

성정에 따르자면 상하 분별없이 엄한 처분이 따를 것이라 생각하였다. 헌데 예전과는

달리 너그럽고 사리분별 바르시다. 아랫것들 모다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 날 일어난 사단은 전하의 즉위 이후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딴일도 아니고 궐 안팎 경비가 허술하여 대궐 후원에 외인이 침입함을 막지 못한 참이다.

지존의 안위에 구멍이 뚫린 터이니 절로 몸서리쳐지고 살이 떨리었다.

저가 딱 자진하여 죽어질 참입니다 하고 머리 풀고 목을 내밀만 하였다. 모두 점치기를

안팎으로 장한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라 지레 짐작하였다. 간 졸이며 달달 떨었다.

헌데 전하께서 바르고 어진 처분하시어 무사히 넘어가니 아랫것들 모다 감격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얼떨떨하여 제 정신이 아니다. 석계 아래 중신들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구동성 치하하였다. 그렇게 일을 가리고 왕은 우원전으로 가자 하명하였다.

중신들 일부는 전하 뒤를 따르고 나머지는 마당에 서서 왕의 뒷등을 바라보았다.

웅성웅성 전하의 덕을 칭찬하고 칭송하는 한편, 놀라움의 사설도 만만찮았다.

"한 점 어리석음 없이 곧고 엄하시되 밝으시도다. 전하의 영명함을 감축하오. 

사리분별을 이리도 또렷하게 하실 줄은 몰랐소이다. 헌데 참으로 의외구려."

"그러게나 말이오. 월성궁 여인의 일이 아닌가 말야. 그 사이 성총이 다소 옅어졌다 

하여도 속정이 깊으셨거늘! 독하게는 못하실 것이다 짐작하였는데 참으로 의외구려."

"누가 아니래나. 예전마냥 흐리멍텅 성총따라 가벼이 처분하실 줄 알았는데 가혹한 

처분을 단번에 내리셨소이다 그려. 전하께서 그 여인에 대한 정해의 그물에서 완전히

벗어나신 듯 하오."

영의정 한영회가 남준을 바라보며 한마디 하였다. 평생 왕에 대하여 절대 복종만 있지

단 한번도 구린 입 한번 떼지 않던 남준이 마주 답하였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합디다. 태양이 뜨면 달 그림자는 자연히 기울게 마련이니 어질고

총명하신 중전마마께서 성총 회복하신 터로 전하의 눈도 밝아지신 것이 아니니까?

실로 전하께서 이리 어진 처분하여 주심도 고운 심성 가지신 우리 중전마마 영향이니

이 나라 사직의 홍복으라 할 것입니다."

"중궁에서 석고대죄하는 좌상 형편은 어떠하오?"

"아까 중전마마께서 재상을 수모 줌은 민망하다 하시며 그만 물러가라 내쳤다지요."

"쯧쯧, 핏줄 독한 자손 하나 잘못 두어 그이도 만만찮게 망신이오."

등 뒤의 중신들이야 전하를 칭찬하고 칭송할지 모르나 우원전 들어서는 용안은 결코

편안치 않았다. 실상 왕의 마음으로야 그 길로 중궁전 들어가서 상심한 지어미를

위로하고 달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단이 월성궁 계집의 방자한 짓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는 터, 중전을 볼 낯이 없다 싶었다.

결국은 그 무도하고 악독한 계집에게 짐이 미혹하여 실덕한 것을 모다 죄 없는 중전이 

감당하는구나. 도대체 그이 얼굴을 미안해서 어떻게 볼 것인가? 의대를 갈면서도, 

욕간을 하시면서도 왕은 내내 한숨이었다.

'필시 또 어린 새처럼 홀로 울고 있을 테지. 중전이 복동이 그놈을 얼마나 아꼈는데..

짐인듯이 보오 하며 데려다 준 정표잖냔 말야. 중전에게는 그놈이 어린 자식이나

진배없었는데..... 젖도 못 뗀 놈을 토실토실 어여쁜 영물로 키워놓았거늘! 

얼마나 상심했을까? 휴우~ 짐의 실책으로 지금까정 중전만 욕을 보는구나. 짐의 탓이야.

이 모든 것이 다 짐의 탓이다.'

몹시 언짢은 기분이다. 하여 그는 한참 동안 기오헌에 앉아 망설이고만 있다.

치열한 갈등. 두 마음이 다투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서 상심한 그 사람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야지 하는 마음 한줄기. 면구하여 짐이 어찌 그이 얼굴을 볼 것이냐? 차라리 도망치고

싶다 하는 다른 줄기가 서로 얽혀 갈팡질팡. 도승지가 호조판서와 더불어 급히 보셔야

할 두루마리를 한 아름 안고 편전에 든 것은 그때였다.

"이것은 서북 지방 쪽으로 미곡을 보내는 일의 전말이옵고 이것은 장성 쌓는 인부들

임금을 호조에서 다시 계산한 터이니 보시고 재가하여 주옵소서."

"미곡 보내는 일은 그대로 시행하면 될 것이나 장성 쌓는 인부들 임금 일은 애초부터 

다소 눅게 주었다 하지 않았던가? 헌데 왜 다시 계산을 한 것이더냐?"

"지금 돌아가는 곳이 바위가 많고 험하여 평지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힘이 드니

그에 맞추어 노임을 올려줌이 가하다 하는 중론이 있었나이다. 그것이 사리에 맞다 하여

그리 계산한 줄 아옵니다."

호판의 설명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바쁜 일이 생긴 것이 좋다.

중궁전으로 늦게 들어갈 구실이 생겨 오히려 안심하는 마음이다.

그곳으로 아니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는 중전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이가 울면 짐은 억장이 무너져.'

두루마리를 읽으며 머리 속으로 혼잣말. 호판이 재가한 두루마리 안고 나가고 도승지가

또 다른 두루마리를 펼쳐드리었다. 그것을 읽어 내려가고 있는 참인데 바깥에서 장내관이

고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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