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200)

노들목 행궁은 귀인들이 도강을 하기 전 항시 머무시는 곳이다. 종종 이용하시는 전각이라.

다른 행궁과 비교하여 규모는 작지만은 꾸밈과 단장 치레만큼은 지지 않는 날렵하고 우아한

전각이었다. 마마들께서는 행도의 차비를 풀고 원로의 피곤을 씻으시었다.

왕이 밤수라를 받으러 중전이 머문 내전으로 들어왔다. 수라를 물리고 차를 내놓으면서

중전이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마마, 예서 제헌원이 그다지 멀지 않지요?"

"가깝긴 하오. 말을 달리면은 한 식경이면 되오만은, 갑자기 왜 물으시오?"

영 엉뚱한 말에 왕이 되물었다. 중전이 생긋 웃었다.

"신첩이 혼인한 후 오직 바라옵기를, 제헌원에 전하를 뫼시고 함께 가서 희빈마마 영전에

향불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마마, 지금 살며시 한번 다녀오실 마음이 없으십니까?

일부러 궐에서 나오기는 힘이 드나, 이왕 이곳에 머문 참이니 몰래 한번 다녀 옵사이다?"

"음? 생모마마 유택에 다녀오자고요?"

"예, 이내 마마의 탄연이십니다. 생모마마께 감사의 예를 드려야지요. 실은 작년에 신첩이

희빈마마께서 좋아하시었다는 백목단을 구하여 제헌원 주위에 몇 그루 심었거든요. 

그 꽃이 지난 가뭄에 살았는지도 궁금하고요. 지금쯤 한창 목단 필 철이니 보기가 좋을 

것입니다. 신첩을 한번 데려가 주십시오."

중전의 그 말에 왕은 문득 가슴이 그득한 기분이었다. 

지존인지라 마음이 있다 하여도 후궁이신 생모마마 묘소에 함부로 발길을 하지 못하는

것이 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 역시 아까 말을 타고 길을 따라 오며 생각했다

저쪽으로 뻗은 길로 조금만 더 가면 제헌원이로다. 사람들의 눈이 뭇워 이렇듯이 아들이

어미의 유택을 두고서도 그냥 지나치는구나 싶었다. 하여 잠시 울적했었다.

헌데 중전이 먼저 청하여 주는구나. 제헌원에 가옵사이다 하니 참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

중전께서 먼저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겠다 하며 그를 이끌어주는구나. 못할 게 무엇 있으랴?

급한 성정답게 벌떡 일어났다. 무작정 중전의 가마를 대령하라 하명하고 어서 가자 작은

손을 잡아 끌었다. 노을이 빨갛게 지고 있었다.

두 분 마마는 신임하는 장내관과 윤상궁만을 뒤에 딸리고 느릿느릿 제헌원에 걸어 올라갔다.

손을 꼭 잡은 채였다. 

지존마마의 생모이시다. 비록 후궁의 묘역이되 제헌원은 잡풀 하나 없이 잘 가꾸어진

금잔디가 파랬다. 우아한 석간으로 둘러쳐진 둥실한 봉분도 어디 하나 어그러진 데가 없다.

산소 주변으로 그분께서 생전에 좋아하시었다는 장미화며 백일홍이며 옥잠화며 백목단이

장하게 피어 향기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흡사 꽃 바다요, 칠색 구름에 쌓인 듯 하였다.

작년 주상의 생신날, 중전마마께서 윤상궁 시켜 어렵사리 구하여 심은 백목단이 한참

피는 철이다. 상감마마께서는 유택 주변에 활짝 핀 꽃을 보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화사하면서도 단아하고 기품어린 고운 꽃이 꼭 희빈 어마마마께서 살아 돌아오신 듯싶었다.

"백목단은 작약과 함께 핀답니다. 목단이 피며은 작약이 따라 피니 바로 정분좋은 부부

지간이 아닐 것입니까? 백목단이 전하이시면 작약은 이 희빈입니다."

"번화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참말 희빈과 같을지니, 짐에게는 그대가 이 꽃이거늘. 

정표로 꽃을 드립니다."

서경당에 핀 백목단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시던 어마마마가 기억에 생생하였다. 

선대왕께서는 이미 그때 병중이시었다. 앙상하게 야윈 모습이셨다. 허나 고운 정인의

한마디에 벙싯 웃으시며 굳이 쇠약한 몸 이끌고 뜰에 내려서시었지. 소담한 꽃 한송이

꺾어 희빈 어마마마께 주시었던 기억이 난다. 어마마마께서는 성상께서 직접 정표로

주신 그 꽃을 수반에 담가놓고 마냥 좋아하시었다 꽃잎 하나 질 적마다 마냥 안타까워하셨다.

'고맙소이다, 중전.'

왕은 작년에 이미 그 일을 알아 중전에게 깊이 감사하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무뚝뚝하고 수줍은 터라, 고맙소이다 말 대신 꽃봉오리처럼 고운 손을 잡은 어수에

힘을 꾹 주었다.

두 분 마마, 나란히 제각에 들어가시었다.

위패 앞에 촛불켜고 향을 살랐다. 지전 태우고 절을 하는데 두 분 마마께서 나란히

생모마마 앞에 향촉을 사른 것은 처음이라 마냥 감격스러웠다.

약속이나 한 듯이 묘역 주위를 한 바퀴 삥 돌았다. 행여 잡풀이라도 났을까 봐 알뜰하게

살피신다. 그러고서 멀리 장조 선대왕마마 능이 올려다 보이는 언덕에 앉으셨다.

손을 뻗으면은 닿을 듯이 가까운 곳이다. 당신이 깊이 총애하신 지어미. 죽어서도 가까이

두고 싶으신 것이라. 반드시 짐의 능 가까이 희빈의 영묘를 두라 유훈하신 터이다.

그리하여 희빈마마 유택이 선대왕마마 능 아주 가까이 있게 된 것이다.

"어마마마께서 중궁전에 오르시었으면은 아바마마와 함께 나란히 영면하시었을 터인데..

끝내 후궁의 신분으로 돌아가신 지라, 총애가 더없이 깊으시었으되 대접은 실로 변변

찮았던 게지. 할마마마께서 어마마마를 신분 미천하다 하여 싫어하신 터였소이다. 하여

중궁전이 비어있어도 어마마마를 중궁에 올려주지 않으신 것이오. 그 일에 상심하사 

어마마마 병환이 더 깊어지신 것이니 실은 심홧병이 아닐 것인가? 한 분 원자 낳고

지극한 성총을 받았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돌아가신 지 오래이되 아들에게 절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불쌍한 분이신 것을."

밤 그늘이 깔리는 하늘을 바라보시며 왕이 문득 우울하게 말하였다. 이곳에만 오면은 

저절로 생기는 원망이었다.

"할마마마께서 희빈 어마마마를 싫어하신 것이 아니랍니다, 전하."

뜻밖의 말에 왕은 깜짝 놀랐다. 옆얼굴을 보인 왕비는 손 가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강아지풀 하나를 따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사실과 다른 줄 아옵니다. 실은 저가 그것이 궁금하여 한날 할마마마께 여쭈었

습니다. 어찌하여 중궁전 비워진 터인데 원자 생산하시고 그 분으로 보위 이으신 터이니

희빈 어마마마께서 교태전에 올지 못하셨습니까? 여쭈었습니다."

"하였더니, 무어라 대답하십디까?"

"전하께서 아시고 계신 것과는 다소 다른 사정이 있던 걸요. 실은 할마마마와 선대왕마마께서

의논하시기를 희빈 어마마마를 중궁전에 올릴 것이다 하였었답니다. 그 분께도 뜻을 알려

드렸구요. 헌데 지아비의 병간호를 하다 희빈마마께서도 그때 이미 가슴앓이 병이 깊어진

터였답니다. 피를 토하고 기력이 딸리는 분이라, 병이 든 이 몸으로 어찌 중궁의 무서운

자리를 감당하리요 하며 스스로 사양을 하셨답니다. 오히려 신분으로나 그 덕성으로나 

창빈마마께서 그 자리에 가하다 희빈마마께서 천거하시었다는군요. 하여 그리 할까 의논

중에 갑자기 선대왕마마께서 훙서하신 것이라 그만, 교태전이 비워진 채로 일이 끝났다

합니다."

"...... 그랬구먼요. 짐은 그런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였소."

어린 나이라 세자에게 어른들께서 말해주지 못한 진실이 지금에서야 드러난 것이다.

그가 알지 못하였고 보지 못한 진실의 끝이라, 오해는 그렇게 매듭이 풀려갔다.

중전의 다음말에 오히려 왕은 경악하여 뒤로 넘어갈 지경이 되었다.

"싫어하시기는커녕 할마마마께서는 희빈 어마마마를 아끼시기 참으로 그 정이 깊으십니다.

이렇게 제헌원을 선대왕마마 능 가까이 앉히신 것도 오직 할마마마 덕분인걸요. 저가

자운궁 대부인께 들었습니다."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제헌원이 예에 있게 된 것이 할마마마 덕분이라니요?"

"희빈마마께서 졸하신 이후 묘소를 어디다 둘 것이냐 논란이 심하였답니다. 

이리 능 가까이 후궁 묘역을 쓴 관례가 없는 것이라, 예조에서 심하게 반대를 하였답니다."

"그 일은 짐도 기억하오."

하여 그것 때문에 원망이 얼마나 쌓였던가? 그 당시 영의정이었던 최형전, 예조판서인

김장집과 왕의 사이가 멀어진 결정적인 일도 그것 때문이었다.

"심지어 정궁 마마 두 분의 능도 도성 바깥인데 이토록 가까이 도성 안쪽으로, 그것도

바로 대능 옆에 후궁의 묘역을 둔다함은 형평에 어긋나고 실로 무엄한 일이라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난리가 아니었답니다. 헌데 할마마마께서 반드시 희빈의 산소를

능 가까이 앉혀주시오 한 선대왕마마 유훈이 있었다 하교하시어 일이 결정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 유훈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오?"

"그것이...... 저어, 전하. 신첩이 듣기로 선대왕마마께서 그런 유훈을 하시었다 함을 

들었다 주장하신 분은 오직 할마마마 한 분이랍니다. 당신께서 그러하다 하니 그러한

줄 알지, 아무도 그 진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대부인께서는 아마도 그 유훈은 할마마마

께서 지어낸 일일 것이다 추측하셨습니다. 그런데 굳이 할마마마께서 그런 거짓부렁까지

하며 제헌원을 예에 앉히신 것은 희빈 어마마마를 오직 선대왕 아바마마의 안곁으로 

여기셨다 이 말이 아니겠습니까? 휘강전 전하께서 희빈 어마마마를 미워하셨다 하신

전하의 말씀은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짐은 그 일을 처음 듣는 것이오! 실로 그것이 참이오? 할마마마께서 진정 어마마마를

위하여 그리 하셨단 말이오?"

왕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경악하였다.

눈을 크게 뜨고 중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중전이 영민한 눈을 들어 용안을 똑바로

우러렀다.

"마마, 항시 일의 추이라 하는 것은 양쪽면이 같이 있는 것이랍니다. 한편의 말만 듣고서

무조건 옳다 그르다 하시는 것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쉬운 지름길이 아닐까요? 무작정

신첩의 말을 믿으십시오 하지는 못할 참이니, 돌아가시어 예조에다가 그 일을 정확하게

알아보시어요. 진성 대군께서도 그 일을 잘 아실 것이니 부르시어 그때 사정을 한번 

찬찬히 들어보십시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그렇게 하면은 밝혀질 것입니다.

전하, 할마마마께서는 희빈 어마마마 말씀을 하실 적에 신첩에게 항시 말씀하셨습니다.

그 용색도 꽃이었으나 그 인품이 실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구요. 오직 선대왕마마께서

마음으로 아낀 안곁이라 희빈이었으니 원자를 낳아준 여인이요, 지성으로 선대왕을 

모신 여인이라 항시 감사하였다 하셨습니다. 다만 두 분께서 사이가 그 동안 멀어지셨던

참이었으니 할마마마께서 속에 든 이야기를 못하신 것입니다."

전하, 그저 잠잠히 중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귀밑부터 용안 전체가 노을처럼

벌게졌다.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치는 지난날. 무서운 실책이었다.

한 분뿐인 할마마마를 두고 감히 창회궁 늙은 것이라 막말을 하지 않았나, 수렴청정하시며

그를 허수아비 만든 분이라 오해하여 지금껏 척이 진 터라. 문안인사 한번도 제대로 아니 

한 터였다. 성덕궁에서도 거처하지 못하게 하고 창희궁으로 내몰았으니 망극한 이 불효를

어찌할 것이냐? 지금껏 왕은 그저 할마마마께서는 엄하고 나의 흠만 잡으시는 분이다

생각하였다. 항시 어렵고 두려웠다 살뜰한 정보다는 불만이 강하였다.

"짐은 항시 무엇을 어찌하여도 할마마마 앞에서 잘하였다 말도 못듣는 바보 멍청이라 

어차피 폭군이거늘. 못난 사람이니 못난 짓을 하여주마. 흥!"

억지심술이 반인 되튕기는 오기였다. 게다가 희란마마 일로 한번 더 크게 척이 졌다.

희란마마 또한 저를 대놓고 싫어하고 마치 뱀처럼 사위스러워하였던 왕대비전에 대하여

좋은 감정 가질 리는 만무하였을 터. 악심이 장하여 밤마다 왕의 침수를 뫼시며 대놓고

속살거리기 왕대비마마에 대한 욕이요, 구설이 굉장하였다.

낮밤마다 모함에 악한 참소가 이어졌다. 허니 어찌 왕대비전에 대한 왕의 감정이 풀릴 

것이더냐? 갈수록 켜켜이 쌓이는 원망이요 미움들. 그깟 할마마마야 어차피 시간 흐르면

늙어 죽어질 분이지. 짐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내쳤다. 칠팔 년 공식적인 궐의 행사에서 

마주쳐도,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고 먼저 절하는 법도 없이 스쳐 지나가던 냉랭한

조손지간이었다. 하물며 구 년 전. 왕이 친전하시겠다 나서 일으킨 <명일옥사>때는

어찌하였던가? 왕대비마마 집안인 덕수 민씨 가문을 거의 깡그리 몰살을 시켜버렸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등에 주르르 진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낯을 들어 하늘을 우러를

수조차도 없을 지경이었다. 중전의 말이 사실일진대 이 무서운 과오를 어찌하랴.

편협한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참소하는 이의 말만 믿었다. 한 분 뿐인 할마마마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참이니 어찌하랴?

중전이 가만히 두툼한 어수를 두 손으로 잡았다. 여린 볼에 그 손을 대고 진심을 다하여

간절하게 청하였다.

"전하, 천행으로 신첩이 성총 회복하여 사이가 가까워진 터입니다만은, 실상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이 할마마마와 전하의 사이가 아닐까요? 허고요,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올립니다. 전하께서 원래 할마마마와 척이 지신 것이 월성궁 여인의 일 이전부터라구요."

"...... 짐에게 늘 엄하시었지. 쌀쌀맞고 차디찬 옥안만 보여주시었습니다."

"윤상궁에게 들었습니다. 항시 흠만 잡고 무조건 못하였다 꾸짖는 것을 못 참아 하셨다구요.

그리하여 할마마마께서 마마를 미워하신다 오해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실은

말 그대로 오해여요."

"응? 그것이 무슨 말이오?"

"한날 말씀을 하셨습니다. 노인께서 전하께 그리 엄하신 속사정을 이야기하여 주셨습니다.

전하께서 탄생하시자마자 훙하신 연수대왕대미마마께서 당부하시었답니다. 지엄하고 높은

원자입니다. 혹여 전하 곁에 어렵고 엄한 분이 없으면은 매사 아기가 조심함도 없고 근신

하심도 없을 것이라. 잘못하면 보위에 올라, 망극하옵니다, 폭군 되어지기 딱 알맞다 하여

한분이라도 겨에 계신 어른들이 그런 조심함을 가르쳐야 한다 엄히 하교하셨다 합니다.

그러나 선대왕 마마께서 병중이시니 엄하게 돌보시기 다소 힘이 부치었고, 워낙에 어지신

분이니 한마디 큰소리도 아니 내신 아비였다구요. 희빈 어마마마께서도 금세 세상을 

버리시니 그 일을 감당할 분은 오직 왕대비마마 자신 한 분이 남았다구요. 울며 겨자먹기로

그렇게 하셨다 하셨습니다."

중전은 왕대비전하께서 오랜날 가슴에만 담아놓았던 이야기를 비로소 왕에게 전하였다.

"단 한 분 장중보옥, 애지중지하신 손자입니다. 헌데 어찌 마마가 귀하고 아깝지 않으셨을

까요? 마음으로는 너무 귀하고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셨으되 마마께서는 사가의 아드

님이 아니라 이 나라 사직을 감당하고 보위 올라 만리 강토를 다스려야 할 분이었습니다.

주상께서 어리석고 제 일을 감당하지 못하면은 이 나라 사직이 흔들림이다, 예쁜 자식에게 

매 하나 더 주고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준다 함이니 내가 그 엄숙한 역할을 하리라

결심하셨답니다. 전하께서는 제발 할마마마 그 깊은 뜻을 헤아려 주십시오."

"짐이, 짐이..... 부끄럽소!"

간신히 한마디. 왕은 남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차마 면구하여 사람을 바로

볼 수 없다는 뜻이리라.

"중전께서는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 이라 함은 잘 알고 있소이다. 그대가 지금 한 

말이 모다 참이겠지. 짐이 지금껏 단 한 분뿐인 할마마마께 무슨 짓을 하였던 것이오?"

"망극하옵니다."

"잘난 척은 혼자 하였으되 사실은 천하의 어리석은 멍청이라! 어리석은 정해에 눈이 

가리워져 참소하는 이의 말만 믿었소이다. 오직 한 분 짐에게 남은 혈육이 할마마마이신데

그 분을 그렇게 박대하고 한을 쌓이게 하였구려. 짐은 실로 염치가 없소! 오직 짐을 

위함이니, 할마마마 그 모든 것은 짐을 위함이었으니...... 은혜를 원수로 갚은 터라,

할마마마 앞에서 낯을 들 수가 없을 것만 같소."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이미 할마마마께서는 전하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작년에 전하께서

가뭄 방비하시며 솔선수범하여 근신하실 그 때부터 주상께서 총명을 회복하시고 성군의

덕을 쌓으려 함이니 이제 여한이 없다 말씀하신 터인데요? 마마, 지난 일은 다 흘려버리

십시오. 이렇게 전하께서 진실을 다 아시고 이해를 하시었으면 되었나이다. 신첩도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앞날의 기쁨만 생각하거든요. 할마마마께서도 전하께서 진심을 아신다 할 

것이면 금세 다 잊어버리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번 온천에서도 그저 즐거워하셨지

않으셨습니까? 두 분 마마께서 오해를 푸시고 다정하실 것이라 이리 하면은 신첩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나이다."

왕이 문득 어수를 내리고 중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친 김에 다 말하자 하는

용안이었다. 나직하게 씹듯이 뱉았다.

"창빈 어마마마 이야기도 다 알고 있잖소? 그 이야기는 어찌 하지 않소?"

"그 일은..... 망극하옵니다. 차마 다시는 입을 열지 못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절대로

발설 말라 하신 분부를 어기고 신첩이 죄를 받은 터입니다. 두려워 감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중전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청으로 대답하였다. 두 사람간의 가장 혹독한 시련의 

시작이라 그 시초가 된 사단이 창빈마마 일이었다. 이 날 전하께서 창빈마마 이하

경덕궁 내전 마마들 이야기를 꺼내어 주시기를 은근히 바랐지만은 당신께서 말씀을

아니 하시면은 어찌할 수가 없다. 그녀가 먼저 꺼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일이야말로 중전에게 가장 가슴 아프고 항시 묵지근하게 걸려있는 가시였다.

왕의 으뜸가는 실책이기도 하였다. 아무리 계집에게 미쳐도 그렇지 인의효덕이 강상의

기본인데 길러주신 어마마마 모다를 머리카락 자르게 하여 정업원에 들여보내었다. 

실로 하늘아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은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손아래 애꿎은 풀만 쥐어뜯었다. 날카로운 풀에 베여 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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